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한 그림자로 비춰본 <휴일>,<안개>,<하녀>
- 무기력, 무능력, 비생산적인 남성들의 쾌락과 죄책감 사이의 행로.
그 당시 정말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휴일>과 <안개>,<하녀>의 남성주인공은 하나같이 진정 무기력한 캐릭터이다. 60년대라는 군사정권이 집도한 시대에 남성이라는 동성 사회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런 국가를 권력으로 이탈해 갔다는 점에서 그들이 동조했던 느낌을 간과할 수 없겠지만, 그들 역시 아버지가 부재된 남성이었다는 점과 쾌락과 죄책감 사이에서의 행로를 오고 갔다는 점에서 관객을 분노시킨다. <휴일>에서의 허욱은 연인인 지연의 아이 아버지이지만 출산이 아닌 낙태에 동의한다는 점에서 생산력을 잃었으며 택시비가 없어서 택시를 도둑 승차한다는 점, 커피값이 없어서 실외를 떠돌아다닌다는 점등 자본적인 부분에서도 생산력이 없는 인간상으로 나온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 첫 시퀀스부터 계속되어 허욱이라는 인간상을 허무하며 무기력한 캐릭터인 것으로 확실히 각인을 시키며 마지막 회상하는 플래쉬백와 함께 그에게는 더 이상의 출구도 없는 막막한 인간으로 내몰아버린다. 이는 그가 생산적인 일을 했더라도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야기시키는 인물이며 이 영화가 진정 이야기 하고자 하는 60년대 남근상의 풍자일 것이다.
<안개>에서의 기준 역시 남근을 아내에게 빼앗긴 볼품없는 아버지로 남성주인공이 등장한다. 물론 첫 시퀀스에는 빽빽한 서류들과 담배연기를 뿜으며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것처럼 보이는) 높은 위치의 남성이 존재하나, 얼마 가지 않아 아내가 등장하는 씬으로 그의 정체가 들통나게 된다. 그는 성공을 위해 부유한 집안에 장가를 간 기회주의적 남성이며 가정에서 실제적인 남근의 존재를 아내에게 뺏긴 권위 없는 자다. 자신을 위안하며 지내던 어느 날, 그는 고향인 ‘무진’에 가게 되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의 남근을 다시 찾은 듯한 자신감을 갖게 되지만 바로 아내에게서 온 전보 한 장에 무너지게 된다. 결국, 그 역시 자생산력이란 없는 남성이란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 된 것이다.
<하녀>에서의 남성은 다른 영화와 달리 두 남매라는 생산적 결과물과 함께 등장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무기력적인 모습으로 인해 생산물을 없애버리게 된다.(남매가 죽게 된다.) 또한, 잠시나마 생산성을 부가시킨 하녀의 아이조차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아주 극적인 에피소드에 의해 남성의 이미지는 무기력적이며 비생산적인 것을 재차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수입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주수입원은 아내의 몫에 맡긴다. 그러면서 자신은 부수입에 얽매여 ‘피아노’따위를 공장 여성들에게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나온다. 그가 예술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물질적인 생산보다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공장이라는 생산적인 공간에서 여성이라는 존재에 기대어 수입원을 받는 다는 것에서 그가 남성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부분은 그가 집안까지 끌어들여 여공에게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점이나 그의 부인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 더욱 부각된다. 이처럼 <휴일>,<안개> 그리고 <하녀>에서는 무기력, 무능력, 비생산적인 남성의 캐릭터를 계속해서 나타내고 그들의 그런 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내던지듯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주인공 뿐만이 아닌 주인공 캐릭터의 친구 역 조차도 어떤 생산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간상으로 나타내거나 주인공보다 더 세속화된 부분을 희화화시켜 보여준다. 우선, <휴일>에서 허욱이 낙태비를 위해 친구들을 찾아 다닐 때 이러한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방금 만난 여자와 대낮에 섹스를 하며 그 행위자체를 당연시 여기는 친구나 자신의 집을 비워둔 채 술집에서 술을 먹으며 자신의 집에 술을 먹으러 오라는 비생산적 친구, 그리고 할 일이 없다며 목욕을 6번 하고 있다는 친구는 허욱이나 다름없이 보인다. 또, <안개>에서 기준의 친구인 세무사 남사는 여자의 유행가에나 흥겨워하는 관료주의와 성장제일주의의 전락한 남성으로 등장한다. 남사의 출세를 위해 기준처럼 여성을 이용하려는 속물적인 성향은 또 다른 기준을 방불케 한다. 또한, 이들은 주인공 남성들의 다른 특징인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구제할 수 없는 인간들로 묘사된다.
세 영화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비생산적이며 허구적인 인간상이라는 점이라는 것 외에도 비슷한 성향을 띄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쾌락과 죄책감 사이에서의 행로를 걷는다는 점이다. 즉, 다시 말해 남성캐릭터들은 타인에게로의 자신의 모습을 중요시 여기는 죄책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타인보다 자신을 위한 충족을 우선이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소외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국가적 모습에 불만족을 느끼는 자아에서 재현되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나르시즘이나 라캉의 거울단계에 있다 본다. 이들은 어느 정도의 도덕심이 구축되어있는 성인 남성이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를 낙태할 때나, 다른 여성과의 성행위를 하면서 느끼는 죄책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행위 후 자신에게 다시 눈을 되돌린다. <휴일>에서 연인이 낙태를 할 때 술집에서 술을 먹으며 다른 여성과의 정사를 한다든가 <안개>에서 도피한 곳에서의 남근을 다시 찾은 것을 즐기며, 마치 자신이 모든 해줄 수 있는 양 행동하여 역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의 정사를 한다든지 <하녀>에서처럼 휘말려 빠진 덫이라는 것을 끝내 빠져나가지 못하고 자신의 충족을 위해 정사한다는 것이 그 부분이다. 이런 행동에 대한 시선은 자신의 자아 동일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이라는 타인을 도구로 사용한다. 자신의 남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들은 다른 성적대상으로 부족함을 충족시키려 하며 자신을 진정한 주체로 만들려 하는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죄책감 사이에 자기애를 위한 쾌락충족은 이처럼 무기력한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도피지점이며 행위일 것 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더 이상의 효과는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영화는 다시 귀결하고 만다. 아마도 이런 결말은 그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랄까.
이처럼 <휴일>,<안개> 그리고 <하녀>는 완전하지 못한 남성들을 어느 정도의 여지의 세계에 빠뜨렸다가 잠시나마 착각을 취하게 하는 이야기를 서술하며 그러한 내러티브는 곧 ‘0’이 될 뿐 더 이상의 아무 효능을 하지 못하고 되돌아 온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즉, 이들의 행위는 더 이상의 진보도 퇴보도 없는 그저 자기만의 만족 애와 같은 영역 안에서만 해당된 다는 것이다. 마치 이러한 점들은 현대인들의 도태적 양상과 흡사해 그저 치부시킬 수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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