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는 고춧가루가 3봉지 들어 있었다. 한 봉지는 색깔이 변한 것 같아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보여 주었더니 버려야 한다고 해서 버리고 색깔이 제법 남아 있는 두 봉지를 냉동고로 옮겨 넣은 것이 1년 전이었으니 냉장고의 고춧가루는 10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나는 매운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찌개 색깔이 밋밋하여 고춧가루를 조금 넣기만 하면 추추가 켁켁거리기도 하고, 김치를 담글 일도 없으니 이대로 두면 냉동고의 고춧가루는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다.
나는 배추값이 폭락하고, 김치가 떨어지기도 하여 고춧가루를 처분할 겸하여 김치를 담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터넷을 뒤져서 방법을 알려고 했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처럼 김치 담그기를 건성으로 구경하고, 저울도 없고 부피를 재는 기구도 없고, 채썰기 개념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나는 내가 틀니를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고 도전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슈퍼에서 배추 3개, 무 1개, 사과 2개, 생강 마늘 부추 대파 새우젓 멸치액젓을 대충 샀다. 솔잎가루도 넣으면 좋다고 했으나 쑥뜸을 하려고 사다 두었던 3년 묵은 쑥가루로 대신하기로 했다.
배추 겉잎을 대충 따내고 배추를 4쪽으로 쪼개어 물에 씻어서 왕소금을 대충 뿌리고 나서 소금물에 담그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려고 겉잎을 우거지로 쓸 겸하여 씻어서 모아 두고, 무를 가늘게 썰어서 바가지에 담가두었는데 이 때 영배가 잔뜩 들고 찾아왔다.
영배는 김치도 1통을 가져 왔는데 이미 늦어버려서 곰팡이가 하얗게 슨 김치를 우거지로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영배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았다. 배추 절이기는 6시간이면 된다고 했으나 부드러워지지 않는 것 같아서 소금을 더 뿌렸지만 소금이 떨어지기도 하여 하루 반이 지나서야 절이기가 대충 끝났다.
재료에 고춧가루를 넣어가며 버무리는데 빨간 색이 나지 않는다. 나는 고춧가루가 적어서라고 생각하고 영배가 가져온 김치를 비교하면서 계속 고춧가루를 탔지만 아무리 해도 색깔이 나지 않는다. 고춧가루가 너무 오래 되어 그런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백김치를 생각했다. 고추 없이도 김치를 담그는 판에 묵은 고춧가루는 양반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양념 혼합물을 배추와 대충 버무리는데 5쪽을 채우자 동이 났다. 혼합물을 너무 많이 넣어 버무린 것 같았다. 부랴 부랴 슈퍼에 가서 재료를 또 구입하여 겨우 배추김치 담그기가 끝나게 되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담가본 김치 맛이 산으로 갈지 강으로 갈지 모르겠다. 그런대로 먹을만 하다면 지하 방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한 통을 줄 생각이다. 그도 혼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백번 듣는 것은 한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인데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하여 백견(百見)이 불여일행(不如一行), 백번 보는 것보다 한번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나는 너희에게 백신(百信보)이 불여일행(不如一行)이라고 말하고 싶다. 백번의 믿음신앙은 한번의 행동신앙보다 못하다는 뜻이다.
기독교가 믿음신앙을 전통적으로 강조하게 된 것은 초기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다고 한다. 로마는 기독인을 사자 밥으로 먹이기도 했다고 하니 그 참상이 얼마나 혹독하고 비참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의 기독교는 믿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믿는 마음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사랑과 평화라는 예수의 복음을 세계에 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독인의 희생 정신은 로마를 장악하게 되었고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기독교가 믿음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역사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세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믿음신앙이라는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인 행동신앙으로 들어가고 종국에는 사상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사상신앙은 기독인이 모두 작은 예수가 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둘째가 “아버지는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세요?”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베드로가 예수의 질문에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대답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베드로의 대답을 말할 수도 없지만 그렇게 말할 생각도 없었다. 여호와는 창조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베드로의 대답을 앵무새처럼 뇌까리는 것은 여호와의 뜻을 위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마음 속에는 자나 깨나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과 나는 하나다.”
둘째는 나에게서 기대한 대답을 듣지 못하여 실망을 많이 했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믿는다. 너희도 언젠가는 나처럼 과거에 얽매어 전통과 관습을 강조하는 노예신앙에서 벗어나 사상신앙이 얼마나 숭고한 신앙이고 축복받은 신앙인가를 깨달을 날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과 말이 이해가 되지 않고 동조할 수 없다면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이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전토를 팔아서 도와라.”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벗어 주어라”
“맛타령 음식타령 옷타령을 하지 말라.”
“잔치를 배설할 때는 청첩장을 돌리지 말라”
딸들에게 보낸 러브레터에서...
'자녀들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러브레터] 알음과 믿음 (0) | 2009.03.24 |
---|---|
[스크랩] [러브레터] 내가 존경하는 세 사람 (0) | 2009.03.24 |
[스크랩] [딸들에게] 석가와 예수의 얼굴 (0) | 2009.03.24 |
[스크랩] [딸들에게] 여호와와 달마의 얼굴 (0) | 2009.03.24 |
[스크랩] [딸들에게] 내가 공부한 방법(4) (0) | 2009.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