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나는, 그래서인지 그와 그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왜 이 문장에서 "그래서인지"가 붙는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의 영화를 거론할 정도의 글을 쓸 수 없기때문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든 감정들은 말초적 감정들의 연속이어서 내 자신이 그것을 이성으로, 논리정연하게 글을쓴다는 것자체가 민망하고 부끄럽고 낯뜨겁기 때문이다. 마치 나 자신을 까발려 놓는 듯한 느낌까지 들정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밤과낮'에 대한 글을 쓰냐 묻는다면, 어떤 메시지의 점철된 이미지의 연속성, 컷들을 봤다고 생각되서일꺼다. 이 주장은, 처음 영화를 본 몇일 전이 가장 강했고 지금은 사그라짐의 강도가 있지만 여전히 나에겐 변하지 않는데, 그것은 아까 나 자신을 까발려 놓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홍상수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홍상수 영화를 보며 저런 염치없는 욕망에 가득찬 무기력한 지식인을 자기자신의 모습에서 볼 수 있어 뜨끔한 부분을 느낀다. 나 역시 그러하고.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한 화가김성남의 모습보다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담은 부분에서 영화 자체와 나와의 비교를 상당히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가끔 내 삶의 일부분을 보며 이거 완전, 홍상수 영화식이잖아? 라고 느낄 때가 참많은데, 그것이 정확히 언제냐면 내가 하는 특정대사를 (홍상수 영화의 대조와 대구적 구조장치처럼)여러사람에게 어느자리를 가서라도 할때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내뱉어지는 말이지만 어느새 나를 지배하고 감금하려는 장치로 활용된다. "저 거짓말 정말 못해요." 그렇다. 나는 사실 거짓말을 정말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나는 이 대사를 처음본사람뿐 아니라 10년 지기친구에게도 확인시키려고든다.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이것또한 내 자신에 대한 거리두기의 하나라 우습긴 하지만, 죄의식과 관련되어있다. 나는 죄를 짓지않는 사람이야해, 나는 진실된 사람이고 그렇기에 내가 하는 어떠한 행동도 보상받을 수 있어야해, 나는 어쩌면 이것들의 양가적 감정을 저 '거짓말을 못해요'라는 대사로 감금하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자, 그렇다면 '밤과 낮'은 나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
베토벤의 음악과 함께 똥이 흘러가는 생경한 모습, 'be careful'의 의미중단, 날파리가 들어갔다는 호들갑스러운 낯선컷, 북한 화가와의 기싸움, 여전히 두번 찾아간 바닷가. 이 상당한 재치있는 부분과는 달리 영화는 '죄짓는 남자'가 '죄를 구원받고' 또다시 '죄를 짓고' 또다시 '구원받으려하다' 이번에는 '죄지은 여자를 탐하고' 그것이 성공하자 '되돌아갔'다가 다시 과거의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죄지은 남자'로 돌아가는 이야기라 나는 봤다.
홍상수는 이렇게 말했다. "결말에서 남자의 구원이 처의 거짓 임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맘에 들었습니다. 선한 의도가 거짓이란 틀을 통해 결과적으로 선을 이루어내는 형태가 가장 맘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요즘의 신화 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훗,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김성남은 선을 이루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라 말하고싶다.
영화는 처음부터 명료하게 '죄지은'(대마초를 핀)남자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영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이 죄지은 남자의 자의식이 뚜렷해서이다. 사실 대마초를 피워서 감금, 구속당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그 말랑한 죄의식과 소심함으로 '어쩌지.. 난 잡힐꺼야' 혹은 그 대마초를 피우는 행위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있으며 그래서, 파리로 대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남자는 공항에서의 그 의미없는 'be careful'를 한방 얻어맞고 아, 조심히 살야겠다며있는 그의 의미없고 쓰잘데없는 하루하루를 초반에 보여준다. 파리의 새벽1시의 시간, 한국에 있는 아내와 전화통화를 하는 남자의 모습에서는 어떤 난처함과 막막함이 느껴진다. 영화의 일기체 기법은 딱히 할일 없는 김성남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있다. 파리를 돌아다니다 김성남이가 과거 연인이었던 유정과 마주치는 부분은 상당한 당혹감을 관객에게도 준다. 정말 쟤네가 아는 사이야? 모르는 사이야? 알면 도대체 무슨 사이였던 거야? 마치 진짜 우리가 알던 한 남자와 모르던 한 여자의 만남을 보는 것처럼. 그러다 시작되는 여자와 남자의 끈적이는 만남의 시작. 그리고 이때부터 같은 위치로 읽히는 여자가 말하는 '다른 여자에 대한 경계와 뒷다마'. 난 이부분이 상당히 재미있었는데 아직까지 홍상수 영화에서 등장하지않았던 여성의 특성들이 낱낱히 밝혀져있던 부분같아서다. 이 후로도 박은혜의 입에서 레스토랑 여자아이에 대한 뒷다마가 시작되더니 기어이 바닷가에서는 김성남을 사이에 두고 두여자의 입씨름으로 가열된다. (마치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녀의 이야기만 진짜일것같은, 믿어야하는 공기의 분위기랄까? 그리고 이때 확실히 박은혜는 김영호를 보지않고 등을 보이고 유정과 말하는데 이후 박은혜의 대사에서 그때 봤잖아요, 해서 이 여자가 남자에 관심을 두고있구나 느끼는 부분이기도했다.) 유정이 유부녀인걸 아는 순간,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남편에게 우리의 만남을 말했다라고 듣는 순간, (직접 나레이션으로 했듯)김영호는 자꾸만 그의 남편이 바라보고있을 것같은 불안감에 시달린다. 마치 대마초를 피운 죄의식과 같은 형식의 불안감이다.
그리고 낮시간에 잠깐 무의식적으로 펴든 성경책을 읽는 김성남은, 어떤 종교적 활동을 이때부터 보여준다. 역사책을 읽는 것 같아서 좋다던 그는 사실 그의 무의식으로 죄를 구원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뒤로 이 성경책은 그가 쫄랑쫄랑 들고다니는 '비닐봉다리' 속에서 보여지게 된다. 그의 알량한 죄의식의 표식이다. 이는 그와 유정이 모텔로 간 방에서 더 확실히 보여진다. 그녀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그는 성경책을 아무렇게나 펼쳐든 후, 죄지은 후 남은 한손보다는 구원받고 잘린 두손이 나으며 죄짓고남은 한 눈알보다는 두눈이 뽑히고 구원을 받아야한다는 내용의 구절을 읽어주며, 섹스를 거절한다. 마치 그런 불륜의 거절이 자신의 청렴함을 보여준다는 듯이. 그러나, 그는 민박집 아저씨의 권유로 유학생 현주와 간 오르세에서 (단정적으로) 다시 죄를 짓는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있는 그. 아직 성적 청렴은 멀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만나는 현주의 친구 유정. 그녀에게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아내와의 통화에서는 그의 책임감 혹은 투정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마음은 온통 유정에게 쏠렸으니. 자신의 죄의식은 그녀를 만나 잠깐 정지된 듯보인다. 그녀가 키스를 끝내고 섹스같은 건, '이제 그렇게 소모적인일 안해요'라고 했을때와 비슷하다. 그가 이 파리에서 할일없이 빈둥대며 소모적인 일은 그녀를 만나기 전의 모든 활동이라 했을때 이후는 그녀의 동선과 맞춰져있다. 이를테면, 지하철을 타지않고 무작정 걷다가 비를 쫄딱 맞고 그제서야 집근처 '교회'를 보고 감격한듯 구원받는 듯한 그의 나레이션 부분이, 후반에 '이력서'가 다른 사람손에 있는 것이 싫다며 이력서를 찾은 후 지하철입구로 뛰어가는 부분과 대조적이다.
유정과 현주와 함께한 바닷가, 그리고 이후 유정에게 주체할수없는 성적욕망을 과시하는 그는, 감기각 걸린채 새벽 한시, 한국의 부인에게 폰섹스를 권유하더니, 결국 '발가락 빠는 꿈'까지 꾸고만다. 이는 1930년대 루이스 브뉴엘의 '황금시대'에서 보여줬던 그 유명한 장면의 패러디로 봐도 무방하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 귀족인듯 보이는 여성이 자신의 성적충동을 참지 못해 석상의 발가락을 빠는 충격적인 장면이 그당시를 후끈달아오르게했는데, 이는 2007 홍상수의 밤과 낮에서 다시 재현되고있다. 김성남이 유정과 자고싶은 성적 충동이 그녀의 발가락을 빠는 모습으로, 그리고 그렇게도 일어나지않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 놀래며 '남자면 남자답게 하던가, 말던가 이게 뭐냐며 역정을 내는 모습이, 모두 그의 바람의 기호로 쓰인 것이다. 다시 꿈에서도 죄인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가 드러난다. 바로 그 발가락 역시 죄인의 발가락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저씨를 따라 쫄래쫄래 간 곳에서 북한화가를 만나고 그 다음엔 유정과 같은 보자르 학교를 다니는 유학생의 집에서 유정의 과거사를 듣게된다. 그녀가 김성남에게 보여줬던 그 아끼고 아꼈던 포트폴리오는 사실 베낀 작품이었고 그래서 퇴학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것을 숨기고 학교를 다니는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아이디어가 자기 꺼인것마냥 속인다. 이쯤되면 일반 남자로서는 그녀를 만나기를 꺼려했을 꺼다. 그러나 죄인 김성남은 차라리 죄인 유정을 더 만나고싶어하고 더 탐하고싶어한다. 왜그랬냐고 묻지도않는다. 게다가 다시 찾은 바닷가에서 그녀와 돈을 나누고 섹스에 성공까지 한다. 영화의 엔딩까지, 그는 그녀의 과거사를 한번도 캐묻지도 뒤따라가 그녀의 실제 활동이 무엇인지도 알고싶어하지도않는다. 왜그럴까? 그는 단지 그와 같은 인간의 종류를 이 '죄로부터의 도피지'인 파리에서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곳이라면 죄를 지은 남성이 죄를 지은 여성과 섹스를 하는 것이 허락될꺼라 그의 무의식세계에서는 벌써 허용하고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원치않은 임신을 하게되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의 숙명같이 뒤따라왔다. 김성남은 이 모든 죄와 죄의식을 느끼고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이 모든 상황을 한국의 부인으로부터의 구원의 메시지를 통해 감면당한다. 또다른 임신, 실제로는 거짓말이었지만 그에게는 이 구질구질한 죄악의 덩어리에서 벗어 날 수 있는 한줄기의 희망의 통로였다. 그래서 그는 마치 그녀의 구원에 응답하듯 한국으로 온다. 영화 속 몇군데에서는 이질감섞인 '구원의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길가다 영화촬영하는 구역에서 '의도치않게'살린 새를 보며 기뻐하는 성남의 모습, 두번에 걸쳐 나온 한인신문에서 섹스를 거절한 옛 애인의 투신자살에 슬퍼하는 넓직한 성남의 흐느끼는 뒷모습, 아내에게 투정부리며 서럽게 울어대는 찌질함, 그리고 임신했다고하자 나몰라라 내빼려다 공항 의자앞에서 발견하는 '새'의 이미지들. 이들이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성남의 죄짓기와 이 '구원의 이미지'가 계속적으로 교차되어 '일상'인냥 보여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결국 인간의 한계성, 바로 구원될 수 없는 바를 자각한것 마냥 아내의 거짓말을 따라, 파리에서 느끼고 저질렀고 구원받으려 노력했던 그 모든 죄의 허물을 두고 아내의 품으로 기어온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쉽지않다. 그것은 단편적으로 그의 꿈에서 드러난다. 홍상수감독의 인터뷰에서 두 번의 꿈은 단지 김성남의 꿈일 뿐이라고했지만. 나는 이렇게 본다. 꿈속의 김성남은 실제와는 달리 엄청난 가부장적지위를 가지고있다. 부인은 유정이 훔쳤던 포트폴리오의 실제주인인 지혜이다. 그녀의 어깨에 죽도를 치며 깨달음을 주는 것으로 시작하고 그녀는 그의 아침식사 앞에서 양쪽 무릎을 땅에 닿고 조아리고있는 실정이다. 도자기를 깨뜨리는 작은 실수에 엄청난 '욕설'을 그녀에게 퍼붓고는 꿈이 깨는데, 이는 유정의 죄가 사실 지혜로부터 근간이 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마치 유정에 대한 죄의식을 지혜에게 폭발적으로 퍼붓는 것같은 부분이다. 웃긴것은, 이런 꿈을 꾸고 다시 아내에게 꾸짖음을 받는 김성남이다. 김성남은 고작 그런 인간인거다. 죄를 짓고 죄의식을 느끼고 부인에게 혼나고 마는, 화가지만 영화 내내 작품 하나 그려내지못하는(혹은 구성또한 못하는) 몰이해의 인간이며 무기력의 남성인 것이다.
김성남이란 캐릭터가 나에게 얼마나 웃긴 존재였냐하면, 이를테면, 초반 담배를 사러 가는 장면에서부터 나온다. 일기체이기때문에 나레이션이 계속해서 흐른다. 담배가게가 두군데나 문을 닫고 기어이 찾아간 곳에서의 일이다. 담배가게에서 담배가 거의 다 팔려있었는데 그런 광경은 처음본다, 그것 아마도 다른 곳이 문을 닫아서일꺼다, 뭐 이런식으로의 대사였다. 그러나 영화가 좀더 진행되면, 그 대사가 그의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담배가게에 들어온 또 다른 한국인 커플이 대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김성남의 염치없음은 나에게 비웃음을 준다. 너도 유정의 포트폴리오처럼 다른 사람의 것을 네것인냥 하는 구나, 싶었다.
그리고 홍상수란 감독이 가장 재치를 부렸던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다. 유정이 거지에게 바게트를 사준다. 이를 지나가던 김성남이 본다. 그러면서 유정은 천사일꺼라고, 그리고 세상은 이렇기에 아름답고 살아가는 거라고 나레이션으로 읊조린다. 마치 자신은 죄인이지만 유정은 순수한 천사인듯한 그런 느낌의 쇼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쇼트. 횡당보도를 교차하며 걷는 현지인의 손에는 개줄이 걸려있고 두 개들이 서로를 죽일듯한 달려든다. 이 얼마나 웃긴 연결인가? 천사와 거지, 그를 바라보며 삶의 진실을 깨닫는 듯한 남자의 이야기 다음에는 '개 두마리'가 서로를 죽일듯이 달려들고있다니. 얼마나 웃으며 봤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멋지십니다, 역시 당신의 세계에는 한치의 양보도 없군요, 싶었다.
나에겐 144분의 런닝 타임은길지않았다, 이대로 평생을 이어가도 웃길 영화일정도로. 이 영화 속 캐릭터들이 빚어내는 갈등은 그저그런 하루 그러나 그저그렇지 못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김성남이란 캐릭터를 낱낱히 파헤치고 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일기적인 형식의 영화가 영화 이상의 감흥을 주다니, 나의 예상의 것보다 훨씬 독특한 효과를 주는 그러한 영화라고해야할까? 역시 홍상수의 힘은 쎄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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