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사건이나 참상의 치유 2.
-출신지나 가문이 보잘 것 없다(요 1:46; 마 13:55). 우리 나라처럼 출신 지역이나 가문을 따지는 나라는 드문 것 같다. 영남 정권이 들어서면 영남 출신들이 정, 관계에 대거 포진하고 호남 정권이 들어서면 호남 출신이 그렇게 한다.
또한 아직도 과거의 사, 농, 공, 상에 사로 잡혀 가문을 따지는 집안들이 많이 있다. 어떤 자매는 좋아하는 남자와 서로 결혼을 약속했는데 자신의 가문이 별 볼일 없다는 이유로 결혼하지 못하여 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또 어떤 형제는 자기가 원하는 일류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여 평생 열등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자기 땅에 오셨지만 동료나 가족들로부터 거절당하셨다(요 1:11; 마 13:55; 막 6:3). 요즈음 한국에서는 학교나 직장에서 왕따 현상이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직장에서 왕따 당한 어는 직장인은 동료들에게 보복하여 살인극을 불러 일으켰고 어느 학생은 보디 가드를 대동하고 등교할 지경이라고 한다.
동료나 가족들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고 배척 당할 때의 외로움, 배신감, 분노, 증오는 끔찍한 파괴력을 지닌다.
-볼 품 없이 생기셨다(사 53:2-3; 시 139:14). 여자는 물론 오늘날에는 남자들까지도 잘 나 보이고 젊어보이기 위해 성형수술을 한다고 한다. 한국인들인 성형수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다 보니 성형수술이 발달되어 일본에서조차 수술 받으러 온다고 한다.
사람은 신체에서 뭔가 하나만 정상이 아니라도 열등감을 갖고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받는다. 정상에 대한 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비록 내가 정상에서 조금 벗어났다 하더라도 부모나 주변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주느냐 에 따라 정상하는 자녀가 열등감으로 고통을 받느냐 정상인으로 자라느냐 가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록 좀 못 생기고, 좀 모자라고, 키가 좀 적도 뭐가 좀 적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신묘막측하게 지으셨다는 사실을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3년 반 동안 훈련시킨 제자들이 위기에 처하자 배신하고 도망가 버렸다(마 26:56). 사업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평생 원망과 술로 지내는 사람, 변심한 애인 때문에 평생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도 믿었던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예수님의 면전에서 베드로가 3번 부정했다(마 26:69-75). 또한 예수님인 수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했다(마 27:23).
-죄 없이 잡혀 갔을 때, 군병들이 침 뱉고 머리를 때렸다(마 27:29-30).
특히 성 폭행의 피해자는 수치심과 증오심으로 잘못하면 폐인이 된다고 한다.
-죄 없으신 분이 남의 죄(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마 26:39).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실을 사전에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끔찍한 재앙을 당하면 제일 먼저 하는 소리가 "Why Me?"(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재앙이?)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극형을 당하셨다(마 27:35). 십자가의 극형은 가장 끔찍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다. 당시 로마 당국은 흉악범들을 어떻게 하면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까를 연구한 결과 십자가형이 피를 서서히 흘리면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너무나 끔찍하여 로마 시민들은 십자가형으로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예수님이 재앙과 참상을 이겨내신 방법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충격을 당하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고난과 충격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느냐 이다. 서두에 밝혔듯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에 대한 잘못된 반응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끔찍한 고난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 군병들을 오히려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 23:34).
-또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공의에 맡기셨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1-23).
-자신 보다는 하나님을 바라 보셨다. 죄인인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면 실망할 것밖에 없다. 과거의 잘못, 연약함에 집착하면 스스로 열등감, 좌절감에 사로 잡혀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럴 때 일수록 나 자신이 아니라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시고 영원한 영광을 위해 잠시의 부끄럼을 참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환경에 따라 나를 판단하고 분석하면 하루라도 편하게 살 사람이 없다.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이 나의 참 소망이요 위로가 되어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자랑할 자는 세상 자랑이 아니라 주안에서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31). 아무리 좋은 환경, 좋은 재능을 가졌더라도 사람은 마음 먹기에 따라 불행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다.
충격적인 사건의 치유를 위한 기도 '믿음의 그림 그리기'가 상당히 도움이 된다. 이는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히 13:8; 계 1:8), 우리의 모든 생각과 동작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가 어디 있든 함께 하신다는 성경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시 1:1-12; 마 1:23; 28:20).
기도할 때 사건의 현장으로 예수님을 초청하여 내가 당한 모든 충격과 참상을 예수님께 맡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언젠가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 갓난 아이가 심하게 우는 모습이 보였다. 태어나서 누가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아서 떼를 쓰며 우는 모습이 보였다. 그 갓난 아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초청하였는데, 처음에는 예수님 품에 안겨서 떼를 쓰며 심하게 울다가 나중에는 울음을 그치고 재롱을 피는 모습을 보았다.
이 형제는 어릴 때 부모가 방치하고 무척이나 외로워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치유한 후 상당히 표정이 밝아졌다.
나도 기도할 때, 사건의 현장으로 예수님을 초청하여 내가 받은 충격이나 고통을 예수님께 맡겼을 때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서 심령에 기쁨과 평강이 넘침을 체험했다. 때로는 예수님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의 그림 그리기를 하면 반드시 예수님을 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꼭 보지 않아도 치유가 된다. 한 성령께서 주장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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