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의 시대에서 천주교를 발견한 정하상
정하상(丁夏祥 1795~1839)의 아버지 정약종(1760-1801)과 형 정철상(?-1801)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참형으로 순교하였다. 진주목사(晋州牧使)였던 정재원(丁載遠)은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 아들이 정약현, 둘째가 정약전, 셋째가 정약종, 넷째가 정약용이다. 그리고 정약종의 아들은 정철상과 정하상이다.
신유박해는 정조의 라이벌이었던 노론벽파 정순왕후가 정조 사후 남인들을 숙청하기 위해 '사학 엄금교서'를 내림으로써 발생한 천주교회 박해사건이다. 정철상이 사형 당하던 순조 1년(1801) 2월 25일 정하상은 어머니, 누나와 함께 옥에 갇혀 있었는데 6세에 불과했다.
천주교를 택했기에 박해받다
정하상은 세례명 바오로를 따서 정보록(丁保祿 : 丁바오로)이라 불리는데, 1890년 홍콩 천주교의 약망(若望)주교가 정하상이 쓴 ‘상제상서(上宰上書 ; 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간행하면서 이때 정하상의 전기인 ‘정보록 일기’도 같이 간행하였다. 이것이 그에 대한 기초사료이다. 여기에 따르면 “(석방된 뒤) 향곡(鄕曲)을 유랑하다가 숙부 집에 들게 되었는데, 이 사이에 당한 고초는 붓 하나로 쓰기가 어려웠다”라고 기술할 정도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숙부는 다산 정약용을 뜻하는데, 정약용은 백부 정약전과 함께 유배 중이었다. 정약용은 서학에 반대하면서도 유배형을 당했던지라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를 버리지 않은 일가를 따뜻하게 대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박해로 재산이 몰수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정하상은 어머니 유소사(1761-1839)와 누나 정정혜(1791-1839)와 같이 숙부인 다산 정약용의 고향마재에서 살았다. 친척들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는 정하상의 가족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샤를 달레의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곤욕을 치렀다.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정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런 교를 계속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 달레, 86~87쪽)
그럼에도 정하상의 모친 유소사는 자녀들에게 기도문(經文)을 가르침으로써 신앙을 버리지 않도록 격려하였다. 하지만 이는 구전에 의한 교육으로서 체계적인 교의교육이 아니었을 것이다. 천주교 탄압으로 천주교 서적이 소각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교의를 배우는데 한계를 느낀 정하상은 신유박해 때 함경도 무산(茂山)에 귀양 가 있는 조동섬(趙東暹)을 찾아가 천주교와 학문을 배웠다.
중국에 가서 사제(司祭)를 요청하다
정하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 천주교 사제인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여 천주교회를 지도할 사제(司祭 : 신부)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였다. 실질적인 조선 천주교 교회의 지도자가 된 정하상은 역관의 종으로 위장 취업함으로써 북경에 가서 천주교회 사제가 조선에 오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1805년 중국에서도 천주교 박해가 발생하여 천주교 북경교구에서도 사제를 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에 낙심하지 않고 정하상은 한양에서 누나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북경에 갔다. 1824년에는 교우이자 역관인 유진길(劉進吉) 등이 동반하였는데, 유진길의 동행은 정하상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었다. 유진길이 쓴 서신을 본 교황 레오 12세는 조선을 독립된 전교지로 지정해서 교황청에 직속시키고 파리 외방전교회에게 전교를 맡긴 것이다.
정하상은 1825년 조선의 독립 교구 설치를 교황청에 청원하였고, 이에 응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파리 외방전교회 산하에 천주교 조선 교구를 설치하여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하였다(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치).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중국인 천주교 사제인 유방제 신부가 혼자서 전교를 하려고 하는 욕심을 부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헌종 2년(1836) 1월 모방 신부가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했는데, 모방 신부는 정하상을 ‘중심이 되는 인도자’로 존중하여 숙소도 그의 집으로 삼았다. 교회에 피해를 준 유방제 신부를 중국에 돌려보낸 모방 신부는 앙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헌종 4년(1838)에 9천여 명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선교사들은 조선인 천주교 신부를 키우고자 하였다. 정하상이 유력한 후보였지만 신학수업을 받기에는 그가 할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헌종 2년(1836) 김대건·최양업·최방제가 신부 후보로 선발되었다.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 세력과 풍양 조씨 세력의 각축장이 되어갔는데, 풍양 조씨들이 세력을 잡으면서 순원왕후 김씨에게 천주교 탄압을 계속 요구했다. 드디어 헌종 5년(1839)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이 내려졌다. 40년 만에 다시 중앙 정부 차원의 천주교 박해가 다시 본격화된 것이다.
정하상의 양심선언서 ‘상재상서(上宰上書)’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강화되면서 천주교도 검거 선풍이 일자 정하상은 앙베르 주교를 지방으로 피신시켰다. '오가작통법'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호패(戶牌)와 함께 호적의 보조수단이 되었으며 역(役)을 피하여 호구의 등재없이 이사와 유랑을 반복하는 유민(流民)들과 도적들의 행태를 방지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고 순조(純祖)와 헌종(憲宗) 때에는 오가작통제의 연대 책임을 강화하여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을 모조리 처벌하는 방식’으로 천주교도를 색출하는데 이용되는 수단으로 변질된 군현제의 일종이다. 서울로 다시 올라온 정하상은 체포가 임박했음을 느꼈다. 그는 체포를 각오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문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상재상서(上宰上書)’, 곧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다. ‘상재상서’는 순교를 각오하고 작성한 양심선언이자 신앙고백으로 이벽의 ‘성교요지(聖敎要旨)’, 부친 정약종의 ‘주교요지’와 더불어 조선 천주교도들의 천주교 인식과 신앙관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정하상의 예상대로 헌종 5년 6월 초하루 포졸들이 집에 들이닥치자 스스로 집안에서 붉은 오라로 결박하고 나갔다. 모친과 누이도 함께 체포됐다. 정하상은 미리 준비한 ‘상재전서’를 전했다. 정하상은 ‘상재전서’에서 조정이 천주교를 비판하는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조정은 천주교를 ‘임금도 없고 부모도 없다(無父無君)’고 비판했는데, ‘상재상서’는 “십계명 가운데 네 번째가 효도로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라며 “충과 효는 만대가 흘러도 바꾸지 못하는 도리”라고 설명했다. 또한 천주교가 여색(女色)을 서로 유통한다“고 비난받은 것에 대해서는 ”이른바 여색을 유통하는 것은 짐승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인데 하물며 거룩한 교회에 그것을 돌립니까? 십계명 가운데 여섯 번째가 ‘간음하지 말라’이고, 아홉 번째가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라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천주교의 하느님이 <주역>이나 <시경>에서 말하는 상제(上帝)나 장자가 말한 천(天)과 같은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아이처럼 즐겁게 형장(刑場)으로
그러나 종교탄압은 조선조의 국가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한계가 주어져 있었기에 이미 논리 싸움이 될 수 없었다. 그는 무수한 곤장을 맞고 주뢰(周牢)형을 당했다. ‘정보록 일기’는 “두 넓적다리와 살갗은 모두 벗겨져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났다”며 “피는 용솟음쳐 땅으로 흘러들었지만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헌종 5년 8월 14일 조선 천주교회의 중심인물이던 정하상은 역관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에서 사형 당했다. 3명의 프랑스 신부인 앙베르, 모방, 샤스탕은 새남터에서 사형 당했다.
<헌종실록>은 “정하상은 신유사옥(1801)때 사형당한 정약종의 아들로서, 천주교를 가계(家計)로 삼고 유진길 등과 서로 얽어서 서양인을 맞이해와서 신부와 교주를 삼았으며, 또 김대건, 최양업 두 어린아이를 서양에 보내어 그 양술(羊術)을 죄다 배울 것을 기필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정보록 일기’는 “정바오로가 형장으로 나갈 때 수레 위에 매달려 서서 흔쾌히 웃으며 즐거워할 따름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어머니 유소사와 누이 정정혜도 그 해에 사형 당함으로써 정약종가족은 모두 그리스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순교자 가족이 되었다. 정하상은 1984년 교황청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시성(諡聖)되었는데 모친과 누나와 함께였다.
※ 정정혜(1791-1839) : 세례명 엘리사벳. 정하상의 4살 손위 누이로서 학문으로도 유명하고 또 천주교회 설립자 중의 한 명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정약종의 딸로, 어머니는 유소사이며 동생은 최초의 신학생인 정하상이다. 집안 전체가 열심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일찍부터 천주교 교리를 몸에 익히며 성장하였다. 1801년에 아버지 정약종과 오빠 정철상이 순교하였다. 정정혜도 어머니 유소사와 오라버니 둘과 같이 붙잡혀 들어갔으나 조정에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한 후 젊은 부인과 어린 아이들은 놓아주었다.
그러나 살 길이 막연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마재의 시동생 정약용의 집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친척들의 냉대와 구박을 받으며 몹시 궁핍하게 지냈다. 그래서 정정혜는 어머니가 당하는 수많은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았다. 그녀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 나갔고, 가난과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나가는 데 익숙할 정도였다. 또한 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머니와 장차 신자들의 일꾼이 될 자기 동생 정하상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처음에는 천주교가 집안을 망쳐 놓았다 하여 적대시하던 몇몇 친척들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고 또 그녀의 덕에 감화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어려서부터 신에게 동정을 허원하였던 그녀는 언제나 단정하게 지냈지만, 30세쯤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약하여져 5년 이상이나 강한 유혹을 당하였다. 그녀는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기도와 단식과 편태를 사용하였는데, 마침내 그녀의 눈물은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선교신부들이 조선에 오기를 절실히 원하여 전심으로 그 뜻을 신에게 청하였다. 이리하여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두 명의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거하게 하고 주밀하게 보살핌으로써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앵베르 범 주교는 “정정혜 엘리사벳은 참으로 여회장의 일을 불만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앙과 신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일어남을 보고 무서움을 감추지 못하였으니, “내게는 과연 짐이 될까봐 무섭다”고 했던 것이다. 박해의 조짐을 알고 주교가 서울을 떠나 시골로 피신해 있는 동안 정정혜, 어머니 그리고 동생 정하상은 옥에 갇힌 이들을 보살펴 주다가 결국 그녀도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7회의 혹독한 고문과 곤장을 320대나 맞았다. 그러나 정정혜는 잠시도 평온을 잃지 않았고 관원은 그를 이길 희망을 버리고 10월 2일 형조로 보냈으며, 형조에서 다시 6회의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정혜는 형장으로 떠나면서도 신자들에게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세요”라는 말밖에는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12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43세를 일기로 참수되어 순교하여 동정 순교자의 월계관을 얻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참고문헌: 한국천주교회사)
** 참고도서 :
1. 이덕일 -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2. 박영규 - 조선왕조 실록
3. 이덕일, 이희근 -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4. 김양기 외 - 한권으로 읽는 한국사
5. 이홍직 - 국사대사전
6. 달레 - 한국천주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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