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성경해석의 전제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이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작품임과 동시에 인간의 작품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려면 다음과 같이 기본 전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둘째,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인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셋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러한 세 가지 전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해석하는 열쇠이다. 성경해석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기록된 성경을 본문으로 삼아 출발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0-21)
1. 계시와 영감
1)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과 계속하여 접촉하고 교제관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셔서 아담과 이야기하셨고 하담에게 공급하셨으며 지켜야 할 본분과 명령을 주셨다.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5-17)
아담과 하와가 사단적 범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어버릴 수도 있으셨지만 한량(限量) 없으신 자비로 놀랍고도 오묘한 구원계획을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찾으셨고, 그의 죄를 지적하셨으며, 사단에 대한 심판(審判)을 선언과 아울러 구속 언약으로서 여인의 후손에 의한 회복(回復)을 선언하셨다(창3:14-15).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초의 문자적 구원 계시'(first verbal redeeming revelation of God)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하와, 뱀, 가인, 노아 그리고 그 외에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전달된 말씀은 일반적으로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라 일컬어진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주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시8:3)
24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25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26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27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28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시104:24-29)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선하심에 대한 증거가 되고 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에 나타나 있는 창조자에 대한 증거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계시는 진화론자나 무신론자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근거하여 사물과 현상을 판단하는 인식론자(칸트 등)들에 의하여 종종 부인(否認)되어왔다. 이들은 자연의 복잡함은 우연이며, 양심이라 불리는 내적 도덕법은 사회나 어린시절의 교육, 자기기만(自己欺瞞) 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연 속에서도 창조자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분명하게 단정짓고 있으며 양심의 실재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19-23)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신의 존재를 언제나 믿고 있으며, 때로 양심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인간의 문화에 나타나는 도덕법은 양심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계시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참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불의함 때문이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1:28)
2) 영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직접 말씀하신 것은 ‘말씀’(the word) 즉 언어를 통한 특별계시였다(창2:16).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방주제작 명령을 듣고 그 명하심 대로 다 준행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명하신대로 준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록 수단이 있었을 것이다. 노아 당시 어떠한 기록수단이 있었는지 성경이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언어의 사용을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수단의 선행이 요구된다. 성서고고학의 성과를 인용하면 인간의 기록수단 즉 문자의 출현은 기원 전 3000년 경 이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문자시대 이전 하나님의 구두계시도 이후의 문자를 통한 말씀처럼 동일하게 영감된 것이며 특별하고 참된 것이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양심으로부터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는가? 그것은 가인이 화를 내며 하나님께 대답했음이 이를 증거한다(창4:9). 가인이 들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객관적 음성이었던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창5:22)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에녹이 단순히 하나님과 함께 걸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평소의 삶을 반영해 주는 표현이다. 에녹은 하나님과의 대화를 포함하여 교제(交際)와 조화(調和)를 이루는 삶을 살았다. 이것은 에녹을 선지자로 언급하는 신약성경(유14)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노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방주의 규모나 불러 모아야 할 짐승들의 종류 등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계시를 받았다(창6:13-22). 이러한 특수한 계시가 없었더라면 노아도 동일하게 멸망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어 하나님 앞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창6:8-9). 방주를 짓는 세부 식양은 노아 자신의 뛰어난 조선 기술적 사고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계시와 지시사항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그 세대에 빠짐없이 전했다. 노아가 그 세대의 사람들에게 다가올 심판을 경고했다는 사실은 베드로후서 3:5절에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창세기에도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선지자의 임무를 행하였음을 의미한다.
노아 시대부터 아브라함 시대까지 긴 기간 동안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언급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우르에서의 부르심 이후 계시는 다시 풍성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아브라함에게 성취될 구체적인 계명과 약속의 계시를 주셨다. 아브라함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창14:22)와 선지자(창20:3-7)와 지도자(창23:6-7)였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역자로 일했다고 모세의 기록을 통하여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23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창 21:22-23)
모세는 기록을 남긴 최초의 선지자였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고(민12:8) 자신의 명령을 기록하게 하셨다(출24:4-8). 출애굽기 2장에서 모세가 부름받은 장면 이후 모세오경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The LORD Said to Moses)”라는 표현이 지배적이다. 신명기 끝부분에는 모세가 여호와의 율법을 기록했으며, 백성들이 율법을 준행하도록 매 칠년마다 초막절에 공중 앞에서 낭독하라는 모세의 명령을 기록하고 있다(신31:9-13). 이스라엘에게서 선지자는 단순히 영적인 한 개인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민12:2-8). 이것은 에스겔의 소명과 선지자 파송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1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르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겔3:1-4)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하늘로서 내려온 두루마리를 먹고 그것을 백성에게 선포하였다. 선지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였고,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여호와께서 고대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들은 단순히 말로만 선포되었던지 아니면 기록으로 남겼었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구약 성경의 많은 부분은 처음엔 단지 말로만 선포되었다가 훗날에 기록된 것들이다. 학자들 중에는 오로지 기록된 말씀만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선지자들의 말과 선지자들의 기록사이에 차별을 두는 이가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 자체는 그런 차별을 두고 있지 않다. 이런 예들은 영감(inspiration)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시사해준다. 영감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래어드 해리스(Laird Harris)는 다음과 같이 성경의 영감을 정의하였다.
“선택된 사람들 속에서, 이들을 감동시켜 사실적 특면에서나, 교리, 판단의 측면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오류 없이 그들 각자의 언어 습관대로 말하거나 기록하도록 하신 성령의 역사이다.”
실제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접명령과 그 받은 계시에 의한 영감으로 그의 기록을 여호와의 율법책에 기록하였다.
26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27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수24:26-27)
영감에 대한 견해 중 “축자영감설”은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다. 이 견해는 때때로 “받아쓰기 이론” 또는 “구술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성경기록자들을 단순히 기계적으로 서기의 역할을 하게 하시지는 않았다고 본다. 성경과 영감에 관한 정통적 견해는 축자영감설 외에 유기적 영감설을 함께 인정한다. 실제로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은 성경기록자들을 유기적으로 영감하여 그들의 성품, 재능, 교육, 용어와 문제, 당시의 문화 관습 배경들을 그대로 사용하셨다. 성령께서는 기록자들의 마음을 조명하셨으며, 기억을 새롭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기록자에게 있어 죄의 영향을 배제시키셨으며, 사상을 표현할 용어의 선택까지도 지도하셨다. 그러므로 각 권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시대적 특징과 개인의 개성과 문제까지도 나타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바울의 서신에는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이 알기 어려운 것도 더러 있다고 기록함으로써 바울서신의 영감성을 적극 옹호하였다.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5-16)
초대교회 시대 이후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적 영감성의 개념을 견지(堅持)해왔다. 종교 개혁의 중요 강조점들 중의 하나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서 이는 당시 영적 대부흥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19세기의 독일과 20세기 초 미국의 많은 지역에서 성경에 대한 영감성이 많이 상실되기는 하였으나 20세기 후반에 성경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이 되살아나면서 복음주의의 참된 부흥이 일어났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되고 실제적인 말씀이 없다면 인간들은 자신의 빈약한 사상과 도덕적 무력성 가운데 방황하며 허우적거릴 것이다. 사도요한은 성경의 영감성 훼손으로 오는 심각성을 예견하여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와 같이 경고하였다.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많이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2. 성경의 무흠성과 무오성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이라 함은 성경이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완전한 진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전통적으로 무흠한(infallible)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말은 성경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최근 보수주의 신자들은 이러한 견해 외에 “성경은 믿음과 삶에 관하여 잘못된 것이 없는 유일한 규율”이라는 신념을 포함시켰다. 이 말은 성경이 무흠(無欠)하며 성도의 믿음과 행위에 관한 법칙을 의미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대두됨에 따라 이러한 신조는 재해석 되었고, 성경이 믿음과 도덕이라는 문제에 한해서만 무흠하다는 의미로 변했다. 이러한 신학사상과 과학과 부정확한 역사비평의 어리석음은 오늘날 성경의 무흠성 비판과 그로 인한 영감계시 의미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성경에 관한 저급한 견해에 대항하기 위하여 보수주의 신자들은 ‘절대 오류가 없다’는 말을 추가로 사용하게 되었다. “절대 오류가 없다”는 말은 물론 ‘성경은 결코 틀린 것이 끼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성경이 무흠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현재의 상황은 ‘절대 오류가 없다’는 술어를 다시 필요하게끔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중 일부 대담한 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사건의 기사 중 아담 창조, 요나 이야기, 사람과 짐승의 대화 등의 기사들은 성경에서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눈에 성경은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성경에는 인간적 요소가 들어 있기에 성경의 절대적인 무오류성은 생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들은 성경의 무오류성을 굳게 믿는 보수적인 신학자들에 대하여 현대인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한다.
성경에는 확실히 외견상 불가사의한 사건과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와 서술이 있다. 그러나 수많은 난제들은 그것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그것을 기록할 당시의 풍습과 언어와 지리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점차 해소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해석자는 성경의 무흠성과 무오성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
첫째, 성경의 어떠한 주제에 대한 서술은 한 군데에서만 전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역사적 통일적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무오하지만 계시의 상황과 계시자의 의도에 따라 각 부분에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구약의 할례와 신약의 할례는 다르다. 구약은 언약에 근거한 행위의 표현이지만 신약은 언약에 근거한 믿음의 표현으로서 마음의 할례가 강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창17:9-14;롬2:25-29). 신약에서 강조된 일부일처제는 구약에서는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았으며(출21:7-11;엡5:30-33), 음식물의 규례도 구약과 신약은 문자적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레11:2-23;딤전 4:3-5)
둘째,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은 모든 성경이 명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영감은 성경의 명확성(明確性)을 다 보장하지 않는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선지자들도 자신들이 기록한 것에 대하여 당황해 하였으며(벧전1:10 이하), 바울이 말한 많은 것들에 대하여 자신도 해석하기 어려움을 인정하였다(벧후3:16).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멜기세덱의 관계에 관한 자신의 해석은 길며 듣는 이가 알아듣기 힘들다고 하였다(히5:11). 심지어 예수께서도 여러 가지 어려운 말씀으로 제자들을 당황케 하셨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마19:25-26). 성경은 불분명한 표현을 넘어서 부분적인 불명료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자는 성경이 고대 언어로 기록되었음과 낯선 문화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성경의 다른 자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감안하여야 한다.
셋째,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은 성경의 원문이나 완전한 본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영감을 비판하는 자들은 때때로 성경의 원문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주장하지만 성경의 원문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경기록자는 먼저 사본을 가지고 기록했을 것이고 사본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의미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 주어진 본문 내용이 원문에는 없었던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주장이 영감의 부인을 주장하는 논리적 귀결이 되지는 못한다. 영감된 본문이 불완전하게 전달되었다고 하더라도 영감된 본문에 내적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로부터 사본을 통해 전승된 것 중에 가장 신뢰할 만 것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라는 사실은 고고학과 사본학의 발전으로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넷째,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은 성경의 모순성이 없다는 확신을 준다.
성경에 모순성이 있다고 제기된 예들이 있지만 실제로 모순성을 입증할 만한 실례는 발견할 수 없다.
성경의 모순성처럼 보이는 사안에 대해서 해석자는 어떠한 자세를 취하여야 할 것인가?
가. 성경의 원본에 대한 확실성을 가져야 한다(거라사의 돼지떼 사건, 막5:1-20.)
나. 한 두 개의 서로 상충되는 본문을 잘못 해석할 수 있다(예수의 족보-대상3:10-12;마1:8, 소경의 숫자-마20:30;막10:46).
다. 특별한 경우 원문의 손상도 감안해야 한다(사울왕의 나이-삼상13:1;행13:21, 솔로몬의 병거의 수-왕상4:26;대하9:25, 심판으로 죽임을 당한 자의 수-민25:9;고전 10:8).
라. 특정본문에서 자신이 기록하는 내용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제시와 간접적 설명이나 단순진술을 할 수도 있다(공관 복음서의 산문체 기술상의 차이; 예수의 죄패 기록).
마. 짧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긴 설명을 사용해야 한다(바울의 회심사건 해설 행9:10-19;22:12-16).
바. 다른 사건을 유사한 사건으로 기록하는 수가 있다(성전청결-마21:12-13;요2:15-16, 산상수훈-마5장;눅7장).
사. 무오성은 세밀한 것에 대한 축자성(literalness)을 의미하지 않는다(기록의 요약성;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짧은 설교-바울과 베드로의 설교는 문자적으로 모두 기록된 것이 아닌 것임).
3. 성경의 명료성과 통일성
1) 성경의 명료성
성경도 문자로 기록된 책이므로 문자적으로 자명(自明)한 흐름을 갖고 있다.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의 성경 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명료성(明瞭性)에 대해서 전적으로 확신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근본적으로는 명확하고 알기 쉬운 책이라고 주장했다. 누구든지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기본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명확하다거나 어려운 구절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 원어와 주석의 훈련을 받지 않은 비전문가는 성경의 일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으나 본질적인 내용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루터(Luther)는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이 모호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이 그것을 더 명확하고 단순하게 설명해 준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성경은 촌부로부터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해가 더딘 사람으로부터 명석하고 두뇌 회전이 빠른 학자에 이르기까지 공평하게 열려있다. 그 이유로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의 신음을 들으시는 분임을 성경이 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재창조된 피조물 중 가장 단순한 성품의 사람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단순하다. 동시에 성경에는 가장 날카롭고 박식한 신학자들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도 겨우 일부만 깨닫게 되거나 사람의 지혜로는 가히 알 수 없는 심오함도 있다.
루터나 칼빈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우화주의 전통에 맥을 이은 중세가톨릭교회의 우화주의를 지적하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우화주의에 빠진 주된 원인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성경계시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본문에서 억지로 기독론적인 기묘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개혁자들은 ‘문자적 의미’(literal sense)를 떠나버리면 성경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개혁자들이 우화주의자들의 성경 해석 관점인 ‘여러 의미설’(multiples intelligentia)을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여러 의미설”이란 성경의 한 가지 본문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우화주의자들은 한 본문에서도 도덕적인 의미, 혼적인 의미,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의 본문은 기록자가 강조하려 했던 핵심으로서 문자적으로 명백한 사상이나 전제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할 때, 해석자는 기록한 본문의 의도를 이탈하지 않게 되다. 물론 한 본문 안에서 기록자가 의도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전달하려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러한 경우 조차도 하나하나의 명백한 계시가 함께 계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성경의 통일성
하나님이 성경 전체의 저자이시면 그 사실 자체로서 성경의 통일성은 보장되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니라(사34:16)
이 본문은 성경의 기록자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영의 지도를 받아 기록했음을 계시하고 있다. 이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에돔에 대해 예언한 모든 내용(사34:9-15)이 성취될 것이라는 증거로서 이사야 선지자가 에돔 땅에 있을 것이라고 열거한 동물의 짝을 포함해서 “하나도 빠진 것이 없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어떻게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적중될 것을 알 수 있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책을 연구하면 그 책 속에 자신이 예언한 모든 것이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예언이 성취되는 확실한 이유로서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였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라고 말한다. 선자자의 이 같은 확신은 자신의 메시지의 권위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말씀의 보존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유효성을 가르친다. 성경 속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기록되었고 기록된 대로 성취되거니와 말씀의 앞뒤가 상충되지 않는 통일성을 증거하고 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55:11)
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와 유효성을 지지해 주지만 성경의 통일성을 내포하고 있는 말씀이다. 만일 성경이 완전히 사람의 글이었다면 어떻게 통일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성경의 원 저자라면 성경은 확실히 일관된 통일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획일성(劃一性)과는 다르다. 성경의 인간 기록자들은 역사상의 실제 상황을 다루었다. 그들에게는 자신만의 특별한 관심과 배경이 있었다. 하나님의 구속사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각자 다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 기록자들의 상황을 만들어 내셨고 인도하셨으며, 심지어 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셨고 가르치셨다(벧후1:21). 성경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행한다. 그러므로 성경전체의 이면에는 결국 하나의 지성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섭리와 운행이 흐른다.
그러나 성경비평사(bible critical history)를 볼 때, 성경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 다양성 속의 획일성에 대한 많은 의견이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한다.
가. 담화의 통일성은 전개의 순서와 주제와의 관련성을 어떻게 포함하는가?
나. 전개의 순서와 주제와의 통일성을 구약으로부터 예수의 성육신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계시되는가?
다. 점진적 계시 방식은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성취에 이르기까지 계속 전진하는가?
라. 계속적인 전진은 참 종교의 점진적 계시인가 또는 신앙 공동체 속에서 정경을 확립한 전통의 기능을 의미하는가?
이 같은 질문에 대하여, 경건한 해석자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 속에서 답변의 일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24:44-47)
해석자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베푼 자신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는 듯한 말씀을 하셨다는 데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예수의 이 가르침은 이후에 정경으로 받아들여질 구약의 전체 성경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으로서,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은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본문은 한 군데도 없다. 후대의 교회가 삼위일체론을 특정한 구절로부터가 아닌 성경 전체로부터 이끌어 내었듯이 예수와 그 이후 신약의 기록자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음과 같이 구약 전체로부터 파악하였다.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전15:4)
또한,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의 가르침에 자신들의 마음을 열었다. 그들의 마음이 열린 것은 아래 본문이 계시함 같이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이다(고후3:16;요일2:20).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는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예수께서 직접 말씀으로 하신 가르침의 내용에 접근하는 통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약의 기록된 말씀이다. 그러므로 구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신약과 연결된 통일성을 가지고 살펴야 한다.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Everything must be fulfulled that is written about me)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그리고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에게 좋은 소식이 전파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성경을 알기 원한다면 해석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여야 한다.
․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완성된 자기 백성의 구속이다.
․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다.
․ 성경의 적용은 이 시대의 교회인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이다.
이러한 통일된 성경의 결론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가.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완성된 자기 백성의 구속을 기록하고 있다.
특별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유일무이한 계시이며 하나님과 피조물 특히,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관한 진리이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선포한 언약(출19:5)에 의하여, 백성들의 죄와 그 결과로부터 구출하고 회복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구속적 자기계시는 인간과의 관계가 가능하도록 역사하신 기록으로서, 이 구속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회복하시는 정체성을 나타내셨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19:5-6)
하나님은 대적들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시고, 교훈하시며, 불순종을 벌하신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자녀로 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죄와 반항으로 백성들은 어둠에 처하였고, 하나님은 계속 해서 자녀들을 구원해 주셔야 했다. 성경 자체는 이러한 구속사의 목적을 나타내기 위한 계시의 예가 풍성하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언약은 언약의 말씀을 읽고 가르치며 기억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신6:7-9). 여호수아에서부터 에스더까지의 역사서는 이스라엘의 갈팡질팡하는 모습과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비문서 기록 선지자를 포함한 선지자들은 언약 백성들의 죄와 반역을 고발하고 미래의 징벌과 구속과 해방을 선포하였다. 시편은 역사 속에서 만난 하나님의 구속의 체험을 개별적(個別的)으로 그리고 집합적(集合的)으로 찬양한다. 신약은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준비를 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사역을 하셨으며 그 사역의 결과가 어떠한지에 자세히 말하고 있다.
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성경의 구속사적 성격을 잊거나 오해하였다. 그들은 성경의 해석의 수준을 당시의 율법적 상황에 맞추어 적용하기에 급급한 ‘용례집’ 수준으로 격하시켰다. 그 결과, 그들은 구속사적 목적과 요지를 놓치며 자신을 포함한 백성들에게도 천국복음을 가로막는 입장에 서고 말았다. 사해사본을 기록한 쿰란 공동체도 구약의 구속사적 측면을 잘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미래의 구속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간과(看過)하였다. 바울도 극적인 회심 전에는 예수께서 구약을 성취하였다는 소식을 강하게 거부하였지만(행8:1;9:1-2),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이후,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행13:16-41).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그리스도로 인해 완성되는 새 시대의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롬3:19-22). 또한,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행위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엡6:2). 구약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계시되었다(눅24:44). 예수께서는 공생애 동안 구약을 인용하셨고 자신에게 적용하셨다.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마22:42-45)
예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설명하시며 구약의 궁극적인 목적이 자신에게 있음을 계시하셨다. 예수께서는 재판받으실 때 구약의 다니엘서를 인용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께로서 오는 고통을 호소하실 때 시편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26:6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단7:13)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시22:1)
예수께서 구약을 자신에게 적용하신 것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이미 예언된 것의 성취였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고난에 대한 반복된 예언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의 필연성에 대하여 극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26:54)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막14:49)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눅9: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눅18:31)
구약에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고 적용되는 주제는 출애굽이다. 이 주제는 신약에서 예수의 죽으심으로 완전히 성취되었다. 예수께서 다시 이스라엘 역사의 초점과 정점에 서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구약의 성취로 계시하셨다(마5:17-18). 바울은 신약의 다른 기록자들과 같이 예수의 구약접근 방식을 그대로 따랐으며(롬9:33;사28:16), 베드로도 오순절 성령의 충만을 받은 후 그의 첫 설교에서 다윗의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결시켜 해석하였다(행2:25-28,시16:8-11).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를 성취하셨다. 구약의 예언서뿐 아니라 역사서와 자혜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기 백성의 구속을 가리키고 있다. 신약이 말하는 일관된 주제도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심으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신약은 성도들의 위치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기록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의 위치를 그리스도 안에 두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5-6)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9-10)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구약이 ‘우리를 위해서’ 쓰여졌다고 말한다(롬15:4, 고전10:11). 바울은 당시의 교회들에게 말할 때 매우 분명하게 성경을 직접적으로 적용했다. 나아가 그는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사실(창2:24)에 근거하여 한 몸 되는 비밀(秘密)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바울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호세아는 이미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였다(사54:5-6;렘3:14겔 16:13-14;호3:19-20). 그러나 바울의 적용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면서도 교회론적이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백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바울은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신 그리스도 중심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적용(適用)으로 옮겨갔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6-29)
그리스도 중심인 구약은 동일한 믿음의 법칙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신약으로 연결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약속에 따라 상속자(相續者)가 된 자들이다. 성도의 신앙의 공동체는 당연히 교회인 것이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1:10-12)
선지서들의 주제는 구속이다. 그 증거가 되는 주제는 메시야의 고난과 그후에 따라올 영광스러운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너희’, 즉 ‘교회’를 위한 것이며,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너희’ 곧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베드로는 서술하였다. 선지자들이 “그들 자신이 아니라 ‘너희’(교회)를” 섬겼기 때문에 베드로전서에서 구약을 인용한 다른 구절도 바울에게서 입증된 교회론적 적용 모델과 똑같은 방식인 것이다(벧전2:7-9).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 신약의 기록자들은 ‘구약이 구속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해석한다. 신약도 같은 통일성 있는 주제로 일관하고 있다. 신약의 주제는 하나님의 구속언약의 성취이다. 구속언약의 성취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전인적 구속사역은 택함 받은 성도의 집합체, 즉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적용된다. 이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해석을 위한 중요하고도 통일된 전제인 것이다.
4. 성경과 과학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록된 모든 내용이 현대 과학의 기대에 충분히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영감성은 현대 과학의 실험적 사실에만 비추어 판단 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해석자는 성경의 영감 계시와 과학의 두 사이에서 어떤 해석원리를 따라야 할 것인가?
첫째, 성경의 무오성은 과학적 언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시102:18)
성경은 여러 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이 읽고 깨닫기에 적합하도록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기록은 일반적인 용어와 술어로 표현되었다. 특별계시인 성경이 일반적 용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둘째, 성경은 그 시대의 문화적 조건 속에서 계시되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막 4:31)
식물학에서 겨자씨는 세상의 모든 식물 중에 가장 작은 크기의 씨가 아니다. 그러나 셈족의 유대인에게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로 인식되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개념 중에 가장 작은 씨인 겨자씨의 놀라운 성장력을 통하여 자금 이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쉽게 가르치고자 하셨다. 겨자씨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대한 유비적 설명이었던 것이다.
셋째, 성경의 기록은 현상적 언어로 표현되었다.
전능하신 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50: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주권성을 현상적 언어로 기술하였다. 과학적 사실은 해가 돋고 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매일 1회씩 자전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은 자연계 내 사물들의 실제적 성질들에 대해 과학적 이론을 설명하고 있지 않으며, 천문학․지질학․화학 등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지도 않다.
넷째, 창세기 1장의 기록은 창조의 대강의 윤곽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세기는 만물의 창조과정을 전체 34구절로 요약하여 기록하고 있다(창1:1-2:3). 창조에 대한 대략적 설명으로부터 자세한 과학이론을 도출해내려는 시도는 과학과 불필요한 마찰을 야기시킨다.
성경의 영감성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단하나의 명백한 모순이라고 판단되는 것으로부터 성경 무오성의 교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의 무오성을 비판하는 자들은 성경 속에서 많은 모순된 예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정통주의자들은 그들이 찾은 예들이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성경과 과학사이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토론은 또 다른 새로운 문제들만 제시할 뿐 결말은 나지 않는다. 이것은 창조론과 진화론이 여전히 지리한 논쟁을 계속하는 것과 유사하다.
성경을 과학의 기준으로 삼는다든지 성경적 자료로서 현대과학의 문제들을 결정하려는 시도는 자제되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성경은 자연과학을 포함하고 있지만 모든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잇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경해석자는 역사가들이나 과학자들의 학문적 성과와 발전을 성경주해에 적용시킬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성경을 역사적, 과학적 성과 발전에 부합되게 해석하는 것은 학문적 진전과 완전한 진보를 이루면서 복음 전파에 보다 설득력을 강화시켜 준다(딤후 3:16-17).
다섯째, 성경과 현대과학의 상관관계를 찾는 시도는 적절치 않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3:10)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 위한 옛 창조에 속한 옛 하늘과 옛 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물리적 운동법칙으로 하늘이 떠나갈 것인지 그리고 어떠한 원자에너지 이론으로 체질이 불에 풀어지며 드러날 것인지 언급하지 않는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예언적 사건에 대하여 전혀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베드로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 의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기 위하여 주의 날 곧, 옛 창조에 속한 것을 소멸하는 도적같은 주의 날’을 믿음으로 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러므로 성경에서 과학이론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유익보다는 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 많다.
5. 구약과 신약의 관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이 신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 구약은 방대하고 복잡하며 친숙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구약과 신약을 한데 묶어 한 책으로 주셨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의 감동하시는 역사로 사람에게 깨닫게 하신다. 구약을 깨닫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신약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신약의 구약해석 방법은 가장 확실한 구약 해석 방법의 텍스트이다. 그 이유는 신약이 구약의 영감된 주석이기 때문이다.
1) 신구약의 일치성
(1) 저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믿음의 선조들에게 말씀하셨다(히1:1-3). 구약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믿음의 선진들의 글이다. 바울은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딤후3:16). 바울이 상고했으며 디모데가 어려부터 알았던 성경은 구약이었다. 바울이 현존했던 당시 신약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성되거나 인정되지 않았지만 히브리서와 바울서신은 구약의 저작자가 하나님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신약의 전체를 통하여 편만히 나타난다(롬1:17;9:25;고후6:2-16).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행28:23)
(2) 구속 계획
성경은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죄로부터 구원받는 길을 보여준다(딤후3:15). 바울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영적체험을 말하면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은혜를 자세히 설명하였다(롬4:1-9). 이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구원 받은 근거가 모든 시대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됨을 의미한다. 즉 구약시대 사람들도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던 것이다(롬4:10-25;8:1-3;11:13-24;갈3:6-29;약2:18-26).
14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15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행24:14-15)
또한, 구약은 구원의 계획뿐만 아니라 구속 속에 포함된 하나님과의 동행방법도 포괄된 구속계획임을 나타내준다(고전10:6-11). 즉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생활지침이 구약 속에도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
구약은 구속의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속의 중심임을 보여준다. 구약은 그리스도의 초림 전 기록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계시로 풍성하다.
▶ 창조
하나님의 구속의 가시적인 출발은 우주의 창조이다. 창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으나 신약은 그리스도가 창조의 중심임을 증거하고 있다(요1:1-3;골1:16;히1:2).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에 어떻게 참여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성경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구약의 창조에 관한 기사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 임재
구약에서 하나님은 여러 번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구약시대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인간이 되신 것은 아니지만 여호와의 사자 “말라크 야훼”로 오경에 자주 언급된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the angel)는 곧 하나님을 지칭한다. 그 증거는 여호와의 사자의 임재 앞에서 사람이 그를 하나님이라고 호칭한 것과 성경의 서술이 이를 증거한다(창16:7,13;18:1-2,16-22;22:15-18;출3:2-4;32:34,민22:22-35;삿5:23;6:11-15;13:3-5).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창32:30)
(4) 국가적 구원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증거하시고(신6:12;7:8;사6:8-10;시81:10;렘23:7), 애굽의 종이 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하여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안착시키셨다. 고린도전서 10:1-11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음을 가르쳐 주었다(고전10:4). 출애굽의 구속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으로부터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정국가 성립 사역을 상징한다.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19:4)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모세라(행7:37)
(5) 개인적 구원
구약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은 각 개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순종의 삶을 살도록 도우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믿음의 계보를 잇는 구약의 성도들은 영적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구속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서 조명될 수 있다. 구약시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역사적 계시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성막과 성전에서 드려진 제물은 제물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령한 계시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선포된 죄의 처리방법을 믿음으로 제물을 가져오는 개인에게 적용시키셨다. 하나님은 믿음의 행위를 보인 개인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심으로써 구약의 백성들과 화해하셨다. 이것은 구약시대의 백성들도 하나님께 대해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믿음의 기초 위에 서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레4:13-14)
(6) 직접적 예언
구약을 포함한 전 성경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개되었음을 증거 한다(요5:39).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구약의 성경이 자신을 증거하고 있음을 친히 가르치셨다(눅24:25-27). 또한,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가르친 구약의 예언이 자신에게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안타까움으로 교훈하셨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 발견된 그리스도는 항상 신약의 본문과 대조(對照)하고 확인(確認)해야 한다. 그 이유는 신구약에서 공히 발견되는 그리스도가 조화된 일관성과 통일성하에 증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고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1:8)
2) 대조성
(1) 문자적 차이
신약의 어떤 가르침은 구약의 어떤 가르침과 문자적인 차이를 보인다. 구약의 가르침은 일정한 기간 속에 있었던 일시적(一時的)이었지만, 신약의 가르침 하나님의 속성과 같이 영원하고 영구적(永久的)이다. 구약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준비 했어야 했다. 즉 성취를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신약은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한다(마1:12;2:17-18;4:14-16;행3:18,21:24;8:32-35;13:27-29). 즉 예고에 따른 성취의 선언이다. 구약은 열방 중에서 선택한 이스라엘을 초점으로 하지만 신약은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 모든 나라를 초점으로 한다(마10:5-6;15:24;행3:26;10:34-35;18:5-6). 또한 구약의 계시는 부분적(部分的)이고 불완전(不完全)하며 희미(稀微)하지만, 신약의 계시는 전체적(全體的)이고 완전(完全)하며 선명(鮮明)한 특징적 차이점이 있다.
(2) 옛 언약과 새 언약
옛 언약은 물질적 측면을 통하여 계시되었지만 새 언약은 영적 측면과 실체를 통하여 계시되었다(히8:5;9:10-11;12:18-24). 이러한 대조는 반드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도 영적이며 신령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신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11:10,16). 그러나 구약의 물질적이고 지상적인 모습은 신약의 신령하고 천상적인 것의 모형과 그림자였다. 신약은 이러한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증거한다(골2:10-17;8:2,5;10:1).
신약시대는 구약시대의 절기법(출25-28장), 제사법(레1-8장), 의식법(출29-30장), 그리고 사회법(출22-23장, 레13-25장)을 지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성취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9:11-14;10:1-10). 즉 그리스도께서 영적 실체로서 구약의 율법에 의한 그림자를 성취하심으로써 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모형이 아닌 실체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해석자는 구약 속에 계시된 모형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섭리에 따라 점진적인 신약의 실체로서 성취하고 완성되었음을 통전적 관점으로 신구약의 본문들을 대하여야 한다.
▣ 제 5 장 연구과제
1. 성경의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대하여 기술하라.
2. 성경의 영감성에 대하여 기술하라.
3. 성경의 유기적 영감에 대하여 기술하라.
4. 성경의 무흠성과 무오성에 대한 바람직한 접근 자세에 대하여 기술하라.
5. 성경의 모순성처럼 보이는 사안에 대한 해석자의 자세를 기술하라.
6. 성경의 명료성에 대하여 기술하라.
7. 성경의 통일성에 대하여 기술하라.
8. 성경의 통일된 결론적 관점에 대하여 기술하라.
9. 성경의 영감계시와 과학의 연관성에 대한 바람직한 해석원리를 기술하라.
10. 신구약의 일치성에 대하여 기술하라.
11. 신구약의 대조성에 대하여 기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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