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이야기

[스크랩] [러브레터] 알음과 믿음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3. 24. 06:12

언젠가 둘째가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나요?”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곤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상신앙을 한다.”고 대답했는데 내가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나는 이름을 한문으로 쓸 줄 안다.”고 자랑(?)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나를 무식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름을 한문으로 쓸 줄 모르다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결과로 나타나게 될까?


그것은 알음(유식)과 모름(무식)이 한 쌍이기 때문이다. 도(道)가 10장이면 마(魔)도 10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알음과 모름은 극과 극으로 극과 극은 쌍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알음을 강조할 수록 모름을 강조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알음을 아는 사람은 알음을 말하지 않는다. 알음의 세계에서는 알면 알수록, 모름이 많아지게 되어 입이 다물어지고 고개가 숙여지게 되어 조용해지고 고요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불신도 한 쌍으로 존재한다. 믿음과 불신이 함께 커지기 때문에 믿음이 커질 수록 불신도 함께 커지지 않을 수 없다. 믿음을 강조하는 세계는 시끄럽고 소란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부모를 부모로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는 부모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는 그냥 부모일 뿐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에 어머니 얼굴을 기억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고, 유전자를 검사하여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이 부모다.


그런데도 부모를 “부모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의심이 손톱만큼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또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있을 때 자녀가 대학에 합격했다면 부모가 학비를 대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도 “학비를 대주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학비를 대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의심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은 믿음을 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불신을 강조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믿음을 외칠수록 불신도 함께 외쳐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는 믿음신앙을 강조하는데 믿음신앙은 행동신앙으로 가는 전단계일 뿐이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전토를 팔아서 도와라.”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벗어 주어라”

“맛타령 옷타령을 하지 말라.”

“잔치를 배설할 때는 청첩장을 돌리지 말라”


이런 가르침은 모두 행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를 믿는 것은 초보적인 단계로 그것은 행동신앙으로 가는 전단계일 뿐인 것이다.


예수가 인류에게 가르침을 주신 것은 행동신앙을 하라는 것이지 믿음신앙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행동신앙도 사상신앙으로 가는 전단계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사상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신이 일체가 되는 신앙으로 흔들릴 수 없는 굳건한 신앙, 작은 예수님이 되는 신앙이라는 것을 둘째가 깨달았으면 한다.



아버지...

출처 : 금산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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