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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밀양]나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7. 16:52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고 재밌다고 쓰기도 점점 버거워진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쩌면 그 생각의 내면에는 단지 그 작품이 "재밌다."라는 내 순수한 의지 외에 누군가 내 글을 읽고 동감해 주길 바라는, 어쩌면 작품보다 내 글로 동감을 넘어서 감동해 주길 바라는 이기적인 욕심이 뒤섞여 있는 최소한의 죄책감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보다도, 나의 생각과 지식의 깊이는 내가 잘 알고 있으므로, 그것이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 당연히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곧잘, 나를 잘 속이곤 한다. "넌, 그냥 좋아서 이짓을 하고 있는거야."

 

 

사람은, 그 어떤 타인보다도 스스로를 잘 속여 먹는다. "나"라는 자아를 스스로 속이는 순간, 자아는 너무도 절친한 "타인"이 되어 내곁에 머무른다. <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남편의 외도로 아들과 함께 남편에게 버림 받았음에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믿지 않으며, 남편의 죽음 이후에 언제나 남편이 머무르고 싶다는 "밀양"을 기어코 찾아가 아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남편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그의 고향 밀양에서 아들과 함께 사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였던 것이다. 그녀 스스로 만들어낸 "아름다운 모습의 자아"는 사회에서 인정받고 칭찬듣고 싶어하는 또다른 타인이다.

또한, 그녀는 부족한 능력으로도 <피아노 교습소>를 열고, 얼마 없는 통장 잔액은 무시한채 땅을 사겠다고 동네에 소문을 낸다. 이러한 일련의 그녀의 행동들은 실제의 자아는 자기도 모르게 부정하고, 자신을 알지 못하는 낯선 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나"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녀의 헛된 이미지 메이킹은 결국 아들을 죽게 만들고, 믿을 수 없는 상황앞에서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과연 이것이 현실일까? 정말, 이 일들이 내게 닥친 일들일까? 이건... 정말, 무슨 일일까?

 

그녀의 상황들을 "불행"이라 결론 짓고,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집사님의 권유에 지푸라기 잡듯 찾아간 개척교회 부흥회. 목구멍에 돌덩이를 게워내듯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앞에 목사님은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짚어주신다. 그리고, 그녀는 독실한 "신자"가 된다. "불행했던" 지난 날들은 그분의 사랑으로 치유되고 지금은 행복하노라고, 그분과 항상 연애하는 심정이라며 매일을 찬양과 기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마비시킨다. 그녀에게 "종교"는 치유의 대상이 아닌, 환각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스럽고 아픈 자아는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영접하여 "행복하다"는 그녀의 당당한 미소는, 그래서 그녀에게 타인의 미소일 수 밖에 없다.

그녀의 진짜 웃음이 아닌, 그녀의 진짜 행복이 아닌 "또 다른 그녀"는 또한번의 "훌륭한" 일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해한 범인을 찾아가 직접 용서해 주기로 마음 먹는다. 그러나, 그가 자신 또한 하나님을 영접했으며, 모든 죄를 그분께서 용서해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그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을 범죄자에게도 똑같이 찾아오신 "상황"에 절규하며 분노하기 시작한다.

울분과 분노로 하나님에게 대항하고자 했던 신애는 결국, 자살을 시도한다.

 

 

 

 

영화에 대한 내 감정을 이야기 하기 전에 나는 감히 이 영화를 대한민국의 대안적 종교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써놓고 무섭다;;)

이창동 감독은 나를 스스로 속여가며 사는 한 여인과, 전혀 그녀의 아픔을 "알지" 못하면서도 제 감정에 정직하여 늘 그녀의 곁에 머무는 한 남자를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의 통속적인 관념에 대한 문제와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예리하게 관통해 나아간다.

드넓은 푸른 하늘을 전부 보길 거부하고, 이 영화가 처음 시작하는 도입부 씬의 차유리만큼만 보여지는 하늘이 전부라고 믿고 싶어하는 우리의 삶이 가지는 모순들.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쏟아지는 햇빛을 가리면 하늘과 햇빛은 없는거라고 믿는 우리네 삶.

하지만, 하늘은 내 손으로 가린다고 가리워 지는 것이 아니고, 햇빛은 손으로 덮어도 늘 새어나오기 마련이다.

 

예수를 영접하고 내 삶이 달라졌다고 남들 앞에서 웃었던 신애도 홀로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먹는 밥상에 울컥 눈물이 나며, 피아노 학원 어린이의 오줌 누는 소리에 아들이 돌아온 줄 알고 놀라는 사람이다. (나는, 여기서 그녀의 고통이 너무 강하게 전해져와 꺽꺽대며 울었었다;;) 이게 사람이다. 사람은 맞으면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울수 있다. 남들에게 "불행한 여자"라는 말이 두려워 스스로를 잊어버렸던 그녀는, 그녀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의 마비를 "거듭났다"고 "칭찬해 주었던" 교회는 이 영화에서 우스개거리가 된다.

그러나, 나는 밀양의 교회가 하나도 우스워 보이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도 성실하게 교회와 이웃을 봉사하려는 "신자"로 보여졌었다. (한국 교회의  "신자"는 교회조직을 믿고, 담임목사 혹은 당회장이라 불리우는 이들이 '말씀'하시는 예수를 믿는다. 내가 만난 예수, 내 안의 예수는... 글쎄. 모르겠다. 이들 또한 자신들이 틀 지어놓은 창문의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지도. 그 부류에 나도 들어가고;;;) 나도 기독교인이지만, 이 영화에서 이창동 감독은 <교회>를 솔직하게 미화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교회는 아프면 아프다고 고통스러워 하며, 욕하고, 증오하며 울분을 토하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솔직한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의 소모 뒤에, 인간은 자신을 뒤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그 이후에 발현된다. 남이 (혹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를 걱정 하기보다, 내가 나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 죄책감이라는 감정은 분명,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일테니 말이다.

 

분명, 하늘은 손바닥으로 가리워 지지 않는다. 정신병원을 퇴원하던 그 날, 신애의 머리를 잘라주려는 미용사의 눈물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사해졌다고 평화로워 하던 죄많은 아비를 대신했던 참회의 눈물이었다. 죄는 결코, 숨기워지지 않았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내던 신애의 마지막 모습. 스스로에게 타인이었던 자신을 그렇게, 스스로 잘라낼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난 이 영화가 굉장히 "희망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이 그녀가 스스로 끊으려 했던 자신의 목숨을 추하게 구걸하여 다시 살 수 있게 해주었던 것도 감사했고, 끝까지 범인의 딸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던 것도, 그럼에도 하늘과 같은 색의 원피스를 입고 스스로 머리를 자르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에서, 난... 변하지 않는 인간의, 추한 모습이야말로 희망이지 않을까.. 라는 어이없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 이 영화가 또 희망적이라고 느껴졌던 이유는 김종찬, 바로 이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그녀의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는, 그녀가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응급실에 쓰러져 있을 때 조차도 여자의 향을 맡고싶어 했던 그는, 그녀가 신자가 되어도, 그녀가 악마가 되어도, 그녀가 정신병자가 되어도 끝까지 그에게 "이신애"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여자"이므로. 그 불변의 진리 하나로, 그는 끝까지 그녀의 곁을 지킬 수 있었다.

그의 사랑은, 그렇게 자신에게 "여자"인 그녀에 대한 솔직한 감정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드는가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가... 마음으로 와닿는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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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공(空)'s FREEview
글쓴이 : 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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