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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수칠 때 떠나라 Murder, Take One, 2005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4. 11:25

 

 

 

 

 

상실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실존하는 결과.

 


여느 토론 프로그램의 세트장과 꼭 닮은 느낌의 이 프로그램은 생중계로 살인사건의 진황을 파헤쳐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타인의 사생활, 그것도 살인 사건이라면 더욱 흥미로움을 느끼는 인간의 심리는 이 프로그램의 리얼리티에 쉽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건물 안에서 심지어는 거리의 전광판까지도 방영되는 이 인기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분당 70%를 육박한다. 인간의 관음증을 제대로 훑어주는 영리한 프로그램인 셈이다. 《박수칠때떠나라》를 관람하기 위해 온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이 TV프로그램의 시청자와 영화관객을 오고갈 수 있는 특권을 지니게 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박수칠때떠나라》의 관객과 동시에 ‘누가 정유정을 죽였나’라는 프로그램의 시청자도 되는 것이다. 언제나, 이 프로그램의 타이틀이 ‘누가 ***을 죽였나’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영화와 동시에 보게되는 이 프로그램의 타이틀은 적어도 ‘누가 정유정을 죽였나’이다.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는 타이틀이나 문구는 ‘*** 살인사건’이 있지만 이 프로그램은 의문문으로 우리의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왜 하필 ‘누가 정유정을 죽였나’ 였을까? 그것은 이 프로그램 자체에 영화와 직결되는 주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친절한 설명을 약간 더 곁들이자면, ‘정유정 살인사건’이란 타이틀은 그 사건에 대한 동기, 과정, 결과가 적절한 함량으로 섞여있는 종합적인 사건인 반면, ‘누가 정유정을 죽였나’는 동기와 과정이 상실되어있는 반면 결과만이 실존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자연스레 정유정을 죽인 범인을 파헤치고 싶어하고 ‘정유정’이란 인물은 사라진 채 살인 사건이란 결과만이 남아버린다. 이쯤에서 관객은 시청자의 역할로 빠지게 된다. 알다시피 TV를 시청한다는 것은 절대 능동적이지 못하다. 그저 영상이 바뀌는 대로 우리는 그것을 감지하고 사실로 인시할 뿐 이다. 이렇게 수동적인 태도는 아마도 ‘장진 감독’이 원했던 방향일 것 이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 ‘장진감독’은 그런 우리를 보고 비웃기라도 하듯 범인 찾기에 몰두하기보다 ‘정유정’이란 여성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스토리의 흐름에서 영화는 ‘Good News, Bad News’를 낳게 된다.


다시, 영화 초반으로 돌아가보자. 오프닝 시퀀스가 시작됨과 동시에 김영훈(정하연)은 사건장소에서 검거되고 유력한 용의자로서 최검사와 대결모드를 펼치게 된다. 신하균의 밀도있는 연기력은 초반부터 이야기의 집중력을 높여주고 팽팽한 공기 속에서 진행되는 최검사의 심문은 한치의 양보도 여유도 허락하지 않을 법하다. 첫 번째 장 ‘심문’은 이렇게 ‘김영훈은 정유정을 죽였나’의 호흡으로 시작하고 김영훈의 범행여부에 대한 여지를 남긴 채 끝을 내버린다. 그 이후의 장 ‘증언’, ‘전설’에서도 역시 ‘심문’에서 다루었던 부분을 심화 있게 어루만진다. 세 번째 장까지도 앞에서 언급했던 ‘김영훈은 정유정을 죽였나’에 대한 반복과 점층으로 범인몰이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우리가 시청자의 입장으로 다가설 때 영화는 전과 사뭇 다른 표정을 짓기 시작한다. 구분을 해보자면 네 번째 장 ‘물고기’장부터 장진감독이 윤반장의 입을 통해 이 살인사건의 프로그램 문제점을 직접 서술해버린다. 그것은 수동적으로 이 모든 것을 바라본 시청자(혹은 관객)에 대한 일종의 깨우침이었다. 그리고는 영화는 더 이상 최검사와 김영훈의 대결모드로 흘러가지 않는다. 어찌 보면 흐름이 탁 끊긴 것과 같지만 또 어찌 보면 심도 있는 주제의 새 흐름이 되어버린다. 이로써, 주연급 김영훈은 첫 번째 살인 용의자라는 조연이 되어버리고 그 이후 관객과 함께 프로그램의 쇼를 보는 시청자로 전락한다. 이 부분에서 관객들은 실망을 감출 수  없게 된다. 포스터나 예고편으로 ‘올드보이’ 이후 최대의 대결극이려니 하고 영화관을 찾았더니 중반부터 대결극은 끝이 나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장진감독은 왜 이렇게 위험한 시도를 한 것일까. 영화 마지막까지 눈코 뜰새없는 스릴러 수사로 마감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관객이 이런 생각을 미쳐 하기도 전에, 장진감독은 새로운 승부수를 내던진다. 바로 ‘정유정’이란 존재다. 최검사의 입에서 ‘정유정’이 ‘그녀’로 대체될 때 우리는 어느새 죽어있는 그녀를 살아있는 영혼으로 만날 준비를 하고 있게 된다. (이후에 밝혀지지만 최검사는 이미 그녀와의 조우를 하고있었다.) 그녀의 영혼보다 시체따위에 안주하던 영화는 점점 그녀를 무에서 유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였을까. 그것도 스토리 흐름의 역효과를 줄 수 있는 ‘샤머니즘’의 등장을 시킨이유가.

 

스릴러 범죄 수사. 그것도 과학적 물증으로 사건을 해결시키는 이 영화의 경우, 이런 샤머니즘의 존재는 영화자체에 위험한 놀이수가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시각적인 검증’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 범죄수사에서 ‘비시각적인 검증’을 하여 사건의 실마리를 푼다는 것 자체가 합리성에 어긋나게 된다. 그러나 장진감독은 이 모든 것을 이행 시킨 후, 관객에게 정유정에 대한 연민을 품게하여 그녀를 인정시키려한다. TV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위한 거짓 쇼,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굿 한판. 모두가 그녀를 시각적 이미지화 시키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방송PD를 통해 죽은 사육은 버린 채 다른 몸뚱아리를 빌려서라도 말하고자 한다. 그녀가 어떤 아픔을 겼었는지 그녀의 심정이 어떤지 사시나무처럼 떨며 토해내듯 외친다. 그로인해 이 뜬금없는 ‘샤머니즘의 정체’는 정유정 영혼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끝맺음이 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정하연’을 잊고 ‘정유정’을 만나게 되는 것이며, 이 과정은 비상식적이지만 자연스럽게 우리 앞에 펼쳐진다. 또한, 보이는 것이 다가아니라는 속설에 부합하여 영화의 막바지에 자연스러운 판타지로 연결시키려는 관문이기도하다.

 

판타지와 현실의 조심스러운 간극과 연극화 혹은 탈 영화적 시도

 

 아쉽게도 《박수칠때떠나라》에는 상식적으로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상당하다. 영화는 그런 부분을 아주 교묘히 빠져나와 관객 속이기에 몰두한다. 판타지와 현실의 끈을 밀고 당겨 ‘판타지’부분에서는 감성으로 ‘현실’부분에서는 이성으로 이해 시키려한다. 여기서 관객에게 상당부분 물음표를 만든 부분이 어디였을까? 놀랍게도 ‘감성의 이해력’보다 ‘이성의 이해력’을 시킨다는 것이 이 영화에서 부족하다. 우선 언급될 수 있는 것은 해당 사건에 대한 지식이 없는 검사의 무능력함이다. 오프닝과 함께 한 여성의 시체가 눈에 띄이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 호텔방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뿐이다. 두 번째 알 수 있는 것은 용의자로 보이는 남자가 잡히는 모습이다. 그 후 그 용의자는 ‘김영훈’이란 사람이고 최검사에게 심문을 받게 된다. 이 부분까지는 아주 친절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내러티브로 이해력을 돋구어 주어 영화 초반부터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그러나 그 후 김영훈은 정하연이란 본명의 인물이었으며 정유정의 동생으로 밝혀지게 된다. 그것은 용의자 이름을 ‘김영훈’이라 알고 있는 최검사의 유도심문에 대한 결과였지만 현실적 이해력을 돕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용의자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없는 상태로 심문을 하는 것 자체나 사건을 다룬다는 것 자체가 무능력한 검사라는 이미지에서 탈피시킬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원래는 여성이었지만 정유정을 사랑하여 성전환 수술을 하였다는 과거사는 최검사의 잠깐동아의 설명적, 논쟁적 어투로 흘러갔을 뿐 더 이상의 부연이 없어 관객이 ‘정하연은 어떻게 김영훈이 되었나’라는 인식을 제대로 박아주지 못하게 된다. 타 영화에서 보여주는 그 흔한 플래쉬백도 없는 상태에서 이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 생각 할 수 있다. 또한, 이 부분에 큰 비중을 싣지 않으려한 장진감독의 생각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느낄 수 있는 점은 이러한 부분을 쉽게 대사로 넘긴 것은 충분히 연극적 요소, 아니 탈 영화적이었다는 것이다. (장진 감독은 이 영화가 연극적이기보다는 탈영화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영화를 해석하는 데 있어 난점으로 작용하여 ‘정하연’에 대한 궁금증만이 커져갈 뿐이다.

 

또한, 많은 관객이 의심을 한 부분은 해당사건을 맡은 검사가 피해자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건을 해결할 담당검사는 어떤 사건을 맡을 때 시체확인과 동시에 법의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이 부분을 완벽히 배제하고 들어간다. 배제된 사실로 영화는 마지막 주자로 진실을 꺼내놓고 반전의 쾌락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박수칠때떠나라》가 살인시건을 다룬 타 영화와 드라마와 다른 점이 확연해진다. 대부분은 살인사건이란 결론적인 판정이 나오게 되면 그 살인사건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는지 혹은 범행 수법이나 피해자의 뒷 배경을 낱낱이 공개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현란한 카메라 기술과 CG의 도움을 받아 ‘살인사건’재현을 말한다. 그러나 이 《박수칠때떠나라》에서는 범행재현을 묘사하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김영훈’의 실체밝힌 방법처럼 대사들의 조합으로 유추가 가능할 뿐이다. 이 영화가 타 영화들과는 달리, 연극적인 면모가 보이는 것은 거의 플래쉬백없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리하게도 과거의 사건을 들여 볼 수 있는 방법으로 타인의 증언과 CCTV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CCTV카메라는 용의자를 잡기위한 도구로도 사용되나 동시에 플래쉬백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흐름은 24시간 숨가쁘게 진행되는 이 영화 속 TV 프로그램과 맞물려 시간의 압박을 받게 하기도 한다. 다행히도 관객이 궁금해 할 진실들은 이런 시도로 채워진다.

 

이에 반해,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동안 미스테리로 남는 부분은 매끈하지 못한 채 남아있다. 특히나 직접적으로 최검사가 정유정을 만나게 되는 판타지 씬은 그 자체를 감성으로 느껴야 하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그 중, 정유정이 다니던 회사에서 보았던 스토리보드가 최검사의 꿈속에 재현되어 두 인물이 만남을 가질 때 편집의 양을 늘려 짧아진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언뜻언뜻 들게 하였다. 또한, 모든 수사가 마무리 된 후 범죄 수사국 사무실이 그녀가 묵던 1207호로 치환되어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드러날 때 역시 당황스러웠다. 최검사 자체 캐릭터는 어떠한가. 물증으로 과학검사모습을 한 치밀한 캐릭터가 중반부터는 ‘정유정’의 혼과 조우를 하게 된다든지, 영적능력이 있다든지 하는 무당얘기를 듣게 되는데 어느 갈피에 맞춰야 할 지 몰랐다. 영화의 초반부터 그런 전제가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 후 캐릭터의 성향이 바뀌는 것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심히 불편했다. 판타지의 성향은 ‘굿’이 지난 후 더욱 짙어지는데 영화를 다 본 소감은 오프닝과 엔딩의 색이 판이하게 달랐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영화의 모더니즘과는 어울리지 않는 판타지의 시도는 현실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해 아쉬움이 더해졌다. 아주 조심스러운 분량이었지만, 우리는 벌써 과하게 먹어버렸다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현실과 판타지의 벌어진 틈은 생각보다 깊게 느껴졌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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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유디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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