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 교수 장영희, 화사한 얼굴과 은은한 미소를 지닌 감성적인 수필가인 이 분을 제가 언제 알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분이 뛰어난 우리나라의 영문학자, 번역가 겸 영어 교과서 집필자로 유명하신 故 장왕록 박사의 따님이시고, 서강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고, 어려서부터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 었는데 이 책을 보니 그 분은 후진 양성만 하시는 게 아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사실 선 친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함께 공역도 하고, 또 교과서도 만드셨지만)번역가이자 영어 교과서 집필자로 계속 활동하고 계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늘 바쁘게 지내시면서도 섬세하고 맑은 사유를 놓지 않으시는 뜨거운 듯, 온화한 감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는데요. 더불어 굉장히 솔직하고, 또 낙 천적이면서도 예리한 판단력을 소유한 분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었고, 어느 부분 저와 유사한 점도 많은 듯 해 참 가깝게 느껴졌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제게 크게, 그것도 아주 크게 착각을 하고 있다고 흉을 볼 수도 있겠지만 제 자신이 느낀 그 분과 저의 공통점을 나열해볼 테니 한 번 들어보시겠어요? 물론 다른 점도 많겠고, 그 중 또 확연히 다른 차이점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밝히겠지만요.
우선 그 분 스스로 밝힌 대로 다른 이들에 비해 눈치에 둔감하고, 무심히 생각나는 대로 말해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심각한 건망 증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랑 아주 많 이 비슷한 듯 합니다. 거기에 비해 그 분은 어려서 한 번 눈물을 흘렀다 하면 하루 종일 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울었다는데 저는 울음 끝이 짧은 편이었고, 그 분에 비하면 저는 말할 수 없는 끈기 부족에 열정과 실행력이 많이 뒤떨어진다는 걸 또 깨닫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 분과 저의 또 다른 공통점이라면 아마도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감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약간은 ‘이상주의자’적인 면모가 강한 게 아닐 까 싶기도 한데요. 더불어 남들에게 비치는 이미지로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면모가 있다 는 것 또한 공통점이 아닐까 싶고요.
다시 말해 한 쪽으론 원칙론자, 완벽주의자, 현실주의자, 회의론자와 같은 면이 강한 듯 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쪽으로는 순진하다 못해 푼수일 정도의 자기본연에 충실한 면모,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 감상주의자, 거기에 끝에 가서 꼭 뭔가 하나라도 실수를 한다 거나 능력을 다하지 않는 얼렁뚱당주의자가 바로 저란 사람이니 말입니다.
장영희 교수님처럼 저 역시 학생들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고, 지금도 가르치고는 있지 만 학생들의 눈에 비친 저의 모습이 그 분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들과도 그리 차이가 나 지 않는 듯 하니 참 그 분과 저는 닮은 꼴이 여러 가지로 많구나 싶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건 어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나 만약 장영희님께서 제 글을 읽게 되신다면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고 여길만한 부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분과 저의 또 다른 큰 공 통점은 마음 속에 큰 상흔을 안고 있다는, 그걸 떼어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진정 떼어내기 어려운 큰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즉 가슴 속에 가여운 소녀 한 명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란 점이랍니다.
보호받기 싫은 듯 하면서도 심적으로는 다른 이에게 보호를 받고 싶고, 자존심인지 아님 뭔지 모를 고집으로 남들에게 구차해 보이기도 싫고, 동정은 더욱 싫지만 깊숙하게는 그 와 같은 걸 갈구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제게 붙어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건 물론 그 분의 문제는 전혀 아니고 저만의 문제일 수도 있겠고, 바로 제가 그 분에게 서 저와 유사한 점을 굳이 끌어내고자 하면서 혼자 해대는 허무맹랑한 공상일 수도 있겠 지만, 사실인 즉 그랬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괜히 이렇게 확대 해석까지 하게 되 었답니다.
어쩜 우리 모두는 아마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을 수 있겠지만, 다 이와 같은 자기모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아닐까 라는 거요. 모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데 여기에 감 성이 다른 이들에 비해 풍부하거나 심약하거나 예민한 사람들은 더욱 강하게 반응할 테 고, 더불어 더욱 힘들 수 밖에 없을 거라는… 말이지요.
결론으로는 제목 그대로 이 책은 때론 아프지만, 때론 불꽃 같이 자신을 일으키고 싶은 소망을 가진 모든 이에 관한 이야기를 바로 이 분의 특별한 감성으로 엮은 것이라 여겨 졌습니다. 그리고 이 책 안에는 여러 훌륭한 예시, 우화가 많이 들어있지만 그 중 특별 히 저의 눈을 사로잡았던 글 하나가 있어 이걸 소개할까 합니다. 또 작가 자신도 원전 이 어디인지, 누가 쓴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본인의 마음을 잘 대변하고 있어 소개한다 는 설명이 있었고요.
가면
나한테 속지 마세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나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몇 천 개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들을 벗기를 두려워한답니다. 무엇무엇하는 ‘척’하는 것이 바로 내 가 제일 잘하는 일이죠. 만사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듯, 자신감에 가 득 차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내 장기이지요. 침착하고 당당한 멋쟁이로 보이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이지요. 그렇지만 내게 속지 마세요.
나의 겉모습은 자신만만하고 무서울 게 없지만, 그 뒤에 진짜 내가 있습니다. 방황하고, 놀라고, 그리고 외로운.
그러나 나는 이것을 숨깁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나는 나의 단점이 드러날까 봐 겁이 납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할 수는 없어요. 어떻게 감히 당신께 말할 수 있겠어 요.
나는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받아주고 사랑하지 않을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무시하고 비웃을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비웃는다면 나는 아마 죽고 싶을 겁니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게 밝혀지고 그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함의 가면을 쓰고 필사적인 게임을 하지만, 속으로는 벌벌 떠는 작은 아이입니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관해서는 무엇이든 얘기하고 정말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 내가 말하는 것에 속지 마세요. 잘 듣고 내가 말하지 않는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해야 하지만 할 수 없는 것들을 들어주세요.
그렇지만 나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싫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게임이 싫습니 다. 나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진짜 내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도와줘야 합니다. 내가 절대로 원하지 않는 것 같아 보여도 당신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합니다. 당신만이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 버리게 할 수 있 으니까요. 당신이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고 나를 격려해 줄 때, 정말로 나를 보듬어 안고 이해해 줄 때, 나는 가면을 벗어 던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내 속의 진짜 나 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숨어서 떨고 있는 벽을 허물고 가면을 벗어 던지게 할 수 있는 사람도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나를 불안과 열등 감, 불확신의 세계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지 말아 주세요!
그것은 당신께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두려움과 가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회 의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더욱 가까이 올수록 나는 더욱 더 저항해서 싸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과 용납, 관용은 그 어느 벽보다 강합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그 벽들을 무너뜨려 주세요.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는 아주 상처받기 쉽고 여리기 때문입니다. 내 가면을 벗기고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나는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이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입니다.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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