중 세 가마쿠라시대>무로마치시대>아즈치.모모야마시대
1.개 요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로 구분. 12세기 후반에 출현한 무사정권은 귀족의 장원을 빼앗아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며 무가사회를 성립시켜 갔다. 이른바 막부시대. 봉건사회의 성립을 기준으로 하면 장원제 내에서 영주와 예속민의 관계가 형성되는 10세기의 원정기(院政期)를 중세의 시작으로 본다. 장원제가 해체되고 영주와 예속민의 관계가 보다 분명해지는 14세기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거나, 장원제가 완전히 해체되는 16세기 이후를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종료는 16세기말 17세기초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실권을 장악한 때.
2.주요사항
-호겐(保元)의 난 : 황실과 섭관가 즉, 후지와라 집안의 내분. 시대의 전환을 알리는 예고탄이기도 했다. 1156년의 일. 도바 법황(鳥羽法皇)과 그의 아들인 스토쿠(崇德) 상황의 불화에 후지와라 집안의 후지와라노 요리나가(藤原賴長)와 그의 형인 후지와라노 타다미치(藤原忠通)의 섭관 지위 쟁탈전이 어우러져 발생.
원정(院政)을 하고 있던 도바 법황이 고노에(近衛) 천황의 후계로 고시라가와(後白河) 천황을 세우자 스토쿠 상황이 이에 반발하면서 난이 일어났다. 스토쿠 상황은 후지와라노 요리나가와 손잡고, 고시라가와 천황은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와 연결. 여기에 미나모토 씨와 다이라(平) 씨 등 무가들이 합종연횡하여 난에 참가하였다. 싸움은 고시라가와 천황 측이 승리하였으나 전통 귀족들의 무기력함이 노출되고 무가들의 실력이 입증됨으로써 막부정권 성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막부(幕府) : 중국에서는 원래 출진중인 장군의 숙영지를 가리켰다. 일본에서는 무가정권의 정청이나 그 조직을 의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된 후 장군이 거주하는 곳을 막부라 하였다. 역사적으로는 무가정권 자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정이대장군 : 원래는 8세기말 9세기초 주변지역 정벌을 위해 두었던 임시관직. 헤이안 시대 말기에 부활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정이대장군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를 연 이후 막부의 수장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쇼오군(將軍)'이라 부르는 것이 정이대장군. 가마쿠라막부 시대에는 미나모토(源) 씨, 무로마치막부 시대에는 아시카가(足利) 씨, 에도막부 시대에는 도쿠가와(德川) 씨가 정이대장군이 되었다.
3.시 대
1)가마쿠라 시대
(1)개 요
가마쿠라 막부가 정치의 실권을 가졌던 시대. 1185년부터 1333년 까지.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의 정권 장악 과정에 따라 1180년이나 1183년을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종료는 미나모토 씨의 세력 약화를 틈타 실권을 장악한 호오죠(北條)씨의 멸망. 1333년.
막부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세웠지만 미나모토 씨 '쇼오군'은 3대로 끝난다. 그 후에는 섭정과 관백을 맡던 섭관가 쇼오군이나 황족계 쇼오군 등이 이어가지만 실권은 '집권(執權)'이던 호오죠 씨가 행사.
(2)주요사항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오군.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의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는 호겐의 난 때 고시라가와 천황 측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인물. 그러나 같은 편이었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淸盛)와의 권력 쟁탈전, 이른바 헤이지(平治)의 난에서 패하여 살해당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이 때에 잡혀서 유배당했으나 후일 관동지방 호족의 도움을 받아 가마쿠라에서 재기. 교토를 세력권에 넣고 다이라 씨를 멸족시킨 후 무가정권을 확립하였다. 이어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 등의 반대세력을 토벌하고 1192년 정이대장군이 되어 막부를 창설하였다.
-죠큐(承久)의 난 : 조정과 막부 간의 세력다툼. 1221년. 초대 쇼오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죽은 후의 혼란을 틈타 귀족중심의 조정이 세력회복을 꾀한 사건. 고토바(後鳥羽) 상황을 중심으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집권(執權) 호오죠 씨의 막부군에게 대패했다. 이로 인해 고토바 상황이 유배되고 교토를 감시하기 위한 로쿠하라단다이(六波羅探題)가 설치되는 등 무가세력이 강화되고 조정과 귀족세력은 오히려 쇠퇴.
-로쿠하라 단다이(六波羅探題) : 죠큐의 난을 계기로 설치된 막부의 관직명. 집권 호오죠 씨 일족이 임명되어 교토를 감시하고 일본 서부 일대의 군사, 행정, 재판, 치안 등을 담당하였다. 막부와 비슷한 조직을 가지고 막부 말기까지 존속.
-집권(執權) : 가마쿠라 막부의 관직명. 쇼오군의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 독재적인 실권을 장악했다. 13세기 초 호오죠 도키마사(北條時政)가 막부를 통괄하는 권한을 장악하고 집권이라 칭한 이후 집권 지위는 호오죠 씨가 세습하였다.
-호오죠(北條) 씨 : 감무헤이(桓武平) 씨의 후예. 호오죠 도키마사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도와 막부를 세운 이후 '집권'으로서 막부의 행정권을 장악하였다. 막부 창설에 참여하였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죠큐의 난 때 귀족세력을 진압하면서 세력을 한층 강화. 미나모토 씨 쇼오군 가의 정통이 끊어진 뒤에는 집권정치라 하는 강력한 전제체제를 확립하였다. 1333년 겐코(元弘)의 난으로 멸망.
-겐코(元弘)의 난 : 1331년. 고다이고(後醍ご) 천황이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 사전에 발각되어 천황이 유배되기에 이르지만 1333년 유배지를 탈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등과 함께 호오죠 씨를 멸하고 막부를 타도하였다.
2)무로마치 시대
(1)개 요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실권을 장악하여 교토에 무로마치 막부를 설치한 1330년대에 시작. 15대 쇼오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쫓겨난 1573년까지. 약 240년간. 앞부분의 남북조 시대와 뒷부분의 전국(戰國)시대를 제외하기도 한다.
남북조 시대는 2명의 천황이 존재했던 시대.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고오묘(光明) 천황이 추대되자 고다이고(後醍ご) 천황이 요시노(吉野)로 옮겨가 2명의 천황이 존재하게 되었다. 1392년까지 약 60년간. 전국시대는 15세기말 오닌(應仁)의 난 이후 막부의 멸망까지 약 100년간.
(2)주요사항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오군. 겐코(元弘)의 난 때 고다이고 천황 편에 서서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렸다. 이 공으로 고다이고 천황의 이름 한 글자를 하사받아 '다카우지(高氏)'에서 '다카우지(尊氏)'로 개명. 그러나 천황의 친정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다가 패하고 큐슈로 도망쳤다. 다시 상경하여 천황군을 격파한 그는 고오묘(光明) 천황을 옹립하고 1338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교토에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吉野)로 옮겨가 2명의 천황이 존재하는 남북조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남북조 시대 : 1336년부터 1392년까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오묘 천황을 옹립하자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로 옮겨가면서 시작되었다. 북조는 고오묘 천황부터 고고마쓰(後小松) 천황까지 5대. 남조는 고다이고 천황부터 고카메야마(後龜山) 천황까지 4대. 1392년 양쪽의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막을 내렸다.
1333년의 가마쿠라 막부 멸망을 남북조 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북조는 고요묘 천황 앞의 고오곤(光嚴) 천황 때부터.
-오닌(應仁)의 난 : 무로마치 막부의 몰락을 가져온 사건. 처음부터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무로마치 막부는 중기 이후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의 반란 등으로 지배력이 더욱 약해져 갔다. 슈고 다이묘란 지방관인 슈고가 영주화한 것. 대부분 교토에 머물면서 막부의 요직도 겸하였다.
그러던 중 8대 쇼오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아들 요시히사(義尙)와 동생 요시미(義見) 사이에 쇼오군 직 계승다툼이 생기고, 여기에 최고 관직인 관령(管領) 집안의 후계다툼과 유력한 슈고 다이묘인 호소가와(細川) 씨와 야마나(山名) 씨의 세력쟁탈전이 어우러져 일대 전란이 발생하였다.
1467년 교토에서 시작된 전란은 지방까지 확대되어 호소가와 씨 쪽의 동군과 야마나 씨 쪽의 서군이 무려 11년간 전투를 벌이는 사태로 발전. 1473년 주역이었던 호소가와 가쓰모토(細川勝元)와 야마나 모치토요(山名持豊)가 병사하고 서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尙)가 쇼오군이 된 후 1477년에 이르러서야 전란은 끝이 났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교토가 황폐화되었을 뿐아니라 막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슈고 다이묘들이 대부분 몰락하였다. 반면 지방 무사세력은 강화되어 이른바 센코쿠 다이묘(戰國大名)들의 격렬한 세력투쟁이 이어졌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오닌의 난이 발생한 1467년부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교토에 입성한 1568년까지. 각 지역 다이묘들의 세력투쟁이 활발했던 군웅할거 시대였다. 오다노부나가와 그를 이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
3)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개 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쇼오군(將軍)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와 함께 교토에 입성한 1568년을 시작으로 본다. 종료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159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에서 승리하여 실권을 장악한 1600년을 종료 시기로 보기도 한다. 약 30년간.
(2)주요사항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 센코쿠 디이묘(戰國大名) 출신.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지금의 나고야(名古屋) 일대에 해당하는 오와리(尾張)를 통일. 주변지역으로 세력을 넓힌 후 156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쇼오군으로 받들고 교토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의 세력확대를 경계한 요시아키는 다른 다이묘를 동원하여 노부나가를 공격. 노부나가는 적대시하는 다이묘들을 격파하고 요시아키를 추방하여 무로마치 막부를 붕괴시켰다. 이어서 각지의 다이묘를 제압하며 통일전쟁을 벌이던 중 쥬코쿠(中國) 지방 정벌에 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원조하러 가다가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게 암살당했다. 1582년의 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서 자주 전공을 세워 신임을 얻었다. 노부나가의 사후 주도권 쟁탈전에서 승리. 오사카에 성을 쌓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1585년에 관백(關白)이 되고 이듬해에 태정대신이 되어 도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하사받았다. 이전에는 하시바(羽柴) 씨.
1590년 전국통일을 완성한 히데요시는 1591년 양자에게 관백을 넘기고 태합(太閤)이라 칭했다. 그 후 1592년과 1597년 두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 이른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이를 '분로쿠·게이쵸(文祿·慶長)의 역(役)'이라 한다. 전란 도중인 1598년 히데요시는 후시미 성(伏見城)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태합검지(太閤檢地)라 하여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고 세제를 정비하였으며 병농분리를 철저히하여 막번체제(幕藩체制)의 기초를 닦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에도 막부의 초대 쇼오군. 오카자키(岡崎) 성주의 아들로 오다 노부나가를 따라 전국통일에 나섰다. 노부나가의 사후 그의 아들 오다 노부카쓰(織田信雄)를 내세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패권을 다투었으나 곧 화해. 히데요시를 도와 전국통일을 완성하고 에도(江戶)에 입성하였다.
히데요시의 사후인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격파하고 적대세력을 제압한 후, 1603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 막부를 열었다. 이어서 도요토미 씨를 멸족시키고 명실공히 천하통일을 이루었으며, 1616년 태정대신에 임명되었다.
-세키가하라(關ケ原) 전투 : 1600년 미노(美濃)의 세키가하라에서 발생한 전투. 미노는 오늘날의 기후 현(岐阜縣) 일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후 무장들은 문치파와 무단파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무단파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자 문치파는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이에야스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에야스 중심의 동군과 미쓰나리 중심의 서군이 세키가하라에서 격돌. 동군이 승리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패권이 확고해졌고, 이시다 미쓰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은 처형되었다.
출처 : 니홍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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