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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나의 신앙 간증(懇證)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21. 07:18

나의 신앙 간증(懇證)


  나 자신의 경험으로는 신약 성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분신(分身)으로 오신 그리스도론(論)이 가장 잘 묘사된 요한 복음을 읽다가 나의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을 믿고 교회를 출입하면서도 예수 님과 나와의 관계가 확신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도 믿어지지 아니했고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면서도 기록된 성경 말씀에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찬송(82장)을 부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다른 찬송에서는 느끼지 못하는데 이 찬송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 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뿐일세" 한 절만 불러도 눈물이 나오는 것을 금치 못했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 유년 주일학교에 잠깐 다닌 이후로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멀리하였습니다. 그 동안 온갖 추잡한 죄를 먹고 마시며 죄를 짓고 살다가 중년이 다 되어 우연한 기회에 교회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집과는 멀리 떨어진 작은 개척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시무 하시는 늙으신 목사님의 인자하신 배려 속에 교인 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믿음이 없이 갈등 속에 교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 속에서 교인 생활을 수년 동안 하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못했던 것은 이 찬송을 통해서 느끼는 감동의 눈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성령의 감화의 은혜이었던 것이라고 깨달아지지만 그 당시는 이것을 모르고 지냈습니다.


  이렇게 수년을 보내고 있다가 하루는 성경을 통독(通讀)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수년 동안 성경을 읽으려 해도 진도(進度)가 나가지 않아 성경을 한 번도 통독을 못했습니다. 책을 멀리하는 체질도 아닌데 성경은 이상하게 지루하고 읽어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으니 성경이 지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의 창세기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창세기는 사건과 사건의 기록으로 소설처럼 생각하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부터 여러 가지 명령과 규례(規例)가 나오면서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민수기, 레위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읽지 못 하고 성경을 덮어 버렸는데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새롭게 성경을 읽으려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제는 신약 성경부터 읽기로 했습니다. 여기서도 공관(共觀) 복음서와 사도행전까지는 사건을 기록한 소설쯤으로 여기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리(敎理)를 설명한 로마서부터는 또 복잡하고 지루해지기 시작하고 기록된 신앙 교리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나 자신은 복잡한 이론에 관한 글은 잘 이해 못하고 지루해 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를 복음 서신에서 막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또 실패하게 되어 단번에 읽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여러 번 시도 끝에 억지로라도, 이해하지 못하여도 그대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억지로 신약 성경을 한 번 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번 읽고 두 번째로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두 번째는 처음보다 조금 수월하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신약 성경만 읽기를 몇 번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약 성경만 읽다가 몇 번째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나 성경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은총(恩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차례차례 읽으면서 요한 복음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을 읽으면서 첫 장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전에 읽던 때와는 다르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깨달아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예수에 대하여 막연하던 것이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첫 장부터 느끼던 이 감동이 읽어 나갈수록 점점 강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해서 읽으며 17장에 기록된 예수 님의 중보(中保)기도의 내용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읽을 때에 내 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 님이 서 계시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내 앞에 계신 예수 님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님을 느끼게 되자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나오면서 "주여 용서하여 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하며 울음 섟인 소리가 나왔습니다. 마침 방안에 어린 아들과 처가 같이 있었습니다. 울음은 걷잡을 수 없이 나오고 한편으로는 창피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가 겨울 아침이라 이불을 쓰고 앉아서 읽고 있었는데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이불을 쓰고서 소리를 죽이려 했는데 울음은 계속해서 억누를 수 없이 나왔습니다. 이 울음 소리를 들은 처가 웬 일인가 했는지 이불을 들치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내가 주님 앞에 죄인(罪人)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내 죄(罪)에 대한 구속(救贖)과 은혜(恩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 한 성경이 믿어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가 하나님 아들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님이 십자가의 보혈(寶血)로 나의 구주(救主)가 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으로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성경에 기록된 것이 이해하기 어렵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 하든지 무조건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감화(感化), 감동(感動)으로 성경의 진리(眞理)가 날로 깨달아졌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날로 깊어지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론 세상 습관과 기호(嗜好)와 교회 생활하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남아 있던 정욕(情慾)적 습관이 변화되어 그런 것이 싫어졌습니다. 성경을 읽기가 좋아지고 교회 생활이 좋아졌습니다. 세상에서 즐기고 좋아하고 원하던 것이 덧없고 허무하게 보였습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고 깨끗한 상태로 살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를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참 좋았겠는데 몇 달이 지나자 다시 예전에 즐기던 육신의 소욕(所慾)이 발동하게 되었습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죄성(罪性)이 나도 모르게 다시 발동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웬일인지 알 수 없어 속으로 놀랬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커지며 굳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점점 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전에 내가 즐기던 옛날 습관으로 다 되돌아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롭게 변화된 것들 중에서 여러 부분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남아서 굳게 뿌리박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있던 여러 가지 습성 중에서 여전히 바뀌지 못한 것이 많이 있었지만, 변화된 것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의 인생관(人生觀)과 역사관(歷史觀)이 바뀌어 성경 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없는 나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부귀 영화를 누리며 어떤 세상적 의미의 위대한 성공을 이루어도 예수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나의 최고의 성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고 그가 주는 영육(靈肉)간에 축복(祝福)을 받고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점수를 따는가? 라는 것이 나의 우선 순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나 자신의 체험은, 책자나 복음 방송을 통해서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의 중생(重生)의 체험을 들어 볼 때 비교적 단순한 체험인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 님의 십자가 모습을 면대(面對) 해 본 것 같은 그러한 놀라운 체험도 없습니다. 자기 인생의 모든 죄악이 영사기의 화면 같이 나타나며 회개하는 특별한 경험도 없습니다. 자연(自然) 만물이 변화되어 보이고 그 자연과 자신과 대화하며 주를 찬양하는 신비로운 체험도 없습니다. 예수 님의 정다운 음성을 들어 볼 수 있는 복 있는 귀의 은혜도 못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예수 님을 만나고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 이 체험이 다른 누구의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 되었습니다.


  체험의 종류나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의 분량은 하나님 안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베푸시는 주권적 은혜의 역사입니다(엡 3:18,19).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서 육신의 눈으로, 귀로, 몸으로 주님을 면대(面對)한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접 부활 승천 하셨던 예수 님을 만나는 강력하고 놀라운 체험(행 9:1-9)을 했던 것처럼 큰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의 복음 증거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수천 명이 한꺼번에 예수를 영접(행 2:37-42)했던 것처럼 일반적인 체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를 이슬과 같이 상징한 말씀이 있듯이(호 14:5). 소낙비 같이, 단 비 같이 은혜를 내리실 뿐만 아니라 이슬비에 속옷이 젖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임하기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여자 사명 자의 간증을 들어보면 모태 신앙으로 교회를 성년이 되도록 출입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영접할 때 그 신앙고백이 자신의 속으로부터 튀어나오는 고백이었다고 합니다. 그 고백이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것을 억제치 못하였다 합니다.

 

이것을 미루어 추측해 보면 자신의 의식으로는 느끼지 못했지만 자기의 속 깊은 영적 상태에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있는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백하는 것은 다만 그 내면에 있던 상태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외부로 표출(表出)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앙고백 이전에 주(主) 성령께서 이 여인의 심령 속에 내주(內住)하신 것이 아닌가 라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내면에 계시고 임재 하신 성령의 역사가 언제 표출되는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때와 시기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체험으로도 주께 용서를 구하는 회개는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의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던 것으로 나의 의식적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소수의 사람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거의 일반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심령에 들어와 계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에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먼저 들어와 계신다면 언제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셨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전도를 받을 때였는지, 교회에 등록한 때인지,  세례를 받을 때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모태 신앙인 경우에도 잉태할 때인지, 출산할 때인지, 유아 세례 받을 때인지, 입교 세례 받을 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체험적 신앙고백은 의식이 있는 행위이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는 체험 이전에 성령께서 먼저 임재 하셨다면 이러한 성령의 선재적(先在的) 강림은 우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출처 : 충신사 기독교 문서 선교회
글쓴이 : josep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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