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로마서강해

[스크랩] 로마서 강해 4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44

 

 

 

 

 

 

 

 

 

 

로마서 강해 4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로마서 31강(롬5:15-17절) 풍요한 구원
로마서 32강(롬5:20-21절) 율법의 기능
로마서 34강(롬5:20-21절) 은혜의 왕 노릇
로마서 35강(롬6:1-2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로마서 36강(롬6:3절) 세례
로마서 37강(롬6:3-4절) 죄에 대한 죽음
로마서 38강(롬6:5-7절) 죄의 몸
로마서 39강(롬6:8-11절) 주와 함께 산다
로마서 40강(롬6:11절)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1)

 

 

 

 

 

 

 

 

 

 

로마서 31강(롬5:15-17절) 풍요한 구원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5-17)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확인 되어야 됩니다. 하나는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확인 작업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첫 번째 항목이 되겠고 ‘내가 얻은 구원이 최종성을 가지는가?’ 안전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도 구원의 확신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확실한 것을 우리가 아무 조건 없을 때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에서만 밝힌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운명이 주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취소 되지 않을  것과 실패되지 않을 것을 믿고 우리 주님이 하늘 나라에 가신 것같이 우리가 거기에 갈 것을 이제 믿습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최종성을 확인하는 것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의 위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되었다는 것, 즉 새 생명을 얻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갖는 그 생명의 풍성함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우리의 구원을 얻은바, 생명을 빼앗기지 않는 차원에서 소극적으로 갖고 있는 수가 많습니다. 우리가 얻은 생명이 얼마나 풍성한 것이고 우리의 인생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누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너무 소극적이고 모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기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담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아담의 후예로서 기업을 이을 자로 확보한 삶의 부요함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삼고 믿음의 원리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본 본문에 의하면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삶에게 넘쳤으리라”(롬 5:15)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 볼 단어는 ‘더욱’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담 안에서 아담의 후예로서 우리가 가졌던 아담이라는 시조로 인하여 함께 걸머져야 했던 멍에들, 같은 원리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함께 짊어질 멍에가 아니라 누려야 할 복들과 은혜들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그것이 ‘더욱 더’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아담 안에 있을 때는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범죄로 인하여 그 범죄가 우리에게 미친 사망 아래서 종 노릇하는 하나님의 저주와 외면 속에 사는 불이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다릅니다. 그래서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옛날에  우리의 인류의 시조였던 아담과 이제 우리 믿는 자들의 시조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입니다. 이 두 대표자는 어쨌든 인류의 대표자라는 그 성격상 같지만, 같은 원리와 넘겨줘야 할 유산들을 넘겨준다는 의미에서는 동일한 직분을 가집니다.

 

 

 

그러나 아담이 가졌던 직분과 예수님이 가졌던 직분은 한 쪽은 사망을, 다른 쪽은 생명을 만들어 낸 차원에서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것이 더욱 다른 것은 이런 것 때문입니다. 아담은 자기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대가로 죄와 사망을 받는데, 그 근거는 아담의 범법 행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끼치는 것은 예수님이 행한 일의 그 대가를 받는 것인데 아담이 행한 것에 대한 대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일에 대한 대가는 대단히 다릅니다.

 

 

 

왜 다르냐 하면 한쪽은 범법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서 일종의 삯이고 그것이 바로 범죄 행위의 대가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하신 일의 대가를 우리가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 것보다 더 급니다. 왜 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나에게 복을 주려 하심입니다. 이 둘을 잘 비교해 보십시오. 아담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님을 배반할 것인가’라는 어떤 중립 지대에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선택함으로서 복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때 우리가 확보해야 되는 중요한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잘 했느냐, 못 했느냐’를 근거로 갖는 대가라는 의미에서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의도를 인식하고 있는 차원에서의 믿음의 확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어떤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 보내진 분이라는 사상을 일단 머리 속에 넣기로 합시다. 요한 복음 6장으로 갑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이것이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38-40).

 

 

 

분명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운명을 바꾸려고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신자가 가져야 하는 믿음의 중요한 근거와 기준이 뭐냐 하면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내가 무엇을 해서 대가를 갖는 어떤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복 주시려고 그의 은혜 가운데 강권하고 계시다는 사상인 것입니다.

 

 

 

아담은 이제 그가 행한 행위로 말미암아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이지만, 예수님은 오셔서 행한 어떤 것으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초래시키시려고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를 누가 보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한 일은 그가 한 일에 따라서 ‘그가 좌로 가면 결과가 좌측에 생기고, 우로 가면 결과가 우측에 생기는’ 그런 위치에 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로 작정하신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신 것입니다. 그는 이 쪽, 저 쪽을 선택하러 오신 분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아주 중요한 근거와 기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내 편이다’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하나님 편을 든다든가, 하나님을 붙잡는 결정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갖고 계시는 의지와 열심과 사랑에 대하여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표권의 가장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러나 한 쪽은 이리로 가고 한 쪽은 저리로 갔다는 방법론의 차이가 아닙니다. 허락된 결과가 차이가 난다는 말이지 원리는 같은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모두 죄인된 것 같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전부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다릅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르냐면 한 쪽이 행한 일의 결과라면 다른 한 쪽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결과라는 차원에서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구원의 근거로써 무엇을 분명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이미 확보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더 중요한 설명이 있다면 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1:18로 갑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 1:18-20).

 

 

 

서로 변론하자” 무엇을 변론하자는 것입니까? 너희는 왜 범죄하고 있느냐? 이스라엘 백성은 나름대로 핑계와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저들은 저들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 중에 실패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지적하여 하나님은 저들로 하여금 핑계댈 수 없게 하고 싶어서 변론하자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옳은가를 증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을 회개 시키려고 합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너희 죄가 주홍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바로 용서하기 위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위하여 꾸짖는 것입니다.

 

 

 

좀더 적극적인 표현을 봅시다. 신명기 8:1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1-3).

 

 

 

무엇을 알려고 40년 광야생활을 걷게 하신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려고 그렇게 행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큰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말 내 편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내 편인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실패하고 내가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의 연약함과 미련함과 완악함을 볼 때 ‘이래도 하나님이 계속 내 편을 들어주실 것인가’라는 의심이 생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하나님께 이토록 매달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열심을 부렸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이 편안치 않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내 편인가?’ 하나님께서 이 고난에 찬 광야 같은 인생 길을 걷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필요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만나를 먹었다’ 그러니까 굉장히 복받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나를 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거기에 자리를 잡고 터를 잡고 자기네들의 삶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논과 밭을 가질 틈이 없었고 집을 짓고 살지 못하던 장소로 그들이 늘 걸어다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만나를 주시지 않는 한 먹고 사는 것이 막막한 길을 다녔습니다. 고달픈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궁극적인 목표를 알고 계십니까? 진심으로 이해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표자 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신자들의 특권들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던 것 같이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자기 신앙을 확보하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 주심과 사랑하심과 열심속에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을 자꾸 놓칩니다. 내가 하나님 편을 드는 것보다 하나님이 내편을  드는 것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늘 부족한 사람이라는 고백밖에 할 수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 편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이 대조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로마서 5:15로 오셔서 이 표현을 분명히 해둡시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롬 5:15上).

 

 

 

범죄와 은사의 차이입니다. 아담을 우리의 시조로 하여 가졌던 죄와 사망의 노예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여태 것 범법한 것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구원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한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사(恩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범법한 행위는 그 범법한 행위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저지른 범행에 상응하는대가를 받는 것에 불과 하지만 은사란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의 가치와 자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고 싶은 쪽에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는 것은 ‘선물을 주는 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와 ‘나를 사랑하는 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느냐’ 그 두 가지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무엇을 보고 확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 대신 죽인 것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압니다. 이 세상과도 바꾸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확보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얼마나 능력 있느냐만 남은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구원에 대한 확신에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무엇을 확인하느냐 하면 ‘내가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나님이 나에게 선물을 줄 이쁜 짓을 했는가?’ 여기에 너무 많이 집착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일들을 등한시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는 신자의 길을 걸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근심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어떤 대가를 받는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에 행하는 일들이지 어떤 보상의 문제는아닌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꼬마가 있는데 그 어머니가 시장에 가면서 꼬마를 데리고 갔습니다. 과일 가게에 가서 그 어머니가 과일을 많이 샀더니 과일집 주인이 꼬마에게 “너 참 예쁘구나, 몇살이냐?” “네살이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그랬더니 가게집 주인 아주머니가 그 꼬마가 귀여워서 “그 앞에 있는 버찌 네 마음대로 한 움큼 가져가라” 고 하니까 고개를 저으면서 갖고 갈 생각을 안하더라는 것입니다. “가져가라. 마음껏 가져가라” 그래도 안 집어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함께 부추깁니다. “왜 가져가라고 하는데, 아줌마가 주는데 왜 안받어.” 그래도 뒤로 손을 빼더라는 것입니다.그래서 결국 주인 아주머니가 듬뿍 담아서 갖다 주었습니다. 그래 그 어머니가 집에 오는 길에 물었습니다. 너 왜 아줌마가 줄 때 안 받았니? 그랬더니 “아줌마 손이 제 손보다 크잖아요.”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손만큼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만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놓쳐서 모든 신자들이 그토록 가난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않습니다. 그 범죄한 사람, 아담의 실패에 상응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담의 실패는 기껏 해봤자 얼마 안됩니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이 최고로 악질적으로 해 봤자 요즈음 값어치로는 한 삼천원 어치밖에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하나님의 호의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있었던 사망과 또 차이가 나는 것은 이런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롬 5:17). 가장 큰 차이는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생명과 사망의 차이이기 때문에 차이가 납니다. 사망이란 죽은 것이 가장 최악의 경우입니다. 죽은 것으로 그러니까 죽은 시신을 열 두 토막 내든, 회초리 질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죽음을 더 어떻게 끌고 가지는 못합니다. 죽음이란 최악의 상태입니다. 시체에다 더 모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시체로 이미 끝입니다. 사망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은 끝이 없습니다. 생명이란 씨앗으로 있어도 생명이고 싹이 막 삐죽 나왔어도 생명이고 꽃이 핀 것도 생명이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도 생명입니다. 생명에만 ‘넘침’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망은 넘친다는 표현을 쓸 수가 없습니다. 사망에서 끝이 납니다. 더 이상 무엇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본문들이 사망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생명에만 있는 것으로 부요함과 풍요함과 넘침이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 제일 불행한 일이 뭐냐 그러면 이것을 마치 씨앗으로 만들어서 비닐 봉지에 싸서 금고 속에 넣어 놓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빼앗기면 안되는 최소한의 생명으로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꽃 피우질 못합니다. 그 부요함이 없습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생명을 빼앗기느냐, 확보하느냐의 싸움 이상의 자리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만이 유일하게 이 생명을 꽃 피우고 열매 맺는 풍성함에 갈 수 있는 자들입니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봉사하는 부서에서, 혹은 구역으로 모이는 곳에서 여러분은 세상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립니다. 여기만이 생명이 그 부요함을 나타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 가치로 가장 좋다는 아름다운 보석을 나열하고 있어도 그 보석과 개나리 꽃 하나 피는 것을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가치가 비싸고 요란한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생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모임 속에는 그 생명의 부요함이 있습니다. 그것을 누리십니까?

 

 

 

그래서 구원을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에베소서 1:3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엡 1:3-8).

 

 

 

여기에 쓰여진 단어들을 보십시오. 수식어들을 보십시오. 영광 위에 또 영광, 풍성함 위에 또 풍성, 기쁨 위에 또 기쁨, 영광, 찬송, 기쁨, 풍성, 충만 이런 단어들로 수식되어 있는 것을 보십니까?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입니다. 생명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피었느냐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이 생명을 빼앗기느냐, 확보하느냐의 싸움에 있지 않고 이 생명을 얼마나 번성시키느냐의 싸움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사계절 중 그 가치에 비해 가장 대접을 못 받는 계절이 여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덥고 벌레들도 많이 생기고 쩔쩔 매는 계절이 여름입니다. 그러나 여름을 가만히 살펴보면 칭찬을 해야 될 계절입니다. 왜냐하면 여름은 그 생명이 가장 왕성하게 드러나는 계절입니다. 태양이 작열하고 태풍이 불고 비가와도 억수처럼 쏟아지는 때가 여름입니다. 모든 생명이 그 모든 것을 이길 만큼 강한 때입니다. 그때 모든 식물들이, 또 동물들이 가장 활동적입니다. 생명의 힘찬 모습을 볼 때가 여름입니다. 그 쏟아지는 폭염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나무의 성장을 보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여름 소나기나, 태풍이나, 바람이나, 여러 가지에도 오히려 싱싱하게 크는 생명력을 보는 계절이 여름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흑암에 덮여 있고 우리를 반대하고 우리를 삼키려고 해도 그러면 그럴 수록 더욱 우리 생명력이 생명력이 더욱 힘있게 발휘되는 장소가 바로 이 세상이어야 됩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에베소서 3장에 신자들에 대하여 이런 요구와 또 확인이 있는 것을 주의 깊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14절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며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하나님의 충만한 자리까지입니다. 대단한 요구입니다. 이것은 책임으로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능성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갈 수 있는 자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여기 14절을 다시 보면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들에게 이름을 주신 ”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각각의 존재가 각각의 가치와 구별된 가치를 가지고 완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시체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습니다. 생명만이 이름을 가집니다. 그 각각에게 허락된 그 다양함과 부요함이 그 부요함 그대로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자들의 현실이요, 현재 위치요, 장차 완성으로 나타날 우리에게 약속된 운명입니다. 바로 로마서 5장에서 보는 ‘더욱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생명 가운데서 왕 노릇해야 되는 신자의 부름입니다. 우리가 와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우리 생애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 속에서 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시는 계기가 되십시오.

 

 

 

요한 복음 10:28로 가보십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의도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누구에게 빼앗기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영생을 확보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고 있는 가능성과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십니까? 그 은혜의 풍성함이 무엇인지를 보십니까? 그 생명 가운데서 왕  노릇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십니까?

 

 

 

여러분은 유일하게 거룩할 수 있고 빛으로 살 수 있고 여러분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모든 것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한 자리에 설 수 있으며, 여러분만이 용서함으로 생명을 나누며 진리를 증거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생명을 낳듯이 여러분만이 죽은 영혼들을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허락된 육십, 혹은 칠십, 혹은 팔십, 이 인생이 결단코 고달픈 인생길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 기간 동안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아니, 부딪히는 우리의 모든 사건들이 그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나타내야할 복된 자리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실패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십니까?

 

 

 

여러분은 마땅히 매일 매일을 찬송과 감사 속에서 살아야 하고 승리를 기대하시며 사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존재와 삶이 이웃들 앞에 생명으로 나타나고 하나님 앞에 감사로 나타나고 여러분의 존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와 그 영광과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 그 생명과 진리와 구원들이 낱낱이 증거되는 복된 삶이어야 됩니다. 이 삶에 실패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구원을 다시 확보하시고 주 안에 있는 기쁨과 생명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32강(롬5:20-21절) 율법의 기능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롬 5:20-21)

 

 

 

이 시간에 생각해야 할 말씀은 로마서 5장의 마지막 부분, 율법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加入)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하는 이 표현은 우리에게 상당히 의아심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다면 ‘율법을 주어서 죄를 더 많이 짓게 한단 말인가?’ 하는 의아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먼저 근본적으로 율법에 대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율법은 분명히 구원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16로 가 봅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이것은 이미 구원을 생각할 때 누누이 강조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면 율법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면, 최소한 율법은 정죄의 방법입니까? 그러나 율법은 정죄의 방법도 아닙니다.우리가 로마서 5장을 살펴보면서 확인한 것은 율법이 들어와서 정죄가 되고 그 다음에 사망이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기 전에 사망이 왕 노릇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2 -14).

 

 


분명히 사망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들어왔느냐 하면 12절에 있는 것과 같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율법이 정죄의 방법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와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면 구원을 얻고 율법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을 베풀지도 않고 정죄를 베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죄당한 것은 율법이 있기 전에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고 그 사실을 역사적으로 입증하는 것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사망이 이미 인류 위에 왕 노릇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편도 아니고 정죄를 위한 것도 아니라면, 그러면 도대체 ‘율법의 가능이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당연한 질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이 무엇이냐’고 할 때 우리가 읽은 본문에 있는 말씀같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하는 성경의 답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답은 답이기는커녕 우리에게 더욱 의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율법’의 기능이 무엇이냐? 그리고 왜 주셨는가? 그리고 그것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는 것이 합당한 말인가? 하는 것을 이제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율법의 기능은 분명히 ‘죄에 대한 지식’의 증가를 위하여 준 것입니다. 죄를 규정하고 ‘이것이 죄다’ 하는 것을 확인시키는 작업으로써 율법은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여러 번 나옵니다. 로마서 3:19로 가시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19-20).

 

 

 

율법의 기능 중에 가장 큰 기능이 무엇이냐면 죄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7로 가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나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죄를 규정하고 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알게 하는 것이 그 첫 기능입니다. 죄를 규정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죄다, 이것은 아니다’이런 판별은 됩니다. 그래서 우리기 지금 읽는 로마서 안에서도 4:15에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라는 표현, 5:13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라는 표현들을 이제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다’라는 규정을 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4:15이나 5:13에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라든가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한다, 그래서 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이 들어와야 죄가 비로소 죄로 인정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시험을 보기 전에는 누가 일등이고 누가 꼴등인지 모릅니다. 시험을 보면 누가 꼴등인지 누가 59등인지, 누가 60등인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나 시험을 봐서 석차가 나오지 않으면 누가 58등인지 누가 59등인지, 누가 60등인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험을 봐서 그 시험이 학생의 실력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까? 원래는 20등 짜리 인데 시험이 그를 59등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보지 않으면 어쨌든 본인이나 부모님이나 ‘그저 그래도 중간쯤은 하겠지’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 아닙니까?

 

 

 

죄를 드러내는 것과 없던 죄를 만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율법은 이처럼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몇 등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없던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식으로 하면 율법이 있기 전에는 범함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범함이 없다는 것은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 라는 것, 등수가 매겨지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지 그가 죄를 안 지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죄인이었다 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류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었다는 것으로 충분히 죄인인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적해야 되느냐 하면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죄를 더 짓게 한다는 말과 지금 설명된 것과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은 무엇이 죄인지 그리고 우리가 몇 등인지 밝히는 일을 그 첫 번째 기능으로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율법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엇이 죄 인지를 규정하는 것과 함께 우리가 누구인지를 밝혀줍니다.

 

 

 

율법은 죄의 본질이 죄를 짓는 한 인간이 외부로부터의 강압과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를 좋아하는 존재’라는 것을 밝히는 작업을 합니다. 로마서 7:7로 가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여기서 먼저 죄에 대한 지식을 율법이 얻게 합니다. 그러나 8절 “그러나” 여기부터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롬 7:8-13).

 

 

 

보십시오. ‘이것이 죄다, 이것이 죄가 아니다’ 이것을 밝히면 인간은 곧 생각하기를 “죄가 무엇인지 알면 나는 절대 그것들을 짓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율법이 들어와서 이것이 죄고, 이것은 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밝혀준 이후에 우리가 죄를 죄 인줄 알고도 그 죄를 짓더라는 엄청난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곧 없어질 것을 알고,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을 알고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것을 알고 세상의 것을 탐내면 안 되는 줄을 압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여러분 중에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그래서 신자의 가장 큰 모순과 허구는 정답을 아는데 정답같이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신자가 스스로 애통해 하는 것이 그것이고 남한테 욕을 먹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돈으로 키우고 신앙으로 키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몰라서 그랬다고 핑계거리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알아도 그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산다는 게 그렇지 않아요.” 이 따위로 대답을 합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글을 써서 액자에 걸어 놓는 것, 아무도 그렇게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무서울 것이 없고 부러울 게 없는 자들이고, 죽어도 괜찮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안 죽으려고 발버둥칩니다. 살아서 뚜렷이 해야 될 일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오래 살려고 그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만날 준비를 못한 것을 자기가 알거든요. 그래서 가능한 한 오래 버티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오래 버티느냐고 물으면 아직 회개할 것이 많아서 그런다고 합니다. 그래서 회개할 시간을 주면 그 시간은 세상을 위해서 살고 다시 물어보면 또 아직 못했다는 것입니다. 회개할 시간을 전부 무엇으로 바꾸어 썼습니까? 세상에서 즐기는 데 씁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무서운 것은 내가 죄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죄가 나의 주인이더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를 떨쳐버릴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다시 보시겠습니까? 7: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롬 7:8上) “그러나 죄가”에서 주어가 죄입니다. 죄가 나를 속이고 나를 위협하는데 내가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습니다. 14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것인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아는데 그것을 선택할 자유가 나에게 없더라는 것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 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5-17).  

 

 

 

율법이 선한 줄 알고 신앙 생활을 해야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선택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게 할 실력이 우리에게 없고 아니, 그 소원이 있어도 그것을 행사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나를 주장하고 있고 죄가 나의 상전이요 나는 죄의 노예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확인합니까? 율법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신령한 것을 가지고도 죄를 짓는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분명히 무엇이 죄며 무엇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가를 밝히려고 온 것입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알린 것인데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신령한 쪽으로 사용하질 못했습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가 그 역사를 통하여 증명한 것입니다.

 

 

 

인류는 처음부터 좋은 것을 하려고 해 본 역사가 없습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인류의 문명이 가장 발달하게 된 모든 계기는 모두 전쟁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더 많이 죽이고 어떻게 하면 적군을 더 많이 살상할 수 있는가’ 하는 기술 개발이 인류 문명을 발전 시켜왔습니다. 의학도 언제 가장 발전하느냐 하면 생물학전을 이루기 위하여 생체 실험을 하는 중에 많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독일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습니다.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 점령하고 나서도 일본의 많은 전범자들을 묵인해 준 것 중에 하나는 그 생체 실험의 결과를 자기네가 갖기 위한 보상으로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 인류 역사는 항상 그런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자기의 유익과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억압하고 압제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한 악랄한 방법을 개발하는 것으로써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명의 발전이 전쟁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닙니까?

 

 

 

비행기가 무엇으로 인해 가장 많이 발달합니까? 전쟁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인 부분이 무엇입니까? 전쟁 무기입니다. 이것은 전쟁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쟁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드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이 한 일이 무엇인가를 보자는 얘기입니다. 유엔이라는 것이 있어서 여태껏 잘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상임 이사국 꼭두각시일 뿐입니다. 그 동안 세계를 주름 잡았던 로마든, 영국이든, 미국이든, 이제 일본이든 그 나라들이 언제 평화를 외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역사상 어떤 나라도 평화와 자유를 약속하고 실현한 나라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가진 자의 횡포에 겉만 포장하기 위한 번드르르한 예의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그 동안 쭉 피해를 입고 있었으니까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도리어 우리가 힘이 있었더라면 일본보다 더 악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우리 민족은 일본족 보다 낫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다 똑같습니다. 불행히 우리는 연약한 나라에 태어났을 뿐이지 우리는 힘이 있더라도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문에 나오는 사설이나 시론(時論)등에 ‘이 시대는 왜 이런가, 왜 세상이 이런가?’ 라는 글들을 쓰는 것은 헛된 것들입니다. 누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안 합니까? 우리는 알아도 안 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그때 친일파로 나라를 팔아먹고 거기 붙어살던 사람들이 아직도 경찰계나 법조계나 정부 관리들 속에 남아 있어서 우리 나라가 요모양 요꼴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때 그 사람들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고 해서 오늘날 이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습니까?

 

 

 

우리 중에 아무도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입니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평등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연약할 때만 하는 소리입니다. 힘이 있으면 아무도 그 이야기를 안 합니다. 힘이 있는 사람과 계약을 맺을 때 힘있는 사람이 9개 가지고 힘없는 사람에게 몇 개를 줍니까? 힘있는 사람이 9개 가지고 힘없는 사람에게 하나도 주지 않습니다. 힘있는 사람이 9개 가지고 그 나머지는 생색내는데 써야지 어떻게 없는 사람을 줍니까? 힘없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있는 사람이, 힘있는 사람이 9개 가지고 나머지는 생색내는데 쓰고, 힘없는 사람은 굶어 죽어야죠. 죽는 그날까지 힘있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해야 됩니다.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한다고 생각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입니다. 죄의 노예된 인간의 현 주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노예입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많은 것들을 죄에 대한 지식을 피하기 위해 쓰지 못합니다. 우리의 거룩과 신령을 위하여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교육들을 조심해야 됩니다. 참 불행한 일 중에 하나인데 학교나 가정에서 성교육 같은 것을 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걸 가르쳐 주면 어떻게 이것을 다루어야 되는가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아 요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고 나쁜 쪽으로 먼저 머리가 굴러가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본성이고 재주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의학이 전쟁 중에 발달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요? 생물학전을 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에게 어떤 균을 퍼뜨리면 어떤 환경을 만들면 가장 크게 안간에게 손해가 되는가?’ 어떻게 하면 치명적인 재난을 주는가를 연구하느라고 의학을 공부한 것이 의학 발전에 가장 크게 공헌했지, 어떻게 하면 사람 살리느냐라는 연구는 그렇게 집요하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범죄자들이 어디서 범죄를 배우냐면 신문에 그 잘나게 쓴 신문 기사를 통해서입니다. 글쎄 어떤 악당은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아 이 자식은 바보같이 이렇게 해서 잡혔구나. 여기서 요렇게 하면 빠져나갈 것을” 이라고 깨우쳤답니다. 이것밖에 못 배우는 것이 신문입니다. 그래서 신문에다가 범죄 기사를 그렇게 크게 쓸 필요가 있는가 하는 반성은 마땅히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가장 답답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가장 심각한 문제를 부모하고 의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친구하고 의논을 합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를 왜 부모하고 의논하지 않고 친구하고 의논한다고 생각합니까? 부모가 어려워서? 이해를 안 해줄까봐? 그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자녀들이 갖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범죄의 냄새가 나서 부모에게 의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등록금을 떼어먹는 이야기 아니면, 자기가 잠깐 눈이 맞은 어떤 여자하고 도망하는 이런 음모들이니까  부모에게는 의논하나 마나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그들에게 가장 심각하고 재미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의논을 하면 정당한 답을 해 주는 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고만 고만한 놈들끼리 자기가 해 보고 싶은데 기회가 안 왔던 것이니 해 보라고 그러죠. “야, 뭘 망설여? 사나이가 그런 것 가지고. 도망가.” 그리고 어떻게 되나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영화를 보는 것보다 훨씬 재미가 있거든요. 이처럼 아무도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생명과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조언하거나 생각을 하거나 심사숙고하는 일은 없는 법입니다. 인간은 죄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율법이 밝힌 것입니다.

 

 

 

실제로 율법 자체는 신령한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롬 7:14-16). 율법은 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밝혀진 죄에 대한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준 정보로 더 깊이 더 많이 팔려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결과적으로 범법을 더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본문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면서 죄를 더 많이 지으라고 주신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배우느냐 하면 우리가 누구인가를 드디어 깨닫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유혹한 것이 아니요, 환경이 나를 위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고 죄가 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 뒤에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이 고백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것이 율법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하고 죄로부터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은 궁극적으로 어떤 적극적인 목표를 가지느냐면 갈라디아서 3:21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1-24).

 

 

 

율법은 그런 의미에서 몽학 선생입니다. 몽학 선생은 무엇이냐 하면 옛날 계급 사회 때, 로마 시대의 주인집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하인입니다. 그러니까 이 몽학 선생은 말하자면 뭘 가르치는 선생은 아닙니다.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안내자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한 일이 무엇입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죄를 깨닫지 못하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내가 사망의 몸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의 회개를 동반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때 여러분은 감사와 함께 통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꼭 있지 않습니까? 율법이 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하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요, 율법을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런 부작용이 하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부작용은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 부족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부작용 중의 하나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다” 하는 것 때문에 “그러므로 이제 예수를 믿었으니 율법은 나와 상관없다”하는 식의 사고가 꼭 있습니다.

 

 

 

로마서 8:1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1-3).

 

 

 

율법은 분명히 신령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밝힌 것 중에 하나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율법을 따라 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와 사망의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8:2에 나오는 것과 같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가 구원을 얻었다고 외친다면 이제 신령하게 살며, 거룩하게 살아야 되는데 그 신령과 거룩의 가장 중요한 안내서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는가 무엇을 싫어하시는가’ 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가장 큰 핵심은 마태 복음 22장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했을 때 가졌던 죄의 핵심 되는 본질이 무엇이냐 그럴 때 자기 이외에 어느 것도 인정치 않는 이기심이며 모든 사람을 굴복시켜 그 위에 군림하려는 우리의 욕심들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기꺼이 우리 이웃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사랑의 자리에 섭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율법을 통하여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매일의 삶 속에서 여러분이 과연 생명과 성령을 좇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도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지 확인 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스스로가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은 자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요, 이 세상의 흑암과 불의와 횡포 속에 신자의 책임을 놓고 사는 것이 됩니다. 우리야말로 유일하게 생명을 전하고 위로를 전하고, 그리고 사람을 고쳐 낼 수 있고 의와 거룩을 나눠 줄 수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적인 커다란 사명을 회피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가정과 여러분 자녀 앞에서, 이웃 앞에서, 여러분에게 허락된 인생을 신자답게 살아서 여러분이 마침내 율법을 이루어 내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이 큰 특권들을 누리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과 동행하시고, 여러분을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이 생명과 성령의 법에 동참하고 싶은 마땅한 갈증이 일어나도록 여러분의 삶을 이제부터 믿음 가운데서 지켜내십시오.

 

 

 

 


로마서 34강(롬5:20-21절) 은혜의 왕 노릇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이제 로마서 5장을 마치면서 마지막 은혜의 왕 노릇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귀한 것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로마서 5장은 여러 번 강조한 바와 같이 구원의 확신을 주려는 의도가 그 중심 내용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실존적 차원에서 나를 기준으로 하는 나의 감격, 나의 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어떻게 확고한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어떻게 영원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분명한가, 어떻게 취소 될 수 없는가를 확인시키는 것이 성경이 의도하는 구원의 확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는 의문 꺼리는 이것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모자람대로 그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구원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이것을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를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승리할 것을 분명하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우리는 지난번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내용을 성경 상에 있는 중요한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의 얻은 바 구원과 받은 바 은혜가 어떻게 확고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미련함과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마침내 우리에게 일어나고야 말 것인가를 분명히 하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로 가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유다는 디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 1:1-6上).

 

 

 

많은 이들이 성경 안에서 중요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 기대를 하고 그 안에서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얻어내기 위하여 성경을 펼쳤다가 처음으로 깜짝 놀라고 실망하는 가장 대표적인 장이 이것입니다. 귀중하고 중요한 말씀을 만날 줄 알고 성경책을 폈다가 ‘낳고, 낳고, 낳고’ 하는 것이 반복되는 바람에 그만 기가 질려 가지고 성경을 덮어 버리는 경험이 적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이 마태 복음을 이렇게 시작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할 때 성경은 그 장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긴 족보를 나열합니다. 이 족보들은 보통 우리가 잘 모르는 인물들입니다. 그 중에서 유명한 사람이 있다면 아브라함, 야곱, 이삭 등입니다. 그러나 이삭이나 야곱이 다 위대한 인물이라고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유다 또한 대단한 인물이 아닙니다. ‘유다는 베레스를 낳았다’ 이런 기록은 참 수치스러운 기록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는데 다말은 바로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그리고 뒤로 가면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는데 라합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자기 민족을 배신한 사람이요, 배반한 여인이요, 창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합을 과소 평가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족보를 기록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윗 왕을 강조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모든 이 기록들은 모두가 바로 다윗 왕이 하나의 초점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그런즉 모든 대 수가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마 1:17). 여기서 다윗이 중요한 어떤 분기점이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왜 그럴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다윗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족보가 예수님의 족보이고, 예수님을 이 족보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로 들고 있는 것을 1절에서 확인했습니다. 이제 바로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왜 족보를 나열하고 그 족보 속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을 특별 취급해야 되는가?

 

 

 

창세기 12장으로 가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1-3).

 

 

 

바로 이것이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큰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족보로 대표되고 상징된 인물,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주려고 하느냐’는 것의 상징적인 대표적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바로 우리에게 한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무엇이냐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입니다. 바로 “내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이 족보 속에서 두드러지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특별한 두 인물 중에 하나로 대표케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족보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담고 있는, 이 본문 식으로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왕 노릇 하는 것”을 실제로 보여 준 하나의 역사임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아브라함에게 허락된 그 약속은 그와 그의 후손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고 창대케 되고 복을 받는 것으로 약속되었지만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복을 받고 창대케 되고 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태 복음 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실패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한 역사를 하나님께서 치워버리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를 그 족보 속에 보내셨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 마태 복음 1장 족보의 가장 큰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창세기 16장에서 실패를 합니다.

 

 

 

15장으로 우선 가 봅시다. 창세기 15:4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다시 약속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16장에서 하갈과의 사이에 이스마엘을 낳고 하나님 앞에 일종의 외면을 당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17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1-7).

 

 

 

이 약속을 후손들이 지켜내지 못합니다. 그 후손들이 지켜내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약속을 취소하거나 없애 버리느냐, 실패한 대로 방치하느냐 이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약속한 대로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그것을 마침내 이루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후손으로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 후손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만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 질 수 없으니까 이 후손들을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의 후손에게 허락된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그 후손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이 약속을 마침내 이루게 하시려는 것, 그래서 등장한 족보가 마태 복음 1장의 족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은혜의 풍성함이 또 하나 내재되어 있습니다.

 

 

 

마태 복음 1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십시다. 우리는 족보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만 아니라 다윗을 또 하나의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 다윗이냐 하면 그것은 이런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불러냄을 받아서 가나안 땅 남의 나라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러한 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한 위인을 상고할 때에 ‘그 사람이 얼마나 위인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에 대한  묘사가 달라지는데 그 묘사에서 가장 다른 게 뭐냐하면 그 사람이 한 일이 조금 괜찮은 일이면 그 일만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조금 잘한 것 보다 더 잘한 인물일 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디에 살았고,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아주 위대한 인물일 경우에는 아예 그의 족보를 다 캡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한 일이 당 시대에 씨를 뿌리고 거둔 것으로는 너무 크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몇 대 전에 아니 몇 십대 전부터 어떤 시작이 있어서 결국엔 그것이 쌓여서 오늘날 이 사람 당대에 임하는 큰 일이 생겼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위인을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부터 이 족보를 따져서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그 앞에 있는 족보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를 낳고, 유다는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한 이 족보들이 다윗 왕을 있게 했느냐 말입니다. 유다는 며느리와의 사이에서 베레스를 낳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고 모압 족속입니다. 그 시아버지되는 아비멜렉이 이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모압 땅으로 이주해 가서 거기서 얻은 며느리인데 다 죽고 시어머니 하나만 남아서 시어머니하고 이 룻하고 돌아와서 보아스와의 사이에서 오벳을 낳는 것입니다.

 

 

 

결국 이 족보에서 가장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다윗이라는 왕이 왕이 될 조건이 그 앞에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앞뒤에 아무도 왕족이 일어날 만한 무슨 조건과 준비를 한 선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단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복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 이유만으로 다윗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또 어떤 뜻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내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를 창대케 하리라.” 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나와 우리의 죄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면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불러내신 그의 자녀들을 왕위에 앉힌다는 상징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6절부터 다시 봅시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마 1:6-11).

 

 

 

그 뒤를 이은 왕족들이 모두 실패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나라는 망합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왕가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대로 후손들을 복 주시고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조건이 아닌 것으로 왕으로 앉힙니다만 그 왕위에 영광을 누릴 힘이 없어서 실패합니다. 세상의 힘을 가진 사람에게 지고 맙니다. 실패해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 갑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12절,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 1:12-16).

 

 

 

뒤 족보는 앞의 족보보다 더 심합니다. 앞에서는 망해도 왕에서부터 망하는 중이고 악해도 왕으로부터 악해 가는 중인데 뒤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는 이 왕족의 족보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요셉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따라 모든 민족 백성은 자기 본향에 가서 호적하라고 해서 등기를 하러 베들레헴에 갔을 때, 그는 아무런 유력한 인사가 아니었으므로 동네에서 그가 오는 것을 환영도 안 하고, 하나의 사건으로 등장도 안 하고, 아무런 영접조차 안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굿간에 가서 머물러야 되는 지경까지 몰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받은 복을 유지할 힘이 없고 저들의 힘으로 영광을 탈취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윗 왕을 세워 우리에게 허락 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이 족보를 끝내지 않고 이 실패대로 버려두지 않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고 다윗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시려고 오시고 드디어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분명한 은혜의 왕 노릇을 보십니까?

 

 

 

다윗에 대해서는 사무엘하 7장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갖는 왕권이 다음과 같은 상징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 사무엘 하 7:8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類)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삼하 7:8-16).

 

 

 

다윗 왕에게 준 왕권은 상징이 다른 것입니다. 사울 왕하고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힘과 자기의 충성도에 따라서 그 왕권이 유지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왕권은 실패해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패하면 하나님이 삶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를 하실 것이지만 그 왕권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왕권입니다. 다윗의 왕권이라면 다윗과 그의 가문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구원하려는, 하나님이 택하신 우리 모든 자녀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 복음 1장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설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이 약속을 이루시는 그 왕권을 다시 확립하고 영원히 세우시는 은혜의 왕 노릇, 그 승리를 보는 것입니다.

 

 

 

이사야 9:1에 있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1-7).

 

 

 

이것이 은혜의 왕 노릇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위(位)라는 것은 특별히 다윗, 다윗 왕가 이것을 특별히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약속한 그 약속을 특별 취급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네 자손의 하나님이 되고 네게 허락한 것을 지키고야 말겠다. 네 위를 영원토록 견고히 하리라.’ 우리에게 허락한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고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 안에 말씀하시고 우리 안에 필요한 모든 거룩한 것으로 분발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리는 미련합니다. 우리는 완악 합니다. 게으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영혼이 주의 손에 붙잡힌 바 되고 그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간섭하는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간섭을 받으셔야 됩니다, 여태까지 지나온 나날들을 돌이켜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지키신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고 앞날도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사 우리에게 허락한 이 모든 복들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을 여러분은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약속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 것이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반대와 거부에도 이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부하시면 여러분이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인생의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두들겨 맞는 일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충성하여 우리에게 허락된 이 약속들, 하나님의 이 복된 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풍성하게 나타나는가 경험하시고 우리의 미련함과 연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실패되지 않는 허락된 구원과 은혜를 인하여 담대한 믿음 가운데서 승리하는 결심과 그리고 끊어지지 않는 감사와 찬송이 여러분 생애에 이어지기를 권합니다.

 

 

 

 


로마서 35강(롬6:1-2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롬 6:1-2)

 

 

 

로마서 6:1-2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의 구원에 관한 설명에 대해 아주 중요한 하나의 시험이 되는 질문입니다.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구원에 관한 설명을 제대로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은 1절과 2절의 질문과 답에 적당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셈입니다.

 

 

 

기독교 구원에 관한 신앙의 핵심이 되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우냐 하면 거기에 인간의 원인이나 자격, 조건을 묻고 있지 않고 하나님이 거저 주신 선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어려움이 있습니다. 거저 주신 선물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그렇다면 도대체 힘써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열심을 낼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조건과 자격을 묻지 않는다면 열심을 낸 사람과 열심을 내지 않은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는 뜻이 되는데 만일 차별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열심을 내서 신앙생활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기 있는 식으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였느뇨?”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이 말은 절대 이런 뜻은 아니라고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조건과 자격으로서의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식의 표현을 여러 번 들으셨을 줄로 압니다. 전도를 하는 이들이 전도를 할 때 “마음을 열고 결단을 내리십시요”라고 하는 표현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줄로 압니다. 마음을 열라는 말과 결단을 촉구하는 이 두 가지가 본인의 원인으로써 작용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마음을 열었고, 나는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다”하는 것이 그의 구원에 관한 원인과 조건으로 작용을 하게 되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하는 질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나는 예수를 믿었고, 나는 예수를 선택했고, 너는 안 믿고, 안 선택했다는 식이 됩니다.

 

 

 

거기에 도대체 예수를 열심히 믿는 것과 열심히 믿지 않는 것의 차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열심을 부려야 한단 말입니까? 하는 이런 질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질문이 나올 수가 없다면 그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을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 문제, 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구원에 대해 자기가 이해하는 것이 정말 성경이 이야기한 대로 된 것인지, 틀리게 이해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아보는 것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의 구원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생각할 때, 도대체 내가 열심히 신앙생활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공짜라면 내가 이 시간에 왜 열심을 부리고 있어야 되는가라고 생각하기보다 나가 놀아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 내가 노력한 것의 결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적인, 성경이 이야기한 구원관을 들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식의 의문이 생기지 않는 구원관을 갖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인과율에 근거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 행위에 근거한 구원관이 되며 그것은 여러분이 구원 얻을 만한 어떤 조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은 아닙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못하는 것과 구원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을 자기가 오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이것입니다. ‘나는 회개했다’, ‘나는 결단했다’, ‘나는 예수를 영접했다’,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런 것들이 여러분이 구원 얻은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은 구원 얻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구원 얻었기 때문에 취해진 결과들인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할 때 등장하는 “마음을 열고 결단하십시오”라는 표현은 원래 우리식 표현법이 아니고 서양 표현입니다. ‘마음을 열고’라는 데 있어서 ‘open mind'라는 이 mind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마음-감상적인 것, 그래서 가슴을 연상합니다만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이 min d 는 머리입니다. 그것은 지성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open mind, 즉 우리말로 표현해서 ‘마음을 여십시오’라는 것은 우리가 쓸 때는 ‘거절하려는 거부감과 반대하려는 고집을 내던지시고 제가 하는 말을 쉽게 받아들여 주십시오’라는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서양인들에게 있어서 이 open mind라는 것은 그런 뜻이 아니라 ‘당신이 알고 있고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이 사실의 전부가 아닙니다’라는 사고와 인식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경험과 분석, 실험에 의해서 분석되어지는 영역, 즉 인간의 이성으로 분석되거나, 감각되거나, 인식되어지는 영역이 모든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open mind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영역, 우리가 감각하지 못하는 영역, 거기에 더 큰 사실, 더 큰 영역, 더 큰 진실, 더 큰 절대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마음을 열고’라는 설명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무조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주십시오. 또 결단을 해주십시오. 예수를 믿기로 이제부터 결심을 하겠습니다”라는 어떤 의지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고 살아갔던 세상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영원한 나라, 영원한 세상, 거룩하고 의로운 이 세상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둘을 동시에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둘중에 하나밖에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잡아야지 둘 다 잡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결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이 마치 내가 예수가 누구인 줄 알고 나는 그를 선택했다는,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구원에 분명한 하나의 이유와 원인과 자격과 조건으로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럼 무엇이 없어지느냐 하면 내가 왜 이렇게 열심을 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의문, 내가 노력하지도 않고 열심을 내지도 않고 아무 자격도 없고 조건도 없는데 하나님이 공짜로 구원을 주셨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열심을 부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와야만 여러분은 제대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을 들은 것이 되지 그런 질문이 나오지 않고 나는 믿었으니까, 나는 회개했으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니까, 나는 당연히 구원을 얻었고 넌 안했으니까 당연히 지옥간다고 생각한다면 이 질문은 등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식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소유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특별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구원은 어떤 경우에도 성경의 로마서 5:8로 대표되는 것같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는 것으로 얻어진 선물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은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을 알지도 못했고 구원을 시켜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구원이 결과 될 어떤 준비도, 노력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이미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죄에서부터 건져내신 것입니다. 내가 회개하기 전에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사실을 인식하기 전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구원의 필요성을 알고 구원을 위한 어떤 준비를 하라고 하면 그것을 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합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인데요. 그래서 우리는 이런 부수적인 문제를 하나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즉 구원의 확신은 어떻게 근거되고 정리되어야 하는가? 그럴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무엇을 했는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확신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든가, 나는 믿었다든가, 나는 회개했다는 것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확신하는 근거로 삼으시면 안됩니다. 성경이 주는 확신은 여러분이 이제 무엇이 달라졌는가입니다. 이제 무엇이 달라졌는가?

 

 

 

즉 영적인 감각이 있는가로만 여러분의 구원을 확인합니다. 영적인 감각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즉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는가를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나 거룩한가를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움과 그리고 매어달림이 있는가를 보십시오.

 

 

 

많은 이들이 자기의 구원을 확인하기 위해서 원인을 찾아갑니다. 사람이 누구나 어떤 결과를 확인하는 법은 원인을 확인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만원을 들고 나갔는데 저녁에 지갑을 열어보니까 이천원밖에 안 남았어요. 그럼 팔천원을 쓴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어봐도 점심 삼천원어치 사먹고, 뭐하고, 뭐하고 육천원밖에 쓴 게 없고 이천원이 아직 모자라요. 그러면 어떻게 처리합니까? ‘잃어버린 모양이다’ 이렇게라도 처리를 해야 되는 것이 인간 사고의 어떤 약점입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죠. 그래서 결과를 확인하려면 원인을 확인하고, 원인을 확인하려면 결과를 확인해야 합니다. 둘은 떨어질 수 없고 묶여 다닙니다. 그러나 구원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원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입니다. 우리가 독생자를 달라고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에 거기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것입니다. 결과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이라는 결과를 확인하려 하면서 우리 안에서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내가 구원을 얻을 만한 어떤 조건이 있는가를 찾아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즐겨 회개를 했다든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든가, 열심히 믿기로 결심을 했다든가, 무슨 선행을 했다든가 하는 자기 원인을 자꾸 만듭니다. 이것은 다 원인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예수를 통하여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생겨난 영적인 인식이 우리를 바꾸어 놓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회개마저도 사실은 결과이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도 사실은 결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세상에 나와서, 그들에게 천국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버려 둬. 나 이렇게 살다 지옥가게.” 그러나 그들은 지옥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것이 뭐 조금 더 뜻뜻한 방에 가서 앉아 있는 것인 줄로 압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모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너 그렇게 살면 어떻게 해” 그러면 “너나 천국가, 난 천국안 가도 좋아”라고 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대하여 전혀 인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디어 회개가 생기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붙잡는 것입니다. 죽어 있는 영혼은 예수가 누구인 줄 모르고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결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끼리는 그가 회개했다든가 예수를 영접했다는 것으로밖에는 그가 신자인지 아닌지 분간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개했다든가, 예수를 영접하기로 했다든가 예수를 믿기로 했다고 그러면 그 사람을 신자라고 분류합니다. 다만 그것이 신자가 된 원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는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확인하고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느냐면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그 감각이 있으면 우리는 살아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편치 않으면 여러분은 분명히 구원 얻은 사람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 앞에 두려운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의 위치에 대한 감각이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구원을 얻은 사람입니다. 구원 얻은 사람과 구원을 얻지 않은 사람은 우리의 원인으로 판별되지 않으며 지금 결과로밖에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이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들어와서 이제 우리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하는 질문이 우리의 구원,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되는 질문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나오지 않은 구원관을 갖고 있다면 그는 아직도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을 오해하고 있는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에 대한 답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고 이 자리에 왔으니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같이 또 모든 것을 얻으면 됐지 우리가 노력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관과 배치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다.

 

 

 

2절에 이렇게 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이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분문에서 우리라는 말이 맨 앞에 옴으로써 우리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에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이 이 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되는 단어가 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에게 이유와 원인과 조건을 묻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가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여기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죄에 더 이상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을 말합니다. 신자란 누구냐? 신자의 지위, 신자의 위치, 신자의 신분 이것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신자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죄에 더 이상 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로마서 5장에서 쭉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구원 얻은 방법에 대하여 아담의 후손이었던 것과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로운 후손으로서 설명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왜 다 죄인이었습니까?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죄인이었습니다. 이제는 왜 다 의인으로 태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조 아담은 죄인이기에 아담의 후손도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의인이기 때문에 그의 후손도 다 의인입니다. 이 족보에서 이 족보로 바뀌는 것은 물론 회심과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크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아담의 족보를 끊고 새로운 족보를 시작하는 인류의 두 번째 시조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까?

 

 

 

예수를 보내어 이제 그 후손들, 예수로 말미암는 새로운 후손을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죄짓지 않고도 아담이 우리의 선조였기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났듯이 이제 우리가 아무런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고도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우리의 시조가 됐기 때문에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의 법칙입니다. 예수를 보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죄의 족보에서 우리를 끊고 새로운 족보에 들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5장의 이야기였습니다. 죄가 왕 노릇하던 데서부터 우리를 꺼내어 이제 의와 은혜가 왕 노릇하는 데로 옮겨놓지 않았습니까?

 

 

 

골로새서 1:13로 가 봅시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서 그 사랑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내가 나를 깨끗이 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나라에 있느냐? 은혜가 왕 노릇하는 나라에 있느냐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나라에 있으면 그는 죄인으로 시작해서 점점 더 죄를 짓다가, 점점 더 죄가 충만해져서 결국은 형벌의 자리에 갑니다. 은혜가 다스리는 나라에 있으면 그가 은혜 아래서 의와 거룩으로 자라나서 의와 거룩의 부요함과 풍성함으로 열매 맺어 나갈 것입니다. 다른 법칙, 다른 통치권의 나라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으로 가 보십시다. 이것을 권세와 영역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은 주의 깊게 살펴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6:16입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이 주님 앞에 부름받던 장면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6-18)

 

 

 

여기서도 구원을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그 눈을 뜨게 합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통치권 아래 있느냐와 어느 영역에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구원을 감동과 깨우침과 설득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의 파워게임입니다. 한 쪽의 점령지를 한 쪽에서 힘으로 격파하고 빼앗아내는 것입니다. 사단의 휘하에 있던 우리,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노예생활 하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 주인을 격파하고 우리를 그의 소유물로 빼앗아 온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 예전에 우리 주인이었던 죄와 사망과 사단에 대하여 우리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를 이길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여러분 잘 아시는 이 유명한 선교 명령도 그 개념이 이와 방불하다는 것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8:18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일차적으로 설득과 깨우침의 싸움이 아니며, 감동과 결정의 싸움이 아니며, 힘이 있어야만 되는 싸움이기 때문에 18절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로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권세를 바탕으로 구원이라는 것과 전도라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낸 사람들인 것입니다. 죄 가운데서 죄의 노예로 있던 우리를 건져내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사 우리를 공짜로 건져 주셨습니다. 죄 아래 있던 우리를 어떻게 하려구요? 다시는 형벌에 이르지 않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고 이제는 의에 종 노릇하고, 거룩을 위하여 살고, 영광과 영원과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꺼냈습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멸망케 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꺼내오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 멸망과 죽음밖에 없습니다. 이 꺼내온 힘과 일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고 우리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요청하지도 않았고 돕지도 않았습니다. 공짜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만 초점이 모아지고 있느냐 하면 가만 있어도 해 주었다라는 데에만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 있고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조건과 자격이 없는데도 나를 꺼내 주었으니까 또 들어가면 또 꺼내 주겠네?’ 그러나 눈을 넓혀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어디서 무엇 때문에 꺼냈습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멸망과 형벌을 면케 하기 위하여 꺼냈으며, 우리로 하여금 의와 거룩의 열매를 맺어 영원과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긴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에만 초점이 있다구요?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이 은혜를 입었다는 단 그 하나에만 초점이 모아져서 또 들어가면, 또 꺼내 주겠네 이 따위 말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신자들이 갖는 구원관의 약점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약점이 무엇이냐면 구원이란 멸망받지 않는 것, 형벌을 받지 않는 것, 이런 부정적인 차원밖에는 생각을 안 합니다. 구원이란 의를 위하여, 거룩을 위하여 이제부터 우리가 영광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제 의와 거룩과 생명과 진리와 영광과 영원을 사는 복된 삶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합시다. 거지가 병들어서 길거리에 누워서 덜덜떨고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불쌍히 여겨서 데려다가 다 씻기고 병을 낫게 하고 좋은 옷을 입혀서 좋은 집에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가 생각하기를 ‘내가 길바닥에 누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공짜로 나에게 새옷을 주었네.’ 그래서 옷 다 찢고 또 가서 누워서 생각하기를 ‘또 깨끗하게 해 주겠지.’ 물론 또 깨끗하게 해 주실 겁니다. 원래 처음부터 그 거지에게 무슨 조건이 있어서 해 준 것이 아니니까. 그러나 보십시오. 그럼 무엇밖에 안되느냐면 새옷 입었다 찢었다, 또 새옷 입었다 찢었다 하는 것입니다. 이후에 무엇이 없습니까? 새옷 입고 들어와서 연애도 하고 좋은 친구도 사귀고 공부도 하고 훌륭해지고 그것은 하나도 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만 있어요? 꺼내어서 또 목욕하고 새옷 입고 또 찢고 뒤집어 쓰고 밤낮 그런다면 얼마나 밑지는 일입니까? 그 얼마나 미친 짓입니까? 여러분들 이야기입니다.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은 또 갈까, 말까? 내가 이 죄를 지어도 또 용서해 주시겠지 뭐, 회개하면 용서해 준다고 했으니까 하는 그 갈등입니다. 이제는 이쪽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원을 얻어서 시작된, 영광된 앞으로의 나아감이 너무 없습니다.

 

 

 

이 로마서 6장에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6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로마서 6: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17-22).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이 하셔야 할 일이 무엇이냐면 여러분이 공짜로 얻고 노력한 것없이 얻은 것이지만 그 얻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고 그 삶을 살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짜로 얻었고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얻었다는, 여기에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란 죄와 사망의 종 노릇하던 데서 벗어나서 이제 의와 거룩과 영광과 생명과 진리의 자리에 들어온 자입니다. 그의 앞으로의 신자의 삶을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적인 문제를 하나 덧붙여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의와 거룩과 생명의 나라에 들어왔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안 짓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신자도 죄를 짓습니다. 여기에 커다란 갈등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여기 있는 이 말씀을 오해해서 예수를 제대로 믿고 구원을 제대로 받은 이들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그러는데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답입니다. 그것을 다른 쪽으로 적용하면 무슨 문제가 되느냐면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병에 절대로 안 걸린다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데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인생살이에서 한 번도 실패를 안한다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를 짓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다르냐면 이제는 죄가 우리를 장악하고 주인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의 집에 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의의 집에 거합니다. 그 차이는 죄의 집에 거할 때는 돌아다니면서 좋은 일을 하다가도 결국 집으로 돌아가면 거기가 죄의 집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은, 혹 좋은 일을 하다가도 결국에 끝은 죄입니다. 신자들의 차이는 무엇이냐면 돌아다닐 때는 죄를 지어도 결국 돌아오면 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끝은 꼭 회개를 하고 거룩해집니다. 죄의 종 노릇하던 때는 죄의 안에 살았고 죄의 영역에서 상주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가 되면 무엇이 달라지느냐면 죄를 아직도 짓는 것이 사실이지만 죄를 짓는 것이 계속되거나 그것이 그의 주된 삶의 경향이지 않고 싫어하고 벗어나려고 발버둥칩니다. 그래서 해를 더하면 더할수록 여러분은 죄 짓는 곳에서 훨씬 멀어진 자신을 발견하고 그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괴로운 자신의 심증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다른 점입니다. 그럼 왜 아직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느냐?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로 갑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4-16).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했다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도 이 없앴다는 말을 destroy(멸망시켰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원어하고 다릅니다. 원어의 개념을 제대로 하면 사단을 꼼짝 못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적당한 직역을 제가 잘 못하겠는데 영어 표현으로 put out of action입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꼼짝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옛날에는 왕같이 통치하면서 우리의 왕이었고 돌아다니면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직접 손을 댔지만 지금은 저쪽 구석에서 양동이 들고 벌 서고 있는 것입니다. “너 양동이 내려 놓으면 아주 죽어.” 그래서 꼼짝못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전부 사단한테 꼼짝못하고 있다구요. 사단이 우리에게 눈을 흘기면서 “이리로 와, 안 와” 그러면 우리는 지금도 빌빌거리며 가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도 유혹을 당하고 그 위험에 굴복하곤 합니다. 실상 사단은 우리에게 힘을 못쓰며 그는 우리의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옛 습성이 있고 옛날에 하도 당했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사단에 대하여 겁을 먹고 죄에 대한 유혹과 그 버릇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나아집니다.

 

 

 

생명이 아닌 것들은 해가 나면 나서 썩고 비가 오면 와서 썩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것들은 비가 오면 비가 와서 크고, 해가 나면 해가 나서 크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불어서 큽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들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나며 완성되며 그 영원한 나라에 가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준비되며 완성되며 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이며 지금 있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공갈치지 못하며 손대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주저앉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발하게 하는 것들인 줄 이제 여러분은 기억하시고 신자로서의 의와 거룩한 삶을 열심히 사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으로 우리가 이제 의와 거룩을 위하여 열매 맺게 되었고 승리의 삶과 영광된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옛 성품을 벗어버리고 열심을 품고 그리고 근신하며 깨어 있어 경건을 연습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부르신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 영광스러운 자리에 실패 없이 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구원 얻은 인생의 기쁨과 자랑과 보람들을 체험하고 누리며 신실한 종으로 이 남은 여생을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36강(롬6:3절) 세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3)

 

 


이 본문 3절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고 또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말 성경 번역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많게 번역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그 번역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우리가 이 본문대로 풀이를 하자면 “예수님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죽으심에도 함께 동참했다” 일차적으로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그와 함께 죽음에 동참했다”는 이 말씀이 본문에 등장한 이유는 잘 아는 대로 1절에 있었던 중요한 질문, “그런즉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의 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 구원 얻었다고 우리가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구원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자격이나, 조건이나, 근거가 없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필요성도, 준비도, 노력도, 결심도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과 은혜로 값없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결국 필요한 것은 은혜로 주시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럴 수 없다고 하고, 그럴 수 없다는 이 이야기 속에는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답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왜 그것이 불가능하냐?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라는 말에서 세례하는 표현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예식으로 행하고 있는 세례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식을 행하는 이 세례가 무슨 내용을 의식화한 것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가시면 세례에 관한 성경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베드로전서 3:20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물은 노아의 홍수 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그 물입니다. 노아의 홍수입니다. 그 홍수가 분명히 심판하는 것으로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는 표이고, 곧 세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라는 것은 노아 홍수라는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때에 그 뜻이 밝혀질 것입니다. 물은 우리를 구원하는 표라고 합니다. 그런데 물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합니까? 노아 당시 물은 분명히 심판용이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뜻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세상에 악한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중에서 노아와 그 가족들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악당들이 사는 곳에서 착한 사람을 구원하려면 그 한 사람을 악한 곳에서부터 데려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의 방법은 그 착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 악당들을 다 죽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은 악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심판의 방법이었지만 노아와 그의 식구들 쪽에서 보면 그들이 구원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물은 심판자들에게 심판의 방법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의로운 자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방법이었는데 이 구원을 얻는 방법에 이런 뜻이 하나 더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노아의 방주가 없었다면 그들도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은 모든 것을 삼키고 그 아래 가라앉히지만 배는 물 위에 뜹니다. 그래서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이 물로 말미암는 심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방주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노아 홍수에 관한 사건을 통하여 세례에 관한 중요한 힌트를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곧 세례란 무엇이냐 하면 분리와 단절입니다. 죄악된 것, 더러운 것,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영역에서의 탈출입니다. 거기서부터 탈출하여 어디로 가는 것이냐면 죄와 사망에서 탈출하여 의와 거룩과 영생으로 가기 위한 방법이 세례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세례라는 것은 우리가 다른데 속하기 위하여 원래 있었던 소속으로부터 이탈되어 나오는 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0:1로 가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이것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할 때 애굽을 탈출해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하여 저들이 홍해를 건넙니다. 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2절에 있는 바와 같이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조금 더 이해에 근접합니다.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였습니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홍해는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애굽 백성들에게 종으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가서 죽는 것입니다. 죽으면 노예의 신분도 끝이 납니다. 죽으면 더 이상 그 신분이 연장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쪽 약속의 땅, 곧 가나안 입장에서 보자면 새로운 민족이 홍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속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부터 해야 되느냐 하면 원래 소속되었던, 그들이 노예로 있었던 애굽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됩니다. 거기서 탈출을 해야 됩니다. 그 사건을 홍해를 건넌 사건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세례라고 이야기합니다.

 

 

 

처음 그가 소속되어 있던 곳에서부터 이탈하여 새로운 소속으로 연합하기 위한 이 방법을 세례라고 하는데 이 일에 한 가지 난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홍해라는 바다에서는 멀쩡한 인간, 곧 자연인은 거기서 죽고 다시 아무도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노아의 홍수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이 죄인 된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소속되기 위해서는 저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와야 됩니다. 악한 세력, 곧 죄와 사망의 소속으로부터 나와 새롭게 의와 거룩과 영생에 소속되어야 하는 이 일에 있어서의 난제는 앞의 소속에서 이탈하기 위하여 죽은 다음에는 새로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인들을 죽이고 의인만 남게 할 때, 새로운 소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방주 속에 들어가야 했듯이 출애굽 사건에서는 홍해를 건너는 것을 모세에게 속하여 건넜다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모세의 입장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이 됩니다. 이 사건에서 모세의 홍해사건이 왜 가능하냐 하면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서 살았지만 그가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교육받다가 자기가 히브리 민족인 것을 알고 자기 민족 편을 들었다가 쫓겨납니다. 그래서 광야로 먼저 갔었습니다. 육로로 건너갔지만 홍해를 건너 광야라는 곳에 그는 건너 갔었던 자이고, 또 그의 백성을 꺼내기 위해 건너온 자입니다. 즉 모세는 어디에 속한 자로서 오느냐면 홍해를 건너가 있는 자로서 이들을 꺼내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죽고 끝날 수만은 없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금 시작은 애굽에 소속되어 있고 약속의 땅에 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그들 스스로는 못 건넙니다. 그러나 모세가 가서 그들을 인도하여 냄으로 모세에게 속하여 이 탈출과 새로운 소속이 가능해졌다라고 설명하는 것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의 출애굽 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례 문제에 관한 중요한 몇 가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란 예전에 소속된 곳에서 이탈 분리되어 결별하고 새로운 곳에 소속되고 연합하는 이 일련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는 우리 혼자서는 옛 소속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소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어떤 이 속에 들어가서 이 일이 이루어진다고 성경이 세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에 어떻게 증거되어 있는가 보십시다. 고린도전서 12:12입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3).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13절 말씀인데 여기서 성령 세례는 성령이 부어진, 성령을 부어준 세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 우리말보다는 영어가 원문의 그리이스어와 더 유사하기 때문에 영어 표현을 쓰자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 그 세례는 여러 가지 표현을 씁니다. 세례를 베푸는 이가 누구인가 그러면 조금 전의 노아 홍수로 이야기하자면 baptized by God the Father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고 방주에 넣어서 그 심판에서 저들을 구합니다.

 

 

 

누가 세례를 베푸는가? 이 고린도전서 12:13은 baptized by the Holy Spirit 입니다. 성령께서 세례를 줍니다. 성령께서 이 세례를 주면 그들을 어디로 보내는, 무엇에서부터 어디로 보내는 세례입니까? into the body of Jesus Christ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내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세례라고 할 때 보통 말하는 성령 세례는 baptized with 입니다. 누구를 받았느냐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부어지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with the Holy Spirit로 쓰지만 지금 여기서 쓰는 것은 세례를 누가 어디로 주었느냐입니다. 고린도전서 12:13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내는 세례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그런 의미에서 어디로부터 어디로의 위치 이동이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2:12로 가서 조금 더 분명한 표현을 봅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여기서 세례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탈출하여 어디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례 속에는 그러기 위하여 누구 안에 소속되는 것도 말합니다. 영어 표현을 보십시오. you라는 말의 복수에 고어를 씁니다. ye were buried with him in baptism.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데 어떻게 함께 죽을 수 있느냐 하면 in baptism, ‘세례로 말미암아’입니다. 세례라는 것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켰기 때문에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죽음을 같이 맛볼 수 있었고 또 함께 살아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례라는 말이 크게는 우리가 죄와 사망의 영역으로부터 이제 하나님의 복 주시는 영역으로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러기 위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어야 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로마서 6:3로 돌아와서 이런 모든 설명을 가지고 본문을 살펴봅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우리가 보면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영어로 확인을 해 보면 know you not that so many of us as were baptized into Jesus Christ 그러니까 앞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이라는 것을 제대로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러한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제 그와 합한 자이기 때문에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were baptized into his death입니다. 그와 연합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죽으신 것에 나도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는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면 하늘 보좌 우편에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데 또 어떻게 죄 속에 있느냐는 말입니까? 우리는 죄 속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거기서 주님이 우리를 주님과 연합시켜 가지고 우리를 죄 가운데서 죽게 하고 그리고 하늘 보좌 우편에 함께 우리를 앉히셨습니다.

 

 

 

다시 에베소서 2장으로 갑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을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4-6).

 

 

 

허물로 죽은 우리를 어떻게 살릴 수 있었다구요? 그리스도와 함께입니다. 왜 그리스도와 살려야 됩니까? 출애굽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려면 우리 혼자로는 못합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주님이 연합해서, 고린도전서 10장식으로 이야기하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무슨 세례를 받아야 됩니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습니다. 원래 우리가 누구의 소속이었습니까? 죄와 사망의 노예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아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세례를 받아 그와 연합한 다음에는 무슨 세례를 받습니까? 이 세례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의 이해를 위하여 나누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속된 영역,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의와 거룩과 영생의 자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나오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있는 곳에 오신 주님께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천국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아는 갈라디아서 2:20에 있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은 이런 차원인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태복음 28:18 이하의 약속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신자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바울을 보고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는냐?” 신자들을 핍박한 것이 주님을 핍박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와 주님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영광된 구원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주님 안에 내포시키시고 우리가 전에 소속되었던 영역에서 끄집어내사 의와 거룩과 영생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다시 그전 거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가능한 질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설명이요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우리 자신을 설명하고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벗어나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키는 세례를 받게 하신, 성령을 통한 이 놀라운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이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이냐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시켜서 이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승귀에 우리가 함께 있게 됨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예전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기 전에는 우리가 아담 안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어도 아담에게 일어난 일이 모두 우리에게 결과된 것같이, 즉 아담의 신분이 우리의 신분이었던 것같이 이제는 예수님께 우리가 소속되어 있어서, 아담으로부터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께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일어났던 것, 예수님의 신분에 관한 것은 다 우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려면 예수님이 취소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신분과 예수님의 지위가 취소되지 않고는 우리의 구원은 최소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설명들을 자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0에서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은 우리의 무엇이 된다구요?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의로우신 것은 나도 의로운 것이 되고 예수님의 지혜는 내 지혜고 예수님의 영광은 내 영광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구원은 그의 결심과 그의 노력과 그의 믿음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베푸신 일에 근거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무엇으로 확인해야 되느냐면 확신과 감동으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진 사실로 확인해야 됩니다.

 

 

 

골로새서 2:9로 가면 “그 안”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우리 보고 충만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충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충만해졌다고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충만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고 있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충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우리의 충만한 것을 우리가 다 느끼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다 익숙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진 것을 얼마나 누리고 사느냐의 싸움이지,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자의 신앙은 결국 사실을 얼마나 확인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우리에게 되어진 것이 무엇이냐를 아는 싸움,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이라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가 얼마나 알고 얼마나 사용하느냐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울었다가도 다음날 딴짓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기분과 체험과 느낌으로 자신을 근거한다는 것은 믿을만한 게 못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일련의 내용들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이 사역을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복된 소식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것, 저것을 하라고 전해진 소식이 아니라 우리가 이제 무엇을 얻었고 우리에게 되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전해 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여러분의 신자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 존전에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이제 어떻게 지혜롭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주를 만날 준비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제 여러분에게 남은 것은 지혜에 대한 싸움과 성실에 관한 싸움이 남았다는 것을 확인하셔서 부디 승리하시는 신자들이 되시길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하시고 주님 안에 부르사 우리로 주님과 함께 일으킴을 받고 하늘의 승귀됨을 얻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과 약속된 운명을 기억하고 이제 지혜롭게 성실히 우리의 삶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헛된 것들과 낭비하는 것들로 인생을 허송세월하지 말게 하시고 근신하여 깨어 있고 부지런하고 그리고 경건을 연습하며 주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우리의 영광된 자리에서 칭찬과 박수 속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로마서 37강(롬6:3-4절) 죄에 대한 죽음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3-4)

 

 

 

로마서 6장에서 설명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은혜가 갖는 정확한 뜻을 이해하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된 전적인 이유입니다.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노력이나 시작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이고 이유이고 능력이며 은혜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6장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무엇 때문에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애를 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이런 질문에 부닥치게 되고 그 문제야말로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질문거리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할 수 없는 이유를, 은혜가 왜 왔느냐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그 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더 죄에 거할 수 없느냐 하면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죄에 죽었느냐?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나와야 되고 새로 들어가야 되는 곳, 즉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부터 나오고 의와 거룩과 영생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되는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주님과 연합시켜서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나오기 위한 죽음, 의와 거룩과 영생의 영역에 들어가는 부활을 주님이 하시고 또 우리는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이 일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바로 그 일을 내가 하지 않았고 주님이 하셨다는 것 때문에 ‘은혜를 더하기 위하여 죄에 거하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은혜란 우리의 노력이나 근거없이 공짜로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된 방법인 것이 사실이지만 은혜가 더 크게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은혜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방법을 쓰게 됐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부터 의와 거룩의 영역으로 옮겨가도록 하기 위하여 공짜로 되는 이 방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죄로부터 나오고 의와 거룩과 영광으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동원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어떤 의도와 어떤 목적을 가졌느냐는 자꾸 외면되고 공짜로 됐다는 것만 강조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까 우리가 무엇을 할 필요가 왜 있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빠져들게 된다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6장을 통해 바로 그 은혜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냈고 의와 거룩과 영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할 때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라는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 어떠한 국면에서의 연합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그러니까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그의 장사 지낸 바 됨에 연합되어 있고 그의 부활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이 세 국면에 연합되어 있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체험이 아니고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5장을 해오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그와 연합되어서 죽음과 부활의 결과를 맛보고 있지 우리 혼자서 죽음과 부활을 만들어내거나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고 예수님만이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난 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관적이거나 체험적 사건이 아니고 객관적 사건이며 우리에게 되어진 어떤 사실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이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로마서 5장에서는 대표 원리로 설명을 했습니다.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를 그때 보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거나 우리가 죄인이라는 감각이 있지 않음에도 불과하고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했습니까?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어떤 의식을 가지거나 어떤 결정을 하거나 어떤 능력을 갖기 전에도 죽는 것에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기가 죄를 지을 능력도 시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인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죄와 사망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인의 후손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이나 느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구원을 얻었다라는 말 속에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베푸신 구원으로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되었으며 우리의 운명이 주의 은혜 아래 있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떤 면에서 많이 오해하느냐 하면 성화의 문제와 더불어 가장 많이 오해합니다. 이런 식으로 오해되는 예가 많습니다. 신자들이 자신의 회심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성화의 과정으로 이 죄와 사망에 관하여 죽은 것을 도입하는 예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 깊은 영적 생활을 위해서 죄에 대하여 죽어야 된다라고 가르침을 받거나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유명한 책 가운데『자나다(?) 죽을 때』라든가『옥합이 깨어질 때』라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결코 틀린 내용도 아니고 또 틀린 제목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 칭의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때가 있고 성화의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때가 있는데, 표현은 같게 나오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햐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2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 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성경 가운데는 분명히 우리의 옛 행실을 죽이라든가, 십자가를 지라든가 하는 식의 요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다릅니까? 먼저 성화의 차원에서 쓰여진 구절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대표적인 구절을 한 번 예로 들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 말씀을 봅니다. 아주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여기에는 분명히 나는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고 나는 이제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며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살도록 하는 사람이다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고 우리는 이것을 성화의 가장 대표적인 모델로 취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은 성화의 예가 아닙니다. 11절로부터 봅시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11-19).

 

 

 

게바란 베드로입니다. 그때 사도인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와 그 일행이 오자 할례자가 무할례자와 같이 식사를 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법에 따라 황급히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베드로를 여러 사람 앞에서 면책했다고 합니다. 그 면책한 이유는 무엇이냐면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의 구별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면 유대인이라는 구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에도 어떤 조건이 된다고 아직도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즉 할례를 받는다든가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아직도 하나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 너와 네가 사도된 것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얻는 줄 알고 그 일에 우리가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가 유대인들 앞에서 이방인들을 구별함으로써 마치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조건속에서 예수를 믿는 것과 함께 율법의 조건이 필요한 것같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하는 것입니다.

 

다시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갈 2: 19).

 

 

 

그리고나서 20절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지 않느냐? 우리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럼 우리는 어떻게 얻었느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원리가 아니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서 2:20은 성화의 예가 아니고 구원에 대한 진술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 우리가 어떻게 죄와 사망에서 벗어났느냐? 율법을 지켜서냐, 할례를 받아서냐? 아니지 않느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거기서부터 나오지 않았느냐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간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그 안에 품으시고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셔서 우리가 그와 연합한 자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을 결과로써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갈라디아 2:20의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다음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어떤 체험과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안에 어떤 죄의 아무 뿌리나 생각이 남아 있지 않는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하고 그 죄에 대하여 죽기 위해서 고행을 하기도 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기도 하고 기도원에 올라가서 단절된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 그런 노력을 많이도 해 왔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분명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영역과 통치의 개념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본성에 대하여 죽어 있지 않습니다. 죄의 영역과 통치에 대하여 죽습니다. 우리는 지금 죄와 죄의 통치 속에 있지 않습니다. 죄의 환경 속에도 있지 않고 죄의 통치 아래도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와 거룩의 영역에 있고 은혜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얼마나 분명히 있느냐 하면 우리가 읽은 로마서 6장 식으로 하자면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장사되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례를 치른다는 것은 죽음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의식입니다. 사람이 죽었으면 곧 갖다 묻지 않습니다. 죽은 다음에 땅속에 갖다 파묻기까지는 그래도 어쩌면 희망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갖다 묻으면 이제 끝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이 죽음으로써 분명해지고 분명하게 확인되는 것이 장례입니다. 장사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사망에 대하여 죽었는데 어느 만큼 확실하냐 하면 그 일에 대하여 장사 지낸 바 되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황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우리 안에 아직도 죄의 유혹과 죄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죄가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이냐면 불신자는 가끔 착한 일을 해도 돌아가는 집이 죄입니다. 그래서 착한 일을 한 것이 어색하고 우습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죄를 지으면 어색합니다. 이제부터도 여러분은 죄를 많이 지을 수 있습니다. 횟수로 많이 지을 수 있지만 죄에 계속 거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진 것이 여러분에게 그렇게 안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남이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스스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죄를 지으면 여러분 안에 그것이 부딪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여러분을 인도하고 여러분 안에 계시는 이가 죄와 함께 계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럼에도 불고하고 왜 내 속에 죄에 대한 뿌리와 죄를 지을 가능성들이 남아 있느냐고 반문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노력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고쳐야 되는 문제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한 생각과 죄에 대한 감각과 죄에 대한 어떤 실패도 우리 안에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영국에 가서 산다면 여러분은 저절로 영국식화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동양인으로서 서양에 가서 살면서 서양 문화에 익숙한 사람을 바나나라고 부릅니다. 겉은 노란데 속은 하얗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이민을 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한국에 오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결국은 정신의 깊은 것까지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다시 한국에서는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는 줄 아십니까? 차가 너무 난폭하게 다니고 사람들이 몸을 떠밀고 말들을 너무 험하게 하고, 불친절하고 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한 분에게 이런 충고를 했습니다. ‘미국은 법이 사정없이 집행되지 않는가? 한국은 법이 말도 안되게 굴지만 그것이 나에게 유익을 주는 때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여기는 법대로 되는 게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대한민국에서 누가 잡혀 들어갔다면 한다리 건너서 알아보면 다 일가친척입니다. 나올 수 없는 일에 나오고 잡혀갈 수 없는 일에 잡혀가고 뜯기지 않을 돈 뜯기고 생기지 않을 돈 생기고 그래서 공평합니다. 한국에서 사는 즐거움을 여러분은 모르시죠. 운전하고 가다가 교통 경찰에게 잡히면 어떻게 합니까? 저는 필요한 대로 고르라고 면허증과 현금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분이 돈 받아 가지고 간다고 자기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인이 학교 선생님께 갖다 드립니다. 그 학교 선생님은 목사님께 드리고 목사님은 교통순경에게 주어서 돈이 한바퀴 도는 동안 모든 사람이 자기 할 일을 하고 그래서 관계가 돈독해지며 행복하게 사는 나라, 아! 대한민국, 이 재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사는 것은 어디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는 곳에 물이 드는 법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통치한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옛날에 죄에 이틀 있었으면 이제 하루 있고 이제는 반나절 있고, 한 시간 있고 시작했다가 중간에 손을 놓아 버리고 그렇게 점점 바뀝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나아진 것 같지 않습니다. 제 신앙은 도무지 발전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발전할 때는 외적인 실천보다 속에 있는 원리로부터 발전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소원과 실천은 언제나 거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실천이 여러분의 소원을 거의 좇아오질 못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거룩한 소원이 훨씬 앞서 가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천이 지난 해, 지지난 해에 비교하자면 훨씬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앞서가는 소원과는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는 옛날에 가졌던 특이한 생각과 기특한 행동의 차이보다 지금 가진 거룩한 소원과 거룩한 실천 사이의 간격(gap)이 더 커져서 떨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은혜의 영역에 있고 은혜의 통치 속에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죄에 대하여 멀어지고 의와 거룩에 대하여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주일 아침 예배드리러 온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일 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그러다 어느 때인가 성가대에 앉아 있고 그러다가 신학교 가고, 목사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 나왔다가 그 다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나 교회 나가도 아는 척하지 마세요.”  처음에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방 오지 마세요.”, “뭐 시키지 마세요.”, “헌금 같은 것 강요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이 몇 년 내에 어떻게 바뀌는지 아십니까? 중요한 직분을 맡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화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벌써 많이 변해 있고 많이 미쳐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쉬어야 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주일이 가장 피곤한 날이 됩니다. 그리고 이 날 많은 봉사와 분주함 속에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쉼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주 안에서 일한 것, 주의 일을 한 것 자체가 커다란 휴식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바쁜 하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논리적인, 분명한 정리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것은 성화를 위한 기초 단계가 아니고 내가 성화를 위하여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아래 못박혀 있기 때문에 성화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6:11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라: 이것은 안될 것을 그렇게 된 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분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최면을 걸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자녀들을 기를 때 하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너 좀 학생답게 굴어라” 이것입니다. 학생답게 굴라는 것은 학생이니까 그러는 것이고, 너 좀 남자답게 굴라는 것은 남자니까 그렇고 형답게 굴라는 것은 형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되어진 일이기 때문에 이제 그 일에 걸맞은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12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롬 6:12-13).

 

 

 

여기가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를 누구에게 드리느냐에 선택권이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고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를 주관할 때는 우리는 의에게 우리를 바칠 선택권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의에게 우리를 바칠 수 있습니다. 14절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롬 6:14).

 

 

 

에베소서 4장으로 가 보십시오. 에베소서 4:22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엡 4:22-24).

 

 

 

옛사람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죽이라가 아니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입니다. 새사람이 되라가 아닙니다.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이 되는 일을 우리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구원 속에서 우리에게 이미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새사람입니다. 그러나 새사람이 새사람답게 사느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의 책임입니다. 24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이것은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그 새사람을 입는 싸움은 우리의 싸움입니다. 새사람다우냐, 아니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구원을 우리 것으로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은혜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와 거룩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즉 구원 얻은 자답게 사느냐 못 사느냐는 우리 책임입니다. 그것이 구원 자체를 성립시키거나 취소시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가끔 신자들에게는 이런 오해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이 구원을 선택하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화를 선택합니다. 성화를 선택하는 것은 구원이 되어진 자에게만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화를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죄의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화를 선택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성화를 선택하게 내버려 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다스림이 좀더 유효하고 좀더 풍성하기 위하여 우리가 협조해야 됩니다. 이것은 성화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5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무엇이라고 합니까?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지혜 있는 자가 되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까? ‘네가 누구인지 알아라’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의 운명을 여러분이 취하하거나 포기하거나 실패케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실패할 수 있는 것은 성화입니다. 성화가 실패됐다고 여러분이 천당가는 것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을 빼앗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럴 수 없는니라’가 눈에 들어오십니까?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은혜가 우리를 죄에서 꺼내서 어디로 보내려고 베풀어진 것입니까? 영광의 자리로, 의와 거룩으로, 생명으로 하나님의 존전에서의 우리의 자랑으로 가게 하기 위하여 은혜가 도입된 것인데 그것이 공짜로 됐다는 방법론 하나에만 집착해 가지고 또 공짜로 가서 타락합니다. ‘또 용서해 주시겠지’, 물론입니다. 여러분이 죄지으시고 회개하면 또 용서하시고 거기서만 들락거리면 뭐 되는 것입니까? 완전히 거지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로 하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은혜가 도입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은혜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여러분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여러분 마음에 함께 계시는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하고 거기에 순종해야 됩니다. 어리석지 않아야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우리에게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고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떠밀고 있느냐를 주의깊게 들으셔서 신자다운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은혜 아래서 누리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된 이유는 우리가 은혜 아래서 누리는 현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된 이유는 우리가 죄의 영역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아무도 더 이상 뒤를 돌아보거나 죄에 대하여 집착하셔서는 안됩니다. 그럴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의 본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생애 동안 바로 이 은혜가 왕 노릇하고 여러분에게 허락된 구원의 목표와 그 방향을 향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승리하시고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한 준비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의와 거룩으로 부름을 받은 것을 이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리석지 말아야 하겠고 세월을 아껴야 하겠고 지혜로워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부름에 우리의 온몸과 마음과 정신을 합쳐 충성되어 순종하고 따라가서 우리에게 이미 허락된 하늘 나라의 그 복된 자리에 서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의 말씀을 들은, 주의 구원을 얻은 그 은혜 아래 있는 모든 심령들에게 되어진 일을 이제 밝히 보게 하시고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분발케 하사 이 짧은 인생이 주 안에서 승리하여 주를 만날 때 찬송과 감사와 영광 속에 주를 뵙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38강(롬6:5-7절) 죄의 몸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5-7)

 

 

 

우리는 로마서 6장에 와서 구원을 얻은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가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임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이 말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 지어도 좋은가라는 질문을 야기시켰다는 것을 6:1에서 보았고 우리가 은혜로 얻은 이것이 죄와의 단절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죄로 다시 돌아간다는 발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죄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문제가 야기됩니다. 신분과 지위에서 그리고 죄의 영역과 통치에서 우리가 이제는 끊어졌다고 하는 것과 죄의 생각, 죄된 성품, 죄된 본성이 없어졌는가 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신자가 된 이후에도 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고 죄에 대한 습성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는 신자가 어찌하여 죄에 대한 생각과 습성과 죄를 짓는 실패가 생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이제부터 살펴보려는 5절부터 7절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 하려 함이니”라는 것이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죄의 몸이라는 것이 무엇을 지칭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학자들간에는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은 죄의 신분, 죄의 영역에 속한 우리의 지위가 아니라 죄의 성품에 대하여도 죽은 것을 말한다라는 이들이 있고 저나 또는 성품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니고 신분에 대하여만 죽은 것이며 여기 6절에 나오는 죄의 몸은 그런 의미에서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성경 속에서 신분으로서의 우리와 성품으로서의 우리를 구별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을 먼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6:10 말씀으로 가 봅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0-11).

 

 

 

신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11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나 12절에 오면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12절에 나오는 너희 자신과 11절에 나오는 너희 자신은 다른 것입니다. 11절에서의 너희 자신은 가장 핵심 되는 우리의 존재 근거들, 우리 존재의 존재되는 핵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분으로서의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고,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12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로 이어지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너희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할 때의 너희 자신은 앞에 있었던 신분으로 취급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똑같은 우리 자신이지만 신분과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서의 우리 몸입니다. 이 둘이 다른 것임을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앞의 것은 죽은 것입니다. 아담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몸을, 너희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냐면 우리 자신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신분과 지위와 운명으로서 우리를 말하는 것과 아직도 남아있는 옛 성품과 옛 습관으로 불안전한 우리를 둘로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중에 어느 일부는 저기에 속하였고 어느 일부는 아직 아닌 고로 나누어 있지 않고 이렇게 우리 자신을 두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분과 지위와 운명으로서의 우리가 실제로서의 우리를 나누어 보고 있는 것을 지금 성경에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7장으로 가 보시겠습니다. 로마서 7:17에 가면 좀더 두드러지게 나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7-24).

 

 

 

지금 사도 바울은 신자된 우리가 두 마음, 두 법, 두 존재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내 마음에,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를 향하고 거룩을 향한 열심히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면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한다면 이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원래 죄를 짓느냐?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다. 이것은 아주 핑계를 대기 좋은 표현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정확한 신자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기도 한 매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진술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무엇을 보느냐 하면 우리가 분명히 은혜 아래 있으면 더 이상 죄를 소원하지 않고 의와 거룩을 소원하는 사람으로 거듭난 나 자신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속에 새롭게 일어났고 새롭게 창조되었고 새롭게 허락받은 것이 내 온 전체를 주장하고 있지는 않은 것입니다. 아직도 죄의 뿌리가 남아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옛 성품입니다. 아직 완전해지지 않은 나의 일부요, 내가 싸워서 이겨야 하는, 아직도 불안전한 자신의 어떤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신분과 지위와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였느냐 햐면 성경 속에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이루신 것과 이루어 나가실 것을 말합니다. 이룬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계획의 시작, 우리에게 확실한 우리의 운명, 영원한 약속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면 남아 있는 죄의 성품들입니다. 이것이 신자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은 이 둘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성품이 곧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운명으로 볼 때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옛 성품과 나를 아직도 죄 짓게 하는 어떤 영향력들이 결국 나를 장악하거나 그것이 운명이 되고 결과가 되게 끌고 가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결국 의와 거룩과 하나님의 통치하심 속에 있으며 승리로 가고야 말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 이것을 분명히 나누어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것은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신자는 그것으로 끝장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로 끝장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끝장납니까? 우리는 은혜와 거룩과 의와 생명으로 끝장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죄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거나 우리를 끝장으로 가는 자리까지 영향을 주거나 우리를 장악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로마서 6:6로 돌아와서 이 표현을 다시 분명하게 정의해야만 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하는 말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옛사람은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의 신분을 이야기하고 죄의 몸이라는 것은 이제 새사람이 되었지만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의 영향력, 죄의 뿌리, 옛 성품을 가리키는 줄로 압니다. 성경 속에서 이 옛사람이라는 표현도 옛 신분을 이야기하지 않고 옛 성품을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에베소서나 골로새서에서 만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을 볼 때는 그 옛사람이 옛 신분이 아니라 옛 성품인 것을 봅니다. 이 죄의 몸이 멸했다는 것 때문에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 됩니다만 그 죄의 몸이 멸하고 옛 성품이 멸했다면 왜 다시 죄를 짓는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표현에 조금 오해가 있었고 우리말 성경이 정확한 번역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2장으로 가시면 똑같은 표현이 2:14에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 2:14).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이유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말 표현에는 ‘없이 하시고’로 되어 있습니다만 영어 표현에는 ‘destroy'를 사용해서 멸망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것은 정확히 로마서 6:6에 있는 “죄의 몸이 멸하여”와 같은 표현입니다. 여기에 쓰인 멸망시킨다든가, 히브리서 2:14에서 보는 없앤다는 표현은 헬라어 원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없앤다는 표현이 아니고 무력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없애는 것과 무력화시키는 것은 다릅니다. 마귀는 지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멸망받고 있지 않습니다. 마귀는 언제 멸망을 받느냐면 주님이 재림하셔서 주님께서 그를 무저갱의 영원한 불못에 던질 때에야 멸망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신 그 순간에 멸망받았다고 히브리서 2:14에서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무력화시켰다는 것은 무엇이냐하면 더 이상 마귀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있지 않고 지금 예수 안에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사단이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를 통치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는 무력화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무력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힘을 쓰지 못하고 손을 대지 못하고 우리에게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를 속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공갈을 치고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는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도 우리는 그 옛날 습관이 남아 있고 옛날 경험이 있어서 그가 공갈을 치면 꼼짝을 못하고 유혹을 하면 말려들어 갑니다. 지금 우리가 짓는 죄는 그런 것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우리의 인격 속에서 떠나갔습니다. 죄는 우리의 원리가 아닙니다. 아까 본 로마서 7장에서 표현한 것같이 우리의 마음의 법은 이제 더 이상 죄를 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를 좇고 거룩을 좇으며 생명을 좇습니다. 그러나 죄는 아직도 우리 몸에 영향력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의를 좇으며, 생명을 좇으며, 진리를 좇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몸에 죄의 잔재가 남아서 기껏 마음속으로 옳은 일을 생각했다가도 금새 구부러지고 막히고 급기야는 죄가 원했던 것을 하기 일쑤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의 지금 모습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그것을 봅니다. 조금 전에 본 바와 같이 24절에 있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고백이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2절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우리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언제나 좋은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신자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생각입니다. 우리만이 의와 거룩과 진리와 생명과 영원을 따르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몸에 죄의 영향력과 구속이 남아 있습니다. 옛 성품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끌어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집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잘 보십시오. 24절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 24). 그런데 왜 감사합니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그리고 늘 누가 이깁니까? 죄의 법이 이기는데 왜 감사합니까? 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우리가 아무리 죄에게 진다 할지라도 그 영역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그 통치 아래 들어가거나 죄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지, 우리를 죄의 통치 아래로 그의 소유로 다시 붙잡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지위와 우리의 신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그가 착한 일을 해도 착한 죄인인 것입니다. 신분이 죄인입니다. 신자는 죄를 져도 나쁜 신자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이 두 다른 존재, 말하자면 우리가 의인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결국 하늘 나라에 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고 그 옛 성품이 남아 있는 것을 끊임없이 이렇게 가르칩니다.

 

 

 

로마서 8:10로 가 봅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0-14).

 

 

 

우리는 이 두 갈등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시험에 지고 죄를 짓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쨌든 하나님의 자녀요, 그 신분이 바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고 넘어가야 되는 것은 이것이 이야기 하는 것, 죄가 우리 몸에 아직 영향력을 남겼다 할지라도 이 몸이 죄의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꼭 거룩한 생각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생각이 남아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몸뚱이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로 죄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것은 아직도 몸입니다. 우리의 많은 본능 속에 죄의 영향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욕심, 자존심, 빈정댐, 이런 것들이 남아 있는데 그것을 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육신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우리의 몸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죄의 영향에 아직 더 많이 절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고치고자 할 때 먼저 생각을 고쳐야 됩니다. 생각을 고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고친 생각이 몸에 익숙하도록 해야 됩니다. 습관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우냐 하면 김유신이 술 먹고 자기 말에 탔더니 천관녀의 집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습관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버티고 버텨도 습관이라는 것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흘러 가는 법칙으로 오래 남는 법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욕적으로 되고 자학적이 되고 또 수도승이 되고 하는 것을 경건하다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리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로마서 8:23입니다.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무엇을 기다린다고 말합니까?우리 몸의 구속입니다. 아직 우리는 온전하지 않습니다. 신분과 지위에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습성과 거룩함에 있어서 아직 온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준과 성품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이런 물질이나 몸 자체가 죄라는 말이 아닙니다. 전에는 죄가 우리의 인격 자체를 지배했습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욕심으로부터의 소원과 모든 소망, 모든 것이 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은혜가 내 인격 전체를 지배합니다. 은혜와 의와 거룩이 나를 지배합니다. 하지만 우리 몸이 아직도 구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도구로서 쓰임받을 때 몸을 육신이라고 합니다. 육신이라는 표현을 쓰고 그것이 몸이라고 할 때도 죽을 몸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몸이 없어지고 정신만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이 아니라 죄의 원리대로, 그의 도구로 쓰여질 때 우리는 육신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씁니다. 육신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는 이런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는 것은 껍데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생각이 인간을 지배하면 그때는 우리가 육신에 거한다고 거룩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성경이 대조하기 위하여 표현한 것이지 물질적인 것, 이것은 악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어쨌든 우리에게 그 습관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생각과 행동에서 이것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으로 가 보십시오. 이 모든 것에 대한 완성의 소망을 성경을 여러 군데에서 가르칩니다. 빌립보서 3:20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우리 시민권은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운명은 결정적입니다.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왜 기다려야 하느냐 하면 우리 몸의 온전한 변화를 위하여, 우리 성품의 온전한 완성을 위하여 아직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 겪는 실패, 죄에 다시 빠지는 것을 여러분으로 보지 마시란 말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나입니다. 거기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절망을 하는 것도 나입니다. 그럼 어디에다 나를 두어야 합니까? 그 절망하는 나에다 우리를 두어야 됩니까? 내 실패는 죄를 다시 짓게 하고 실패하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그쪽으로 끌고 갈 힘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신자가 겪는 가장 큰 유혹과 실패가 무엇이냐 그러면 이 죄에 잠시 빠지는 것, 죄를 다시 짓는 실패가 그의 운명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절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 평양을 가야 되는 존재라면 여러분이 서울에서부터 뒤로 수원을 가거나 천안을 가거나 대전을 가면 그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되짚어 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간 것만큼 다시 돌아와야 본전이고 그 다음에 가야 됩니다. 여러분이 결국 평양을 가야 되는 존재라면 거꾸로 가면 갈수록 손해이지 거꾸로 가서 결국 부산 가서 끝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신자 된 운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 ‘나는 결국 평양 못가고 부산 가고 말겠구나, 부산 앞바다에 가서 빠져 죽어야지’ 이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서 정신을 차리고 돌이킬 수 있느냐 하면 ‘내가 결국 평양을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이쪽으로 가는 것은 미친 짓이다’하는 생각이 여러분을 구원해 냅니다.

 

 

 

이것이 성경이 여러분을 위로하는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 깨우침을 여러분에게 주려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롬 6:6-7)입니다.

 

이제 분명해집니까? 10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 10-11): 너희는 이제 구원을 얻은 몸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물론 이것은 성화에 관한 내용이지만 로마서 6장에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성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칭의가 어떻게 성화에 철저한 근거가 되느냐를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으니 나갈 길은 성화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의 결론은 12:1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영적 예배란 무엇입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즉 새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고 하면 이런 문제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 사업 위주입니다. 종교적인 행사 위주입니다. 선교를 하는 것도 좋고, 전도를 하는 것도 좋고, 구제를 하는 것도 좋고 뭐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하면 신자들의 신앙의 핵심을 오도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너무 능력 위주로 갈 수 있습니다. 만약에 선교를 한다고 할 경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교사로 나가거나 선교사를 돕는 후원자가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구제를 한다 그러면 어려운 사람에게 가서 힘써서 도와 주거나 혹은 돈으로 지원을 하거나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재주가 있거나 능력이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신앙이 자꾸만 능력으로 가고 있습니다. 능력으로 가다 보면 똑똑한 자와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자가 평가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입니다. 신앙의 대표적인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들어와 구원을 얻은 자로서, 새사람으로서 남겨진 옛 성품을 몰아내고 점점 그리스도를 닮은 새사람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신앙의 최고 목표요, 최고의 싸움이요, 최고의 핵심입니다. 종교적인 행사를 하느냐, 안하느냐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적인 행사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훨씬 많은 자질구레한 일에서 여러분의 성품의 변화를 증명해 내야 됩니다.

 

 

 

사람과 사람의 부딪힘 속에서, 자존심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세상적인 오해에서, 여러분이 신자로 변한 그래서 옛 성품을 벗어버리고 새 성품을 입은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로 여러분을 증명해야 되고 여러분 자신을 전진시켜야 됩니다.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느냐 하면 종교적인 사업, 신앙적인 어떤 형태의 일들에 몰두하고 있는 자들, 여전도회 회장, 성가대 솔리스트, 이런 일을 하고 나면 어떤 중요한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딴 곳에서 대단히 못되게 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목사나 장로에게도 큰 시험이고 어떤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두드러진 오해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들도 어떤 소원을 하게 되느냐 하면 보란 듯이 한 번 그런 멋진 일을 할 능력을 하나님께 자꾸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주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속상해 하고 그런 큰 돈을 낸다든가 어떤 재능을 나타낸 사람들에 대하여 끊임없이 열등감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을 이겨내야 됩니다. 교회 안에는 아무도 잘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싸움은 이 옛 성품을 몰아내서 쓸데없는 싸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그 성품에 참여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고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 그러면 십리를 가주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이 싸움의 승리이지 여러분이 얼마나 큰 일을 하느냐는 전혀 신앙과 무관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을 이제 이 신령한 싸움으로 초점을 맞추시고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번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싸움이 여러분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은 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겨야만 됩니다. 이기기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낙심하지 마시고 졌거든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을 알리셨습니다. 우리는 실패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운명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알리셨고 허락하셨으니 이제 우리 모두가 신앙으로 힘있게 우리의 싸움을 이기게 하사 주를 닮게 하시고 주의 자녀답게 하시고 새사람을 입히시사 그 거룩함과 온전한 영광을 누리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39강(롬6:8-11절) 주와 함께 산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롬 6:8-11)

 

 

 

로마서 6:8-11 말씀 가운데 특별히 8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그 답은 11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 8절의 그와 함께 사는 것,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우리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영원한 나라에서 그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은 그 이야기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라라든가,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된다는 뜻은 미래적 소망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 누리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6:4에서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지금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새 생명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 우리가 읽은 6장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여기서 ‘주와 함께 산다.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라’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산다고 하는 말이 언제나 신자에게 성화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큰 어려움입니다. 성화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때와, 칭의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죄와 그 통치, 사망의 영역에서부터 풀려 나와서 새 생명의 영역안에 들어갔다는 것이 로마서 5장에서부터 6장에 이르도록 내내 사도 바울의 관심을 끄는 내용입니다.

 

 

 

죄와 사망이 우리를 더 이상 다스리지 않고 은혜가 다스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 나라에 올라가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 로마서의 커다란 관심사입니다. 사실상 성화에 관한 이야기는 12장을 넘어가서야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 있어서 8절에 있는 것같이 ‘그와 함께 산다’, 11절에 ‘하나님을 대하여 산다’ 이런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내 욕심만 따라 살지 않고 내 고집대로 살지 않고 주님께서 사는 것, 주를 위해 사는 것, 이런 성화적 차원의 권면으로 받아들이기 일쑤입니다. 이렇게 오해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커다란 문제가 아니지만 신앙에 있어서는 아주 뿌리 깊은 문제로 발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 이 본문을 특별히 관심 있게 보려 합니다.

 

 

 

먼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산다라는 것을 대표적으로 오해하게끔 하는 구절 중에 하나가 갈라디아서 2:20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이 구절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종종 성화의 구절로 오해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으면 누구나 ‘그렇지,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나는 없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사는 것으로 살아야지, 주께 나를 일임해야지’하고 이것을 성화의 말씀으로 마음에 작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의 갈라디아서의 큰 주제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구원을 행위로 받느냐, 믿음으로냐 하는것입니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이 표현은 정확히 로마서 6:8이나 11절과 흡사한데 그것이 20절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上).

 

그러나 그 다음을 보십시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초점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죄가 나를 다스리지 않는다, 은혜가 나를 다스린다, 이제 나는 영생속에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죄의 영역에 있지 않고 은혜의 영역에 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이 성화로 오해되는 때에는 우리는 열심히 우리를 죽이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시는 싸움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화의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고 꼭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6:8과 11은 영역과 통치와 우리의 지금 신분과 위치에 관한 이야기이지 성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내가 신자냐, 아니냐 하는 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끌고 와서 이런 오해를 만들어낸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를 향하여 살고 하나님을 대하여 살고 나를 죽여야겠다.’ 이것은 성화이지 칭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하다가 실패를 하면 ‘나는 구원 얻은 신자가 아닌가 보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이 부작용이 어떠한 형태로 자주 일어나느냐 하면 손뼉치면서 찬송하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집회를 시작하기 전에 ‘주여’ 삼창하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목이 터져라 ‘주여’, ‘믿습니다’,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칩니다. 제가 이 자체를 뭐라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감정이 동원되는 것이고 기쁨과 희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들의 가장 큰 잘못은 그런 아우성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지, 없는지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이와 같은 일종의 몰아의 경지로 가는, 그래서 자기를 잊으려는 몸부림, 이것은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거듭거듭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는 것,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나를 장악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이런 잘못된 권면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는 내세가 있는 것을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돌아가심을 믿습니다”를 백번 외워라 이것입니다. “나는 내세가 있음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백번하기 전에 한 50번만 넘어가면 내가 뭘하고 있는지 까먹고 의심조차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의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대뇌가 사고를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지쳐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이 들었을 때 마취제를 맞아서 통증이 없어진 것과 병이 치료된 것이 다르듯 이런 식으로 우리를 잊고 이것이 내가 주님 앞에 장악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오해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 구절이 성화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위치, 신분, 지금 우리에게 일어난 사실을 확인시키려고 하는 경우에 우리는 분명하게 이 문제들이 몰아의 경지에 갈 것이 아니라는 것을 두눈 똑바로 뜨고 확인해야 되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확인해야 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6장으로 와서 우리는 이 문제가 우리의 체험과 경험 밖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8절로 다시 돌아갑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나니”(롬 6:8).

 

9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롬 6:9-10).

 

 

 

주님의 죽음과 살으심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다시는 사망의 주장아래 있지 않고 이제는 그 밖으로 나와서 영생가운데 계심을 9절과 10절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까? 8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라”에도 언제나 중요한 것은 나의 경험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된 나의 나된 경험, 주님의 경험이 나의 것이 되기 때문에 주님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도 보십시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찌어다”(롬 6:11).

 

 

 

너희가 죄 안에 있지 않고 의 안에 있으며 형벌 아래 있지 않고 영생 아래 있음을 알리는 것을 무엇을 근거로 제시했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셨다’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체험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 신자며 영원한 소망이 있으며 주안에 있음을 무엇으로 확인하느냐 하면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이라는 것으로만 우리 구원에 대한 모든 근거와 증거를 삼지 내가 어떻게 되었느냐로 근거를 삼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4장으로 가 봅시다.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내가 죄에서 나오고 의로운 자리에 들어가는 것, 모두가 내가 죽고 내가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가 나의 것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마서 6:8이나 11절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말속에는 체험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루어질 사실입니다. 무엇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냐면 우리가 죄인이 아니며 죄 아래 있지 않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을 알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부터 성화로 가는 근거요, 그것이 가능한 뿌리이지 우리가 만들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갈라이디아서 2:20에 있는,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나타나게 하는 것은 성화로서 여러분이 꼭 해야 되는 책임이지만 그것이 나의 구원의 근거요, 확인으로서 드러나지는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실수를 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자 되었다는 것을 내 경험 속에서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자인가를 확인하러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어서 예수 믿지 않을 때보다 나아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때보다 죄를 덜 짓습니까? 그때보다 죄된 생각이 덜 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우리가 이제는 이런 죄를 다시는 짓지 않으리라고 작정했던 것, 그리고 질 수가 없으리라고 상상했던 죄도 짓습니다. 이것이 깜짝 놀라는 현실입니다. 물론 불신자일 때보다는 덜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같은 종목의 죄들을 짓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이 아주 심각한 상담을 해 오셨습니다. 장문의 편지를 보내 오셨는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입니다. 이상하게도 자꾸 기도만 하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욕설이 나온다고 합니다. 본인이 너무 괴로워서 귀신이 붙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불신자인가, 내가 도대체 신자인가라는 깊은 회의 때문에 편지를 쓰셨습니다. 제가 그 답장으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에베소서 강해]를 한 권 보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안에 바로 그 문제를 다룬 것이 나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설교가이고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준 분 중에 한 분입니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성경에 대하여 대단히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그분의 에베소서 강해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 가지 죄 중에 자꾸 신성모독적인 생각이 아니라 신자에게서 일어나는 죄목 중에 하나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예를 여러분에게 드는 것은 신자라면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죄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있느냐 하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이 구원 문제에 대한 오해가 나로 하여금 내가 정말 신자냐, 아니냐를 확인하고자 자신의 과거로 들어갑니다. 과연 자신의 죄를 집어던지고 죄를 뿌리 뽑은 행동을 한 적이 있느냐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벗기 위하여 우리의 죄 짐을 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벗기 위하여 우리의 죄 짐을 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진 적이 없고 우리가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확인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죄를 위하여 그를 사망에 내어 주고 우리를 의롭다 하게 하여 그를 부활시켜서 나를 그 안에 묶어 죄로부터 탈출시켰고 의와 영생으로 이전시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와 싸워서 죄를 물리치고 죄에게 승리하고 거기서부터 내가 탈출하고 의와 거룩으로 입문하고 내가 원서 쓰고 내가 시험 봐서 들어온 날은 없습니다. 이것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이 이야기 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나는 아직도 죄가 생각이 나고 죄를 짓기도 하는 연약한 몸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존재론적으로 예수와 하나입니다. 나를 실패시키고 나를 구원해서 탈락시키려면 예수를 탈락시키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지옥에 보내지 않고는 나를 지옥에 보낼 수 없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가 우리에게 그토록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납니까? 마음에 감사와 평안과 확신이 일어나십니까? 이것이 여러분들이 얻은 구원인 것을 감사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6:1의 질문이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 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롬 6:1).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은혜도 더 많이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질문이었지 않습니까? 바로 그 대목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못나게 굴어도 나는 내가 아니며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실패시키려면 그리스도를 실패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은혜가 왜 들어온 것입니까? 우리를 더 이상 죄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게 하려고 들어온 것이 아닙니까? 구원이 왜 일어난 것입니까? 우리를 영원한 형벌로 부터 영광과 거룩의 자리로 가게 하려고 부른 것이 아닙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벌받지 않는,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얻어 옛날에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이제는 의와 거룩을 열매 맺고 아름다워지고 영광스러워지는 길로 가자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자꾸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더 이상 벌받는 자리에 있지 않고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은혜가 주어진 궁극적인 목표에 발을 맞추려면 은혜가 은혜되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목표로 한 지점에까지 맹렬히 더 달려가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11절을 다시 보십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1-13).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이제 이 말씀을 이렇게 요약해 봅시다. 우리의 진리란, 그리스도에게 진리인 것이 우리에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사실들,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 영원한 형벌에서 벗어나는 것, 여러분이 그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돌아가야 할 근거는 여러분의 과거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노력이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돌아갑니다. 로마서 6:8에서 11절의 권면이 그 증거로 9절과 10절 모두 그리스도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느낌도 경험도 체험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는 낯설고 문외한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경험하지 않았고 그것을 느끼지 못한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앞에 있었던 이야기와 결국 연결이 됩니다만 요약할 두 번째 초점은 체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체험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믿어서 체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말씀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 내가 구원 얻은 것을 믿습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가를 이제 수납하는 행위이지 그것을 믿는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여러분의 경험으로 체험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요약해야 할 세 번째 중요한 요점은 성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사는 이 문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 고백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뭐가 있느냐 하면 신자답게 살아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답지 못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8장으로 가 봅시다. 8:31입니다.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우리의 경험과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까 아무도 그 일을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2-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이 왜 이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끼?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로마서 8장의 결론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베푸신 구원을 취소케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싸움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신자답게 사느냐, 못 사느냐는 성화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신자답게 살아야 됩니다. 그것을 실패했다고 해서 여러분의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인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전 생애에 걸쳐서 여러분의 실패, 외부 환경과 어떤 외세에 의하여 여러분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는다 할지라도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영생 안에 들어와 있고 하나님이 자녀며, 영광 된 신분의 소유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답게 살라고 요구합니다. 거기서부터 다른 싸움입니다. 실패가 이 쪽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은 성화의 싸움에서 실패할 수 없는 자가 될 것입니다. 성화에서의 실패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모순된 생활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나니 이 싸움이 여러분 앞에 있는 줄 아셔야 됩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여러분의 성화가 이제부터 열매 맺어야 됩니다. 놓치지 마십시오. 어떤 유혹과 시험에도 지지 마십시오. 다른 것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확인하지 마십시오. 방언이나 희열과 봉사나 열심이나 40일 금식 기도나 선행이나 그 어느 것도 여러분의 구원의 근거가 아니요 여러분의 구원을 확인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그분이 실패될 수도 없듯이 우리의 구원은 패하지 않습니다. 든든한 믿음 가운데 여러분의 성화가 시작되고 성공하기를 빕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하늘 보좌에 앉힌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의 삶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이것이 실패될 수 없음을 인하여 우리 마음에 강한 믿음과 지혜로운 믿음을 가지고 남은 여생을 주의 자녀답게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게 하시고 게으르지 말며 경성하며 깨어 있어 주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주의를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충성되이 우리의 여생을 신자로서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40강(롬6:11절)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로마서 6장은 어떻게 우리가 죄와 관계를 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확히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해가 심한 근본적인 이유는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구원을 우리 인간 쪽에서의 선택, 의지, 결정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했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실패할 때에는 구원의 근거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으로 자신의 구원 자체를 의심하는 자리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에서 계속 확인되고 있는 성경의 주장은 구원에 관한 성격이 우리의 선택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의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 연합시켰다는 것으로 구원의 중요한 근거와 성경을 삼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신자의 체험, 신앙의 수준, 느낌 같은 것으로는 이 구원의 근거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상에 실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문제는 어떤 이들은 예수를 잘 믿고 있다가 임종 때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이고 죽는 사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자들은 내가 혹시 나중에 죽을 때 정신이 혼미해져서 ‘주를 모른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문들은 구원의 근거를 자신의 결정과 자신의 의지로 삼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10장에서 증거하는 바와 같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는 말도 있습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의 신앙고백, 우리의 결정, 의지를 분명히 구원의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성격은 가장 중요하게 에베소서 1장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지’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하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구원을 ‘창세 전’이라는 말로써 설명합니다. 이유는 우리의 선택과 결정이 구원의 근거이기보다 하나님의 작정, 즉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의지가 구원의 근거인 것을 보이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선택에 의한 구원을 여러분의 작정과 여러분의 신앙의 근거로 가진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게 되었고 예수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먼저 여러분에게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생겼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회심이나 여러분의 결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단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그 구원의 결과를 마치 구원의 근거인 양 갖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상당히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임종 때 주를 부인하는 자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 답은 이렇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이 선택과 하나님의 의지에 있는 한 그가 한 번 신자였으면 그는 영원토록 신자입니다. 죽을 때 딴소리를 한 것은 그의 의식의 착오이고 그 육신의 기능의 쇠약으로 인한 헛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중풍이 든다든가 커다란 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몸을 우리의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우리의 사지를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사고와 의식, 구원은 그런 것으로 인하여 취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이 거듭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5). 무엇으로도 우리를 주의 사랑에서 끊지 못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자격과 의지의 견고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그의 신실한 영원성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담대함이 되면서 동시에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그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신자가 아닌데 신자인 것으로 오해했다가 다시 신자가 아닌 본래 상태로 돌아간 자와 원래 신자였으나 잠깐 신자가 아닌 것 같이 행동하고 있는 자들과는 어떻게 구별이 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든가 해서 혹은 범신론적 어떤 하나의 이상이나 고급 사상으로서 기독교를 이해했다가 후일 “나는 아니다”라는 신자인 것 같았지만 신자가 아닌 사람과 , 원래 신자인데 잠시 잠깐 타락한 사람에 대해서 구별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원래 신자이면서 타락한 사람은 죄를 짓고 죄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본인에게는 남의 집에 간 것 같을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비참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아니었던 자가 신자였던 것처럼 굴었다가 본래 자기 위치로 돌아간 것은 비참하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 같고 여태껏 내가 왜 딴 데 가서 놀았나 하는 후련함을 가집니다. 신앙을 걷어찬 것이 후련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근거 구절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표현은 직역하면 죄 속에 거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역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죄 속에 가서 뿌리를 내리고 집을 짓고 그 안에 거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언제나 그것이 낯설고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예수를 믿는다고 온 것이 남의 집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불신자들이 어떤 제약이나, 절제나, 희생 없이 자기 속에 가진 대로 사는 것을 볼 때 신자들은 가끔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나만 왜 절제해야 되고 나만 왜 참고 살고, 저 사람들같이 못 사는가 싶어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하고 싶어서 어느 날 죄를 지어봅니다.

 

 

 

그러나 신자는 예외없이 죄를 지으러 나간 것이 후련하지가 않고 자유롭지가 않고 비참할 뿐입니다. 그래서 “왜 그랬던가” 후회하며 돌아오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신자로 살아서 겪는 억울함, 손해 보는 것 같은 생각들 때문에 세상 사람들하고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날 안 도와 주시니 할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잘못해서 그렇다라고 핑계합니다. 자신이 그렇게 잘못하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목사님도 그렇게 살더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이 죄를 짓는 것이 편치 않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들입니다. 죄짓는 것은 싫습니다. 그러나 죄를 안 짓고 신앙인으로 살기에는 부족하여 눈앞에 있는 이익을 위해서 여러분이 죄인의 모양으로 여전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늘 마음은 편치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고 언제나 죄짓는 것이 좋고 교회에 온 것이 이상하면 여러분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잠시 죄로 인해 실패하더라도 여러분들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감사하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패한다는 것은 산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산 정상을 향해 오르던 그 자리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일만 미터 되는 산을 오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천 미터쯤 올라가서 실패하면 거기 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진 모습이 산 밑바닥에서나 중간에서나 꼭대기에 거의 다 가서 넘어진 것이나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킵니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넘어진 장소에서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시거든 거기서 또 위를 향하여 올라가십시오. 여러분이 3m에서 넘어졌다고 해서 여러분이 30m를 다시 되짚어 오르는 것은 아닙니다. 3000m에서 넘어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30m에서 넘어진 것과 3000m에서 넘어진 것과 8000m에서 넘어진 것은 똑같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비참함 때문에 여러분이 원래부터 바닥에 있었다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어떤 분명한 것들을 확인했습니다. 즉 우리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인 것을 확인했고 그리고 돌아갈 수 없음 또한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죄의 영역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취소당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차원인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에 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벌의 자리로 가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더 이상 그분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의 복 주심 아래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문을 열어 두심이 있을 뿐 우리를 벌하시고 진노하시고 미워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매를 드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과 복의 징계이며 결코 형벌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적극적인 삶에 대하여 신자들이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신자들의 실패와 연약함이 그토록 두드러지게 표출됩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사망과 죄가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 대신 누가 우리를 주장합니까? 성경이 계속 이야기해 주십니다. 은혜가 우리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복 주심이 주장하십니다. 따라서 새 생명이 주장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의 삶입니다. 산 자인 성도들은 복의 근원입니다. 신자 때문에 이웃이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셈입니다.

 

 

 

벤허’라는 영화에 이런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벤허가 노예선에서 노를 저을 때 로마 함대의 사령관인 아리우스 제독이 승선했었습니다. 그들이 탔던 배가 침몰하고 아리우스 제독이 전쟁에 패한 줄 알고 자결하려 하자 벤허가 자결하지 못하게 만류합니다. 그후 아군의 배를 만나서 구출되었을 때 전투에 이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러자 아리우스가 벤허를 돌아보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너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었구나.”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제가 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소돔 고모라를 멸망시키러 내려오시다가 아브라함을 만나서 아브라함에게 그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며 구합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그래서 몇 명까지 간청했습니까? 의인 십인이 있으면 소돔 고모라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의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사회의 무슨 지도자들이 어떠냐에 대해 묻지 않고 거기 의인 10명이 있는냐를 물으십니다. 그것이 신자의 위치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교회가 환영받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소금의 맛을 잃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신자가 신자답지 않은 줄 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허락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인생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로 인하여 이 나라가 지켜지는 그 맛을 모르고 신자 노릇을 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받을 복도 놓치는 것입니다. 즉 복의 근원 노릇을 여러분이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까지 함께 복을 거절하십니까? 이것이 오늘 한국 교회 신자들의 최고의 약한 부분입니다. 우리를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이 복 주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이 저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됨이 귀한 인생인 것을 아십시오.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을 복 주시는 하나님을 보십시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4-15).

 

 

 

이렇게 복 주시는 하나님은 지금 피난가는 야곱의 입장을 아셨습니다. 하룻밤 유숙할 마땅한 곳이 없어 들판에서 돌을 베고 자고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모든 복의 근원’이라는 복된 약속을 계승한 자로 인정하십니다. 그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이 그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약에도 있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 약속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가려할 때,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여호수아가 발바닥으로 밟고 다니는 모든 땅을 여호수아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신자가 발을 디디는 모든 것,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거기에서 승리케 하시며 거기에서 복을 나누시고 은혜를 나누시고 생명을 나누실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막으며, 넘어뜨리며, 좌절케 하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요, 주님이 함께 하는 인생이므로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이 내용에 대하여 신학적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 즉 구원을 받은 자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엄청난 영광의 시작입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목표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이 영광된 길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그 문을 열고 들어선 것에 불과합니다.

 

 

 

신자들의 가난함은 어디에 머문 상태입니까? 우리가 이제 벌받지 않고 천국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흡족해 하며 주저앉은 이것이 가장 가난한 신자의 모습인 듯 싶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 야곱에게 한 약속, 여호수아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주셨던 성경의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의 영광과 그 권리를 막을 자가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에베소서 1:15 이하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5-19).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바로 알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를 바란다는 기도는 대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까, 의심하는 불확신의 수준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로서 그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의 복되심, 우리를 향하신 사랑, 이런 것들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알기 원한다고 합니까?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 우리를 부르신,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가는 길입니다. 신자가 부름 받은 복된 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거나 하나님께서 외면한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를 향하여 드사 복 주시기를 원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려고 지금 귀 기울이고 계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 구절을 오해하는 이들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분발시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도록 하시겠다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라’, 하나님께서 귀 기울여 들으시고 응답하시겠다고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가장 사소한 일에도 너희로 하여금 만족한 인생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의 다른 표현입니다. 성도 중에 슬픔을 만난 이가 기뻐하고 감사할 것이 없는데도 ‘내가’ 감사하기로 하거나, 이마를 다쳤는데 눈이 안 다친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이런 식의 감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면은 무엇을 근거로 한 명령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18 하반절을 보시면, ‘범사에 감사하라’에 이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기뻐하라는 말씀은 나를 스스로 분발하고 격려하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했으면 기뻐하라고 한 이가 기뻐할 것이 있게 하겠다는 역설적인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 된 모든 신자들의 삶이며, 바꾸어질 수 없고 취소되거나 실패되어질 수 없는 신분이며 우리의 실제 권리들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각자가 오해했을 때뿐입니다.

 

 

 

신자 된 것을 감사하시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고 그리고 승리하십시오. 만일 실패했다면 실패한 것만큼 손해이고 여러분이 그것을 안한다면 안하고 산 것만큼 손해일 뿐입니다. 성도들에게 허락된 성경의 약속들이 복의 근원으로 모든 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사 승리와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신자 된 것을 스스로가 확인하시는 인생이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우리가 다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허락한 모든 것을 기필코 이루실 것을 이제 믿습니다. 부디 우리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지혜롭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게으름과 미련함에서 건져 주사 지혜로운 신자로서 승리하며 우리의 생애를 지내게 하사 주를 만날 때 기쁨과 감사 가운데 만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메모 :

'신앙테크 > 로마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마서 강해 6  (0) 2009.05.29
[스크랩] 로마서 강해 5  (0) 2009.05.29
[스크랩] 로마서 강해 3  (0) 2009.05.29
[스크랩] 로마서 강해 2  (0) 2009.05.29
[스크랩] 로마서 강해 1  (0) 2009.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