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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I`m a cyborg, But that`s ok, 2006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4. 11:32

 

* 아래 첨언을 붙였으니, 이 글을 보기 전에 읽어보시길.

 

 

오늘 뉴스에 박찬욱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내년 베를린 경쟁 부분에 초청되었다고 나왔다.또 여기에 악플러들이 상당수 있겠지만, 제발 특정 분야를 욕할때는 제대로 알고나 말하라고 충고하고싶다. 그런의미에서 아래 첨언도 붙인것이고. 

 

내가 본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어떻냐면, 딱 한마디로 엄청나게 '반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기에 베를린 경쟁 부분에 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딱 들어맞는다. 사실, 박찬욱의 '심판'이후의 영화들은 모두 '정치적'이었으니까.여기서 '반정치'적이라는 것은 '정치'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을 명심하도록!그렇다면, 차근차근 보자.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도 계속 리플레이 하고싶다는 충동을 받았을 만큼, 너무나도 획기적이었다.어떤 점이 획기적이었는가? 연출의 구도가!박찬욱의 영화를 보면 언제나 느끼지만 처음 볼때의 '충돌'적 이미지는 정말 강렬하다. 우리는 그의 영화를 몇번씩 볼 때마다 이 충돌들이 곧 평범할 정도로 익숙해지는 것임을 잊지말아야한다.전 영화를 말해보자면 친절한 금자씨에서 폐교의 학부모 '얼굴'들의 충돌은 정말!! 이건 뭐, 클로즈업 충돌의 승리라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혼란스러웠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지극히도 포스트모더니즘적이었으며 이미지의 남발, 알레고리의 분산, 내러티브의 병렬에 있다고 본다.아, 또 하나 이 영화의 '시선'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추가된다.첫 시퀀스는 영화 메트로 폴리스 혹은 시티즌 독과같은 기계적 인간 영군(임수정)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 부분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구조적인 부분이 아니라 '정렬'의 상황에서 '혼란'을 담고있으니 관객들이 얼마나 심난한가 하는 문제다.실제로 이 시퀀스에 들리는 사운드를 크게 3개(라디오소리, 공장소리, 영군의 말소리)가 되는데, 우리는 도대체 영문을 모르고 영화를 지켜보게된다. (보는것도 아닌 지켜보는 행위)그리고 곧! 알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은 절대 당신의 '시점'에서 보지 말라는 것인데, 이를 알아야 영화가 즐겁다.영화는 크게 세 시점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훨씬 더 많이 갈라지긴한다. 어째뜬, 영군의 비정상적 시점, 일순의 비정상적 시점과 마스터 시점이다.마스터 시점은 관객의 정상적 시점과도 동일하기때문에 그나마 이 영화를 이해하기 수월하게 해준다.영군의 비정상적 시점은 관객 자체를 영군으로 동일화 하는 수밖에 없기에 이 차이점에서 상당히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자신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는 소녀, 자신의 할머니가 쥐 - 그것도 자신이 사이보그이기때문에 마우스로 나타내는 -, 또한 라디오를 신처럼 받들고 기계와 대화하는 점 들이 그러하다.일순은 알다시피 반사회적 인물로 남들의 특징을 뺏는 '기술'을 지닌 정신병자이며, 영화에서 몇부분에 걸쳐 '일순'의 시점숏이 강하게 드러난다.이러한 '시점'들은 영화가 어떤 부분을 지향하고있는가를 다시 말해주는데 '정상'과 '비정상'을 분류하게 된 산업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즉, 지배와 피지배에 대한 우화이며 동화적 캐릭터들로 '반정치'를 '탈정치'화로 드러낸다.이런 탈정치의 시 공간은 영화의 시 공간과 일치하며, '신세계정신병원'은 그야말로 떠도는 장소와도 같다. 그래서 '신세계 정신병원'을 반정치적 장소로 보여주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의사-환자로 구분되는 '정치적'장소의 대표적이기도 하다.그것도 '이해한다는 식의 웃음'과 '관용'의 가식이 있는 장소. 

 

영화는 이런 의사와 하얀맨이라는 지배적 인물들이 피지배층에 어떤 권력으로 행사하는 가를 아주 '착하게' 가르쳐 주는데, 이를테면 여의사가 행하는 가식적인 진찰, 치료 등이 피상적 진심성으로 보여진다.정말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다 안다는 듯의 그런 자비로움이, 실제 우리 삶의 지배층과도 닮아있지 않는가 반문해 보고싶다.이러한 지배층에 대한 반감은 '하얀맨'으로 특정지어지고 일순은 틀니를 빼놓고 외할머니를 끌고갔다는 것으로 계속적인 '복수'를 꿈꾼다. (이 영화가 '복수3부작'의 끝에있다 해도, 분명한 '복수'영화임은 확실하다.)여성의 몸이 남근적 형상과의 결합으로 탈 인간화될때 '핵'으로 전세계를 파멸할 수 있다는 잔인하면서도 귀여운 상상은 정말 박찬욱 감독만이 할 수 있다 생각될 정도다.어째뜬, 이런 지배층에게 일순은 '충전완료'와 함께 무자비한 총알 세례를 보낸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사이보그화 되기 위한 '망각'의 7단계인데, 인간이 인간화되기 위해 덕목을 지키는 것과 달리 사이보그화 되기위해 덕목을 지워야 함이 상당히 반 정치적인 성향과 근접하다는 것이다.마치 청소년기의 일탈과 반항을 그리듯 일순을 사이보그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모든 어른들에게 날리는 그런 죽음의 향락을.(틈틈히 보여지는 일순의 사이보그의 모습은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모티브로 삼았던 '최종병기그녀'와 가장 흡사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마케팅과 동일하게 짜여져있었다면 엄청난 실망을 했을 테지만, 그와 반대로 감독의 승리적 여유가 보였기에 좋았다.이 영화는 심판(1/2),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컷(1/2),  친절한 금자씨와 함께 놓는다면 5와 1/2쯤 되는 영화일 것이고, 나는 감독이 다음 작품 '박쥐'를 내놓기 전 어느 정도의 상상적 일탈을 말그대로 시각화 한 것 같다 생각한다.그렇기에 현재 최고주가인 두 남녀를 캐스팅 한 것이고, 흥행성과 함께 자신의 자유분방함을 보여주었다고.여기에 일반 관객들은 상당한 분노를 일으켰겠지만, 이 영화를 '완소'할 수 없는 이유중 하나가 일치된다.알레고리들이 분산되어있다는 점. 이것은 영화 속 캐릭터들의 상당부 존재하고 병렬적으로 나열되어있다는 것과도 연관되어있는데, 아마 이런생각이 들것이다.왜 저 캐릭터들이 저렇게 나와서 영화의 주요 스토리를 흐뜨러 뜨리는 거냐고, 하지만 묻고싶다.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아니겠냐고, 어떤 원형적 스토리는 소설에서도 충분히 보여질 수 있고 그것을 영상화 한다면 드라마에서까지 확장되어있다.그렇다면 우리는 영화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것인가.나는 이런 알레고리의 분산때문에 승리의 손을 살며시 낮게 잡아 줄 수 밖에 없지만. (왜냐면, 이 영화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은 것같다. 작품으로 이야기 하자면, 데이비드 린치와 장 르누와르의 사이랄까.)

  

그렇지만, 그러한 이유때문에 이 영화에 대해 여러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싶다.당신은 그래도 이 영화를 제대로 본 거라고.왜냐면, 우리는 너무나도 일편적 내러티브에 길들여져있고 그런 내러티브가 말하고자 하는 것만을 '보고 듣고 감동'하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서, 관객의 의무를 충실히 해야한다. 즉, 영화를 보고 주관적 비판을 해야한다는 점!이것이 가장 중요하다.제발 수동적 관객은 TV불상으로 족하다.현대 관객이 가져야 할 각각의 주체성과 비판의식, 그것이 현대 영화가 갖추어야 할 미덕이라 생각한다.

  

 

* 여전히 크레딧은 인물의 순서대로 드러나 있으며!오프닝 크레딧에 상당히 신경쓰는 모습이 사랑스럽고!성적 모티브를 놓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관객의 무의식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그리고 가장 '반정치적'캐릭터인 영군엄마!!정말 마음에 들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미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또한그녀의 순대작업실또한 지옥과도 같은 이미지다.), 또 그러함을 보여주기 위해 계속적인 헛소리에도 불구하고 일순을 '정신병원'에 쳐넣은 '지배자'이며 '외할머니'를 억압한 '지배자'이기 때문이다.고로, '지배자=미친캐릭터=바깥세상에서 잘만 먹고산다'의 일치는 정말이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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