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 좁쌀
한 알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저자명 :
최성현
출판사 : 도솔
발행일 : 2004년 05월 발행 303
쪽
책을 읽는 동안
감동으로 순간순간 울컥(?)하는 경험을 했다. 숭고함, 고매함 어느 한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장일순 선생 존경할 수 있는 분을 알게되서 행복했다.
장일순 이라는 이름으로 동시대를 살다간 한 인간의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사람이 어떻거 살아가야하는가 너무나 당연하
면서도
외면하기 쉬운 질문에 가슴뛰는 대답을 듣는다.
좁쌀 한알. 너두나도 작고도 작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눈을 뜨자. 그 좁쌀 한알이 품고 있는 우주에. 좁쌀 한알에서 생명이 움트고 세상을 키운다. 모든것의 씨앗이
된다
최성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에 살며 번역과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저서에『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 가 있고, 옮긴 책에는 『여기에 사는 즐거움』『지렁이
카로』『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 할 것인가』(공역)같은 것이, 편역서로는 일본 선승들의 일화를 모은『다섯 줌의 쌀』이 있다.
문화일보 : '고향'과 '거기'는 같은 것일까. 각기 목표와 방법을 말하는 것 같지만 장일순에겐 본질 적으로 하나다. 뜻과
삶이 하나였던 사람, '우리시대 현자'로 불린 장일순 선생의 10주기가 22일이 다.1928년 강원도 원주 태생인 장일순은 드물게 '도(道)'
또는 '영성(靈性)'과 '사회운동'을 접목하고 실 천적 전범(典範)을 후세에게 보여준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가톨릭 신도였으며 5·16 쿠데타 직후 그가 펼친 중립화평화통일론을 빌미 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장자'에 대해 탁월한 해석가였고, 불경과
성경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해월 최시형의 사상을 새롭게 부각시키는 등 동학에도 정통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감시대상이었지만 극악한 유신시절 '원주캠프'라는 말 이 나올 정도로 민주화 운동의 '배후'로 활동했다. 이어
교육운동, 신용협동조합운동, 한살림운동 등 생 명을 살리는 운동을 펼쳤다.
간단히 추린 그의 이력이지만 동·서양을 아우르는 정신적
깊이와 삶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다.장일순은 일찍이 이데올로기에 기댄 사회운동의 한계를 본 것 같다. 그는 운동권 내부의 치열한 이념대립을
고민하 는 후학에게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이라고 했다. 한
외국기자가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 새로운 삶을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되지요"라고 답했다.그의 이러한 사상 과 실천은 1960년대 중반부터
보이는데, 근래 들어서야 사회운동과 영성의 결합, 개인의 계발에 희망을 거는 변화양상이 우리사회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는 성큼 앞서 간
선각자였다.
장일순은 호를 호암(湖岩)에서 1960년대 청강(靑江)으로 바꾸는데 '박정희를 용서한다'는 뜻에서였다. 이 어
1970년대 무위당(無爲堂), 1980년대엔 일속자(一粟子·좁쌀 한알)로 호가 바뀐 과정도 그의 사상과 삶 의 궤적과 같이 한다.
곧 용서와 '밑으로 기어라'라는 하심(下心)이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다.이화여대 정현경 교 수가 물었다. "불교에서는
좌선을 하고, 기독교에선 기도도 하는데, 선생님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닦습 니까?" "주로 혼자서 걸어요… 길가에 풀이 나서 자라는 걸
보는데, 그 풀들이 저를 일깨우지요. 풀은 땅 에 뿌리를 박고 밤낮으로 해와 달을 의연히 맞고 있단 말이야. 거기에 못미치지요. 부끄럽지요.
마음을 씻는 거지요."책 두 권 모두 장일순의 10주기를 기해 나왔다.
<좁쌀 한알>에서 최성현은 장일순에게서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그들이 겪은 감동적인 일화들을 묶 었다. 장일순의 사람이 그랬듯이 유명인사들보다 원주에서 같이 산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가 많다. 또 장일순이 남긴 글씨와 그림을 한데 엮었다.
녹색평론사의 책은 리영희(전 한양대 교수) 김지하(시인) 김종철(영남대
교수·녹색평론 발행인)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사 편집인) 김성동(작가) 이현주(작가·목사) 이철수(판화작가) 등 장일순을 '연모'했던 저
명인사들의 회고담을 중심으로 엮어졌다.한편 22일을 전후해 원주에서는 각종 추모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모임'의 다음카페(http://cafe.daum.net/Jangilsoon)에서 볼 수 있 다. - 엄주엽 기자 ( 2004-05-20
)
한겨레신문 : 그는 '비어 있는 중심'이었다. '무위'였다. 억지로 하는 법도 없고 억지로 하지 않는 법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어디서 나는지도 모르게 은은히 번지는 풀꽃 향기 같기도 하고 휘어져도 꺾이지 않는 푸른 장대 같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가 있음으로 하여 원주는 1970년대 반유신 투쟁의 성지요 민주화 운동의 고향이 됐다. 수많은 지식인 ·활동가들이
그를 따랐으나 그는 한번도 지도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는 운동의 배경이었고 산파였으며 한 사람의 일꾼이었다. 그렇게 자유인으로, 자연인으로,
무위의 실천가로 살다 간 이가 바로 무위당 장일 순(1928~1994)이다. 1994년 5월 22일 위암으로 타계한 뒤로 꼭 10년이 흘렀지만,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그는 세월이 갈수록 커지는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그 그리움을 달래보려는 심산일까, 두 권의 책이 그의 죽음
10주기를 앞두고 나왔다. 생태운동가 최성현 씨가 쓴 <좁쌀 한 알>과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회장 김영주)이 엮은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가 장 일순의 행적과 말씀과 인품을 추억하는 책들이다.그가 1970년대에 즐겨 썼던 자호 '무위당'이 암시하는 대로
장일순은 중국의 옛 성현 노자처럼 세상의 중심에서 멀찍이 떨어져 은둔자로 살았다. 67년 일생 동 안 그는 치악산 자락의 고향 원주 땅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잠시 대학을 다니던 시절, 한국전쟁 중 통역관으로 활동하던 때, 그리고 5·16군사쿠데타가 난 직후 '반 공
국시'를 거스르고 "중립화 평화통일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한 3년을 빼고 그 는 원주 안에서 원주와 함께 살았다. 그
고향에서 그는 하나의 세계를 일으켜세웠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 들에게 무위당은 열두 명의 사도와 함께 헐벗은 민중과 고락을 함께했던 '목수의
아들'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탁발승들과 밥을 얻어먹으며 진리를 설법하던 '깨달은 사람' 붓다를 떠올리 게도 한다.
원주는 갈릴리였고 룸비니였다.
<좁쌀 한 알>은 이렇게 그를 사모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얻은 '무위당
일화'를 무위당이 즐겨 쓰고 그렸던 난초와 글씨를 곁들여 들려준다. 그를 삶의 스승으로 받드는 김지하 시인은 장일순의 사상을 '모심'과
'살림'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한다. 김 시인은 그의 스승이 언제나 '밑으로 기어라!'라고 말했다고 증언한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뭇사람을 섬기라는 뜻이었다. 1980년대에 장일순 은 자신의 호를 일속자, 곧 '조 한 알'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상에
가장 하잘것 없는 게 좁쌀 아닌가. '내가 조 한 알이다' 하면서 내 마음을 추스르는 거지." 그렇게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내려놓음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을 높이는 이, 모시는 이가 되고자 했다.
이 모심의 자세로 그가 편 운동이 살림 운동이었다. 이른바
'생명사상'으로 이야기되는 그의 살림 운동은 뭇사람을 넘어 뭇생명, 심지어 생명 없는 것들까지 아우르는 커다란 하나 되기 운동이었다. 정치를
바꾸 는 것만으로는 풀 수 없는 숙제를 그는 생명운동으로 풀어가고자 했다. 자연의 약탈과 파괴로 생명의 터 가 무너지는 것을 되돌리기 위해 그는
1989년 '한살림 선언'을 내놓았다.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사람과 똑같이 존엄하게 봐야 한다." 어느 외국기자가 혁명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가 "따뜻하게 보듬어 안 는 것"이라고 답했을 때, 그에게 혁명이란 바로, 만물이 하나가 되는 차원의 혁명이었다.
1991년 그는 위암 선고를 받았지만, 병과 싸우지 않았다. "투병이라니 뭐하고 싸운단 말인가 암세포는 내 세포 아닌가 잘 모시고
의논하면서 가야지." 그는 그렇게 암과 편안하게 3년 동안 놀았다. 자기의 목숨을 갉아먹는 암세포 앞에서도 그는 자신을 위해 방어막을 치지
않았다.
그를 한 번 만나고 '홀딱 반했다'는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씨는 장일순의 철저한 비폭력주의가 해월 최시형의
사상에서 발원했다고 이야기한다. "해월 선생에서 장일순 선생으로 이어지는 비폭력주의 사상의 흐름은 한국 근현대 정신사에서 참으로 희귀한 사상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 심신이 힘들 때면 그를 찾아 가곤 했다는 언론인 리영희씨는 "지금이야말로 무위당 선생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고 더욱
심화시켜서 생 활화해 나가야 할 시대"라고 말한다. 그의 10주기를 기념해 22일 오후 3시 강원도 원주시립박물관에서 두 책의 출판 기념회가
열리고 이어 생명평화문화제가 펼쳐진다. - 고명섭 기자 ( 2004-05-22 )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 : 지난
2004년 12월 14일 수능 성적 나오는 날, 우리 학교 학생들에게 11시까지 등교하라고 했습니다. 그 런데 걱정스러워서 아침도 먹지 못하고
꼭두새벽부터 학교 온 학생이 여럿이었습니다. 또 수능성적표 보 고 기가 막혀 어지럽다고 계단 난간을 붙잡고 간신히 내려오는 학생, 도서실에 와서
멍하니 앉아 있는 아 이, 대책 없이 도서실에 와서 횡설수설하던 재수생들.
이 책은 특히 그런 학생들과 그 부모님들께서 읽었으면
합니다. '장일순'(1928∼1994)이 누구인지 고개를 갸웃대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들에 핀 꽃을 보고 "산길에 소리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
가는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라고 고백한 그를 사람들은 '원주에 살다간 예수'라고 합니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고 , 『녹색평론』의
발행인인 김종철이 한 번을 보고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라고 했고... 장일순은 1961년 '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내세우다 8년 언도를 받고 3년의 옥살이 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도 록 밑바탕에서 돕는 일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살았지요.
그는 정치가, 서예가, 한국생명 운동의 대부로
알려져 있으나, 평생 어떤 직함도 가진 적 없이 뒤에서 묵 묵히 도와주었습니다. 숱한 일화와 그의 글씨로 이루어진 이 책은 선생의 좋은 점만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장일순 판(版) 용비어천가‘로 오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찬찬히 읽다보면 감히 '닮고 싶은 사람' 목록에 그를 올려놓고
싶어질 것입니다. - 서경은(서울 중앙여고 사서교사) ( 2005-02-15 )
別
"밥 한 그릇이 곧 우주다"
최성현, <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정병진(naz77) 기자
일생동안
고향인 강원도 원주를 거의 떠난 적이 없던 사람, 스스로의 손으로 책 한 권 남기지 않았던 사 람, 돈벌이를 위한 변변한 직업 한 번 가져 보지
못한 사람, 그러면서도 오늘날까지 숱한 사람들의 정신 적 스승이 되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조한알(一粟子)이라는 아호를 지닌
장일순(1928~1994)이다.
시인 김지하, 이현주 목사, 판화가 이철수, <아침이슬>의 김민기, 리영희 교수,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 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등 이름만 들어봐도 금방 알만한 쟁쟁한 문사(文士)들이
장일순에 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장일순을 스승으로, 아버지로, 부모 없 는 집안의 맏형으로, 단 한
분의 선생님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꼭 이렇게 이름난 사람들만 장일순을 존경하고 따랐던 것은 물론 아니다.
장일순의 집에는 일 년 내내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는 장군, 시장, 국회의원 같이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었고 주부, 목수, 농부, 직장인 같은 평민들도 많았다. 장일순은 지위가 높든 지 낮든지 누구나 차별 없이 즐겨 반갑게 맞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손님을 대한 것으로 전해 진다.
한 번도 싫은 기색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치 하나님처럼 잘 모셨던
것이다. 심지어는 병상에서 암으 로 투병생활을 할 때까지도,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환자인 장일순을 걱정하기보다는 두어 시간씩이나 자 신들의
푸념만 잔뜩 늘어놓고 가도 그는 일절 성가시다는 내색 한 번 없었단다. 철저히 타자를 위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랬으니 장일순을 만나 감화
받지 않고 배겨날 사람도 무척 드물었으리라.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일순은, 지학순 주교와 더불어 7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었던 ‘원 주 캠프’를 이끌었던 실질적 주역이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는 종래의 정치 투쟁 일변도만으로는 진정한 변혁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활 및 생명운동으로 전환을 꾀한다.
그러면서 땅과 먹을거리를 살리기 위한 도농직거래 운동인 ‘한
살림 운동’을 처음 시작하였고, 그 운동 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돌아보면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장일순은 근래
까지도 일반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지도자였다. 왜 그랬을까?
지난 독재정권들은 장일순을 요주의 인물로 꼽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하고 제한을 가하고자 했다. 아마도 이런 폭압적 상황이 장일순으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정치 운동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장일순 스스로가 노자의 무의(無爲)의 도를 실천하여 도무지 앞에 나서기를 좋 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보다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장일순은 생전에 자신의 손으로 책을 남긴 적이 없고, 죽기 전에도 자기 이름으로 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신을 ‘좁쌀 한 알’ ‘건달’로 부르기마저 주저하지 않을 만큼 겸손한 그였기 때문 이리라. 그러나 장일순을 마음 속 깊이
흠모하고 기리려 하는 사람들은 선생이 보여준 훌륭한 삶의 자취 를 널리 소개하고 나누고자 했다. 그래서 타계 10주기를 맞아 생태운동가
최성현씨의 손을 통해 이 책을 펴냈다. 장일순과 얽힌 잘 알려지지 않은 일화들을 주로 취재하여 그의 서화와 함께 엮은 책이다.
그래서 그런지 따뜻한 감동을 주는 건 물론이고 빼어난 서화 감상을 동시에 누릴 수 있기에 애지중지하며 곁에 두고 볼만하다. 특히
유명인사 보다는 무명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겪은 일화가 많이 소개되 고 있어 장일순의 인간적인 면모와 체취를 훨씬 더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다. 삶의 좌표를 잃고 힘겨워 할 때, 사람다운 사람 하나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가만히 펼쳐 천천히 다시 새겨 봐도 좋을 책이다.
일찍이 장일순은 20대 초반에 벌써 아인슈타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세계를 하나의 연립 정부로 세우기 위한 원 월드 운동에
동참하였다.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하여, 강원도 원주에 앉아서도 세계정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전 한양대 리영희 교수 같은 사람까지도
자주 놀래게 만들곤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이처럼 장일순은 서구사상의 흐름에 해박했으나, 이것을 결코 티내는 법이 없었고 철저히
소화하여 주체 적으로 수용하는 올곧은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삶의 태도와 사상의 근저에는 동학의 제2대 교 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의
영향이 매우 컸다. 최시형을 발견하고서 그는 들뿌리 백성들을 하늘처럼 섬기게 되었고 나락 한 톨이나 풀 한 포기에도 대우주의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깊이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격 월간지 <녹색평론>을 펴내는 김종철 교수는, 최시형 선생이나 동학사상을 복원하여 오늘날 가장
필요한 실천적 삶의 원리로 살려냈다는 점에 장일순 선생의 커다란 공로가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 적 있다.
정현경 교수와 대담에서
장일순은 ‘주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닦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혼자 산보를 해요. 사람을 많이 만나니까 술도 많이
먹었어요. 술 몇 잔 얻어먹고 나서 돌아올 때는 꼭 방축으로 걸어서 오지요. 그래서 “이 못난 나를 사람들이 많이 사랑해주는구나”하는 감사도
하고, 또 “내가 이러이러한 허튼 소리를 했구나, 오만도 아니고 망언에 지나지 않는 얘기를 했구나”하고 반성도 합니다. “네 자신이 건전하게
대지 위에 뿌리박고 있지도 못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구나”하면서요.
또 하나는 돌 틈에 끼어서 짓밟혀 있으면서도 풀이 턱 버티고
서있는 걸 보잖아요. 풀은 뿌리를 대지에 박고 있고 주야로 태양과 달을 의연히 맞이한다 이 말이야. 그 하나의 모습마저도 내가 못 미치거든요.
걸어오면서 내 마음을 씻는다고 할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길가에 짓밟힌 풀들이야말로 자신의 위대한 스승임을 깨달았을 때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다고 한다. “밥 한 사발만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우리가 평생 배워 아는 것이 밥 한 사발을 아는 것만
못하다”는 해월의 가르침도 이런 장일순의 깨달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평소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장일순은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가 솔로몬의 모든 영화를 능가 한다”는 예수님 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독특하게 풀어내고 있다.
“솔로몬이 누린
영화는 메카닌 시스템(기계, 자금, 건물, 욕심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을 바탕으로 만들 어졌기에 언젠가는 다 쓰레기가 돼버린다. 그에 견주면
들에 핀 백합 한 송이는 바이오 시스템이라 살아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작지만 하늘과 소통을 하고 있고, 또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영원하지. 차원이 다른 거라.”
장일순이 가장 강조해 마지않았던 것 중 하나가 “자신을 낮추고 남을 공경하고
높이는 것”이었다. 그래 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바닥으로 기어라”는 말을 곧잘 했고 이를 몸소 실천하려 애썼다. 이와 관 련한 일화는 이
책에 수두룩하다. 원주역 소매치기를 정성껏 대접한 이야기, 감옥에서 잡범들과 스스럼없 이 어울렸던 이야기, 흙길에서 제자 앞에 납작 엎드려 절한
이야기 등 모두가 하심(下心)의 중요성을 가 르쳐주는 훌륭한 일화들이다.
천지간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고 보듬어 안을 때라야 비로소 세상이 변한다고 장일순은 힘주어 가르쳤다. 유홍준에 의해 “우리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 (文人畵家)”로 평가되는 그는 빼어난 글씨와 함께 풀 한 포기를 상징하는 난초 그림을 즐겨 그렸다. 그 런데 그 난초를 가지고 나중에는
웃고 명상하는 사람 얼굴을 그려냈다. 깊은 산속에 소리 없이 아름답게 피었다가 가는 난초처럼 살라는 걸까?
別
[여적] ‘944원 점심’
[경향신문 2005-06-09 18:29:58]
생명운동가 장일순 선생은
‘나락 한알 속의 우주’라고 말했다. 쌀 한톨, 콩 한알, 좁쌀 한알에도 우주 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하찮게 보이는 쌀과 콩 한알이 생기려면
햇빛과 비, 그리고 대지 등 전체 자연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사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광합성을 일으키는 태양빛에 그 생명을 의존하고 있다.
사람이 먹는 음식은 태양과 지구, 한걸음 더 나아가 태양과 지구를 있게 한 우주가 차별과 대가 없이 마 련해 준 성찬이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은 호흡과 함께 생명유지의 필수요소이다. 음식을 먹어야 생명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밥 은 생명이요,
하늘이라는 말은 타당성을 지닌다. 동학 지도자 해월 최시형은 밥 한그릇을 약으로 여기고 먹으라고 가르쳤다. 우리 전통의학에서도 음식이 곧
보약이요, 식보(食補)가 제일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배고픔에 시달려왔다. 보릿고개는 그 상징이기도 했다. ‘이 고개
저 고개 다 넘어 봤지만 그만한 고개는 없더라’는 말에는 배고픔의 설움이 진하게 배어있다. 자식들을 배불리 마음껏 먹 이지 못한 것은 많은
부모들의 한이었다. 요즘은 밥걱정에서 벗어났다. 오히려 영양과잉과 비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한
가정의 평소 점심식사가 공개됐다. 월수입이 70여만원이고 남편이 간경 화로 앓고 있는 50대 여성가장(청소용역업체 직원)이 밝힌 한끼 점심식사
비용은 944원이다. 아파트나 부 동산 투기 바람을 타고 단기간에 수억원 혹은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챙기는 현실 속에서 “최저임금은 바 로
우리들의 생명선”이라는 그의 말은 절실하게 다가온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고 있다. 1년에 15조원의 돈이 음식물
쓰레기로 사라진다. 그 이면 에는 결식아동과 노인들, 그리고 ‘눈물 젖은 한조각 빵’으로 허기를 달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인간 생명의 기본인
음식에 있어 이처럼 극명하게 명암이 엇갈리는 것은 우리 사회가 건강한 공동체가 아니라 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이연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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