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부 교수이며, 언어학자인 유대인 사울 나우먼은 딸 엘리자가 단어 맞추기에 특별한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딸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는 "언어"를 형성하고 있는 철자 하나하나는 세계의 유구한 역사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 안에 내재된 언어의 힘을 영혼으로 깨닫는 자는 하나님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 유대교 신비주의(카발라)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딸인 엘리자가 암기로 인한 노력에 의해 철자를 맞추는것이 아닌,
단어의 모든 기원으로부터 오는 기운을 받아 단어를 느끼는;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되고 난 후부터, 그는 점점 자신의 모든 기대와 염원을 딸아이에게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그는 딸아이의 재능을 파악하기 이전부터도 아내 미리암과 아들 아론에게 매우 친절하지만,
무의식중에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장의 존재로써 군림하는, 한 가정의 소리없는 독재자였습니다.
어린시절, 자신의 눈 앞에서 교통사고로 인해 산산히 부서진 차창 유리조각 틈새로 죽어가는 부모를 지켜보았던 미리암의 상처를 모른채, 그는 그녀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완벽한 형상(또는 질그릇?)을 산산히 조각내어 깨놓으셨다.
우리 인간은 그 부서진 조각들을 찾아내어 다시 형상을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깨어진 조각조각들마다 하나님께서는 희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깨어진 유리조각같은 상처와 남편의 깨어진 하나님의 희망 사이에서
그녀는 남편을 향한 강한 강박증, 내지는 열등감을 실제로 형상화 하기 시작합니다.
반짝이며, 빛에 반사되는 모든 보석과 유리, 크리스탈등을 수집하여, 또는 훔쳐서라도
그녀는 자신의 은밀한 공간에 깨어진 빛들을 한없이 모아두는 행동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그녀의 강박증은, 그녀의 딸 엘리자가 철자경연대회에서 천재성을 발할수록,
더욱 심해져서, 결국에는 정신병원으로 장기입원을 하게 되는 사태로 치닫게 되죠.
사울의 아들 아론은 사회적으로나 가정에서나 언제나 모범이 되는 아버지 사울을 깊이 존경하며
그에게 인정받는 것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한몸에 받았던 아버지의 사랑을 동생 엘리자에게 모두 빼앗김으로써
그는 아버지를 향한 강한 부러움과 열등감을 다른 방향으로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언어를 통해, 신과 직접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아버지의 형이상학적 이상향을 동경한 나머지, 아버지와 다른 방법을 찾아서라도 아버지가 원하는 이상에 다다르려는 그의 의지는 스스로를 이단종교에 심취하게 만든 것입니다.
치열한 고뇌와 굳건한 신앙이 필요없는 피지컬한 이단종교는 그를 그 공간 안에서만큼은
충분히 행복하게 했습니다.
결국,
사울은 그의 딸 엘리자에게 언어를 통해 신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전수하게 되고
전국단어경연대회에 출전하기 전날, 엘리자는 홀로 경연장 무대를 찾아 카메라 위치를 확인한 이후
스스로 그 무서운 경험을 체험하게 됩니다.
신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경험한 것이죠.
그녀의 작은 몸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그녀의 내부는 마치 조각난 빛망원경처럼 조각조각 나뉘어 해체되어 정신을 놓아버리지만, 다음날 아침. 그녀는 미국 전역으로 방송까지 되어 퍼져나가는 경연대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드디어 한 단어만 맞추면 승리하는 그 상황 속에서
작은 소녀 엘리자는 단어가 부르는 철자도, 그 전날 이미 연습한 단어임을 알고 승리의 미소를 만면에 짓고 있는 아버지를 외면하며. 오로지 TV 카메라만을 바라봅니다.
정신병원에서 그 프로를 지켜보고 있을 엄마를 위해.
승리를 놓치고, 가족을 선택한 소녀의 뒷모습을 통해
병원에서 눈물 흘리며 웃는 엄마 미리암의 마지막 대사에서
가족사이에서의 갈등이 해소됨을 암시합니다.
"저 아이가 제 딸이예요."
성서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6일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두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또한, 영화 <반지의 제왕>3부에서 아라곤이 자신의 아버지가 "말"로 저주를 씌운 원령들을 그의 "말"로 용서함으로써 든든한 원령의 지원군을 얻게 되지요.
우리 속담에도 "말"로 인한 많은 속담들이 있습니다.^^
말의 힘, 다시 말하면 언어의 힘은 어쩌면 인간이 생존하기 시작한 이래 사울(리쳐드기어)의 말대로
유구한 역사와 인간 생존의 의미를 함축함으로, 그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절대자인 하나님과의 직접적 소통도 가능한, 초능력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인 사울은 "언어"의 실체에만 집착했을 뿐,
정작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 소통은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하나 남부러울 것 없는 4인 가족이 겨우 딸아이 하나의 천재성을 기뻐하며, 그의 재능에 욕심부리는 아버지의 편애에 이렇게도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이유는
결국, 처음부터 이 가족에게는 소통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싶네요.
서로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며, 동경이 대상이 될지언정,
갇힌 각자의 마음들은 동경의 대상인 아버지, 혹은 남편의 애정이 한쪽으로 기울때
엄청난 열등감으로 증폭되어짐을, 영화는 아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내 미리암, 아들 아론, 그리고 천재소녀 엘리자까지
이들은 다른 형태로 강박증적인 행동을 하지만, 결국 그 목적은 하나였던 것입니다.
사울의 원대하고도 높은 "이상"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을 엘리자가 전국대회에서 1등을 놓침으로써, 스스로 깨뜨리게 되고
결국, 아버지 사울이 누누히 강의한 내용처럼 깨뜨린 조각들 속에서 네명의 가족들은 희망이란 것을 찾게 되는군요.
가족의 소통부재,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거는 무거운 대리만족 등
중산층 가족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가족문제를 철학적이고도, 사색적으로 풀어낸
<다섯번째 계절>,
우리나라에서 2월에 개봉되었다가 조용히;; 사라진 작품이긴 하지만
정말 네러티브와 심리묘사가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스릴러적인 요소로 인해 한순간도 긴장이 늦추어지지 않는 보기드문 수작인듯 하네요.
게다가, 정말... 영화가 시작되는 오프닝부분은 압권입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또한, 엘리자가 단어를 맞출때마다 온 우주의 기운이 그녀를 향해 단어 철자를 느끼게 해주는 기운을 연상시키는 컴퓨터그래픽 장면은.. 진짜 환타스틱합니다.ㅠㅠ
리쳐드 기어와 줄리엣 비노쉬의 빛나는 연기,
그리고 천재소녀 엘리자를 묘하고 분위기 있게 연기했던 (단 한번도 웃지 않았던;) 플로라 크로스의 만남도 기대 이상입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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