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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양산도>와<이어도>를 중심으로 환상양식으로 나타나는 여성의 욕망실현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4. 10:49

 

 


 

환상양식으로 나타나는 여성의 욕망실현


 

1. 들어가며

 

 김기영의 작품은 분명 한국영화사 안에서, 전근대와 근대의 혼성, 인간의 검은 본성을 성적 담론과 그로테스크한 미장센으로 그려내는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 결과 인간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심리주의적 영상 기법으로 표현하는 대표적인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김기영 영화를 말할 때 이 같은 담론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의 논의 존재는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처럼 거시적인 구조의 일방적 읽기방식을 돌려 조금 더 미시적인 구조로 접근하고 싶었다. 나의 접근은 이러했다. 그의 영화 중 보이는 갑작스런 등장장면들에 대한 궁금증을 묶어 보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 장면들은, <양산도>의 결말 부분이 되어서야 등장하는 마당극의 출현 그리고 어머니의 초월적인 힘은 도저히 내러티브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이것은 <양산도>에서 의문이 풀리지 않았던 폐쇄적 장소, 무룡의 절대 악惡적 면모, 수동의 남성성 제거과정과 유사하다. 이런 유사한 연결고리는 희미하나, 환상양식과 조우하는 부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요소들의 방치가 사실 환상양식으로의 도피를 유발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혹은 이 영화의 환상양식의 방식은 무엇을 이루기 위한 것인가?
 <이어도>역시 허구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내러티브는 마치 민담을 추적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특히, 민담과 섞여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증언은 이 영화의 사실바탕이 된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의 대부분이 플래쉬백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점이고, 이로써 섬이라는 특성을 벗어나 과거와 대과거를 넘나들며 시공간을 자유롭게 배열하고 있다. 영화 초반부터 <이어도>의 공간은 전근대적 인습과 토속신앙의 색채를 담아낸다. 이러한 신비한 분위기는 영화 전반부에 걸쳐 있는데, 절정쯤에는 직접적으로 무당과 굿이 등장한다. 마치 김기영이 <양산도>에서 보여줬던 연희와 제의의식이 <이어도>의 미신과 굿으로 직접적인 표출을 하는 셈이다. 두 영화 모두 제의적 기능을 행하는 캐릭터는 여성이다. 어머니와 무당은 초월적 치유의 양식으로 현실의 문제를 환상양식에서 봉합시킨다. 두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 간의 불안은 여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여성들의 금기된 욕망은 폐쇄된 공간에서 초극적 재현 또는 육화로 나아간다. 이 부분에서 초현실적 존재가 된 여성은 현실 경계를 위협하고 징벌하는 기능으로 인식된다. 바로 이 ‘기능의 수행’을 가능케 한 것이 환상양식(판타스틱)이며, 제의적/연희적 기능은 여성들의 욕망을 보다 낯선 방식으로 실현시킨다.

 


2. 환상양식의 성취

 

 우선 ‘환상’의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환상적(fantasic/fantanstique)이란 단어는 그리스어 판타제인(phantasein)에서 파생된 단어로 ‘나타나 보이게 하다. 착각을 주다.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다. 드러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없던 것이 홀연히 있는 것, 없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일종의 영상이란 의미로 통용되었다. 비평적 용어에서의 환상은 사실적 재현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 문화적 경향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 왔다.  그러나 <양산도>와 <이어도>의 환상양식은 서양의 ‘드러냄과 사라짐’보다 욕망에 우선시한다. 욕망과 연결 지어 더 넓은 의미로 보자면, 환상이란 인간의 잠재의식의 표현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환상은 소위 현실세계와는 반대되는 소망 충족으로 가득 찬 내적 세계, 상상의 세계를 의미한다. 환상은 욕망의 원인에 대한 주체의 불가능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환상의 세계에서는 성별에 얽매임 없이 복수의 주체 위치가 가능하다. 그래서 환상이란 충족될 수 있는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표현하고 전시하면서 쾌락을 얻는 욕망의 장면화(mise-en-scene) 가 된다. 환상양식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서양의 효과와는 달리, <양산도>와 <이어도>에서는 기저로 깔려 강박증에 사로잡힌 불안한 감정이 폭발하는 의도로 쓰인다. 이를테면 <양산도>의 초반부터 아들에 대한 애정을 일방적으로 쏟아냈던 어머니는, 모진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아들의 죽은 소식을 듣고 찾아 나선다. 구성진 가락과 함께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는 어머니는 돌산을 오를 만큼 초월적 힘을 발휘한다. 이때 마치 판소리의 한 소절을 보는 것처럼 영상과 음향이 여인의 한을 쏟아낸다. 이때부터 어머니의 욕망은 서서히 드러나, 후반부 아들의 죽음에 칼을 꺼내어 살인까지 저지른다. 이 살인은 복수의 칼날보다 어머니의 쾌락 충족의미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살인 이후 등장하는 것이 어머니의 좌절이 아니라, 어머니의 욕망실현으로서의 아들의 결혼식이기 때문이다. 수동과 옥랑의 진정한 결혼은 어머니의 힘에 따라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지워버린 후에 가능했다.
 <이어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박여인과 민자의 히스테리컬한 직접적 경쟁은 굿 이후에 발생한다. 그녀들의 경쟁은 천남석의 죽은 시체를 두고 남아있는 정자를 자신의 몸속에 넣어 수정시키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흐름은 <양산도>에서 어머니가 성취시킨 사후결혼보다 더 당혹스럽다. 박여인과 민자가 무당을 사이에 두고 초자연적인 경합을 벌이는 것 뿐 아니라, 그녀들의 욕망의 대상마저도 현실의 것이 아닌 죽음에 기반하고 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어도>와 <양산도>에서 여성들의 상상계적 세계는 로즈메리 잭슨이 말한 판타스틱 영역과 유사하다. 그 영역은 완전히 ‘현실적(대상)’이지도 완전히 ‘비현실적(이미지’이지도 않으면서 바로 그 둘 사이 어딘가에 놓여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완전히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와 끝내 현실에서 미지의 사건의 대답을 구하고 마는 친숙한 낯선 세계 사이에서 동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호한 욕망 실현의 공간은 메츠가 말한 중간지대에 대한 욕망을 투사하는 스크린과 그것에 몰입하는 관객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영화 장치는 거울 단계를 재현하면서 관객에게 스크린과의 상상적인 관계를 구조화하는데, 이 관계에서 주체에게는 시각 영역에 대한 지배 감정은 물론 총체적이고 통일적인 환상이 주어진다. 스크린을 향한 관객의 몰입은 디제시스와 동일화를 이루고, 마치 시각 인식을 자신의 욕망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영화적 이미지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관객의 믿음은 바로 거기에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거기에 있다고 믿는 물신적 부인에 의해서 성취하게 된다. 이 때, 관객은 현혹되면서도 머뭇거리게 되는 ‘환상양식’의 기능처럼, 현실에서 이룩할 수 없는 <양산도>와 <이어도>의 낯선 방식에 쾌감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이 쾌감은 두 영화의 환상양식이 보여주고자 했던 성취라 할 수 있다.

 


3. 샤머니즘에서의 환상

 

 <양산도>와 <이어도>는 제의적, 연희적 기능으로서의 환상양식을 보여준다. 특히, 두 영화의 후반부에 설정된 토속신앙과 관련된 의식은 대립된 요소들이 절정으로 치닫고 봉합되는 과정과 관련된다. 마당극과 굿과 같은 토속신앙은 샤머니즘이라는 포괄적인 믿음 아래, <양산도>의 어머니를 샤먼과 유사하게 만들거나 <이어도>의 샤먼(무당)을 등장시킨다. 샤먼 혹은 유사 샤먼의 극중 역할은 치료자이자 대립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된다. 여기서 치료의 기능은 제의적 기능과 함께 이루어진다. 무질서적인 문제를 샤먼의 영력 수단으로 질서로 바꾼다. <양산도> 내내 삼각관계를 이루며 대립했던 옥랑과 수동, 무룡의 결투는 그들 손에서 끝나지 못한다. 영화는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흐르다가, 갑작스레 어머니의 복수로 끝이 나버린다. 한을 안고 죽어버린 아들의 혼이 어머니에게 들어간 것처럼, 이 부분에서 어머니는 샤먼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애절함으로 칼을 뽑아들었고, 아들의 원이 자신의 원인 것처럼 초월적인 힘(영력)으로 (삭제된 부분에서) 그 둘의 합방을 성사시켰다. 이와 같은 무질서에서 질서로의 이동을 보여준 제의적 모습이 어머니가 트랜스(의식의 샤먼적 상태)상태로 현실의 문제를, (현실적이지 않으면서도 비현실적이지 않은)판타지적 영역에서 이룩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요컨대 이 판타지적 영역은 라캉의 환상의 무대이다. 라캉은 주체의 욕망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어떤 사실이며, 주체의 욕망을 조정하고 그 대상을 특화시키며 주체가 취하는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환상의 역할이라고 했다. 주체가 욕망하는 주체로 구성되는 것이 오로지 환상을 통해서라면, 샤먼의 힘을 얻어 제의적 의식을 치룬 수동의 어머니는 욕망하는 주체가 된다. 마치 이 환상 시퀀스는 주체가 어떻게 욕망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환상 시나리오의 상연처럼 보이는데, 타자의 환상 시나리오가 시각화되어 관객에게 당혹스러움과 기이함을 준다. 이 감정은 로즈마리 잭슨의 지적처럼 ‘환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현실세계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오히려 현실 세계 속에서 드러나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uncanny과의 충돌로 야기될 때 기이함을 느끼게’ 하는 방식이다.
 기이함은 <양산도>에서의 탈춤의 등장에서도 드러난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탈춤은 비교적 오래 잡힌 쇼트길이와 해학적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사실 이것은 영화 내러티브상 불필요한 요소기 때문이다. 탈춤은 수동과 옥랑, 무룡의 관계를 광대놀음으로 재현시킨다. 삼각관계의 구도에서 죽어간 수동이 무색하게, 놀이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진 탈춤은 영화에서 가장 흥겨운 부분이다. 보편적으로 탈은 위장면(僞裝面)으로 주술적 목적, 종교적 의식과 민족 신앙의 의식용으로 쓰이며, 탈춤은 제의적 기능으로서 구경꾼과 여러 신에게 죽은 이의 넋을 빌거나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벌였다. 마치 굿에서 무당의 무구(巫具)인 것처럼 탈을 쓰고 한바탕 춤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양산도>에서는 죽은 넋에 대한 강조보다는 계급적 모순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굿 대신 탈춤을 등장 시켰다. 탈춤은 민중 생활의 모습을 담아 지배계급의 모순점을 해학과 풍자로 표현함과 동시에, 피지배 생산 계급인 농민들과 어울려 노고를 풀고 지배 계급에 대항 하는 연희 형태였다. 무룡에 의해서 수동이 죽고, 결국 옥랑이 마차를 타고 무룡에게 시집을 갈 때, 탈춤은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탈춤의 연희적 기능과 의미를 살펴보았을 때, 특권 계급의 횡포가 탈춤판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수동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애통함과 지배계급의 대항을 함께 품게 된다. 수동이 무룡에게 차례로 처단을 받은 것은 사실 계급 갈등과 권력의 횡포에 의해서였기 때문이다. <양산도>의 비극적인 대립은 탈춤이라는 현실의 연장 안에서 재현되고, 탈춤판과 옥랑의 가마가 한 길에서 맞닿을 때, 비로소 어머니는 칼날을 꺼내어 자신의 욕망을 풀어버린다.
 <양산도>의 탈춤과 유사 샤먼(어머니)은 <이어도>의 굿과 샤먼(무당)으로 이어진다. <양산도>의 간접적 형태와 달리 <이어도>에서는 무당이 직접 등장하여, 굿으로 인간과 신령의 중매자로서 인간의 문제를 푼다. 이러한 굿은 무당 개인의 영역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양산도>의 탈춤과 유사하다. 굿은 강한 신성성과 함께 주술성도 갖고 있지만, 짙은 오락성도 함께 나타난다. 연극사적 측면에서 탈춤이 '굿에서 극으로 발전하여 왔다'는 주장에 굳이 주목하지 않더라도, 탈춤판 속에는 굿의 요소가 곳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탈춤이 인간이 속해 있는 여러 사회가 섞여 있는 것처럼, 굿에서의 신령과 무당과 인간의 만남은 사회의 고른 참여와 확인 내지 보증을 통해서 뒷받침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조화가 사회까지 포함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다. 게다가 영화 속 인물들 뿐 아니라, <양산도>와 <이어도>를 보고 있는 관객마저도 참여하게 되어 이 조화에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탈춤과 굿은 종교적 체계 내지 심리, 정신복합체를 가장 명료하게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영화 구조상의 변환 과정을 구성하고 행연(performance)한다. 변환의 기제는 일상적인 구조를 뭉개고 깨버리는 것으로 행해진다. 다시 말해, 캐릭터의 욕망이나 관객이 동일시하는 내적 환상이 행연으로 보여 지는 것이다. 이는 탈춤과 굿이 일상적, 사회적 역할의 구조를 ‘거짓’으로 표현하는 것으로써 앞에서 언급한 욕망의 환상장면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어도>에서 굿판은 박여인과 민자에게 천남석의 사체를 끌어다주는 장소이며, 그 둘의 욕망이 극으로 치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두 여인은 대중들 앞에서 자신과 천남석의 인연의 끈을 보장 받으려 하며, 그의 시체를 갖게 됨으로써 합일되기를 바란다. 마치 네크로필리아를 연상시키게 하는 두 여인의 욕망은 일상세계에서 금기시 된 영역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기묘한 장면은 천남석의 사체다. 무당의 주술에 끌려 뭍으로 나온 천남석의 사체는 판타지의 현현이기에 현실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천남석의 임자’임을 증명한 민자는 천남석과의 결합을 한다. 붉은 방에 베일로 감춰진 공간은 마치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듯, 생명의 잉태를 예견한다. <이어도>에서 여성들이 욕망을 펼치는 시점과 공간은 이렇게 비현실적인 형태에서만 가능하다. 일상을 벗어나거나 샤머니즘의 힘을 빌려야만 그녀들의 욕망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욕망들이 시각화 되는 데는 역시나 ‘환상’의 요소가 따른다. 토도로프의 말처럼 가시화된 환상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검열과 맞서 싸우는 전복적 장치가 된다. 말하자면 기존의 법과 질서를 위배하기 위해 환상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녀들의 탐욕스런 욕망이 드러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환상이고, 현실의 균열을 깨뜨림으로써 그녀들은 안정된 세계를 흔들어 놓는 것이다.

 

 

4. 여성의 욕망실현 - 전복

 

 <양산도>에서 옥랑의 죽음을 수동의 죽음으로서의 처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옥랑과 수동의 결혼이라는 어머니의 욕망으로 볼 때 훨씬 흥미로워 진다. 영화 내내 수탈당하는 어머니의 한(恨)은 그녀의 정서를 이루는데, 그녀는 옥랑을 희생자로써 복수 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는 옥랑의 죽음까지도 옥랑의 해피엔딩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여기서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 실현을 이룸과 동시에 영화의 전체적인 틀을 비틀어 버린다. 이 같은 낯선 과정은 어디서 기인할까?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욕망(cupiditas)이며, 이러한 욕망은 '의지'(voluntas)와 구분되면서 정동의 일부를 이룬다. 정동(affect)은 '신체의 활동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이다. 그가 제시하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정동은 욕망과 기쁨 및 슬픔이다. 이 중 기쁨과 슬픔의 정동은 그 자체로 수동적(passive)이다. 그 수동성의 차이는, 보다 큰 완전성으로 이행은 기쁨의 감정이고,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은 슬픔의 감정이다. 반면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정동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정신이 적합하지 않은 관념을 가질 때, 정신은 이로 인해 슬픔을 느끼며, 이러한 슬픔으로 인해 더 작은 활동성으로 이행하게 된다. 예컨대 무룡에 의해 수동이 남성성을 제거당하며 생명력을 잃어가는 것 역시 수동의 정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정동의 고착, 모방, 전이 등이 발생하며, 개별적 인간들은 상호간에 미움과 질시에 빠지고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정동은 그것과 반대되는 정동, 그리고 억제되어야 할 정동 보다 더 강한 정동에 의하지 않고서는 제거될 수도 억제될 수도 없다. 즉, 어떤 슬픔의 정동은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의 정동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수동의 어머니는 수동을 잃은 슬픔의 정동을 제거하기 위해 더 큰 기쁨의 정동으로 옥랑의 죽음을 택한 것이 된다.
 <양산도>에서 어머니의 욕망실현은 처절하게 짓이겨진 슬픔이 기쁨으로 치환되는 찰나에 발현된다. 이러한 정동으로서의 작동되는 환상은 로즈메리 잭슨의 환상성의 의미인 체제 전복적 힘과 유사하다. <양산도>에 펼쳐진 한계들(계급적, 성차적)에 대해 인물들은 자신의 정동으로 이에 투쟁하며, 현실에서 접근할 수 없는 경계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타개해 나갈 수 있는 환상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양산도>에서처럼 전통적인 유교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있는 사회 구조 안에서의 환상은 더 낯설게 느껴진다. <양산도>의 시공간(조선)인 기존 관념을 깨뜨리고, 인물들이 자신들의 욕망작용에 따라 환상을 드러낸다는 것이 그러하다. 게다가 ‘어머니’라는 상징적 인물은 환상과 기존 세계의 도덕적 경계를 지워가기까지 한다. <이어도>의 비도덕/욕망의 세계 역시 환상의 전복 안에서 경계가 허물어지고 동일시된다. 서사 구조 안에서의 도덕적, 윤리적 가치는 사라진 채, 죽음에 맞닿은 초월적 세계로까지 욕망이 침투하게 된다. 환상이라는 인간의 무의식적 관념이 도덕에서 굴복한 채, 발산되지 못하는 것들을 해체하는 것이다. 경계가 허물어진 환상의 세계라는 것 이외에도, 이러한 전복이 당황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환상의 등장 시기 때문이다. 영화의 인물에 관객은 자연스레 동일시를 느끼며, 그 인물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어느 정도 예측하게 된다. 그러나 김기영의 영화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관객의 심리가 주도하기 전에 캐릭터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꺼내어 비현실적인 세계로 바꾸어 버린다. 그 의도치 않은 방향성도 당황스럽지만, 인물들이 행하는 욕망의 범위가 현실세계에 속한 관객에게 터부시 될 정도로 강렬하다는 것도 있다. 분명 관객은 스크린에 투영되는 환상(영상)이 현실에 다가서지 못한다는 것을 알며, 그렇기에 그 영상 속 금기된 환상을 즐긴다. 하지만 동시에 관객은 그러한 전복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안도하며, 시각적 배출구인 영상으로 그 도덕/윤리적 전복의 꿈을 꾸는 것이다. 즉, 환상은 자동적인 반응을 교묘하게 회피하면서 관습의 껍질을 깨뜨리는 새로움을 제공하고, 다양한 범주와 방식으로 독자에게 영향을 주는 이미지들의 응축을 촉진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 리얼리티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물질의 세계에서 초월하는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한다. 하지만 환상은 악몽이 떠오르는 일상과 같다. 결국 환상양식으로 규범을 넘은 흔적이 일상에 남기 때문이다. 그 것은 전복이라는 경험의 잔상이다.

 


5. 맺으며

 

 사르트르는 환상문학을 근대 자본주의의 세속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세계 속에서, 그 고유성을 찾는 하나의 영원한 형식으로 규정함으로써 환상성을 옹호한 바 있다. 이는 환상성이라는 관념 자체가 자연스러운 인간의 내재적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현실에서 환상성을 통해 인간성의 회복, 도피, 위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환상과 미메시스>에서 캐스린 흄은 현실과 환상은 길항 관계이지만, 이 둘을 충동의 산물로 보고 있다. 하나는 ‘미메시스’로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핍진성과 함께 사건, 사람, 상황, 대상을 모사하려는 욕구이며, 다른 하나는 ‘환상’으로서, 권태로부터의 탈출, 놀이, 환영, 결핍된 것에 대한 갈망, 독자의 언어 습관을 깨뜨리는 은유적 심상 등을 통해 주어진 것을 변화시키고 리얼리티를 바꾸려는 욕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환상은 등치적 리얼리티로부터의 일탈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작가는 어떤 것도 그러한 리얼리티를 바꿀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에, 독자가 그 음울한 불쾌함으로부터 벗어나서 환영들에 안기기를 권한다. 앞서 나는 환상양식의 성취와 전복에 대해 말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환상양식으로 봉합하고 있다고 했다. <양산도>와 <이어도>에서 묘사되는 여성들은 현실에서 가부장제의 주변화된 인물들이지만, 환상양식을 통하여 그 욕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 욕망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하는 것처럼 그녀들의 욕망은 탐욕스럽게 그려진다. 그로써 그녀들은 환상양식 안에서 원초적 본능과 함께 영화 전체의 윤리적 균열을 가하게 한다. 환상양식이 드러난 영화 이전과 후는 같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다시 말해, 리얼리티의 일탈은 환상이라는 상처를 남기고 봉합된다. 여기서 상처의 봉합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자기 폐쇄가 선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 배제된 외재성은 언제나 내부에 그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숨통이 트이는 환상의 공간을 발견했고 그것이 은밀하게 주는 쾌감을 알아버렸다. 마치 욕망과 거래할 수 있는 신비한 공간이 된 것이다. 이로써 환상양식은 권력과 배제에 입각한 위계적 질서체계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상징이며 도전이 된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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