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자. <흔들리는 대지>(1947)이후, 13년이 흐른 뒤에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을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로코와 그의 형제들>은 네오리얼리즘영화가 점차 소멸된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의 궁핍한 삶보다는 도시개발과 산업화가 부흥할 무렵을 담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두 영화는 연관성이 없이 만들어 졌을까? 만약, 파론디가족을 앤토니의 가족의 연속선상으로 파악한다면, 그리고 그 13년의 간극이 이탈리아 사회적, 정치적 흐름의 변화를 말하고 있다면 어떠한가? 그 질문은 이 영화의 제목이 왜 장남인 빈센트나 차남인 시모네가 아닌 로코에 맞춰져있는지에 대한 이유로 이어진다.
영화는 남부지방에서부터 올라온 파론디가족이 밀라노의 기차역에 도착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들 고향의 지리적인 부분이나 계층적인 부분은 앤토니의 가족을 떠오르게 하는데, 이는 가족사진이라는 소품으로 더욱 명확해진다. 파론디가족이 두 번의 이사를 할 때마다 카메라는 가족사진을 가장 먼저 보여준다. 영화 속 가족사진은 하나의 연대적 의미 뿐 아니라, 복선의 역할도 하게 된다. 나디아가 처음 파론디가족의 집 안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가족사진의 인물을 가르키며 개인들을 호명한다. 가족사진 앞에 서서 도시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그녀는 가족사진의 일부와 겹쳐진다. 이는, 그녀가 파론디가족의 일부가 될 것임과 동시에 가족의 화합을 단절 시킬 사람임을 암시한다. 시모네와 로코는 권투로 돈과 명예를 쌓으며 도시생활에 적응해 가지만, 나디아를 사이에 두고 질투와 욕정을 일으킨다. 건실하고 착한 청년이었던 시모네는 성공과 패배만 있는 도시에서 패배자가 되자, 방탕한 생활 끝에 스스로 몰락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굴절된 욕망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자신의 동생인 치로에 의해 고발된다. 파론디가족은 나디아라는 여성처럼 매혹적이기에 어둠의 이면을 알아차리기 힘든 도시의 공간에서 서서히 흩어진다. 치로와 루카로 대변되는 가족의 희망과 유대감은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공장의 사이렌에 의해 갈라진다.
결국 이 영화는 <흔들리는 대지>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 계층인 한 가족의 삶이 역사적 상황과 맞물렸을 때 빚어지는 비극과 한줄기 희망을 이야기한다. 단지 현대산업사회의 이면을 고발하고자 했다면 타락한 인물 시모네가 적절했을 테지만, 영화는 희생을 하는 로코에 주목한다. 그는 차라리 배신, 욕망, 물욕의 도시에서 단 한명의 성인처럼 보인다. 나디아와 재회 후, 매춘부였던 그녀의 새로운 삶을 가능토록 도와주는 그는 군복을 입은 예수에 다름없다. 나디아와 이별을 하는 장소가 두오모 성당이라는 점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시모네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녀는 팔을 뻗어 죽음을 수용하는 듯이 십자가형을 취한다. 그 순간, 구원을 받은 막달레나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로코는 가족의 영위와 시모네의 빚을 치르기 위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권투를 선택한다. 그렇기에 그는 이 영화의 희망을 야기하는 희생의 상징물이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예수와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다. 마치 앤토니가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이끌어 가는 것과 유사하다. 니노로타의 처연한 멜로디는 희생이라는 역설적 희망을 말하는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맺는 지점에 적절해 보인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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