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책방이야기

[스크랩] [김현승]책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21. 06:15



책
김현승
가장 고요할 때
가장 외로울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밤하늘에서 별을 찾듯 책을 연다
보석상자의 뚜껑을 열듯
조심스러이 책을 연다
가장 기쁠 때
내 영혼이 
누군가의 선물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는 책을 연다
나와 같이 그 기쁨을 노래할
영혼의 친구들을 
나의 행복을 미리 노래하고 간 
나의 친구들을 거기서 만난다
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주택들
아, 가장 높은 정신의 성城들
그리고 가장 거룩한 영혼의 무덤들
그들의 일생은 거기에 묻혀 있다
나의 슬픔과 나의 괴롬과 
나의 희망을 노래하여 주는 
내 친구들의 썩지 않는 영혼을
나는 거기서 만난다
그리고 힘주어 손을 잡는다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Op.3 in Em No.12(Song)


온몸으로 만나는 책

고등학교 시절 헤르만 헤세의 모든 작품을 읽겠노라고 청계천변의 헌책방들을 모두 뒤지며 케케묵은 먼지 속에서 헤세의 책들을 끄집어 들었을 때의 기쁨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철이 지난 문학 잡지를 찾아다니며 결국 수십 권에 해당되는 과월호 잡지 전체를 하나하나 사서 모았을 때의 기쁨은 또 얼마나 형용할 수 없었던 것이었던가.

책의 갈피에는 누렇게 잎이 바랜 낙엽이 끼워져 있기도 하였다. 또 어떤 책에는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구절에 정확히 밑줄이 그어져 있기도 하였다. 대체 내가 공감하고 있는 구절들에 밑줄을 치고 있는 그는 누구일까. 나의 상상력은 그를 한 명의 아리따운 처녀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

낡은 페이지를 열었을 때, 코에 싸하게 풍기는 냄새, 한 권의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질량감과 헌책이 가져다 주는 몽상, 헌책방에서 한 권의 책을 구입한다는 것은 그 모든 구체적인 느낌들과 만나는 일이기도 하였다.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한 지 삼 년째다. 책을 구입하기 위해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고, 안방에서 할인의 혜택까지 받을 수 있는 데다 책에 대한 일간지 서평과 독자 리뷰를 읽을 수 있으니 인터넷 서점은 여러모로 이득인 셈이다. 그러나 책에 대한 애착이 줄어든 탓일까. 인터넷에서 책을 구입하게 된 후로 버리는 책의 양이 많아지게 되었다.

의사는 환자의 환부를 절개했을 때 풍기는 악취로도 병의 악화 정도를 판별할 수 있다고 한다. 첰단의 통신장비가 동원되는 사이버진료도 여러 가지 장점이 있겠지만 아무래도 의사는 직접 환자의 몸을 살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책도 그런 게 아닐까. 내 발로 책을 찾아가 책장을 열고, 책의 냄새를 맡고 책의 질량감을 느낄 때, 나는 비로소 온몸으로 책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손가락의 클릭만으로 책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내 온몸을 동원하는 그런 만남!

엠파스 사막님...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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