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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고니온, 하란, 파묵칼레, 구브로, 바나바 기념교회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0. 11:13


이고니온 바울 기념교회

 


이고니온 헬레나 교회

 


이고니온 메블라나 회교사원

 

콘야는 터키 이슬람 메블라나 교단의 본산지이다. 메블라나 교단은 메블라나 루우미가 12세기에 창시한 이슬람 수피 교단 중 하나이다. 메블라나는 유일신 알라와 만나기 위해서는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하며, 금욕과 고행을 통한 끊임없는 기도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소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며, 터키 특유의 이슬람이라 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발흐(지금의 아프간 북부)에서 태어난 메블라나는 득도를 위해서는 출가해 코란을 육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읽고, 궁극적으로 알라 신과의 만남을 추구할 것을 주창했다. 메블라나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은 더비쉬(dervish, 세마)라고 부르는 수도승들의 춤인데, 이것은 일종의 신과의 교통에 이르는 수행 방법이다. 메블라나사원에서 원무(圓舞)의 한 형태인 더비쉬 춤판이 벌어지는 12월에는 그것을 보기 위해 밀려드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을 정도로 유명세를 치르는 곳이다. 콘야에서는 관광객들을 위하여 이 명상춤을 선보이고 있다.

 


이고니온 메블라나 박물관

 

메블라나 박물관은 콘야인들의 자랑이다. 이 박물관은 콘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하다. 박물관에는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를 창시한 메블라나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원래 궁전의 장미 정원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왕이 메블라나의 아버지 바하틴 벨레디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가장 이색적으로 인상을 주는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탑은 1396년에 세워진 것이다. 터키 정부가 이곳을 박물관으로 개장한 것은 관은 1927년이다. 휠링 더비쉬의 창시자인 메블라나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이 박물관은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휠링 더비쉬의 명성 때문에 1년에 백만 이상의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수도자들이 추는 더비시 춤판이다. 남성 무용수, 원통형 모자, 하얀 윗도리, 둥근 치마, 침묵 속의 댄스로 요약되는 더비쉬는 춤추는 자를 황홀의 경지로 이끌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러한 특수한 수련 방식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이유로 정통 이스람에서는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이스람은 알라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도록 할 뿐 개인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도사들의 더비시 춤판

 


박물관 메블라나의 관

 


박물관 메블라나의 애용품들

 

정면 입구로 들어서면 단상 위에는 금박 수를 놓은 천으로 덮인 관(棺)이 있는데, 맨 안쪽의 가장 크고 중후한 관이 메블라나의 관이다. 그 옆에는 그의 의복과 애용품과 신비한 악기들, 셀주크 시대와 오스만 시대의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중앙 유리관에는 마호메트의 턱수염을 넣은 조그만 상자가 있고, 별채에는 수행자들의 생활을 표현한 인형과 카펫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그가 쓴 시집과 코란의 사본, 친필 서적이 진열되어 있어 터키 신비주의 이슬람 문화를 접할 수 있다. 메블라나 박물관은 터키 국내에서도 특별히 성스러운 곳이어서, 여성은 관광객이라고 할지라도 스카프를 쓰도록

 


이고니온 명상춤 세마

 

메블라나의 사상을 추종하는 종교의식에는 세마(SEMA)라고 불리는 명상춤이 있다. 이것은 신비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행하는 의식으로서 우주의 신과 융합하는 의식이다. 영적으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명상춤을 추면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춤을 추는 사람들을 '세마젠'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흰색의 긴 치마를 입고 위에는 수의를 뜻하는 흰색 저고리를 입는다. 또 그 위에 무덤을 상징하는 검은 망토를 입는다. 세마젠들이 머리에 쓰는 갈색이나 흰색인 뾰족한 모자는 묘비를 의미한다. 세이히(SEYH)는 메블라나의 사상을 지상에서 추종자하는 사람이다. 세이히는 머리에 터번을 쓴다. 명상춤은 함께 기도를 한 후 네이(터키 피리)를 불기 시작하면서 시작된다. 네이 소리는 신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다고 한다. 명상춤을 추는 무용수들이 먼저 세이히의 손에 키스를 한다. 그 후 우주를 향하는 여행객처럼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주를 향하는 춤 여행은, 먼저 무덤에서 나와서 우주의 신에 대해 의식이 준비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망토를 벗는다. 명상춤은 한 손을 위로 향하고, 또 한손은 아래로 향하는데 이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전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명상춤은 처음에는 천천히 돌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더 빨리 돌기 시작한다. 빠른 물살이 깊은 웅덩이를 만들 듯이 빠른 회전을 통하여 우주의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는 사상의 표현이다. 메블라나의 사상은 분명 정통적인 이슬람 사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터키인들은 메블라나의 사상에 깊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매년 12월이면 콘야에서 메블라나 축제가 열린다. 이 때, 우주의 신과 깊은 만남을 열망하는 메블라나 추종자들의 숙련된 춤을 관람할 수

다.

 


알라딘 모스크

 

콘야인들의 또 하나의 자랑은 셀축 투르크인들에 의해 지어진 가장 오래된 모스크인 알라딘 모스크이다. 이 모스크는 알라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모스크의 건축은 루크네딘 메수드의 통치기간(1116-1156) 중에 시작하여 1221년 술탄 알라딘 케이쿠바트 통치시대에 완성되었다. 관광객들을 비롯한 모든 출입객들은 신을 벗고 맨발로 입장해야 한다. 경건한 참배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셀리미예 모스크

 

콘야에는 오스만 제국의 건축술의 진수를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모스크가 있다. 메블라나 박물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셀리미예 모스크이다. 모스크는 술탄 셀림 2세가 1558년에 시작하여 1587년까지 29년에 걸쳐서 건축하였다. 셀리미예 박물관은 규모면에서 알라딘 모스크보다 작지만, 메블라나 박물관 옆이라는 지역적 이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다. 콘야는 이스람 메블라나 교단의 본산답게 터키의 그 어느 곳보다 이스람 성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이고니온 (콘야)


이고니온은 소아시아 남부 중앙에 있는 루가오니아 지방의 수도이며, 부루기아 지방의 경계에 위치한 루스드라의 북쪽에 있다. 해발 1000m의 고원에 위치한 이고니온은 서쪽으로 1500m 정도의 산들이 맥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 제국 당시 ‘루가오니아’(Lycaonia)의 수도였던 이고니온은 시리아에서 에베소와 로마에 이르는 대로가 지나고 있는 남부 중앙의 상업 도시로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옥한 곳이다. 이고니온은 B.C. 4C경 크세노폰이 최초로 언급하였다. B.C. 3C경,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서 헬라화되었다. B.C. 165까지, 이고니온은 갈라디아인의 지배를 받았고, B.C. 129, 이고니온과 갈라디아는 폰투스 왕들의 지배를 받았다. B.C. 36 당시 갈라디아의 왕이었던 ‘안티마스’(Antymas)가 이고니온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가, 왕이 죽은 후에 갈라디아의 한 지방이 되었다. 그 후 로마제국에 의해 통합되었다. 235년에는 초대 교회 종교회의가 이곳에서 열렸으며 708년, 아랍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고니온의 번영은 1097년 절정에 달해 셀주크 족의 수도가 되었으며, 1190년에는 피레데릭 1세가 이고니온을 점령하여 지금까지 터키의 도시로 남아 있다. 현재, 이고니온은 터키의 도청 소재지로 ‘코냐’(Konya)라고 부른다. 이고니온은 시리아에서 에베소와 로마로 통하는 대로가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따라서 광대한 상업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고니온은 비시디아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강물로 비옥해진 아름다운 평야를 가지고 있어 곡식과 과일 산출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특히 서양 오양, 살구 과수원, 밀, 아마밭이 유명하다. “세계를 보라, 특히 ‘이고니온’(코냐)을 보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고니온은 세계적으로도 아름답고 비옥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고니온에는 터키의 유명한 관광자원이 된 메불라나 수도승들의 집단원무인 테비쉬의 근거지이다. 메블라나 교단은 시아파 수니 교단의 하나로서 이곳에서 교단을 창설하였기에 메블라나 사원이 유명하다. 디모데의 고향이기도 한 이고니온은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여행 중에 방문한 곳이다(행13:51, 14:1). 제 2차 선교 여행 때, 다시 이고니온을 방문하였다(행16:2). 

 

 

 

                                     하 란



하란 민속촌

 


하란 성

 


하란 민속 흙집

 


하란 성 터

 


하란 성 유적

 

하란


현재명은 하란이다. 하란이라는 지명은 히브리어 '마른'이나 아카드어 '도로'라는데서 유래하였다. 하란은 '밧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하는데 (창 48:7) 하란과 같은 '도로'라는 의미이다. 리브가가 있었던 '나홀의 성'은 현재의 셀루기(Seruj)로 하란에서 서쪽으로 55km떨어진 틸나히리(Til-Nachiri)로 추정된다. 유브라데강스의 지류인 벨릭(Belik)강변에 위치하여 아브라함이 떠나온 우르와는 940km 정도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동서를 잇는 대상(隊商)로였다. 주전 18/9세기, 갑바도기아 문서(Kultepe texts)의 앗시리아 상인의 사업편지와 법적인 문서에 하란은 당시 중요한 교차로였다고 기록되어있다.하란의 에훌훌(E-HULHUL)라 불리는 신전은 메소포타미아의 달신, 신(Sin)을 섬기는 중심지였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이 하란 주변에 살던 셈족속이아니라 유랑하는 아람족속임을 고백한다(신 26:5).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란 땅을 자신의 고향이라 부른다(창 24:4). 갑바도기아 서판, 마리문서, 함무라비 법조문등을 보면 아브라함때 하란은 후리아인(Hurrian)과 아모리인들의 요소가 수메르-아카드인 기초하에 혼합된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함무라비때(주전 1728-1686)는 하란은 아모리 왕 앗디타킴(Asdi-takim)하에 있었다. 마리문서에의하면 하란의 뫙들과 잘마쿰(Zalmaqum)의 왕들, 베냐민족의 족장들과 장로들이 라란의 달신전에서 조약을 제결했다고한다. 아닷니라리 1세(주전 1307-1257)는 하란에 망대를 세웠고 디글랏빌레셀 1세(주전 1115-1077)는 달신전을 꾸몄다. 하란은 왕하 19:12와 사 37:12에 앗수르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는 편지가운데 언급된 것같이 -"내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곧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 . .", 앗수르왕 앗술단(Asshur-dan) 3세에의하여 주전 763년 멸망하였다. 이 도시는 사르곤 2세(주전 721-705)에의하여 재건되었고 엘삿핫돈(605)에의하여 신전이 수리되었다. 하란은 바벨론에의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었을 때 3년간 앗수르의 수도역할을 하다가 주전 609년에 함락되었다. 바벨론은 달신전을 재건하였고 그 제사장으로 나보니두스(Nabonidus)의 어머니를 임명하였다. 에스겔서에 두로와 함께 하란은 유명한 상업도시라고 말한다. 그리스와 로마에는 칼래(Carrhai)로 알려졌다.

 

 

                            파묵칼레

 


파묵칼레 (PAMUKKALE)

 


 


파묵칼레 온천

 


파묵칼레 온천장

 


파묵칼레 고대 온천장

 

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파묵칼레"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신약성서의 골로새서에서 언급되는 히에라폴리스(성서상의 히에라볼리)이다. 히에라볼리는 석회를 함유한 온천지역에 세워진 도시였다. 1840미터 높이의 리코스 산 중턱 단애 위에 위치해 있는데, 단애의 높이가 무려 376미터에 이르러서 산 아래쪽 멀리서 보면 석회가 굳은 모습이 마치 하얀 목화성처럼 보인다고 해서 영어의 코튼 캐스틀(Cotton Castle)로 번역되는 터키어 파묵칼레라(PAMUKKALE)는 지명을 얻었다고 한다. 산 위에서 수 천년을 두고 흘러내린 칼슘성분이 바위를 덮어 산비탈을 온통 순백의 덩어리로 변화시켰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 욕조를 놓아 대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이곳의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어서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최초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군주는 버가모 왕국의 유메네스 2세라고 역사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 도시의 번성은 비잔틴 제국까지 계속되었으며 히에라볼리는 기독교의 대교구가 설치되어 기독교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사도 요한의 수제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파파이스와 골소새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에바브라'가 복음 전파에 힘썼다.

 
 

       구브로 바나바 기념교회(키프러스섬)
 


구브로 바나바 기념교회

 

 


구브로 섬

 


구브로에서의 바울 전도

 

구브로 섬의 동쪽 연안 파무구스타(Famugusta)만에 위치한 살라미(Salamis)는 이 섬의 중요한 항구이다. 이곳 역시 바보 항구처럼 일찍이 베니게(페니키아)에 의하여 설립된 곳으로 주전 400년께 에바고라스(Evagoras? BC 410∼373년)가 구브로의 태반을 지배하고 살라미를 수도로 정했다. 주전 58년 로마의 속령이 됐고 상업도시로 번영하였다. 신약시대에는 섬의 수도를 바보(Paphos)에 넘겨줬다. 116년 유대인의 반란으로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성읍이 파괴되었고 다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그후 648년 아라비아인에 다시 파괴된 이래 지금까지 폐허가 되었으나 아직도 야외극장과 상당수의 현무암 원주기둥이 산재해 있다. 유적지 바로 옆 바닷가에는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살라미에는 바나바의 무덤과 그 바로 옆에 바나바수도원(교회)가 있다. 바나바는 이곳 살라미 출신으로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 선교사로 파송돼 고향인 이곳에 와서 전도했고 말년에 유대인의 폭동 때 돌에 맞아 순교,이곳에 묻혔다고 전한다. 이것은 현장에서 얻을 수 있는 성경 외적인 귀중한 정보였다. 교회 안은 나사로 무덤교회와 같이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성화로 채워져 있었다. 지중해 해안가에 있는 살라미(살라미스) 유적이 남아있다.

 

 

 

                           다  소
 


다소 바울 기념교회

 


바울 생가 우물

 


사도 바울 당시의 생가 터

 


다소의 옛길

 


다소 클레오파트라 문

 


다소 출신 바울

 

다소


다소는 길리기아의 옛 수도로 이 지방의 동쪽, 비옥한 지대인 ‘길리기아 페디아스’의 주요도시이다. 다소는 터키의 남쪽, 소아시아의 남동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길리기아 관구 내에 있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며 길리기아의 주요도시로 다소강과 지중해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터키의 남부 도시이며, 지중해로부터 약 19km 정도 북쪽에 떨어져 있다.  다소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선 B.C. 3000경으로 올라가야 한다. 선사시대의 신석기시대로 소급되어지는데, B.C. 3000경에 다소는 이미 요새화된 성읍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소의 초기 역사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B.C. 400경에는 페르시아 제국에서 점령했다가(B.C. 401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사라졌는데, 그때 당시 크세노폰이 쓴 원정기에 다소가 언급된다.) 그 뒤에 알렉산더 대왕이 지배했다. 알렉산더 이후에는 시리아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B.C. 200경에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여기에 와서 살게 되었고 그 중에는 사도 바울의 조상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B.C. 104에는 로마가 다소지역에 침투하였고, 따라서 다소는 B.C. 65에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동쪽 끝의 모든 민족들을 정복함에 따라 로마의 관할 지역이 되었다. B.C. 50경, 다소가 로마제국에 속하게 되면서 시세로가 총독으로 있을 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이 도시를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B.C. 41에는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가 조공을 받기 위해 다소에 있었는데, 이 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만나러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 문’을 세웠다. 그 문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A.D. 641에 아랍이 침입하여 이 도시를 파괴했으며, 1086에는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점령하여 1097년 십자군들이 여기에 들어올 때까지 이 도시를 지배했고, 결국 다소는 16C에 오스만 투르크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은 터키의 한 도시 ‘테르수수’라고 불려지고 있다. 현재, 아다나 공항에서 왼쪽으로 40km떨어진 곳에 다소가 있으며, 인구는 8만 정도 된다. 길리기아 평원의 비옥함은 다소에 부를 가져다주었으며, 특산물은 직조와 천막 제조업이다(바울도 천막을 제조하는 직업적인 기술을 가졌으며 전도 활동 중 생활수단으로 이 기술을 사용했었다.). 다소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중앙 소아시아 사이에 무역을 하는 중요한 상업 지역이며 옥수수, 면, 양모, 가죽 등의 수출로 유명하다. 주전 33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길리기아를 통해 페르시아 정복을 하였고, 이로 인해 다소는 동, 서양 문화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사도 바울 시대에는 다소가 대학도시로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하니 헬라 철학과 문화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던 다소는 아덴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처럼 학문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소는 사도 바울의 출생지로 사도행전에만 5회 언급되었다(행 9:11, 11:25, 21:39, 22:3 등)

 

 

 

               앗소(터키)
 


앗소 항구

 


앗소 아테나 여신전

 


앗소 아테나 여신전

 

앗소


앗소는 미둘레네 맞은 편에 있는 항구로 천연의 요새 조건을 갖춘 아름다운 도시이다. 소아시아의 서쪽 끝 무시아의 항구도시로 지금의 ‘베흐람쾨이’(Behramkoy) 자리에 해당하는 ‘아드람뭇데노만’(The Gulf of Adramyttium)에 있었다. 앗소는 에게 해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로서 드로아 전쟁 때, ‘파다소스’(Padasos)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B.C. 1000, 미둘레네의 식민지였고, 그 후 리디아, 페르시아에 의해 점령 되었다. B.C. 334~241에는 알렉산더 대왕과 그의 후계자의 지배 하에 있었다. B.C. 241에는 버가모의 식민지였다.  원래 미둘레네(레스보스) ‘이올리아’의 식민지였던 앗소는 버가모의 왕들에 의해 ‘아폴로니아’로 재건되었으며 그 후에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화산 모양의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진 성읍으로 3km에 걸친 방어 성벽이 쌓여있다. 앗소는 스토아 철학자 클레안데스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그 주변이 주로 농경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성읍은 그 항구에서 수출하던 좋은 품질의 밀로 유명했었다. 지금은 조용한, 고급스러운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앗소는 지금도 고고학적 탐사가 계속되어 여러 유물을 찾아냈는데, 286m 산 정상에 세워진 ‘아테나’(A소둠) 신전을 비롯해서 고대 도시의 유적이 남아있다. 그 중에는 도리아식 신전을 비롯하여 중요한 조각품들, 시장, 체육관, 목욕탕, 극장 등이 있다.

성경의 앗소는 바울이 도보로 방문한 성읍이다(행20:13~14). 드로아에서 바울은 자신의 동료들을 배로 ‘렉툼 갑’(Cape Lectum)을 돌아 항해하도록 보내고 자신은 육로를 따라서 앗소로 갔는데, 이는 약 32km의 여정으로서 곶을 돌아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덜 걸리는 여행이었다.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 사도행전 20:14

 

 

 

 

                           버 가
 


버가

 


버가의 신전

 

버가


버가는 소아시아의 남부 해안 지방인 밤빌리아의 중요 도시들 중 하나이다. 밤빌리아 평야에 있는 성읍으로 남쪽 해안에서는 약 13km 떨어진 내륙이며, ‘세스트루스 강’(River cestrus, 현재 ‘아크수’(Ak su)강)에서 서쪽으로 약 8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터키 남부 ‘무르타나’(Murtana)와 동일시된다. 버가는 약간 내륙에 위치해 있었고 강과 연결하는 항구 역할을 했다. B.C. 2C 경에 건설된 앗달리아는 뒤에 있는 버가의 항구 역할을 했으며 또한 버가의 번영을 흡수하였다. 몇몇의 폐허는 지금 까지 남아서 고대 버가의 융성한 발자취를 더듬게 한다. 하지만 앗달리아는 지금까지 남아, 현재 활발한 항구 도시를 이루고 있다. 바사 시대의 버가 역사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이곳이 그 당시에 이름난 도시일 수는 없었다. B.C. 334, 알렉산더는 버가에서 길잡이들을 고용했고 이 성읍을 두 차례 통과했다. B.C. 188, 헬라 시대에는 이곳에 셀류커스 왕국의 수비대가 주둔해 있었으며 이때 ‘만리우스 볼소’(Manlius Valso)가 버가에서 진군했다. 이 성읍은 ‘에우메네스’(Eumenes)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188년 이후 자유를 되찾았던 것 같다.희랍 신화에 나오는 ‘몹소스’와 ‘칼카스’가 창건자들이라고 알려져 있는 버가는 희랍 시대 이전에 생긴 명칭으로 선사 시대 때부터 사용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버가는 해안으로부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앗달리아’(Attalia)에서 ‘시데’(Side)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밤빌리아 평원, 서동부의 교통 요충지였으며 자연적인 바위산 요새를 만드는 곳이다. 버가에서 발굴된 유적에는 하나님의 성채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낮은 성읍과 외딴 곳에 세워진 기념비 등이 있다. 성채는 이 성읍을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으며(약 50m), 남쪽으로는 입구가 있다. 성벽은 직사각형 모양이며 남쪽에 성문이 거대하게 서 있고, 두 개의 둥근 탑이 타원형으로 생긴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양 측면에 서 있다. 성벽 안에는 로마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체육관과 목욕탕 같은 몇 개의 공공건물들이 있으며, 남문과 서문 밖에는 공동묘지가 줄지어있고, 극장과 경기장은 성벽으로 쌓인 낮은 성읍 밖에 있다. 버가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인 성읍 여신 신전은 아직도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르테미스 페르가이아’(Artemis Pergaia)가 동전에 나타난 것으로 보아 헬라화 된 아르테미스, 또는 에베소의 아르테미스와 닮은 우상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의 신전은 성읍 부근의 언덕에 있으며, 도망자를 숨겨 둘 수 있는 곳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다른 성읍들도 이 여신에 대한 제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여신과 그 여신에 대한 축제가 하나의 유품이 되었다. ‘구걸승’들이 그녀의 의식에 관여했다. 기독교인들이 남긴 것으로는 적어도 4개의 교회가 있다. 성읍의 큰 두 회당은 A.D. 4C 경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채에는 2개의 중세 교회 터가 남아 있다. 안디옥에서 목회하던 바나바와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안수를 받고, 전도 여행을 떠났다(행13:1).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1차 선교 여행 때 바보를 떠나 버가로 갔다(행 13:13). 바울의 선교 일행 중 마가라하는 요한은 이 곳에서 바울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행13:14).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를 두루 돌아다니며 다시 ‘버가’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고 ‘앗달리아’(Attalia)를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왔다(행 14:24).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사도행전 13:13

 
 

                앗달리아(안탈랴,터키)


안탈랴(앗달리아) 항구

 


안탈랴 해안 유적지

 

오스만투르크 시대의 모스크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일 장식의 아름다운 16세기 무랏파샤 모스크와 18세기의 테케리 메스켓 파샤 모스크이다. 항구 바로 옆에는 천연 샘 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운 뒤 그 위에 잘라낸 돌을 얹어서 만든 19세기 후반의 매력적인 우스케레 모스크가 있다. 케시크 미나레트 모스크는 로마, 비잔틴, 셀주크, 오스만투르크 시대에 이르는 이 도시의 긴 역사를 말해준다.

 


 

이블리미나레(사원)는 13세기 초 셀주크 터키인들이 세운 것이다. 45m 높이의 첨탑을 지니고 있다.  이 첨탑은 술탄 알라딘 케이크바트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사각 받침대 위에 만들어진 벽돌 첨탑은 세로로 홈이 파져 있고, 모자이크 형태로 된 푸른 돌과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본래 동로마 시대 교회로 사용되던 건물이었는데, 셀주크 왕조시대에 이스람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첨탑을 세운 것이다. 오늘날 보이는 사원은 14세기에 교회 터 위에 지어진 것이다.

 


하드리안 황제 문

 

안탈랴 항구 성벽 안에 세워진 세 개의 아름다운 아치형 문은 기원전 130년 하드리안 황제가 안탈랴를 침입했을 때 그의 영예를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항구 근처에는 이 문과 성벽의 다른 부분을 나누는 두 개의 탑이 남아 있다.

 


 

후두를룩 탑은 2세기 때 만들어진 등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로마 아스펜도스 원형극장

 

아스펜도스는 안탈랴의 동쪽 47킬로 지점, 고대 유리메돈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고대 도시 아스펜도스는 위 부분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와 아랫부분의 로우어 시티(Lower City)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있다. 아고라, 불레테리온, 예배당, 기념분수는 도시의 윗부분인 아크로폴리스에 있고, 극장, 스타디움, 로마 목욕탕과 수로(水路)는 아랫부분에 있다. 원형 극장 아스펜도스는 약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로서, 로마 시대(AD 2세기 후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 121-180) 황제 재임 시 유명한 건축가 제논에 의해 세워졌다. 관중석의 일부는 아크로폴리스 열의 언덕에 의지하여 만들어졌고, 나머지 부분은 둥근 지붕이 있는 하부구조 건물로 만들어졌다. 높은 무대 건물은 대부분의 다른 극장과는 달리 관중석과 분리되어 있다. 구조물은 일반 원형 극장과 별다른 것이 없지만, 입구부터 그 시대 귀족과 평민이 사용하는 문이 구별되어 있고, 관객석 역시 다르게 구별되어 있다.

 


 


무대 건물은 셀주크 시대에는 대무역상들을 위한 숙소로도 사용되었고, 끊임없이 복구한 덕분에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고대에 세워진 극장 중 보존이 가장 잘 된 것이다.  아타투르크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복구하여 야외 공연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앗달리아


소아시아에 있는 로마의 속주 밤빌리아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아달리아’(Adalia)이다. - B.C. 145경 버가모의 왕 앗다로스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세운 도시이다. 밤빌리아 지역의 소아시아 남서쪽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현대의 ‘아달리아’(Adalia)이다. 앗달리아는 ‘카타락테스’(Catarrhactes) 강에서 약 37m 정도 융기되어 있는 평평한 석회암 대지에 위치해 있다. 앗달리아의 역사는 버가모의 ‘아탈루스 2세’에 의해 설립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앗달리아’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소아시아 서쪽 연안, 밤빌리아의 가장 중요한 출구이다. 앗달리아는 남서쪽의 풍부한 ‘프리지아’(Phrygia)지역과 교역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리쿠스’(Lycus)와 ‘메안데르’(Meander), 그리고 에베소와 서머나로 향하는 교역로가 앗달리아를 통과했다. 시리아와 이집트로 가는 길로도 편리하게 이용되었다. 앗달리아는 페르시아, 마케도이나, 시리아의 셀류커스 왕조, 앗달리드, 그리고 로마의 계속적인 침공으로 황폐하게 되었다. 앗달리아는 본래 버가의 외항으로 사용되었는데, 초기 기독교 시대의 주요 도시 지역이 되었다. 앗달리아는 고대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서 터키의 남쪽지방에 위치하고 있고, 아름다운 해변을 지나고 있기에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도시로 알려져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방어 시설물들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고, 중세 도시 성벽들에서 발견된다. 가장 인상적인 고대의 경계표는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만들어진 삼층으로 된 문이다. ‘하드리아누스’(Hadreanus)가 세운 ‘명가고딕 아치형’ 문과 고대의 수로는 기념비적 건물이라 할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중에 들렸던 곳이다.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사도행전 14:25)

 

 


 

                                        아라랏산(터키)

 


노아방주로 추정되는 항공사진

 


노아 방주 추상도

 


노아방주 추리도

 


노아 방주 추상 돌닺

 


터키의 아라랏산

 


노아 방주 추정 자리

 


노아방주 추정 자리

 

아라랏 산 탐험과 방주의 발견

 

아라랏산은 현재 터키에 있는 해발 5165m 이상의 고산이다. 이 산은 지난 수백년간 기독교 성서의 `노아의 방주` 목격설이 있던곳으로, 현재까지 이곳은 많은 나라의 탐험가들이 산밑에 거주를 하며 끊임없이 방주를 찾고있다고 한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수천번 노아의 방주 조형물 목격담이 있던 터키의 고산 아라랫. 과연 아라랫산에는 수천, 혹은 수만년전 노아가 큰 홍수를 피하기위해 만들었다는 방주가 얼음과 눈속에 파뭍혀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것일까?  과거 수백 년간 탐험가들과 인근 주민들은 노아의 방주와 그 유물을 찾기 위하여 아라랏 산을 등반했고 방주를 발견하거나 방주의 잔해 조각을 가지고 온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1) 1886년 제임스 브라우스는 단독으로 아라랏 산을 등반하던 중 방주 조각으로 보이는 돌같이 굳은 목재를 가지고 왔다

2) 1887년 죠셉 노우리는 방주를 발견했는데 그 위치는 나무가 한 번도 자란 적 없는 불모지였다.

3) 1905년 목동인 야곱은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가다가 방주를 발견하였다.

4)1908년 목동인 죠지는 아라랏 산에서 방주를 보았다.

5) 1916년 러시아 군인이 비행 중 방주를 발견하였다.

6) 1936년 뉴질랜드인 하드위크 나이트는 아라랏 산 등반 중 직사각형의 선재(船材)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방주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명백한 사실이다. 방주는 목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배였다. 방주가 매우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졌다는 목재의 크기를 보고 능히 추정할 수 있었다. 선체의 대부분은 눈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그 내부구조를 살펴볼 수 없었다.(죤 몽고메리의

7) 1938년 소련 공군의 한 조종사는 아라랏 산 공중 탐사 중 해발 1만4천 피트(4.2km) 상공에서 얼음 밖으로 약 80~90피트(27m)쯤 튀어나온 방주의 사진을 찍었다.

8) 1948년 9월 레쉬트라는 쿠르드인 농부는 협곡에서 녹은 얼음 위로 드러나 있는 방주의 뱃머리를 발견했다. 뱃머리는 거의 완전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방주의 대부분은 아직도 빙하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당시의 목격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전에 배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방주를 목격했을 때 그것이 배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9) 1952년 미국인 죠지 제퍼슨 그린은 헬리콥터로 100미터 위에서 6장의 선명한 방주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실제로 본 어느 미국인은 "솔직히 고백해서 나는 성경을 믿어본 적이 없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보고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요, 성경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라고 말했다.

10) 1953년 페드랑 나바라가 아라랏 산 탐험 도중 방주를 발견하였다. 그는 후에 아라랏 산에서 노아 방주의 나무 제목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정밀 분석해 본 결과 그 나무는 유프라테스 평원에서만 자라는 나무임이 밝혀졌다(유프라테스 지방은 당시 노아가 배를 만든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11) 1974년 미국 'NASA'의 인공위성 사진에 의해 아라랏 산위에 노아 방주가 발견되었다.

12) 1974년 터키 정부가 아라랏 산에 외국인들의 여행과 탐험활동을 금지한다는 공식 발표를 하였다.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지만 방주가 발견된 곳이 소련의 군사기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라 하였다.

13) 1984년 미국 NASA인공위성 어츠호는 인공위성 사진에 의하여 아라랏 산에 방주가 머물러 있음을 증거하였다(1990년 6월 학생과학)

14) 1984년 미국 국제탐험단의 마빈 스티핀스는 아라랏 산에서 노아의 방주를 발견했는데 배 모양의 형태는 대략 길이가 136미터 넓이가 24미터 높이가 14미터인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길이 "300규빗, 넓이50규빗, 길이 30규빗'과 같은 것이다.

15) 1992년 현재는 터키 정부가 소련연방의 해체와 무신론인 공산주의의 위협이 퇴조되는 때를 같이하여 세계적인 관광지로 개발을 하고 있다.

16) 세계적으로 유명한 탐험가인 마르코폴로(A.D1234~1324)는 그의 저서 '동방견문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분은 수천 년간의 쌓인 눈 때문에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아르메니아의 어느 산봉우리에 노아의 방주가 아직도 잠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눈은 결코 녹지 않는다. 눈은 강설(降雪)이 있을 때마다 더 두껍게 쌓일 뿐이다』(마르코 폴로)



출처 : 일곱샘
글쓴이 : 일곱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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