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로테스크의 미학.
그로테스크. 그렇다. '친절한 금자씨'를 한마디로 정의 할 수 있는 이미지, 미장센으로 영상가득 표현한 감각, 친절한 금자씨에서부터 마녀이금자까지 표현되는 이 캐릭터의 성향, 모두가 '그로테스크' 이 단어로 수렴된다. 물론, '그로데스크'적 표현은 박찬욱감독의 전작 - 특히 '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쓰리몬스터-CUT' - 에서도 미학적으로나 철학적논리로 쓰였으나 금자의 입을 통해 표현된 '예뻐야 돼. 뭐든지 에쁜게 좋아'란 말처럼 직접적 미학으로 완성된 '친절한 금자씨'는 전작의 경우를 더욱 뛰어넘는 다 할 수 있다. 우선, 무엇이 그리도 그로테스크 한지 살펴보자. 캐릭터의 성향이다. 오프닝시퀀스를 지나 바로 이어지는 첫 장면씬에서부터 나타나는 성향은 산소같은 여자로 대표되었던 이영애의 미모보다 돋보였던 대사 '너나잘하세요'와 무표정한 금자의 캐릭터가 그러한 것이다. 영화 개봉전 떠들석 했던 예고편에서부터 강한 시선을 끌었던 이 부분의 '금자'라는 캐릭터를 쉽게 파악해주어, 이영애라는 대스타의 이미지를 뒤로한채 관객이 '금자'를 만날 수 있는 첫 조우의 가능성을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금자의 괴기한 용서를 비는 방법 역시 그러하다. 마치 상류 조폭영화나 야쿠자 영화를 보는 듯한 손가락썰기 씬이다. 가녀린 백설공주같은 금자가 - 박찬욱 감독님이 직접 말했듯이 - 무식하고 고지식한 여자인것을 이 씬에서 확연히 드러내어준다. 손가락을 자름으로서 손목을 자르게 될때까지라도 어찌됐건 무슨짓을 해서든 그녀는 용서를 빈다. 모든 손을 접고 새끼를 자를 때 그녀는 말한다. '용서하실때까지..'금자는 무슨행도을 해서라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그런면은 이제 금자가 관객들에게 보여줄 기초다지기와 같은 것이다. 다시말해 다음 장면에서 고나객에게 보여줄 '박원모 어린이'의 실종자 수배전단과 금자의 몽타주를 붙인 거울 아래 빨간 촛불을 조심스럽게 켠후 십삼년동안 빠짐없이 기도 드리는 금자의 구원과 속죄에 대한 짧은 단상과 같은 것이다. 그저 그녀는 겉으로만,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니라 내면 속내를 발랑 다 뒤짖어서라도, 아니 그녀의 말 처럼 이태리 타올로 빡빡 문질러 아기속살로 변할때까지 구원을 받기를 진심으로 원하는 점이다. 이러한 금자의 캐릭터는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제대로 살려주고있다. 우는 듯 웃는 모습, 기도를 하다가도 담배를 피며 깔깔 웃는 마녀의 모습,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캐릭터라는 자체서부터 말이 많아 질 수 밖에 없다.캐릭터 다음으로 연출을 이야기 해볼 수 있다. 이런 괴기스런 모듬집이 더 괴기스러워 질 수 있던 것은 바로 판타지의 힘이다. 판타지적인 모습을 관객들은 쉽게 알 수 있는 데 몇몇 장면만 늘어놓아보겠다. 자, 다시 금자씨 세계로 들어가보시라. 교도소안의 금자의 몸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을 표현했다거나, '박원모'에게 구원받고 싶어하던 금자가 잠들어 있을때 제니가 만났던 주황색 구슬놀이를 하는 원모라든가, 기도를 드리다 잠들던 금자의 꿈에서 몸은 개 머리는 백선생을 한 복수 그 상대를 죽인다거나, 금자를 만나기 전 제니가 올려다 본 하늘에 쓰인 글자가 구름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나 백선생의 죽음이후 화장실에서 만남 원모의 모습들이 그렇다.이는 판타지 = 금자의 의식 혹은 꿈으로 치환된 '시각적 이미지'이다. 판타지의 표현이 바로 꿈과 의식 사이에서 흐르고 있으니 관객들은 어리 둥절해 할 수 밖에 없으나 쉽게 생각하자. 그 모든것을 눈으로 보는 것이 관객의 특권이라고. 이렇듯 직접적인 판타지가 있는가 하면 간적접 판타지도 함께 존재한다. 그것은 영화가 상영됨과 함꼐 내러티브에 대한 관객들의 상상력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백선생이 흘린 피가 가득한 양동이의 씬이 끝난 후 금자가 9명의 사도(?)에게 잘라준 핏빛 케�이 그러하다. 관객들은 자연스레 백선생의 피로 만든 케�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 나역시 그렇다고 자부했건만!- 아쉽게도 박찬욱 감독님꼐서는 자신은 그런 잔인한 짓을 못한다며 내숭을 떨기도 하셨다. 이러한 괴기한 상상력은 백선생이 삶-죽음사이에 있을때도 작동되어버린다. 우리는 첫부분 원모엄마의 부엌칼씬을 본 후 백선생이 어떻게 당하는 지 직접 확인할 수 없다. 그저 그들이 가진 무기들이 어떻게 사용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 마지막 가위로 백선생의 죽음을 알게된다. 하지만 지금 나열했던 톡톡 튀는 장면들 보다 더 뛰어난 박찬욱식 위트가 있었으니 그 빛나는 장면은 제니와 금자의 커뮤니케이션을 도와주는 백선생의 성우적목소리다. 제니와 금자를 갈라놓은 장본인이 그둘의 조력자가 되는 장면은 그야말로 블랙코미디이며 게다가! 금자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임쏘리'를 외치는데 백선생은 중간에서 그 둘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마치 구연동화를 하는 성우적 목소리를 낸다. 바로 백선생의 직업적 특징을 살려준 대목이다. 백선생의 유창한 영어실력을 살린 이 장면은 친절한 금자씨'의 베스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역설의 미학을 최대한 살리는 박찬욱 식 유머에 관객들은 웃고 말 수 밖에 없고 동시에 백선생은 처죽어도 얄미워보이는 캐릭터로 전락한다. 마치, 정장송 윙크하는 곰 넥타이처럼 부조화다. 아, 원래는 그저 무덤덤한 통역을 했으나, 후에 동시통역을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이런 후반작업 하나가 베스트로 승선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다.
2. 복수의 끝은 진정 구원일까,
'복수는 나의 것'에서 그는 확실히 '복수'를 감행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철칙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마지막 결말 후에도 그러한 생각을 한다. 그럼 복수의 끝이 없는 것인가.. 다음 영화 '올드보이'에서 역시 그는 '복수의 심층법'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이번에는 '눈에는 눈+알파,이에는 이+알파'를 해야한다는 것. 그러나 이 역시 마지막 이우진의 말처럼 '이제 무슨 낙으로 살지?'라며 권총 자살을 하는 인간의 무기력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생각을 지니게 된다. 복수가 계속된다/ 복수가 끝이나면 허무감에 빠진다/ 그렇다면, 어찌해야하는 가? '친절한 금자씨'를 두고 복수극의 완결편이라고 하지만, 지금까지의 복수극은 한가지에서 파생되는 변종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라는 나무 가지끝에서 겨울을 지나 하얀꽃을 피우는 존재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복수극이기보다, '복수'를 피해야함을 일�우게 하는 친절한 천사의 속죄하자는 운동권이야기(!!!)라 생각이 들어버린다. - 이 표현은 극단적인 것이므로 그냥 웃음으로 마무리 부탁 - 어찌됐건, 감독의 말처럼 딱 2/3지점에서 이영애는 복수의 끝에 빠져 고뇌한다. 영화의 초반부 건방진 금자씨처럼 보였던 것은 복수를 실행했다는 의미이며 전개는 교도소시절 금자에게 은혜를 입었던 조력자들의 과거와 함께 힘을 모아 복수를 도와주는 부분이다. 그 이후 금자는 꿈에도 그리던 백선생을 자기 눈앞에 놓고도 복수를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백선생에 대한 애증의 감정 �문일 것이다. 백선생의 눈에서 왔다 갔다 하는 권총을 보더라도 그녀가 굳게 마음을 먹지 못한채 휘둘린다는 것을 말하겠다. 하지만 곧 피해자의 어린이가 한명이 아니라 네명더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악으로 치환되는 이 백선생이라는 인물을
다수로 처벌하기로 한다. 이것은 줄거리다.
하지만 금자는 여기서 잘못된 판단을 한 게 아닌가싶다. 그렇게 구원을 받고 싶어하기도 하고 복수를 하고 싶기도 하지만 둘다 결국은 하지 못하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버리고 말기 �문이다. 복수를 할때는 복수만, 구원을 받고자 할�는 구원만 받으려고 했다면 그녀는 아마 마지막 장면처럼 얼굴을 두부 케�에 처 박는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여기서부터 다른 호흡을 하게 된다. 예상과는 달리 금자는 백선생에게 극악무도한 복수를 하지 못해 통쾌함을 주지못하는 것이다. 후반부분이 초반과 달리간다는 점에서 위험한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이 부분에서 비호감을 나타내었다는 점도 강력한 이유가 될 것이다. 갑자기 복수를 그만두고 관조자로 남게 된 금자가 그들을 지켜본 후 씁슬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이 너무 갑작스런 진행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부분은 소설이 더욱 일리가 있다. 영화 속 '복수'를 하려는 금자는 냉철한 금자이지 피가 끓는 마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비교하였을때 소설 속 금자는 초반과 다르지 않은 마녀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소설에서 금자는 9명의 사람들이 백선생을 범하러 오기 전에 손과 발을 수갑으로 채운뒤 한손과 한발로 운전가능한 쏘렌토 키를 주며 그리고 톱을 주며 웃는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당연히 자기 무덤을 파라는 소리. 결국 그는 자신의 손과 발목을 자르게 되고 영화 속처럼 은주할머니의 가위에 목숨을 잃게 된다. 중간과정은 영화에서는 생략된채,
한마디로 마녀 이금자가 요기를 부린 것에 백선생 자신이 넘어간다는 좀더 잔인해진 이야기지만, 갑자기 복수를 그만 두는 금자보다는 낫지 않은가.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를 만든 것인지 영화의 밀도를 채우기 위해 소설을 각색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등급조정을 위해서 잔인한 장면이나 성적 표현을 한 장면을 다 삭제 한 듯 싶다. 여기서 내가 아쉬운 점이 그것이다. 한치도 봐주지 말고 모든것을 표현했더라면 더 좋은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그런 욕심. 그것은 마치 금자가 그토록 원한 구원에 대한 갈망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친절한 금자씨를 본후 모두들 생각에 빠지게 하는 궁금증은, 바로 복수의 끝이 구원인가 라는 점이다. 그점을 박찬욱 감독도 건드리고 싶었고
그래서 이러한 주제를 내보인것까지는 알겠는데 그것이 옳다 그르다라는 것은 나도 아직 모르겠다. 영화 속 금자는 성녀로 대치되는 이미지를 가졌으니 구원이 끝이라 할 수 도 있겠지만.. 진정 구원이 끝을 낼 수 있는 수단인가..
3. 모성애는 존재 했을까?
'친절한 금자씨'에 반전이 있다면 그것은 '킬빌' 혹은 '맨온파이어'처럼 죽었다고 믿었던 딸을 백선생이 데리고 있었다는 것일 줄 알았다.그러나 웬걸. 중간쯤부터 등장한 금자의 딸 제니는 약간의 당홍스런 캐릭터였다. 금자의 교도소/교도소출소 이미지가 난무하는 영화에서
금자=엄마라는 이미지가너무 적어서 였을 것이다. 딸이기보다는 조카뻘되어보이는 제니, 뭐 그런건 상관없다. 그러나 진정 묻고 싶었던 것은 영화 속 모성애의 존재여부였다. 나도 어쩔수없는 '모성콤플렉스' 때문일까, 금자라는 인물이 엄마라는 이미지로 대치되기 힘든 것은 아마도 이영애라는 꺼질 수 없는 스타의 존재 때문일꺼라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문제는 영화 속 이영애=엄마 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씬이 거의 없지 않나 싶기도 하다. 나이가 적은 남자와 잠자리를 한다거나 무표정한 표정들 정성스럽지 못한 모습들? 그래, 그 '엄마스러운'이라는 형용사적 표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여 딸인 제니와의 이별/만남이 (나에겐 적어도) 애절스럽지 못했다. 뭐, 이 점은 나도 잘 모르겠다. 과거의 모습이 삭제되어서 이후의 제니의 비중이 그리 크지 못했다는 점이 문제였는지, 어떤 점이 그렇게도 모성애의 부재를 나타내게 했는지...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금자와의 만남 후 제니가 재부녀화적으로 되는 것을 디테일하게 표현해주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다른 부모들의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수의 기회를 준거를 보면 그녀도 엄마이기는 했나보다.
4. 박찬욱 세계의 리컨스트럭션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를 다른 영화와 굳이 비교를 해보자면 왕가위의 '2046'을 댈 수 있겠다. 왜 두 영화가 비교대상이 되는가? 그것은, 각 영화들이 각 감독의 세계를 모아놓은 종합선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있기 �문일 것이다. 그래서 '2046'을 본 왕가위의 팬들은 전작들의 숨결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환호를 했지만 변하지 않는 왕가위식 스타일에 질려하는 관객들도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까?이번 경우 역시 그러했다. 더이상의 진전이 없다는 의견이나 새로운 스타일의 개척을 못하고 후퇴한다는 식의 의견도 많았다. 물론, 전작의 흐름이 이어지는 부분이 많다. 금자의 입을 통해 백선생이 알려줬다는 나쁜유괴와 좋은 유괴의 경우, 복수에 대한 모티브, 마지막 씬에서 눈이 내린다는 점등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하지만, 전작의 좋은 유괴가 나쁜 유괴로 몰리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인 나쁜유괴를 중심으로 결과와 파멸을 보여주는 것이 '친절한 금자씨'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박찬욱 세계론의 리컨스트럭션이다. 보여주지 않았던 부분들을 보여줌으로서 전작을 본 관객에게 더욱이 재미있는 영화관람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과 같다. 이는 역시 카메오의 역할이 큰데, 그저 카메오를 영상안에서 널리 알려진 배우라는 것보다 전작과는 사뭇 다른 스토리를 선보임으로서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는 것 역시 리컨스트럭션의 주된 요소였다. 예를 들어 전작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의 연결고리를 잇게만든 장본인 송강호와 신하균을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백선생의 심부름으로 금자를 죽이는 동고동락 킬러로 나온다. 또한, 유지태는 마치 이우진의 어린 모습을 보여주듯 댐에서 떨어지는 그 영상과 일치되어보이는 인상으로 금자에게 나타났고 우리는 그들의 보이지않는 연결 고리가 어떠한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해본다. 이 밖에 까메오로는 '락스를 먹였대?'라고 외치는 클로즈업상의 윤진서나 티비방송의 앵커를 맡은 강혜정들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인 류승완은 도저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알았지만, 수족관씬에!- ( 혹시 보신분? ) 이렇게 영화는 낯익은 그들을 통해 복수에 대한 다른 열쇠를 주는 듯 했다. 우리에게 퍼즐을 풀어보라는 식으로. 그저 랜덤으로 배치한 역할들이 아니라
그 역설적 표현을 위한 카메오가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가 더 빛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는 낯설지만 친근한 영화가 되었다.
5. 밀도가 약한 금자씨, 스타일의 과잉,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쉽게도, '친절한 금자씨'는 밀도력이 약했다. 조명, 연출, 촬영, 미술, 음악등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을지 몰라도 전작들의 부드러운 내러티브의 연결이 아닌 미적감각만이 돋보이는 스타일의 과잉이 눈에 밟혔다. 혹은 편집의 부족함 이었을까, 최근 한국영화들을 보면 스타일을 추구하다 내러티브를 놓치는 면이 많아서 ( 특히 분홍신이 그러했다!!! ), 개인적으로 '친절한 금자씨'에 그런 점이 보인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영화는 초반부터 의식의 흐름처럼 과거와 현재가 마구잡이로 엉켜있다. 물론,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나, 순간순간의 빈공간-> 인물로 보여주는 신들은 떨어진 느낌이 영력했으며, 관객이 그들에게서 떨어져있는 느낌을 주게 만들었다. 그것은 제 3자가 보는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나레이션과 같은 느낌이었다. 또한, 조력자들의 금자씨에 대한 도움이 그저 짧은 순간으로만 끝난채 영화에서 두번 다시 그들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마지막 부분에서 백선생을 모두가 보았다면, 그리고 꿈속에서 금자가 웃는 것철머 모두가 백선생을 보고 그렇게 웃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도 해본다. 아, 이것은 판타지적인 힘을 빌려서 해야할 것이다. 그저 상징적인 의미니까. 박찬욱 감독에게 관객들이 던지는 말로는 변태적인 성향이 많다고 한다. 물론 식탁에서의 섹스신이나 마녀의 동성애에서 쾌락을 찾는 모습들이 꼭 필요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소설에서는 자세히 그것도 더욱 심한 강도로 나오니 이해하길 바란다. 우주전쟁을 말할때 그렇지 않나? 원작이 그러한 결말이니 어쩔수없다고. 이것도 같은 맥락으로, 원래 백선생은 그러한 놈이니 이해해야한다 라고 넘어가야한다. 식탁식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어가보자면, 아주 미학적인 모습이 좋았다. 영화속 티비를 보다가 강제적인 섹스를 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카메라는 점점 백선생의 자리로 밀려가는 반찬들을 비춘다. 웃기지 않는가. 그가 원하는 것이 섹스였나. 아니면 자신을 위주로 놓여진 반찬들의 배열을 보기위함인가. 소설에서는 티비속에서 남학생이 여고생을 강간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백선생이 그러한 행동을 한 것 처럼 나온다. 그는 절대악인 존재이니까. 그가 왜 절대악적인 존재가 되었는지. 왜 아이들을 죽였는지. 그것은 영화에서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소설에서의 부연설명을 보아야 그제서야 영화는 친절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는 밀도가 약해질수밖에 없다. 행위하는 것에 대한 원인이 없기때문에 관객들은 쉽게 그들과 하나가 되어 순응하지 못하기 �문일 것이다. 소설과 영화 각각의 특징이 있으니, 더욱 밀도있는 영화내용을 원한다면 소설을 한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하지만 영화속에서 보였던 각 세트와 미술 음악 연출의 조화는 시각적인 것임으로 소설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니, 친절한 금자씨는 이런 저런 갖가지의 시리즈로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다.
5+. 에필로그.
복수를 하려는 자는 한치도 재지말고 앞뒤보지말고 오로지 복수만 해야된다. 그래야 그것을 복수하는 자의 화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복수를 하다가 멈추는 순간 그는 인간의 약한 모습을 자기 스스로 끄내어들어 타인역시 인간으로 만들고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복수를 할때는 그 순간, 한움큼의 지푸라기로 세상을 이긴 것 처럼, 복수는 쾌락이된다. 복수, 그게 전부인것처럼. 이 점은 '올드보이'에서 강우진이나 오대수가 아주 잘 나타내고있다. 그런데,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금자는 너무 착하다. 너무 친절하다. 금자는 어느 순간 복수를 하다 말고 정의의 사도가 되려고한다. 정의는 복수에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금자는 더이상 마녀 이금자가 아닌 친절함 금자씨로 남으며, 정의의 여신 아스트라에 더 가까이 서게 된다. 우리는 그녀가 복수를 멈추는 것에서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 차라리 구원을 하길 원해도, 박원모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복수도 구원도 아닌 딜레마에 빠지며 마지막까지 치열한 속죄를 위해 하얀두부모양의 케�에 자신의 얼굴을 집어 던진다. 그래. 복수는 그런거야. 남이 죽지 못하면 내가 죽어야 하는 그런 치열한 거야. 근데, 금자는 너무 친절해서 문제다.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지 못한 금자, 정의의 사도가 되려는 그녀의 욕심에 안타까움 뿐이다. 그래서 나는 좀더, 좀더, 복수에 힘쓰는 '복수는 나의 것'에 지지한다. 그래도, 난 인간 한켠에 있는 그 미궁의 '복수를 해도 될까'라는 것에 대해 찬욱씨의 성향에도 동의한다. 복수를 하더라도 뒤를 돌아볼 수 있는 그 한뼘의 평점심까지도. 왜냐하면.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지녀야 할 복수에 대한 가장 최소의 예의니까.
아. 금자씨에서 가장 좋았던 점 혹은 흐뭇했던 점은,마지막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부분이었다. 주로, 주연배우순으로 올라가는 것이 일반화인 반면 '친절한 금자씨'의 엔딩크레딧은 영화에 등장한 순서대로 나온 것이었다.아주, 획기적이며 재미있던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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