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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경해석학 - 제6장 문자적 해석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12. 10:47

제 6 장 문자적 해석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 연구의 가장 깊은 진전(進展)은 성경을 ‘문자적 의미’(sensus literalis)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원칙의 확립이다. 루터는 문자적 해석원칙을 중세교회의 사중적(문자적, 도덕적, 알레고리적, 종말적)의미 해석보다 탁월한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문자적 해석원칙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성경 본문에 대한 직역주의(直譯主義)를 택하였다. 해석자가 본문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등장하는 각 품사(品詞)의 용어가 출현한 역사적 상황과 그 용어 자체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문자적’이란 말은 문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litera’에서 왔다. 어떤 용어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문자’(litera)로서 사용된 문자와 단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문학’(literature)으로서 문법과 구문과 문맥의 일반적인 규칙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유일하게 성령의 감동을 받은 매우 특별한 책이다. 그러나 성경구절의 단어나 문장의 문자들이 어떤 신비한 구절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영감하에서도 명사는 명사이고, 동사는 여전히 동사이며, 의문문이 감탄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역사적 사건이 우화(寓話,an allegory)가 되는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문자적 해석의 원칙은 텍스트에 대한 가장 꼼꼼한 문학적 연구를 요구한다.


1. 종교개혁이전의 시각


성경해석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경의 해석방향의 여하에 따라 역사적으로 교회의 진로는 크게 좌우되었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는 전통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였고, 해석 전통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전수했다. 루터가 문자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며 가톨릭의 교훈에 대적했을 때, 로마가톨릭 교회는 루터의 성경해석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는 ‘성경의 비밀’이라는 교리 하에 성도 개인의 성경해석권을 절대 허용치 않았다. 그들에게는 성경 해석의 최종권한이 교황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개혁교회는 각 개인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가르쳤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석하며, 해석된 것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결정의 근거를 성경 아래 두어서 종교개혁 이전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 종교개혁자들이 특히 반대한 것은 구약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과 로마가톨릭의 알레고리 해석 위에 자신들의 교리를 강화시킨 것이었다. ‘문자적’이라는 말은 ‘알레고리적’ 이라는 말에 직접적으로 배치된다. 언어의 영적, 신비적, 알레고리적 그리고 은유적 사용은 문자가 지지는 고유의미 외에 일종의 불필요하게 쌓여진 층들일 수 있다.


개혁교회의 문자적 해석 관점은 십자군 전쟁(A.D.1096-1254, 제7차에 걸쳐 로마가톨릭교회가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코자 일으킨 전쟁으로 A.D.1291년 이후 예루살렘은 완전히 회교도의 소유가 됨)과 르네상스(Renaissance, ‘재생’, ‘부활’의 뜻을 지닌 낱말로서 14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여 전 유럽에 퍼진 예술과 학문의 혁신 운동)의 시발로 13세기 말부터 세워진 대학들의 학문적 기준과 과정에서 형성된 학문적 원리들로부터 태동되었다. 성경 본문의 문자적 해석은 인문주의에 영향을 받은 문헌학(文獻學)의 학문적 기초 위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인문주의적 영향은 종교개혁자들로 하여금 중세 천 년간 서방 기독교의 성경이었던 라틴 벌게이트 역에서부터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원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성경 해석을 위한 문헌학적 정신은 본문의 원래 의미와 의도를 발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 가장 견고해진다. 문자적 해석 목적은 주해(exegesis : 본문에서 그 의미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이지 본문에 어떤 생소한 의미를 밖에서 본문 안으로 집어넣는 일(eisogesis)이 아니다. 루터는 성경해석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장 훌륭한 선생은 그가 생각하는 뜻을 성경에 집어넣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의미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사람이다.’


 칼빈도 이와 같은 견해에 동조하며 ‘성경은 해석자가 이리저리 치고받을 수 있는 공과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자적 해석원칙 하에 저축된 칼빈의 주석들은 교회사에 있어서 최초로 과학적이고 문헌학적인 주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고직식한 문자주의’(wooden literalism)나 말 그대로의 ‘축자주의’(verbalism)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문자적 해석은 한 본문에 대하여 원어연구, 단어의 기원, 문장의 역사적 배경, 문법적 구조등 해석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본문의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 관점에는 본문의 통상적(通常的), 일반적(一般的), 관습적(慣習的), 그리고 전통적(傳統的) 교리의 범위 안에서 이해하는 사고의 출발점이 요구된다. 문자적 의미는 성경의 어느 곳에서든지 본문의 단어들이 나타내는 의미이다. 어떠한 인위적인 수사적(修辭的) 표현이나 은유(隱喩) 그리고 신비적(神秘的) 의미로부터 이끌어낸 유추(類推,analogical inference)는 정상적인 자연스러움과 적절함을 저해(沮害)한다.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노예적(奴隸的) 문자주의(文字主義)를 배척하였다.

2. 문자적 해석원칙의 긍정적 견해


성경의 문자적 해석원칙은 어떻게 옹호될 수 있는가?


첫째, 문자적 해석 접근은 성경이 아닌 일반적인 문헌의 해석에 있어서도 가장 보편화된 방식이다.


현대문학에는 많은 장르(genre)가 있지만 각 장르마다 표현의 일차적인 수단은 단어와 문구와 구절과 문장의 문자적 문법 원칙을 따르고 있다. 각 문헌의 문학적 장르는 독자로 하여금 다른 차원으로 이끌기 전에 우선적으로 문자적 의미를 깨닫게 한다. 문자적 의미가 아닌 다른 차원의 의미들은 언제나 문자적 의미가 먼저 있다는 것을 전제(前提)한다. 어떠한 문학 장르는 문자적 의미 이면에 의도적으로 신비적, 알레고리적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有限)한 지혜(智慧)를 아시는 하나님은 분명히 상식적(常識的)인 인간의 언어로 듣는 자와 말하는 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음에 틀림없다.


둘째, 모든 부차적인 의미들은 일차적인 문자적 의미 층에 우선 의존한다.


비유, 모형, 알레고리, 상징, 수사학적 표현, 신화 그리고 우화 등은 자체적인 의미 층이 형성되기 전에 어떤 문자적인 의미 층이 이미 있음을 전제한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아브라함, 사라, 하갈, 이삭, 그리고 이스마엘에 대한 모형론적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이러한 인물들에 관하여 이미 문자적인 의미층을 반영하는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다. 이외에도 고린도전서 10장의 홍해 세례나 히브리서에 언급되는 성막, 제사장, 멜기세덱에 대한 모형적, 상징적, 알레고리적 해석은 문자로 기록된 하나님의 의도된 역사적 사건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셋째, 최우선적인 문자적 해석은 성경의 주해적 남용과 오용을 예방할 수 있다.


성경의 다중적 의미를 찾는 식의 해석으로서, 모든 알레고리 방식은 성경에 없거나 비성경적인 생각들을 성경의 가르침 속에 집어넣는 관행(慣行)의 근저(根柢)를 이루고 있다. 성경의 알레고리 해석역사는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 의미를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무시한 역사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에 있어 문자적 해석은 ‘육적’(physical) 또는 ‘피상적’(superficial) 성경 이해로 간주되었다. 중세시대 교부들은 구약에서 교회의 교리를 찾아내기 위해 알레고리를 무절제하게 사용하였다. 그들은 성례전과 교회 내 계급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도 몇 가지 형태의 알레고리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수세기에 걸쳐 복음서의 비유들은 적절하게 해석되지 못했다. 성경의 의미를 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자적 해석으로서 본문을 주해하여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비성경적 생각을 차단하는 것이다. 문자적 해석은 축자주의나 알레고리에 대한 유일한 대책이며 성경의 바른 해석을 지켜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보호 울타리이다.


문자적 해석의 우선 원칙에 대하여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원칙이라 해서 성경에 기록된 언어의 수사학적 표현, 상징, 모형, 알레고리를 전혀 배척해서는 안 된다.


문자적 해석은 눈먼 축자주의나 고지식한 문자주의에 빠지는 것도 지양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나. 축자영감설(verbal inspiration)을 믿는 믿음에 의한 해석이 축자주의나 고지식한 문자주의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축자영감설에 의한 해석 원칙도 예언서의 경우-특히, 요한계시록-완전히 문자적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성경에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본문이 상당히 많이 산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성경 본문도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음에 틀림없다.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기원에 관한 이론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해석학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결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축자영감설과 문자적 해석 원칙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정통적이라 할 수 없다. 문자적 해석이라 해서 축자적 의미만 캐내는 것은 순수한 의도처럼 보이지만 보수적인 것도 아니며 어리석인 태도라 할 수 있다.


다. 해석학에 대한 이론 중 성경의 중심을 벗어나게 하는 매우 고도화된 이론은 배척되어야 한다.


철학에 관한 언어이론 중 분석철학(Wittenstein, Carnap, Feigl, Ayer등)과 Tillich의 상징이론, Ramsey의 신학의 언어이론. 하이데거로부터 오는 언어의 실존론적 이해와 이론은 깊게 재검토 하여야 한다. 그중 하이데거의 언어의 실존론적 이해와 당해 이론의 바탕 위에 전개한 불트만의 신해석학파의 해석은 정통보수신학의 성경해석에 도전과 함께  많은 해석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3. 문자적 해석의 일반원칙


1) 문맥에 따른 이해


성경해석의 생명은 문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문맥을 따라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예수께서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죄성이나 원죄를 부정하신 것인가? 본문에서 문맥이나 교리적인 선험적(先驗的) 전제가 없다면,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 나타난 질문 자체는 바로 앞에 나타나있다. 그것은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까 그 부모오니까”라는 것이다. 만약 제자들이 ‘이 사람이 죄인입니까?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였다면, 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죄인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제자들의 질문은 “소경으로 태어난” 이 특수한 상황이 “죄 때문입니까?”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이 상황이 꼭 죄와 관련된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고전10:23)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고린도교회에 가르치려고 우상의 제물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을 하고 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지만 반드시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에서 “모든 것이 가하다”라는 말씀은 문맥(文脈, the context of a passage)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인들의 ‘무율법주의적 행동 원리’를 주장하는 우스꽝스런 해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본문의 ‘모든 것’을 고린도전서 10장 전체의 문맥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문맥으로서 고린도전서 10:6은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또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0:11 상반 절에서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偶像崇拜)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절대 피해야 할 죄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본문은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가난해도 이 말씀을 믿는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해석으로 결론지어질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어떤 병중에 있거나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는 경우, 말씀의 주인되시는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신뢰(信賴)하면 치유(治癒)되거나 소원(所願)이 성취(成就)된다는 해석으로도 결론지어질 수 없다. 해석자는 빌립보서 4:13 전에 12절 그 전에 11절, 그 전에 10절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바로 앞 구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중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자족의 교훈’임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한 중심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신실함을 가장한 맹목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비천과 풍부와 배부를 때와 배고플 때를 막론하고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그 가운데서 자족의 교훈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어떤 삶 속에서든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승리할 수 있다는 증언인 것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감정으로부터 난 인위적(人爲的)인 믿음을 통하여 소위 불가능이 없다는 식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재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창4:3-5)


이 본문은 많은 해석자들의 해석처럼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신 가장 큰 이유가 아벨의 제사가 피의 제사에 있었기 때문’임을 가리키지 않는다. 창세기 3장과 4장의 주변 문맥을 살펴보면, 그 때까지 피의 제사가 공식적인 제사제도로서 확립된 문자적인 근거가 없으며, 창세기 3장에서도 명백하게 피의 제사만이 유일한 유효제사라는 언급이 없다. 하나님은 레위기의 제사제도에 있어서도 피의 제사 외에 곡물(穀物)의 제사도 열납하셨다. 그러나 해석자가 피 흘림의 제사만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는 자기전제와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경우, 그러한 전제와 원칙만을 통해서 해석하려고 하므로 자신의 해석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해석자가 이러한 전제를 버리고 창세기 4장을 객관적(客觀的)으로 접근한다면, 본문의 문맥 속에서 아벨의 열납된 제사의 사유를 찾아낼 수 있다. 본문 4절의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에서 가인의 제사와 대조되는 것은 첫 번째 것인 “첫 새끼”와 그 당시 제사에서 가장 좋은 것인 “기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4:4과 관련구절인 히브리서 11:4를 연계하여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첫 번째 것과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고전15:29)


본문은 신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 중의 하나이다. 본문의 적절한 해석은 가장 최근의 성서 신학자들의 발견과 증언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로마를 중심으로 한 문화권(文化圈)은 이방종교를 믿던 사람들과 섞여져 있었다. 이방종교 신봉자(信奉者)들 중에는 자기 친척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죽었을 때, 그들을 대신하여 기독교인들의 세례 또는 침례와 비슷한 의식을 습관적으로 행하는 이들이 있었다.


본문의 다음 절은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주고 맹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0-31)”라고 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저희를” 위하여 받는 세례라고 하였으나 다음절에서는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저희가 죽은 자를 위하여 받는 세례가 반드시 기독교의 세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문이 속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 전체는 기독교인의 부활의 소망을 담고 있는 장이다. 바울은 ‘이방종교 신봉자들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의식을 행하는 광경을 보고 만약 그들이 죽음 이후에 대한 기대가 없다면 왜 그런 의식을 행하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서 고린도전서 15:30은 ‘어찌하여 우리는 때마다 날마다 많은 위험을 무릎쓰고 이 신앙을 지키는가? 그것은 죽더라도 죽은 이후에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담대한 것이 아닌가?’라는 역설적(逆說的) 표현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 희망이 있기에 바울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문맥은 그 흐름 속에 성경 자체에서 해석을 해 주고 있다. 또한, 문맥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난해(難解)한 구절들에 대한 이해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본문의 앞과 뒤에 있는 직접적 문맥과 동일한 책 속에 전개되는 평행적인 기사의 사상 전개의 목적, 동일 저자 또는 다른 저자들에 의해 쓰여진 평행기사들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그러나 문맥으로만 가능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성경의 잠언서나 전도서나 산상수훈 등은 문맥과 상관없이 편집되어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어휘에 따른 이해


성경본문은 수많은 단어인 역사적 어휘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해석자는 성경 속에 사용된 어휘의 뜻과 문법적인 구조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히브리어와 신약의 코이네 헬라어를 배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 독일어 등은 고도의 굴절어(inflected language)이다. 그러므로 이들 언어에서는 시제, 법, 태, 인칭 그리고 수 등은 그 사용형태에 영향을 미쳐 다양하게 해석된다. 히브리어 명사는 헬라어 명사처럼 빈번하게 변하지는 않지만 그 변화에 따라 의미의 전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히브리어 동사 체계는 아주 복잡하여 숙달하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들 언어의 숙달엔 반드시 문법서와 어휘사전과 성구사전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여 위하여 검증된 성경 주석이 필요하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신약성경은 아람어-예수께서는 원래 아람어로 말씀하셨다-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에 구성된 어휘는 그 당시 그 시대의 삶의 정황과 그 이전 시대의 삶의 정황에 근거된다. 나아가 계시의 창조성은 이미 사용된 어휘보다 더욱 깊은 의미와 통찰력을 요구한다. 그 한 예로 “의”(righteousness)의 경우, 70인 역에서는 명사, 형용사, 동사의 용법에서 어떤 한정된 의미를 갖지만 신약성경의 문맥에서는 같은 어휘에서도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고스’(logos)와 ‘레마’(rema)라는 헬라어 단어는 종종 “말씀”으로 번역된다. 예수께서 생명의 말씀 “로고스”로 불리는 요한복음 1:1-18의 로고스 용법은 “선포하는 것”(speaking)을 의미하는 에베소서 6:19의 로고스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같은 번역된 ‘말씀’에 있어서도 베드로전서 1:23에서는 ‘logos’가 사용되었지만 같은 성경 1:25에서는 ‘rema’가 사용되었다. 이들 문맥 속에서 양 단어는 ‘메시지’ 즉 기독교적 메시지로서 복음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메시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거듭나고(벧전1:23), 세세토록 있는 주의 메시지인 복음(벧전1:25)으로 받는다. 이처럼 성경의 어휘는 다양하게 적용되었다. 그렇다면 해석자는 어떠한 원리로서 어휘를 해석해야 하는가?


․ 그 어휘가 사용된 당대의 당해 어휘에 대한 모든 가능한 의미를 파악할 것

․ 어떤 의미가 기록자의 의도에 가장 적합한지를 결정할 것

․ 해석자가 성경 문맥 속에 무의식적인 자신의 개념을 가미하지 말고 기록자 시대의 삶의 정황을 세심하게 고려할 것

․ 현재의 용법과 다른 어원적 표현들에 유의할 것

․ 본문의 문맥 중에서 지지받지 못하는 동의어의 세밀한 의미 구분을 삼갈 것

․ 다른 단어이지만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없는가 살필 것

(예 :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단어이지만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 마18:9;막9:47)

․ 같은 단어이지만 다른 의미를 가진 것은 없는가 살필 것

(예 : 구원파에 속한 자들은 구원과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으로 붉은색은 인간의 죄를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조직신학에 의한 교리로서 영적인 구원이 있는 한편 행27:20의 경우, 단순한 구조적 의미의 구원을 가리키고 있다. 엡6:9의 ‘공갈을 그치라’의 경우, ‘공갈’은 당시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지만 오늘날은 의미가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3) 문법에 따른 이해


혹자는 성경해석자가 언어학자는 아니므로 문법에 너무 깊이 매달리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해석자는 원문과 원어사전을 자주 참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본문의 각 단어는 독립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다른 단어와 결합하여 그 뜻을 밝혀주고 있다. 번역(飜譯) 성경(聖經)에서 조차도 각 단어를 연결하는 문법의 법칙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는다면 원만(圓滿)한 해석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11:27)


본문에서 ‘합당치 않게’라는 말은 ‘누구든지’에 걸리는가 ‘먹고 마시는’ 데에 걸리는가? 대부분의 해석자는 ‘누구든지’에 연결함으로써 ‘합당치 못한 사람은 성찬(聖餐)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합당하지 않다고 느끼므로 성찬을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합당치 않게’라는 부사구는 ‘먹고 마시는’ 동사에 걸리는 것이지 ‘누구든지’라는 명사를 수식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합당한 해석은 의식적으로 죄를 붙잡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도 자신을 합당치 않다고 판단하여 성찬에 참여(參與)하기를 주저(躊躇)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성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보혈의 공로를 믿는 신앙에 근거한다. 본문은 영적 분간과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경외심도 없이 물질적인 음식으로 간주하는 경망스러움을 경계하는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문법은 성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문법에 어긋나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해석자는 인간의 언어가 가지는 가장 일반적인 문법 원칙에 따라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문법이 실제의 의미를 밝혀주지 못할 수도 있음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성경을 문법에 따라 이해하려면 어떠한 원칙에 유의하여야 하는가?


첫째, 어휘의 순서는 매우 중요한 해석의 열쇠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구문의 경우, 주어부와 서술부의 순서를 뒤바꾸어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전혀 다른 뜻이 된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긴 하지만 사랑 그 자체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둘째, 단어들을 여러 다른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교착어(agglutinative language) 또는 종합적 언어(synthetic language)는 문장의 의미 전달에 있어 어순 보다는 단어나 격(格)의 어미들에 의존한다. 모든 언어는 어형변화(inflection)로서 다양한 의미를 전달한다. 어형변화는 접두사, 접미사가 붙거나 어간의 변화로서 단어의 특별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변형들을 통해 각 어휘는 남성형과 여성형, 현재시제와 과거시제, 단수형과 복수형을 나타낸다. ‘마귀’(diablos, devil)나 ‘사탄’(satan)은 단수이지만 ‘귀신’(daimonion, demons)들은 복수이다. ‘걷는다’는 현재이지만 걸었다는 과거이다. ‘격변화’(decline)는 형용사나 명사의 어형 변화를 자칭한다. ‘제자’는 단수이고 ‘제자들’은 복수이며, ‘그녀는’은 주격이나 ‘그녀를’은 목적격이다.


이처럼 어형(語形) 변화는 매우 복잡한 형태로 일어난다. 이는 한 단어가 여러 종류의 변형을 통해 많은 의미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즉 문법이나 구문법칙이 아주 복잡해지는 것이다. 헬라어는 성(남성, 여성, 중성)과 수(단수, 복수)와 격 변화(주격, 소유격, 여격, 목적격, 호격)가 다양한 종합적 언어이다. 이러므로 해석자는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근본적인 언어구조를 이해한 다음에야 본문의 각 단어를 대할 때 원래의 의미에 가까운 해석의 감을 잡을 수 있다. 그 예로서 헬라어에서 분사는 그 문법적 용도에 따라 형용사적, 동사적으로 사용된 수 있다. 또한, 분사는 동사적 용법으로 인하여 목적격, 남성, 단수, 현재, 능동태, 분사 등으로 분해될 수 있다. 성과 수와 격은 명사나 형용사에 적용되는 어형변화이고, 시제와 태와 분사는 동사에 적용되는 어형변화들이다.


(1) 동사와 시제


동사는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므로 본문의 해석에 대단히 중요하다.


▶ 과거시제


과거시제는 과거에 단회적으로 발생한 것을 가리킨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본문에서 계명인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땐 자신이 살았었지만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sim sprang to life and I died)고 말한다. 또한, 과거시제는 반복이나 습관적인 행위 등이 여러 번 일어난 것을 뜻하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 같고 생각하는 것이 …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본문은 ‘내가 어렸을 때(when I was child)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았고(I talked like a child),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고(I thought like a child),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I reasoned like a child)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야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 현재시제


현재시제는 시간에 제한 없이 일반적인 진리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God is spirit)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영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계속해서 가지고 계심을 의미한다. 현재시제는 영구적인 진리(눅12:54)나 계속적이고 습관적인 것(마23:13)을 나타낼 때도 있다. 때로는 가까운 장래의 일을 표현하기도 한다<예: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the Passover is two days away), 마26:2>.


▶ 미래시제


미래시제는 곧 또는 먼 장래에 일어날 일을 나타낸다. “내가 다시 와서(I will come back)”(요14:3)은 미래시제이면서 명령을 뜻한다. “살인치 말라”(You shall not murder,출30:13)는 구약을 인용한 미래의 형식이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구약의 예언은 시제상의 주의를 요한다. 장래에 관한 예언은 거의 미래시제로 되어 있지만 과거시제로 사용된 ‘예언적 과거’가 있다.


예언적 과거는 반드시 성취될 확정된 사건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이사야 53장의 본문은 거의 다 과거시제로 기록되어 있지만<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Who has believed our massage…)사51:1>, 실상은 그리스도의 미래사역을 말한 것이다. 유대인에게 전하는 복음서인 마태복음 8:16-17의 본문은 이사야 53:4의 예언을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과거시제로서 예언이 수 백 년 후에 성취되었음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의 예언은 과거시제로서 미래에 관한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시편 22편의 본문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서의 죽음을 예언하였지만 대부분 현재시제로 표현하였다(시22:8;요19:23-24). 이것은 성경의 시제가 무질서 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극히 어려운 시제를 제외하고는 본문이 속하는 문맥과 다른 성경구절을 참조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밝혀나가야 한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죽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5:18)


We know that anyone born of God does not continue to sin; the one who was born of God keeps him safe, and the evil one cannot harm him(1John5:18)


본문은 현재시제로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치 아니하는가? 이 구절은 절대적인 선언인가? 현재시제는 이미 살펴본 것 같이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같은 서신의 다른 곳을 읽어보면 본문의 의미를 더 밝힐 수 있다.


․ 요한은 본 서신을 불신자가 아닌 그리스도인에게 쓰고 있다(요일2:11-14).

․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의 범죄가능성을 분명히 시사하고 있다(요일2:1,15;3:11-12).

․ 요한은 자기 자신도 범죄 할 가능성이 있는 그리스도인 속에 포함시켰다(요일 1:8;3:16-18).


현재시제는 계속적이거나 습관적인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요한일서는 두 개의 극단적인 대조인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 생명과 죽음, 의와 죄를 강조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삶에 대하여, 거룩과 의로 특정짓는 생활을 하여야 함을 밝혀주고자 하는 의도로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그 하나의 증거로서 영문 번역 성경의 예를 참조할 수 있다. NIV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계속되는 범죄(즉 습관적인 범죄)를 짓지 않는다’(We know that anyone born of God does not continue to sin)고 기록하였다. 즉 계속되는 현재로서 미래의 시제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2) 대명사, 격, 접속사


▶ 대명사


명사를 대신하는 대명사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가까이 있는 명사를 가리킨다.


․ 에베소서1:3-11에서 ‘그’라는 대명사는 어떤 때는 그리스도를, 또 어떤 때는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다.

․ 신명기 32:15-16은 대명사 ‘네가’와 ‘자기를’이 한 무리인지 또 다른 무리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 이사야 10:27에서도 ‘그의’와 ‘네’는 분간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대명사는 구약 예언서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그 구별이 쉽지 않으므로 원문과 자주 대조해 보아야 한다.


▶ 격


목적격 소유격과 주격 소유격은 본문에서의 구별이 쉽지 않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의 본문의 경우, ‘그리스도가 주격이 되어 우리를 위한 그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목적격이 되어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러한 본문들은 본문 앞뒤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야 좀 더 분명한 해석에 도달 할 수 있다.


▶ 접속사는 성경 본문 해석의 중요한 연결고리이다.


접속사는 문장들, 절들, 구들, 그리고 단어들을 연결시켜 준다. 특히, 헬라어에는 두 종류의 접속사가 있다. 등위 접속사는 문법적으로 동등한 요소들을 함께 연결시킨다. 종속접속사는 문법적으로 동등하지 않으므로 종속절을 독립절에 연결시킨다. 등위접속사는 연속된 절을 동등한 위치에서 연결시켜 준다. 접속사의 예를 영어적 표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반의적 : but, except

․ 강조적 : yea, certainly

․ 추단적 : therefore, then, wherefore, so

․ 설명적 : now, for instence

․ 시간적, 계속적 : and, moreover

․ 원인적 : because, for

․ 부속적 : also

․ 강의적 : even

․ 반응적 : in response, in return

4) 구문론과 주제에 대한 이해


(1) 구문론과 문맥


▶ 구문론


해석자는 구문론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한 문장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이 구문론(syntax)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숙지한다는 것은 언어의 구문론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해석자에게 중요한 것은 일련의 문법적 법칙 자체 보다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성격과 특징에 대한 감각이다. 해석자가 문법이나 구문론에 대한 감각을 갖춘다면 훨씬 더 많은 성경의 본문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훌륭한 주석서는 ‘숙어’(idioms, 관용적 어법), ‘수사적 표현’(elipsis, 생략법;Paraleipsis, 역설법), ‘화법들’(figures of speech, 직유법 ‧ 은유법), 반복법(paronomasia)를 본문의 주해과정에서 설명한다. 해석자는 구문법을 따로 외우기보다 본문의 주해과정에서 자연스레 숙지하는 것과 양질의 주석을 참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문맥


문법적 해석도 필히 문맥을 고려하여야 한다. 성경전체는 일련의 연속된 문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교훈이나 되어진 상황이나 사건의 배경은 바로 성경 자체임을 의미한다. 성경의 각 부분들은 성경 자체의 맥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신학적 해석은 숲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숲으로 순환하는 관점이 가장 타당하다. 신구약은 각각 고유한 특색을 지닌다. 성경이 지니고 있는 다양성은 통일성보다도 탁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성경을 대할 때 신구약의 고유한 본질과 구성, 역사적 상황과 계시의 점진성의 관점에서 객관적인 시각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주제와 문맥


해석자는 각 책의 특성적 주제를 알고 있어야 한다. 사도행전의 경우, 교회의 탄생(1-10장)과 확산(11-28장)의 큰 주제를 알아야 한다. 야고보서의 경우, 극단적인 갈라디안 주의를 알아야 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이단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경우, 초대교회의 박해와 순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상황과 신학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문맥은 본문을 둘러싸고 있는 전후 구절들이다. 본문 앞의 구절이 본문에 접근하는 입구의 통로라면, 본문 바로 뒤의 구절은 본문에서 떠날 때 출구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해석자가 특정한 본문에 접근하거나 그 본문으로부터 나아가는 구절들을 추적할 수 있다면, 그 본문을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넓은 문맥을 가지게 된다. 그 예로서, 성경 전체적으로 구원에 대한 신학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로마서 3장의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이해하려면, 1장의 복음의 능력과 2장의 공의의 심판을 이해한 후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결과로서, 4장의 아브라함의 칭의와 칭의의 결과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혹자는 설교에서 문맥을 자주 무시하는 경향을 직시하며 ‘해석의 첫걸음은 인위적인 장절 구분을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5) 참조구절에 대한 이해


문법적 해석은 본문과 관련된 참조구절을 고려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동일한 방식으로 그 자체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문자적 참조구절(verbal cross reference)


성경본문의 어떤 문자적 배열이 다른 성경 본문의 문자적 배열과 유사할 때 유사 참조 구절의 의미를 밝히려면 두 본문의 문자적 병행을 상호 비교하여야 한다.


․ 인간인 인자와 신성을 가지고 왕권을 주장하는 인자(민23:19와 단7:13)

․ 인간인 인자와 속죄의 제물되는 인자(사51:12와 요6:53)

․ 육(sarx, 요3:6;6:63)와 육신(basar, 마26:41;요1:4)과 육체(basar, 창6:3;갈5:17)와 지체(욥18:13;롬6:13)

․ 영(kabod, 시16:9;ruach, 시31:5;Pneuma, spirit 요4:24)와 영혼(nephesh, soul, 시19:7, 벧전1:9)


▶ 병행참조구절(parallel cross references)


성경의 기록 중 동일한 사건이 두 곳 이상에서 묘사될 때 당해 사건의 전체 윤곽을 파악하려면 아래의 예와 같이 병행구절을 상호 비교하여야 한다.


․ 그리스도의 생애(사복음서의 비교, 특히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비교)

․ 바울의 생애(사도행전과 다른 서신서)

․ 다윗의 생애(사무엘 하와 역대상)

․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역대하 29:32장와 이사야 36-38장)

․ 유다 열왕들의 생애(열왕기 상하와 역대하)


▶ 개념참조구절(conceptual cross reference)


성경본문 상호간 직접적인 문자적 일치는 없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념이나 내용을 다루는 구절들을 파악(把握)하려면 본문이 가지는 개념을 상호 비교하여야 한다.


․ 그리스도의 성육신(빌립보서 2장과 히브리서 2장)

․ 그리스도의 대속사역(로마서 3장과 히브리서 10장)

․ 역사 종말의 상황(마태복음 24-25장과 데살로니가후서 2장)

․ 죽은 자의 부활(고린도전서 15장과 요한계시록 20장)

․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벧후2:4와 유6)

6) 문학 양식에 대한 이해


성경에는 여러 부문의 ‘문학양식’(literary, mold) 혹은 ‘장르’(genre)로서 역사가 있고, 사건에 대한 기사가 있으며, 아름다운 시문학 등이 있다. 해석자는 성경의 문학 양식의 각 특성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의 모든 표현들이 실상은 문학적 양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보수주의 신학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자유주의 비평 신학자들에게는 호평을 받고 있는 모세오경의 문서설(J.E.D.P)과 공관복음의 4문서설이 있다.특히, 모세오경의 문서설은 현대 신학자들 중 많은 이들이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해석학적 측면에서, 성경의 문학적 표현의 범주는 대략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수사학적 표현(figure of speech)


성경의 기록자는 특정한 방식의 수사학적 표현을 많이 하였다. 가장 흔한 방식은 은유(Metaphor), 직유(Simile) 그리고 과장법(Hyperbole)등이다.


▶ 은유법

은유는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거나 직접적인 유사성을 표현하거나 직접적 병행을 통하여 표현한다.


․ “나는 벌레요”(시22:6)

․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요”(시18:2)

․ 구원의 잔(시116:13, 구원과 잔을 직접비교)

․ 불의의 떡(잠4:17)

․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호7:8)

․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호7:11)


▶직유법


직유는 은유와 비슷한 기능을 갖지만 ‘~처럼’, ‘~같이’, ‘~듯하다’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 “그 마음이 돌같이 단단하니”(욥41:24, 마음이 돌에 비교됨)

․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미7:4, 가장 선한 자가 가시에 비교됨)

․ “너희의 인애가 …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6:4)

․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호14:5)

․ “여호와의 영광이 … 맹렬한 불같이 보였고”(출24:17)


▶ 과장법


과장법은 어떤 개념이나 사건을 그것의 중요성이나 크기를 강조, 확대 할 때 표현한다. 이러한 본문에 대해서 해석자는 과장된 표현임을 인지하고 의미를 파악하여야 한다.


․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119:136)

․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레26:36)

․ “만일 네 오른 눈이(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찍어 내버리라)”(마5:29-30)

․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도 부족한 줄 아노라”(요21:25)


이러한 수사학적 표현이외에도 성경은 다음과 같은 많은 수사학적 표현들을 담도 있다.


․ 역설법(parodox)

․ 생략법(ellipsis)

․ 풍자법(irony)

․ 제유(대유)법(일부로서 전체 또는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표현하거나 그 반대의경우를 표현,synecdoche, 수7:1,11;삼상14:45;삼하16;21;욥29:11;사2:4)

-‘내가 칼을 불러’에서 ‘칼’은 복수로 된 많은 칼을 대표함(렘25:29)

․ 환유법(어떤 개념의 원인에서 결과를 도출, metonimy, 창49:10;수10:21;욥34:6;잠10:21;렘21:7,10;호1:2;행6:7;11:23;고전10:21(계3:6)

-‘다윗의 열쇠’에서 열쇠는 권위를 대신하고 있음)

․ 돈호법(감탄조로 사물을 하나의 인격으로 의인화하는 표현, apostrophe, 삿5:4-5:삼하18:33)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에서 ‘바다의 도망함’은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창조물의 반응적 표현임(시114:5-6)

․ 간략법(문장에서 주어와 술어의 보충적 표현을 생략함, bachylogy, 롬11:22)

․ 곡어법(litotes, meiosis)

․ 완곡어법(좋지 못하거나 꺼리는 일을 다소 부드러운 표현으로 대치, euphemism)

-‘죽었다’가 아니라 ‘자니라’로 표현(행7:16)

․ 모순어법(oxymoron)

․ 의인법(personification)

․ 액어법(생략법의 특수 형태. zeugma)

-‘단단한 식물’을 먹을 준비가 되지 못한 고린도의 성도(고전3:2)

․ 반복법(paronomasia)

․ 과장법(Hyperbole, 신1:28;왕상1:40;삼하1:23;시119:20)

․ 의문법(대답이 하나 밖에 없는 특수한 의문형,Interrogation, 렘32:27;욥21:22;마7:16;고전10:22) 등이 있다.


이러한 수사학적 표현 외에도 성경에는 비유, 알레고리, 우화, 신화, 수수께끼 등의 다양한 표현법이 있다.


(2) 다양한 문학양식


성경의 각권은 다양한 문학 양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욥기는 ‘극적 서사시’(dramatic epic), 시편은 ‘시’(poem), 잠언은 ‘지혜서’(letters of wisdom), 다니엘서는 ‘묵시묵학’(literature of revelation), 사도행전은 역사서(book of history), 서신서는 ‘서신’(letters)으로 분류한다. 성경은 이처럼 그 문학양식이 다양하고 풍성한 책이다. 성경의 문학양식이나 특정구절의 문학적 성격은 당해 책의 나머지 부분을 바라보는 입장이나 관점을 결정한다. 그 예로 ‘아가서’는 매우 다양한 해석을 야기시켰다. 한편으로, 알레고리 해석의 입장에서 아가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과 하나님 · 그리스도와 교회 · 그리스도와 성도 · 하나님과 성도등으로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 시적 이미지의 개연성(蓋然性)을 인정하여 문자적으로 인간의 성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와 해석으로 보았다. 이처럼 성경의 문학양식은 해석자의 전체적인 해석의 입장을 결정한다.


복음서의 문학양식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이다. 혹자는 복음서를 역사적인 보고서로 보았고, 19-20세기 전후 극단적 비평주의자들은 복음서를 신화적인 책으로 보았다. 이러한 비평주의자들의 시각은 역사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 초대교회의 기사처럼 잘 각색(脚色,dramatization)된 첨가물(添加物)로 보는 관점에 기인한다. 대부분 현대 신약학은 복음서를 구체적인 역사기록으로 보기보다는 ‘증언’(witnessing)과 ‘선포’(Kerygma)와 ‘설교’(preaching)과 ‘가르침’(teaching)의 문서로 본다. 그러나 복음서의 진정성에 대한 견해는 성경의 영감과 계시에 대한 신학자 개개인의 확신에 달려 있다.


만약 어떤 신약학자가 복음서를 본질적으로 신화로 취급하거나 문학의 전 단계 과정(pre-literature)으로 본다면, 그는 자신의 관점으로 복음서의 사건들을 해석하고 주해할 것이다. 반면에, 복음서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진정한 증언의 총집합이나 사도들에 의해 충실하게 전수된 메시지로 보는 신약학자는 복음서의 영감과 계시의 진정성을 인정하는 관점으로 해석하고 주해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관점의 차이는 성경의 문학 양식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 해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성경의 문학양식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가진 해석자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 루터교회(the Lutheran Church), 성공회(the Anglican Church)등은 성경의 문학양식에 대하여 과도한 문자주의를 고집하는 성경해석을 하지 않는다. 개혁주의적 학문성은 가장 높은 수준의 문헌학적 전통을 인정하므로 문헌양식을 주목함 없이 제대로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해석의 전통은 문학 양식에 대한 관점이라기보다 신학적 관점에 따른 해석차이의 예를 많이 보여준다. 루터교 신학자들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구분을 명확히 한다. 반면에 개혁주의 자들이나 성공회에 속한 신학자는 복음을 율법의 완성이라는 통시적인 개념으로 해석한다. 율법과 복음의 구별은 루터교에 속한 해석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루터교회는 율법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며, 죄를 미워하시고 낯선 목소리로 말씀하시며, 기대치 않았던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이 은혜와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율법을 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복음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율법개념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윤리적 진지함과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절대적 중요성으로 보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가 기록하고 있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에 대하여 자세히 상고한다. 그러나 이들은 통시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므로 차이점을 주된 해석학적 원리로 간주하지 않는다.

7) 원 기록자의 의도에 대한 이해


성경은 유기적인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 성경의 제 1 저자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록자인 사람을 기계적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사용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기록자의 지식, 경험, 품성, 사회적 환경을 사용하셨으나 오류가 없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록된 성경에는 기록자의 의도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해석자는 성경 원 기록자의 의도를 살펴 밝혀내야 한다. 기록자의 의도는 집필을 위해 마음먹고 있는 대상인 1차 독자가 계획된 의도대로 깨닫는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을 기록한 의도는 1차 독자인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예수를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 즉 표적에 대한 기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를 체험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표적을 행하시는 분은 창조주이신 물질세계의 주관자이다. 표적을 통하여 영적 생명을 드러냄으로써 사람들이 믿음을 따라 순종하기를 원했던 것이 요한의 의도였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랐고, 예수님은 그들의 신뢰와 순종을 받으셨으며, 그 결과 연회장의 참석자는 표적을 경험하였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고전12:1)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보잘 것 없는 과거와 성령의 사역에 의한 은사를 대조시킴으로써 은사 문제로 말미암아 발생한 고린도교회의 분쟁에 대한 부당성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것이며, 구속받은 자녀임을 입증하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의 표가 됨을 깨우쳐서 교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의도를 본문에서 암시하였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후12:1)


바울이 왜 자신이 본 환상(幻想)과 계시(啓示)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가? 바울이 자신의 체험을 언급한 의도는 자기의 신령함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의 위대성을 자랑하며, 고린도교회의 건덕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의도하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롬12:1)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로마교회 성도에게 무엇을 권하는가? 그는 성도(聖徒)의 몸을 거룩한 제사의 제물(祭物)로 드리기를 권하였다. 바울이 이 교훈을 왜 권하는가? 성도의 몸을 거룩한 제사의 제물로 드리는 것은 바로 성도가 드릴 영적 예배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예배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삶을 통하여 헌신할 것을 교훈하고자 하였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빌1:12)


바울은 자신의 투옥(投獄)을 염려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기 위하여 옥중 생활의 경험을 알려 주고자 하였다. 바울 자신의 최대 소원은 복음의 확장이다. 바울은 이를 위하여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소신(所信)을 피력하였다.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더욱 담대하고 철저하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勸勉)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본문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모든 본문에서 기록자의 의도가 쉽게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경우 개별 본문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개별 본문의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경우 해석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러한 경우에는 보다 넓은 앞뒤의 문맥을 살피거나 당해 성경 전체 주제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어떤 암시만 가지고 속단해서는 실수가 뒤따를 수 있다. 어떤 제시나 간접적인 언급은 그 의미가 분명할 경우에만 유용하므로 어렴풋한 구절로서 함부로 짐작해서는 안 된다. 해석자는 본문을 대할 때 매번 기록 의도를 밝혀내려고 고심할 필요는 없지만 의도를 살피면서 본문을 상고할 때 해석을 위한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 제 6 장 연구과제


1. 로마가톨릭의 성경해석 권한과 관행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관점을 기술하라.

2. 문자적 성경해석 원칙의 긍정적 견해에 대하여 기술하라.

3. 문자적 성경해석 원칙의 주의점에 대하여 기술하라.

4. 문자적 성경해석의 일반원칙에 있어 문맥에 따른 이해에 대하여 기술하라.

5. 문자적 성경해석의 일반원칙에 있어 어휘에 따른 이해에 대하여 기술하라.

6. 문자적 성경해석의 일반원칙에 있어 문법에 따른 이해에 대하여 기술하라.

7. 성경해석을 위한 구문론과 주제에 대하여 기술하라.

8. 성경해석을 위한 참조구절의 이해에 대하여 기술하라.

9. 성경해석을 위한 문학양식에 대하여 기술하라.

10. 성경해석을 위한 원 기록자의 의도 이해에 대하여 기술하라.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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