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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12. 00:41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46)이덕구 가족 비석
일가족 희생… 태양은 떠도 깜깜한 세상


입력날짜 : 2008. 05.27. 00:00:00

▲토벌대의 총질에 훼손된 이덕구 조모 비석(옮겨지기 전의 모습).
이덕구의 가족 비석이 세워진 회천동으로 가는 길엔 오월의 훈풍과 하얀 찔레꽃 향기가 역사의 부활을 소망하듯 진한 향을 뿜어낸다.

지난 2007년 음력 10월 20일 귀한 생명의 핏줄로 살아 남은 손녀와 손자들에 의해 흩어져 있던 영혼의 처소들을 한 곳에 모아 14기의 비석에 20여명의 영혼들을 모신 이덕구 일가의 비석이 건립되었다. 뒤이어 지난 2월에는 일본에서 건너온 손녀와 외손, 그리고 제주도의 손녀에 의해 이곳에서 60년만의 귀향풀이 굿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외침 헛되지 않으리

4·3으로 인한 이덕구의 가족사는 거의 절멸이었으며, 행여 목숨은 부지하였다 하더라도 거의 숨어서 살아야 했던 분단시대의 비극이기도 했다.

"진드르 껴안은 신촌리엔 선지자 네분 계셨다. 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피어 한라산 골짜기마다 산새 지저귀고 물오른 나무 이파리 푸르름 가득하여 평화와 희망을 목청껏 노래하던 그해 무자년 사월 초승, 제주 온 섬 아수라장 누가 우리 부모 형제를 범하는가. 누가 우리 친구 이웃을 범하는가. 이건 아니야! 친구여, 형제여, 이웃이여, 당하고만 있을 쏜가. 분연히 일어나 불쌍한 백성 함께 하자. 59년 전, 산에서 들에서 골짜기에서 제주백성에게 외치던 그들의 함성 들립니다. 온 몸을 불 사른 신촌마을 네분 선지자. 이호구 선생, 이좌구 선생, 이덕구 선생, 이순우 선생, 이제는 구천에서 고이 내려 오소서. 맺힌 원혼을 푸소서. 살아 있는 우리가 앞에 나서 저 산새들 울음 멈추게 하리오. 아! 어찌 이들 네 선지자를 잊으리오. 이민족을 사랑했고 온 백성을 다독이던 그 정신 그 애국심 후세에 남기려 작은 정성 모아 여기 작은 돌에 이름 석자 새겨 영원히 기리리라."

이승익 시인의 쓴 쓸쓸한 역사의 비애와 정의로운 정신과 생명을 노래한 비장한 비문이다.

"공은 일본 오사카 일신상업학교, 입명관대학을 졸업, 군 임관 제대 후 해방전 귀향하여 청소년및 민중지도에 힘쓰셨다.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교편 생활중 4·3민중항쟁이 발발하자 3·1지대 지휘관으로 민중봉기의 선두에 섰으며 이후 총지휘관으로 추대되었고 1949년 6월 9일 16시, 623고지에서 서거하셨다. 배 제주양씨 후상은 1948년 12월 26일 4·3사건으로 희생되었다."

이덕구와 그의 부인 양후상의 비석의 비문이다.

비극의 가족사

이덕구는 조천읍 신촌 출신으로 해방 전 일본으로 건너가 입명관 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학병으로 입대, 일본군 소위로 임관되어 복무 중 일본이 패전하자 제주로 귀향하였다. 미군정 하의 해방조국은 사상적 대립으로 인한 갈등의 심한 가운데 조천면 민청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새로 설립된 조천중학원의 역사·체육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에서 5·10 단선 반대를 위한 봉기를 일으키자 5월 말경에 입산하여 무장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무장대 군사총책 김달삼이 해주 인민대회에 참가차 월북함으로써 이를 이어받아 무장대의 사령관으로 활동하다 1949년 6월 9일, 경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덕구의 시신은 관덕정 앞 제주경찰서 옆에 전시되어 사실상 4·3의 종식을 알리는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조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총살된 어머니를 비롯하여 이덕구의 가족, 친척들은 수십명이 화를 당했다.

1948년 10월 25일, 여순사건 직후 경찰이 마을에 와서 이덕구, 이좌구, 이호구의 집을 방화했다. 이호구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나 그의 아들 이순우 때문이었다.

이 무렵 경찰은 삐라를 만들어 이덕구의 항복을 촉구했다. 즉 "이덕구가 항복해 내려오면 가족들은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을 전부 죽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바로 뒷날 조천과 신촌에 무장대의 습격이 들었으므로 이덕구의 가족들은 살아날 방도가 없어져 버렸다.

일본에서 4·3진상규명운동에 앞장 섰던 강실 재일본 4·3유족회장은 이덕구의 외조카이다.

그는 울음을 삼키며 증언한다. "1948년 12월 26일 이덕구 가족·친인척 20여명이 몰살되었습니다. 결국 48년 12월 20일경 경찰은 우리어머니를 포함해 이덕구의 가족과 친인척 20여명을 연행했습니다. 처음에 끌려간 곳은 조천지서이고 곧 읍내 제1구서로 옮겨졌다가 약 일주일만인 48년 12월 26일 별도봉에서 학살당했습니다. 특히 이덕구의 셋아버지 가족 3명도 희생되었는데 이 중 한명은 조천중학원생으로서 불구자인데도 불구하고 바닷가 고깃배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죽었습니다. 조천리에서는 외할머니의 친척들이 친지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최근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이덕구 가족 비석 전경.
훼손된 비석이 전하는 말

1949년 2월 4일 제주시 동부 8리 대토벌 시 봉개 인근 주민 40여명이 토끼몰이식 수색을 피해 동회천 남쪽에 위치한 소낭굴에 숨었으나 토벌대에 걸려 학살되었다.

이덕구의 조모 묘지가 이 지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묘지에 있는 비석은 4·3당시 토벌대에 의해 2등분으로 부러진 채 최근까지도 그대로 서 있었다. 비석에는 총질을 한 흔적도 일부 남아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나 비운의 길을 걸어간 혁명가의 비극적 가족사를 그 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훼손된 비석은 하단부만 남아 있으나 '강씨의 묘(姜氏之墓)'란 비명과 비문 중 이덕구 항렬의 이름들을 볼 수 있다.

마치 왕조시대에 있었던 부관참시의 비정한 모습을 보는 것 같아 4·3의 비극적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 이등분으로 쪼게져 있던 이 비석은 최근에 건립된 가족비석으로 옮겨졌다.

강실 회장의 증언은 계속된다.

"우리집에 경찰이 들이닥치기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직감을 했는지 매일 진수성찬으로 우릴 먹였고, 좋은 옷만을 입혔다. 경찰이 우리집에 들이닥친 것은 새벽 2시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나(11)와 여동생(9)을 가리키며 '저것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셨습니다. 그러자 책임자는 '이것들은 씨나 전하게 내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쫓아가려 했으나 경찰이 우리를 집 안으로 밀어넣었죠. 경찰은 어머니가 업고 있는 2살난 누이동생도 떼어놓아도 좋다고 했으나, 어머니는 '저것들은 어느정도 나이가 들어서 밥을 빌어먹을 수 있지만, 이 아이까지 살리려고 하면 결국 모두 죽게 된다'며 그냥 업고 가셨습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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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밝은 토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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