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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 강해 3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43

 

 

 

 

 

 

 

 

 

로마서 강해 3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로마서 21강(롬3:3-8절) 구약의 가치(1)
로마서 22강(롬3:9-20절) 구약의 가치(2)
로마서 23강(롬3:21-24절) 그러나의 가치

로마서 24강(롬3:21-24절) 기독교 신앙의 개념화

로마서 25강(롬3:21-24절) 구원이란
로마서 26강(롬3:21-24절)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로마서 27강(롬3:25-26절) 구원의 특징
로마서 28강(롬3:25-26절) 십자가 사건의 의미
로마서 29강(롬3:27-30절) 자랑할 수 없는 구원
로마서 30강(롬4:23-25절) 하나님을 믿는 믿음

 

 

 

 


 

 

 

 

 

로마서 21강(롬3:3-8절) 구약의 가치(1)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리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롬 3:3-8)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유익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됐고 이스라엘 백성의 유익함은 저들이 말씀을 맡았던 것이고 말씀을 맡은 것이 왜 유익이냐 하면 그 말씀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누구시냐를 저들은 먼저 알 수 있었고 회개해야 된다는 것을 먼저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구별해야 되는 것은 율법을 주고 말씀을 주신 것이 구원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자기 자신들의 죄와 잘못을 회개케 되는 유익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3:3을 보면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맡기시고 분명히 저들을 회개케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로 실패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이제 야기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맡았던 율법, 말씀,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을 통하여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실패했습니다. 그 율법이 결국 목표로 했던 하나님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부인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질문을 다시 맞이하게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시 말해서 ‘구약의 가치가 무어냐’ 하는 질문들에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저들에게 나타나시고 저들에게 회개케 하도록 율법을 주신것이 저들로 하여금 정당한 회개의 자리로 인도케 해야 했고 주님을 영접하도록 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은 모두 무의미한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다 무가치한 것인가? 이제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다 다시 시작하고 구약은 덮어 버려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구약, 율법, 이스라엘 역사는 실패했지만, 우리 눈에는 실패했지만 그것들이 갖는, 신자들이 놓쳐서는 안 되는 어떤 중요한 내용들이 그 속에 있는가 하는 것이 지금 살펴보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구약의 중심 내용이 가장 잘 나타난 성경구절을 우리가 한번 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그러나 그 날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자로 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1-34)

 

 

 

구약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사 율법을 주시고 약속하여 관계를 가진 그것이 중심 내용입니다, 민법의 가치, 구약의 가치,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떤 언약을 맺으셨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초점이 되고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약속하셨고 무엇을 요구하셨고 어떤 것을 목표하고 있는가를이 언약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가 읽은 34절에서 약속은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을 갱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레미야 31장은 시대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역사를 실패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될 때입니다. 앞에 있었던 약속과 다른 약속이고 언약의 갱신이기 때문에 새 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언약을 세우리라 그리고 이 언약은 옛날과 다를 것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볼 것은 언약의 중심 내용이 무엇이냐, 그리고 옛 언약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왜 달라야만 됐는가, 그 언약을 왜 갱신해야 했는가 하는 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언약의 중심 내용을 봅시다. 33절을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즉 새 언약의 내용에 있어서 그 특징 첫번째 것이 이것입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 이 약속은 하나님이 그들과 맺은 언약은 마음으로부터, 중심으로부터 되어져야 되는 항복과 진심과 전심으로 맺어져야 되는 언약인 것입니다. 외부적이고 부분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 언약이 갖는 친교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어떤 관계를 요구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 백성이 되는것, 동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슨 등산을 가거나 어떤 같은 기호 때문에 모인 클럽 정도가 아닙니다. 상당히 깊은 관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 이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이렇게 친하다는 것과 하나 더 나아가서 이 관계성이 개개인적이라는 것이 세번째 특징을 이룹니다. 여기에 있는 식으로 하면 34절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4)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단체적이지 않습니다. 도매금으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맺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과 맺는 것입니다. 개개인과 개인적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이 언약의 특징은 34절 끝부분,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은혜와 사죄가 그 마지막 특징을 이룹니다.

 

 

 

자, 이것은 새 언약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미 새 언약을 살펴봄으로써 새 언약을 주셨다 할 때는 하나님께서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이것만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에서 놓지지 않겠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가진 내 의도 중에 이것만은 실패치 않겠다고 하여 다시 견고히 세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전에는 무엇을 주었길래, 그리고 무엇을 실패하였길래 이 언약을 다시 새롭게 해야 됐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금 살펴본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새 언약의 특징은 다 새롭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상으로 처음에 우리가 특징을 살폈던 것도 신명기 6장에 가시면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시는 초두부터 나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4-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를 맺으실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님의 법을 내면적으로 중심에 가질 것을 요구하는 그 언약의 특징이 이미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6절에 있는 바와 같이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겨라.”

 

 

 

겉으로의 규칙 정도가 아니라 속으로 가져야 됩니다. 중심으로 가져야 됩니다. 창세기 17:7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시조인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그 친교성을 이렇게 확증하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 아브라함에게 이미 이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관계가 개개인과의 관계인 것이 출애굽기 29장에 나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출 29:45-46).

 

 

 

내가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과 함께 거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입니다. 구원이 개인적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라는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맺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들 개인개인과 맺는 것을 이미  출애굽기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같은 출애굽기 34:6으로 가시면 앞에서 새 언약의 특징 중 마지막이었던 은혜와 사죄의 특징이 여기 이미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가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 34 : 6).

 

 

 

은혜로우신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러면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 뜻, 언약의 중심내용이 새 언약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속에 이미 다 들어있는 내용과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실패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불순종하고 매 맞고 쫓겨나서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제 내가 언약을 갱신한다. 새 언약을 너희와 세운다. 너희를 기어코 이렇게 복주고야 말겠다. 지금 그 언약의 내용들이 옛 언약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면, 그럼 무엇 때문에 새 언약이라는 이름을 예레미야 31 : 31에서 가지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예레미야 31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왜 새 언약인가 하는 것을 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렘 31 : 32).

 

 

 

옛 언약이 깨졌기 때문에 새 언약을 세운답니다. 그런데 옛 언약과 무엇에서 다릅니까? 옛 언약을 세울 때는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어 그들의 손을 잡고 구하여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나를 버렸다. 그래서 새 언약은 어떻게 다를 것인가 하면 내용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새 언약이나 그전의 언약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무엇에서 다르냐 하면 내가 남편 되었어도 손을 잡고 끌고와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이 언약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 : 33).

 

 

 

이 부근이 언약의 특징 중에 첫번째로 내향성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신명기 6 : 6에도 있습니다.

 

너는 내 법을 네 마음 속에 새겨라

 

 

 

그러나 똑같은 내향성이지만 이제 새 언약과 옛언약의 차이성이 드러납니다. 옛날엔 이 언약을 어떻게 요구했느냐 하면 내 법을 너희가 너희 마음에 새겨라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을 너희는 너희 마음에 새겨라 그러나 이제 새 언약에서는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리라입니다.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언약의 내용이 아니라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주도권이 인간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넘어가는 방법론의 차이를 봅니다. 이것이 굉장한 차이입니다.

 

 

 

이 방법의 차이, 말하자면 같은 내향성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결국 율법을 가지고 회개하며,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왜 주셨느냐 하면 율법을 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아라가 아니라, 율법을 가진 것이 저들이 구원 얻은 바 하나님의 표라는 뜻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고 죄인인 것과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고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을 구원의 표로 알고 있고 구원의 방법으로 잡고 있습니다. 율법을 보고서 아무도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벌받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준 율법이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지 못하지 않느냐, 실패하지 않았느냐, 계약은 무의미하지 않느냐, 율법은 무가치하지 않느냐. 이런 결론으로 간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으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돌아와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율법을 주어서 지키나 못 지키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고 구원 얻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은혜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주어 이 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복주시고 이 법을 어기면 하나님이 벌주는 역사를 가지게 하며 이 세상은 인간이 주인이 아니고, 자연이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율법을 주어 구원 얻는 자리에 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율법이 인간의 무지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으로 저들을 회개시키지 못했습니다.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구원시키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이었는데 그 율법으로 깨우치지 않고 더 죄의 자리로 갔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주어 지키면 구원하고 못 지키면 벌주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준 것 자체가 구원을 얻게 하려고 주었던 은혜의 행위였던 것입니다. 율법을 어기고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자 하나님이 처음 가지셨던 뜻,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은혜를 주었던 그 뜻까지도 포기해 버리신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율법을 줄 때도 이미 인간은 죄인이었고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도 인간이 율법을 달라고 해서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불쌍히 여기셔서 준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 깨우치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냥 놔 두어도 죽을 인간들을 율법을 주어 깨우치려고 했던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동이 이 율법으로 회개하지 않는 인간들의 무지함으로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성경이 연결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심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본심은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자비와 은혜의 마음은 율법을 주시는 것에도 똑같이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을 줄 때도 우리를 회개케 하기 위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주신 것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 십자가로 우리의 시선을 모으기 위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깨우치지 못하자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기어코 율법이 손가락질했던 것, 율법이 우리를 인도하려고 했던 것, 십자가를 기어코 보내시사 하나님이 원래부터 가지셨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구원과 사랑을 기어코 이루시고야 만 것이 율법과 십자가가 손잡는 내용인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식으로 이해하기 좋게 이야기하자면 이런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병에 걸렸는가를 알기 위하여 병원에 가셨을 때 청진기를 대고 여러분을 진찰하고 X-ray 사진을 찍거나 내시경을 보거나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이런 이런 병에 걸렸습니다. 이 사진을 보십시오. 당신을 결핵 4기입니다. 당신은 위암입니다. 이 사진을 보십시오. 그런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타낸 X-ray나 내시경이나 청진기는 치료기가 아닙니다. ‘아이고 내가 죽을 병이 걸렸구나’.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앞으로 식사를 이렇게 조절하시고 이 약을 먹고 이렇게 이렇게 사십시오. 그래서 구원을 얻어야죠. 그런데 그 사진을 보고 다 도망갔습니다.

 

 

 

그 사진을 들이댄 것은 고치라고 들이댄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가니까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새 언약의 중심사상을 쫓아가서 뒷덜미를 잡아서 데려와서 코 막고 약을 넣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불만 있으십니까? 이것이 구원입니다. 율법은 절대 십자가와 대치되지 않습니다. 율법도 은혜로 주어진 것이고 구원을 목표로 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가진 것으로 구원얻지 못합니다. 율법을 외면한 것으로 끝장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하려고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갑니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율법이 어떻게 자기 구원의 자기 역할을 갖고 있는가를 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 : 20).

 

 

 

율법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 :7).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안 지킨 것으로 정죄받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안 지킨 것이 저들의 정죄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인 것을 변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 시켰습니다. 율법을 어겨서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킬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분명히 죄인이라는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율법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죄인인 것을 확인시켜서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시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어겨서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자명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실패한 것이 오히려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 7 : 13).

 

 

 

율법이 오자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나쁜 것입니까? 아닙니다.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청진기와 같습니다. 여러분, 사시다가 몸에 좀 이상이 있으면 병원에 얼른 가는 사람이 있고 안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 가는 사람들의 속셈이 뭡니까? 갔다가 정말 병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냐, 그래서 안 갑니다. 당신 정말 병 걸렸소. 그런 말 들을까봐 아주 죽을 때까지 안 가요. 안 가면 병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병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고칠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청진기가 죄입니까? X-ray가 죄 입니까? 죄를 죄 되게 하는 것, 죄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율법입니다. 율법 자체는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확인시키려고 주었고 우리가 죄인인 것을 자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준 것입니다.

 

 

 

율법의 적극적인 면을 봅시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 3 : 19 - 24).

 

 

 

여기서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옛날 로마시대 때 주인집 아이들을 학교에 까지 데리고 가는 노예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학교까지 가는데 혹 옆으로 샐까봐, 요즘 식으로 하면 학교가다가 전자 오락실로 갈까봐 아이를 붙잡아서 학교까지 꼭 보내야 되고 또 무슨 교통사고가 나거나 나쁜 사람들의 방해를 받을까봐 학교까지 무사히 애를 바래다 주는 역할을 맡은 이들을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선생이 아닙니다.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율법의 임무가 그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는 것 입니다. 학교에 가야 한다 하는 것이 몽학선생의 유일한 임무입니다. 학교에 가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유일한 가르침이 십자가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래서 십자가와 손을 잡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 : 21-22).

 

 

 

주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 율법이 아니고 십자가라고 해 놓고도 28절 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 : 28-31).

 

 

 

율법과 십자가가 손을 잡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으로 비추어 본 우리의 죄인 됨,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우리의 부패함을 확인한 것 위에 십자가가 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행복과 기쁨과 자랑으로 서지 않습니다. 좌절과 멸망과 한탄과 회개 위에 서는 것입니다. 율법은 십자가와 같은 연장선상 위에(-->연장선상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율법을 배척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저들을 향한 은혜까지도 배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손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까지도 배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손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가치가 무어냐,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 무어냐 할 때에는 모든 신자는 자신에 대해 절망한 뒤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신자가 된 이후에라도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못난 것이 우리를 한 두번 억누르는 것이 아니며 우리를 얼마나 좌절케하는지 모릅니다. 이 십자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됩니다.

 

 

 

율법의 조건 하에서 십자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누구였었는가? 우리가 얼마나 못났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둘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마음에 그의 법을 두며 십자가를 허락하신 것을 기억할 때 우리의 구원을 감사할 수 있고 우리의 못난 것과 우리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 그 은혜, 그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가치입니다. 구약이 없다면 신약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죄 있는 것을 고백치 않고 구원의 감격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자되어 확인하실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 얻었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인간의 못난 것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자신의 의지로 자랑으로 힘을 삼지 말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으로 힘을 삼으시고 절망이 없으셔야 됩니다.

 

 

 

 

 

로마서 22강(롬3:9-20절) 구약의 가치(2)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 : 9 - 20)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이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구원은 행복하고 기쁘고 영원히 살고 하는, 이런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기 이전에 구원이 필요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이유를 분명히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자들을 벌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인간의 죄인 됨,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피조물의 위치 이런 것들이 확인되지 않고서는 구원의 필요성이나 구원의 감격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1 : 18에서 시작해서 3 : 20에 이르는 이 긴 부분이 모두 인간이 어떻게 죄인인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데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일반인 모두가 보편적으로 죄인인 것을 양심 혹은 도덕윤리를 가지고 진단한 이후에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인 됨에는 변함이 없다 하는 것을 증명해 와서 이제 3 : 9 - 20에 이르는 본문에서는 그 결론에 이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 : 9).

 

 

 

10절, 11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 총체적이고 집약적인 결론입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특별히 구약성경을 들어 결론을 내는 이유는 유대인을 포함시키고 싶은 강조가 거기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점에 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다시 해야 합니다.

 

 

 

지난 번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율법의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근본적으로 은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것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19절에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모든 입을 막고 심판 아래 있는 것을 핑계치 못하게 하고 변명치 못하게 하는 데 율법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율법은 죄를 깨닫는 정도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21절에 가서 드디어 복음에 관한 적극적인 설명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9절에서 20절까지에 있는 총체적인 결론, 1 : 18에서 여기까지 온 긴 본문 중에 가장 핵심되는 결론, 우리가 모두 죄인인 것과 율법으로 우리가 죄인인 것이 증명되었다는 이 말씀을 분명히 하여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과 또 율법이 그것을 증명하는 기능을 일치시키는 성경적인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 : 25 - 27).

 

 

 

이것이 율법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율법의 핵심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이웃을 사랑할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요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눈 10 : 28 - 29).

 

 

 

이것은 율법에 어떻게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을 죄인이라고 객관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만나는 좋은 대목입니다. 율법사가 와서 주님께 물은 것은 이것입니다. 율법 중에서 꼭 지켜야 되는 제일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좀더 근본적으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에 기록된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행하라 그러자 이 율법사가 뭐라고 질문을 하는가 하면 내 이웃이 어디까지이니이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니까. 분명히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면 되는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그럴 때는 어디까지가 내 이웃이냐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마음도 있고 의욕도 있고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입니까? 말하자면 내가 몇 촌까지 책임을 져야 됩니까? 그런 질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가장 먼 친척, 사돈의 팔촌까지입니까? 단지 이웃입니까? 어디까지가 내가 사랑을 책임져야 하는 이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 : 30 - 36).

 

 

 

우선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비유는 어떤 분명한 한 가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 내용이 가장 많이 들어있는 일상생활 속에 이해하기 좋은 것으로 예를 삼는 법입니다. 비유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어떤 사람이 시청 앞에서 전철을 타고 동대문을 가다가 소매치기를 만났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강도를 만났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은 제사장이 피해 가고 레위인이 피해 가고 사마리아인이 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이고 이러한 상황 설정은 능히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어떻게 이야기하는 오해가 있을 수 있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니까 강도를 만났지, 그러는 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것이고 여리고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여호수아가 가나안 입국해서 맨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일곱 바퀴 돌아서 무너뜨린 성입니다. 그러면서 이 성을 쌓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는 저주의 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앙이 타락해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저주받은 여리고로 갔기 때문에 강도를 만났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비유의 핵심도 아니고 이 비유에서 따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누구냐? 예수님이다. 나귀는 누구냐? 우리 성도들이다. 기름을 부은 것은 무어냐? 성령님이다. 주막 주인은 누구냐? 성부 하나님이다. 데나리온들은 무어냐? 구약과 신약이다. 이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난감한, 대표적으로 성경을 잘못 보는 스타일입니다.

 

 

 

이쪽은 지금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한 율법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합니까? 율법에 적힌 대로 하라. 율법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라. 이웃이 어디까지 입니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하여, 어디까지가 이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든 것입니다. 거의 죽게 되어서 길에 누워 있는데 누가 지나갑니까? 그런데 이 비유 중 핵심은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고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 : 36 - 37).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답입니다.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율법대로 행하라. 율법의 내용과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겠습니다. 어디까지가 내 이웃입니까? 내가 사랑해야 되는 대상과 범위를 정해 주십시오. 주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비유를 통하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쪽에서 이웃을 정하는 법이지 도움을 주는 쪽에서 이웃을 정하는 법은 없다는 말입니다. 도움이란 필요로 하는 쪽에서 권리가 있는 법이지 주는 쪽의 권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도움이 아닙니다. 도움을 주는 쪽에서 권리를 가지는 것은 생색입니다. 도움을 준다고 그러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척 많이 오해된 부분 중에 하나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에서 농어촌 교회를 돕자, 이렇게 됩니다. 도와줄 만한 교회라는 것이 뭡니까? 도와 주어서 성공해서 생색이 나는 곳을 돕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절대 안 됩니다. 장학금을 줄 때도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주자, 이것은 일반 사람들의 돕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돕는 것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나중에 성공할 사람이니까, 지금 돈이 부족할 뿐이며, 지금 돈을 대주어서 성공했을 때 이 사람의 성공은 내 돈 덕분이다라고 본전을 찾아 가겠다는 투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을 도움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알아 들으시겠습니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즉 율법이 이야기하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내용 속에서 바로 그 도움이 자기의 생색은 아닌 것입니다.

 

 

 

즉 율법의 기준이 무어냐 그럴 때 율법의 핵심 되는 기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치장이 아니라는 것으로, 가장 굵은 원리로, 기초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내용의 정답으로 로마서 5 : 6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 : 6 - 8)

 

 

 

사랑이란 무어냐?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없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대신 죽는 자가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죽는 자가 혹 있는지 모르지만 악한 자를 위하여 죽는 자는 없습니다. 악한 자를 위하여 자기가 대신 죽지는 않습니다. 자식을 위하여 부모가 대신 죽기는 합니다. 그러나 악당을 위하여 대신 죽는 남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십니다. 악당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 악당이 어떤 악당입니까? 이 죄인, 하나님에 대하여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자에게 내가 복수를 하지 않고 용서를 한 것만도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그런데 그를 위하여 대신 내가 희생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인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은 이것입니다.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내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느니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그럽니다. 이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입니다. 즉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했을 때 죄인이냐 그러면, 도덕과 윤리,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수준에서입니다. 거기에 못 미치는 것은 죄라고 그럽니다. 율법이 왜 우리를 다 죄 아래 가두었으며 율법이 등장하여 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이 증명되느냐 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둘은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증명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 : 9 - 14).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한 것 같이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똑같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따라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개, 돼지 같은 짐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와 지극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수준에서부터 떨어져 더럽고 추하고 모자라고 벌레같이 된 것을 말합니다.

 

 

 

악한 짓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문제는 수준이 격하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 밑으로 떨어진 것과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심 속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바로 그것,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사랑한 사람 속에 동참하여 나타난 것이 십자가이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이 포함된 것으로 증명되는 율법의 완성이 거기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이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율법이 죄인이라고 지적하는데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우리를 정죄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목숨을 바쳐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수준이라야 율법적 기준에 합격점이고 하나님의 지으신 목표와 원래 지으신 의도에 합격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다 죄인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가면 이 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 21 - 23).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수준에서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한 영광의 기준에 못미쳤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영광스럽고 거룩한 수준입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고 진정한 모습입니다.

 

 

 

그것을 앞에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는 어떻게 보았습니까? 율법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이웃이 어디까지입니까? 그 질문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율법을 행하는 것이 그 영광스러움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치장으로 가는 것을 발견하지 못합니까? 어디까지 입니까? 범위만 정해 주시면 무조건 저는 하겠습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해서까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타난 표현이지 자기 치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몸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안 나타나 있습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이 남을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슨 일을 해도 다 그것이 자기 생색이고 자기 치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로마서 3 : 9 - 20에 있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서 가장 두드러지는 초점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13 : 10 - 18).

 

 

 

13절부터 18절까지는 모두 이웃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웃을 욕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인인 가장 두드러진 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드러지게 증거의 자료로 제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악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문제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이 얼마나 먼가를 증명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요 초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막말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랍니다. 우리 나라 무덤은 땅에다 묻습니다만 유대인들의 무덤은 벽에 굴을 파고 시체를 놓았습니다. 그 굴이 열려 있으면 거기서 썩은 냄새와 썩은 것이 흘러 나온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입을 열어서 좋은 말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남을 칭찬하고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간은 누구든지 입을 열면 몽땅 무슨 이야기입니까? 누구 잡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이런 말이 다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갑자기 친해지면 공동의 적이 생겼다는 표시라고 그럽니다. 둘이 갑자기 친해지는 것은 서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적이 있기 때문이고 둘이 동시에 미워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친해진답니다. 우리 역사가 이것을 증명합니다. 나라와 나라가 손을 잡는 이유가 뭡니까? 공동의 적이 생겼을 때입니다. 그 짓을 제일 많이 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이 세상 역사 속에 가장 악당이 누구냐 하면 영국인들입니다. 독일이 세지면 프랑스와 손잡고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 뒤통수 치게 하고 프랑스가 세지면 독일과 손잡고 프랑스 뒤통수를 칩니다. 싸우고 나서 식민지 얻어먹는 것은 일등이고 절대 양보 안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을 가졌으면 영국 놈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안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구요. 웃기는 소리하지 마십시오. 힘이 없었고 피해만 입었습니다. 언제나 피해를 입는 쪽이 덕과 정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절대 그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라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악당입니다. 악질이고 못된 놈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증명하는데 대해서 변명할 여지가 있으십니까?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린 다 악당입니다. 선한 일을 한 적이 있다면 생색을 낸 적밖에 없으며 우리가 누구와 친한 적이 있다면 그를 내 편으로 삼아 누구를 함께 죽이기 위하여 친한 적밖에 없습니다. 예외없이 그렇습니다. 신자란 여기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신자란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술을 통하여 성경이 이렇게 증거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변화입니까? 로마서 14 : 7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변화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 : 7 - 8).

 

 

 

이렇게 인정하십니까? 신자들은 바로 이렇게 바뀐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은 덕을 세우기 위하여, 찬송하기 위하여 생명과 진리를 위하여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은 더 이상 열린 무덤일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존재와 우리들의 입술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며 덕을 세우는 것이요 생명과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변화입니다. 구원 얻은 바 달라진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처참한 자리, 그 버러지 같은 자리에서부터 이 자리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큼 인간에게 영광된 것은 없습니다. 이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더 이상 남을 죽이지 않으며 저주하지 않으며 남을 해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지 않는, 정말 하나님이 지은 영광된 인간 본연의 자리에 비로소 들어온 것입니다. 그 감사를 여러분이 하실 줄 알아야 되고 그 기쁨을 누리실 줄 알아야 되고 그 영광된 것을 여러분 스스로 파괴하지 않으셔야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자의 쾌감이 무엇입니까? 누구를 작살내는 것 아닙니까? 누가 못되는 것을 보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더 이상 그러지 않습니다. 남을 위하여 기도하며 안타까와 하며 성경이 요구하는 것과 같이 잘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우리는 즐겨 능력받는 일과 곤란당하는 일과 이 세상에서의 환난을 기쁘게 기꺼이 감수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신자 된 특권이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자의 자랑이며 감사거리이며 영광된 모습입니다. 죄가 무엇인가 분명하게 직시하시고 여러분의 영광된,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누리실 줄 아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권합니다.

 

 

 

 

 

로마서 23강(롬3:21-24절) 그러나의 가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 21 - 24)

 

 

 

로마서 1 : 16에서 선포했던 복음에 관한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로마서 3 : 21 이하에 등장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 복음이 다시 한 번 선포되고 그 내용이 다시 한 번 증거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3 : 21에 시작되는 ‘이제는’ 이라는 단어로 뜻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구원의 복음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오해가 뭐냐 하면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이제는’ 이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 중에 우리 신자들이 가장 많이 보는 구절이 서신서입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쉽게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서들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상당히 설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문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훈적이지 않습니다. 납득과 동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에 있는 글 중에서 어떤 단어가 제일 중요하냐 하면 접속사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러나’ 이 단어를 절대 잊지 마십시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구절이 등장했을 때 그것이 왜 등장했느냐? 어떤 목적과 내용을 주려고 등장했느냐를 성경의 입장에서 파악하지 않고 여러분의 개인적인 욕심에 갖다 붙이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것을 잘못 갖다 쓰면 아주 곤란합니다.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욕심을 이 구절에다 다 파묻어 가지고 딱 이 구절만 갖고 덤벼들면 안 됩니다. 그 구절들이 왜 등장하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앞 뒤 문맥들을 연결해서, 즉 그 서신의 줄거리와 연결해서 이해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이 복음을 이야기할 때 ‘이제는’이라는 말로 이것을 소개하는 것을 조심해서 보셔야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그것을 원의와 가깝게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 이런 접속사를 하나 부쳐야 됩니다. ‘그러나’라는 말을 부치면 됩니다. 영어성경에는 이것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해하기 좋게 하기 위하여 ‘그러나 이제는’이라고 말을 붙여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이해할 때 ‘그러나’라고 대조되는 앞 뒤 차이를 분명히 이해하셔야 복음, 기독교 신앙, 우리가 믿는 바 확실한 신앙에 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젊은 학생들을 가르치던 시절에(제가 언제나 첫인상을 별로 좋게 못 주는 외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늘 점수를 못 따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의 괜찮은 점을 학생들이 발견하곤 했습니다. 요녀석들이 이런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척 보면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이것은 우리말의 말장난입니다. ‘인줄 알았지만’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면 뒤는 그 반대말이 와야 되는데 앞에 있는 말을 더욱 긍정하는 말을 붙임으로써 말장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나’라고 했으면 분명히 앞에 있는 것과는 돌변한, 반전된 이야기가 뒤를 따라 와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러나’라고 말하는 뒤를 여러분이 알고 있으면 그것의 정반대 되는 것이 앞에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동시에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즉 ‘그러나’라고 구원을 소개한 것은 그 앞이 이것 없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로마서 1 : 16에서 이미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1 : 18 - 3 : 20에 이르는 긴 장을 할애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장했던 것이 인간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구원이 왜 필요한가 하는 설명이었습니다.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존재라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어서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이 이 ‘그러나’ 앞에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우리는 영원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헤쳐 나올 능력과 지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고 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죽어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받아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와 벌 주심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라는 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을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을 벗어나려면 율법이 요구하는 기준 이상에 우리가 있어야 하는데 율법의 뜻을 이해도 하지 않으며 율법을 추적하지도 않으며 율법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혹 안다 해도 그 율법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을 로마서 1 : 18 - 3 : 20에 이르도록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3 : 10로 돌아가셔서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는 선언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고 우리가 그 중에 하나인 것을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 : 19 - 20).

 

 

 

율법으로 확인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다는 확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복음을 제시하기 전에 우리에게 인식시키는 가장 중요한 전제입니다. 이것이 있고서 ‘그러나’가 등장해야 여러분은 ‘그러나’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리고 무슨 방법이 없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 후에 ‘그러나’가 등장한다면 앞에 온전한 절망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다음에는 분명히 반전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앞이 절망으로 가득한 사람에게만 ‘그러나’가 마음의 희망이고 실제로, 말 그대로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 없이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 근래 우리 한국 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이 ‘그러나’가 없이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을, 기독교 신앙을, 행복과 기쁨의 차원에서 찾고 성취와 만족의 싸움으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절망, 그것을 헤쳐 나오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의 처절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복음이 설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복음은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 기쁘게 해주겠다라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싸움입니다.

 

 

 

복음의 핵심과 어긋납니다. 또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던 구원파 같은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가 하나님 앞에서의 절망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절망에서 구원받은 대조가 없습니다. 무슨 대조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본전치기 인생에서의 대조를 복음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슬펐다 그러나 지금은 기쁘다, 옛날에는 병들어서 무슨 약을 먹어도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기도했더니 나았더라, 옛날에 그렇게 발버둥을 쳐도 먹고 살기가 바쁘더니 예수를 믿고 나서는, 이제 신앙 가운데서는 잘먹고 잘살게 되었다. 이것은 ‘그러나’로 대조되는 성경 복음의 진가가 아닙니다. 성경이 ‘그러나’로 대조하는 두 반전된 양쪽의 커다란 차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대조하는 것이 ‘그러나’로 분리되고 대조되어야 할 국면입니다. 그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료하던 인생으로부터 생기있는 인생으로, 슬프고 고통 속에 있던 인생에서 기쁨과 형통한 인생으로, 이것은 성경이 대조하는 구원의 차이가 아닙니다.

 

 

 

가장 큰 오해가 성경에서는 이렇게 예시되어 있습니다. 말라기 1장으로 가십시오.

 

여호와께서 말라기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말 1 : 1 - 3).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경고를 하시는데 무엇을 경고하시느냐 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너희가 왜 인정하지 않느냐’라고 꾸중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그런데 너희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반문을 한다고 그 문제를 꾸중합니다. 무척 재미있는 질문이며 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애굽땅에서 하나님의 크신 인도하심으로 기적적으로 탈출하고 저들이 짓지 않은 집, 심지 않은 것을 먹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신하여 늘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다가 급기야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 간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나라 말을 다 잊고 잃어버려서 바벨론 사람들이 쓰던 아람어를 저들의 통용어로 쓰게 되는 그런 후유증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야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불평의 자리에 오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섬겨서 얻는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자리에 오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이 신앙생활의 힘을 갖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예수 믿어 이익을 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농땡이 부리고 신앙생활을 해도 여러분이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하나님 앞에 꾸중을 당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을 사랑해서 언제 우리가 유익을 얻은 것이 있습니까? 공연히 하나님 섬겨 가지고 이웃 나라들에게 침략만 당하고 포로나 되었지 이익 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제 대답을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증거를 제시한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사랑한 충분한 증거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이 증거가 됩니까? 여기에는 이런 뜻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서가 장자입니다. 장자만이 가문의 상속권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해서 야곱에게 상속권을 주었습니다. 한 가문의 재산 상속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상속권을 주었단 말입니다. 야곱은 원래 차남입니다. 장자가 아닙니다. 상속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그러나’가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허락한 성령과 영원과 진리를 상속할 권리가 없을 뿐 아니라 자격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이 비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너희는 다른 민족보다 더 우수하지 않다, 더 잘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내 말씀을 주었고 천국 열쇠를 주었다. 생명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느냐 하면 이 세상의 기업으로 그 둘을 비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전과 하나님을 섬긴 이후에 이 세상에서 도대체 내가 유익을 본 차이가 무엇이냐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분명히 차이가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그 증거는 옛날엔 네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내가 너희와 상관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러나’로 대조되는, 신앙의 핵심 되는, 복음의 복음되는 기준이란 말입니다. 에서는 세상 기업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말 1 : 3).

 

 

 

세상의 것을 그들이 가졌습니다. 기업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야곱에게 허락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생각하기를 그들이 가진 것이 나은 것이 없고 이 세상에서 큰 소리칠 수 없고 이 세상의 세력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늘 이스라엘 백성을 치기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그것이 복이라고 그럽니다. 너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친 것이고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으로 약속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꾸짖느냐 하면 예전에 너희가 갖지 않았던 것, 곧 나와 무관했던 관례로부터 나와 유관한 관계, 긴밀한 관계, 화목한 관계로 들어 왔는데도 불구하고 너희가 그 특권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꾸중합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말 1 : 7).

 

 

 

내가 너희의 예배를 받고 너희의 경배를 받는, 너희와 무관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이 관례가 된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 된 줄을 모른단 말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오고 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 줄 모르고 나에게 더러운 떡을 내놓고 있다. 너희가 나를 멸시하고 있다. 이것을 꾸중하십니다. 옛날에는 너희가 나를 몰랐고 나와 무관한 관계로 있었지만 이제는 내 사랑의 대상이고 나와 연합한 자다. 그 특권을 너희가 모르고 있다. 이것을 꾸중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말 2 : 13 - 14).

 

 

 

아내에게 잘하라는 것입니다. 본처를 놔두고 다른 여자를 건드리지 말아라. 물론 이혼도 안 됩니다. 왜요? 성경에서 부부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 신자 사이에 갖는 거룩한 관계를 상징합니다. 순결해야 됩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것이 윤리와 도덕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윤리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가 거룩하고 순결하며 긴밀한 관계인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납득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부부가 어떤 상징을 갖고 있는가,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확인시키기 위하여 이것을 꾸짖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과 우리는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부부 관계같이 그렇게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이상의 긴밀한 관계, 우리를 자녀라 하시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까지 부르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관하지 않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 대신 죽게 하시는 대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나’입니다.

 

 

 

3 : 7 이하에 여러분이 대부분 잘 알고 계시는 구절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 : 7 - 10).

 

 

 

십일조를 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이 없으셔서 여러분 코묻은 돈을 빼앗을 분이 아닙니다. 외운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일조 내면 복 받는다. 아닙니다. 돈이나 갖다 내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배나 참석하고 헌금이나 내고 그러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일조란 이것입니다. 위에 에서같이 세상의 기업을 갖는 자가 아니고 우리는 영원한 기업을 가지는 자입니다. 우리의 목표와 가치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요 거룩한 것, 영원한 것의 근원인 것을 아는 것, 그 신앙적인 행위를 헌금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라.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9절에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 온 나라가 내 것을 도적질하였다. 온 나라가 십일조 낼 것을 안 내었다. 그것이 아니라 온 나라가 어디를 향하여 시선을 못 박고 있느냐 하면 세상의 가치, 썩어질 가치에 눈을 못 박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재정적, 욕심에 들떠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러지 말고 내게 시선을 못 박으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갖고 있는 영원과 거룩과 진리의 가치에 대하여 너희 온 가치를 두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부른 것입니다. 이것이 ‘그러나’가 분류해 내는 ‘그러나’ 이전과 ‘그러나’ 이후의 차이이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종교를 하나의 방편으로 요구하고 계시다고 해도 그것이 예수를 믿는 방법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핵심과 목표는 그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 구원과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높으심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빠지면 기독교 신앙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우리의 기쁨, 구원들은 신앙을 체크하는 아무 기준이 아닙니다. 분명한 기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 앞에 내가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었다는 것을 아는 사실인 것입니다.

 

 

 

마음 속에서 불길이 이는 것이 아닙니다. 냉정한 싸움입니다. 가만히 않아서 조용히 믿으십시오. 박수 치고 믿지 마십시오. 기도받고 자빠지지 마십시오.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심심한 마음들을 채워주는 재미있는 약장수의 광고 같은 것입니다. 제가 아는 저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학교 다니실 때 유일하게 한번 결석한 적이 있었답니다.

 

 

 

한번도 결석을 안 했는데 왜 결석했느냐 하면 그 때 약장수를 만나서 결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약을 팔면서 뱀을 하나 꺼내놓고 줄을 기다랗게 매놓고 이 뱀이 줄을 탄다고 하더랍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전에 잠깐 이 약을 소개하겠다고 하길래 해가 지도록 않아 있었는데 결국 뱀은 다시 자루 속으로 들어가고 줄 위에 올려 진 적이 없다고 그럽니다. 속지 마십시오. 뱀이 줄을 타는 것을 보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에 큰 기쁨이 자리잡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렇게 물어야 됩니다. 신앙을 테스트하는 방법은 여러분이 절망을 아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기쁨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닙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경에 있는 말씀들이 여러분을 정죄하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산상설교를 읽으십니까?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도 대자,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이렇게 까지는 합니다. 오른편 뺨을 대고 왼편 뺨을 댄 다음 진단서를 떼어 고소를 합니다. 그러나 누가 성경에 있는 요구들을, 율법에 있는 요구들을 당당히 지킬 수 있습니까?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자다, 여기서 벗어날 남자가 누가 있습니까? 마음으로 형제에 대한 미움까지도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잘난 사람이라고 해 보았자 마음 속에 있는 것을 표현 안 할 뿐입니다. 우리는 다 정죄감을 가집니다. 그 뿐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무지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모릅니다. 어느날 아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하고 저것은 저렇게 해야 된다, 아는 것을 행하던가요? 안 행합니다. 인간은 그만큼 잘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인간이 알고 행할 수 있는 존재였다면 율법으로 족합니다. 알고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절망에 대하여 여러분이 이 답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신자를 공격하는 방법 중 하나이고 신자가 신자를 정죄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정직한가? 여러분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정직합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그럼 믿는 사람보다 덜 정직합니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차이가 있지 않더란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교양이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겸손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이기주의가 아닙니까?

 

 

 

사회 나가서도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약삭 빠르게 살고 게다가 예수까지 믿죠. 세상에 살 때도 좋은 데서 살고 죽어서도 좋은 데 가려고 발버둥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약삭 빠른 자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거야말로 ‘그러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 사람보다 낫다고 믿지도 않으며 낫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못난 자며 부족한 자며 구원을 얻을 아무런 조건도 능력도 없는 자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이 부족하고 무능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신자란 무엇이 다르냐 그럴 때 우리가 아는 것은 이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보다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죄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가 아닙니다. 구원 해달라고 졸랐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핵심은 이 구원을 받을 조건도 없고 자격도 없는 나에게 왜 구원을 베풀었는지 모르겠다입니다. 설명을 하자면, 아는 것은 구원을 받은 것을 압니다. 이것도 다른 겁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우리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압니다. 아직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왜 구원을 못 받았는지를 모릅니다.

 

 


내가 왜 구원을 받았는지 모르는 것과 똑같이 모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신비는 밤에 자다가 환상을 보는 신비가 아니요 교통사고가 나서 굴렀는데도 아무 데도 안 다치는 신비가 아니요 암 선고를 받고 내일 모레 죽으리라 했던 신자가 벌떡 일어나는 신비가 아니라 조건 없고 자격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욕먹어 마땅한 이 더러운 죄인을 하나님이 그 고귀한 피를 흘려서 왜 값없이 구원해 주었는지 모르겠다는 그것이 신비입니다.

 

 

 

이 싸움이 현대 교회의 가장 큰 싸움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금방 넘어가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해주겠다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에 영원을 팔아 먹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구원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을 무엇으로 확인하느냐? 여러분의 윤리성, 도덕성, 종교성이 아닙니다. 그것이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높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이것으로 점검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압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천국가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것보다 더 든든한 신앙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이렇게 점검하십시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나는 이것도 못한다, 이것도 못한다. 그렇게 절망할 때마다 이 ‘그러나’를 붙이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난 못났습니다. 난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 얻은 믿음입니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고린도전서 15장으로 가십시다. 우리가 믿는 구원의 핵심이 아주 잘 드러나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 : 51 - 58).

 

 

 

우리 성도들이 죽으면 영혼은 주님의 품으로 즉시 가고 몸은 땅에 묻혀 썩습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인간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인간은 소멸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존재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자들은 죽은 후에 영원한 형벌의 장소에 갈 것이고 주를 믿는 자들은 천국으로 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 천국에 우리를 입성시키는 것과 같이 먼저 죽은 성도들은 다 주님의 품 안에 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낙원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세상을 심판하여 없애고 천국문을 여는 날이 옵니다. 그때 먼저 죽었던 모든 성도들을 불러 일으키실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먼저 죽어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죽어서 그 몸이 땅에 썩어서 무엇이 흙이고 무엇이 살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나팔소리가 나는데 어떻게 듣습니까? 그 나팔소리를 시체가 어떻게 듣고 일어납니까? 우리가 구원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팔소리가 나자마자 선착순으로 14만 4천 안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 아닙니다. 왜 안되느냐 하면 시체는 나팔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혹 듣는다 할지라도 이것 때문에 들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또 하나의 불가능한 것을 강조하려고 그럽니다. 들어도 시체는 달릴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아니 목표를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눈알도 썩었고 다리도 썩었고 다 썩었습니다. 시체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달릴 수도 없습니다. 방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나팔에 우리가 어떻게 홀연히 일어나서 부활합니까? 어떻게 그 몸이 부활합니까?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 : 53).

 

 

 

입는 것입니다. 입히우는 것입니다. 수동태입니다. 우리가 입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일으켜지는 것입니다. 5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6 : 57).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이 이김을 주시는 것입니다. 또 일어남을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어냐?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형벌을 받아 마땅한, 그래서 무슨 방법이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꺼내 준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로 기쁩니다. 기쁨을 찾아간 것이 아니요, 행복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여 그 진노를 벗어날 길이 없는 인간을, 그 죄값을 갚을 길이 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해 내신 것을 구원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행복을 목표로 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이 절대절명의 절망의 자리에서 구원받아서 기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것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인생 속에서, 신앙생활 속에서 아직도 무능한 것, 죄악된 성품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다시 외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못난 것을 그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 무엇이 나를 방해하리요. 이것이 신앙이요 우리의 외침이요 기쁨이지 마음 속에 다시는 근심도 없고 난 왜 근심이 있는지 이해가 안 가, 왜 아직도 확 맡기지 못하고 걱정을 해. 이런 것을 신앙이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제발 혼동하지 마십시오. 누가복음 2장으로 가십시다. 예수님이 탄생하셔서 할례를 받으러 성전에 올라가자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 2 : 25 - 33).

 

 

 

이스라엘에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사람이 있습니다. 무슨 위로를 기다립니까?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편안히 놓아 주시는도다’입니다. 아직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구원, 구원의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처해 있는 곤경, 처해 있는 절망, 절망의 위기들에 대해 우리 쪽의 방법을 제시하거나 우리 쪽에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뭐라고 했습니까?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어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 있어요.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시므온이 평안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그가 예수를 만나고 내가 이제 평안히 가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모두 율법 아래 있으며 율법의 지적에 대하여 할 말이 없습니다. 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죄인인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린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절망할 때마다 ‘그러나’를 부치십시오. 누가 여러분을 공격할 때마다 부치십시오. ‘그따위 꼴을 하면서도 예수쟁이라고 말을 해’그러면 그러십시오. 내가 이 따위가 아니었으면 하나님이 안 오셨을텐데, 내가 요따위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말씀하십시오.

 

 

 

누가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여러분을 반대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에서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내린, 우리가 누리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가 복된 소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사와 평안과 여러분의 영원한 천국의 기업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로마서 24강(롬3:21-24절) 기독교 신앙의 개념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 21 - 24)

 

 

 

지난 번에는 복음을 설명하는 핵심 되는 부분 중에 첫 번째로서 구원이라는 것을 정의할 때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구별을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의 현실, 절망적인 상태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구원받은 상태와를 비교하지 않으면 구원의 참다운 기쁨과 그 차이를 혼동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려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2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직접 이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있었던 율법이 요구하는 것, 즉 그 율법의 대상인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하여 행해야 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고 모든 신자들을 가장 혼동시키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의 개념화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하여는 신학적인 자체 내의 논쟁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 교단 내에서도 바로 기독교라는 것을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의미와 내용으로 추적하는 부류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쉽게 신신학자들이라고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은 이런 것들입니다.

 

 

 

불트만이라는 학자가 비신화화라고 그럽니다. 어느 민족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히브리 민족의 종교였던 이 기독교가 전세계에 널리 퍼진 것은 저들이 가진 종교성이 다른 민족이 가진 종교성보다 비교적 수준이 우월했기 때문이다라고 추적하는 부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고 예수님은 어떻게 되는가? 저들은 히브리 민족이 가장 종교적인 어떤 내용들, 한 윤리와 도덕을 사람들에게 잘 인식시키고 수납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신화화했다고 합니다.

 

 

 

착한 일을 권면하고 악한 일을 중단시키기 위하여 종교적인 형태를 빌어 그 교훈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착한 일을 하면 상을 주고 나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 그러니까 착한 일을 권면하고 인간에게 고급한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하여 내용에 신화적 표현을 빌어서 썼으므로 신화적인 요소를 제거해 버리고 신화적인 요소를 동원하여 주장하려 했던 내용만을 제대로 발췌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이 비신화화 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주장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저들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꺼냈다던가 홍해를 가르고 건넜다던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렇게까지 그 내용을 강조하도록 만든 그 내용에만 접근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박애정신입니다.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대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강조키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신격화했다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기독교 신앙을 선행을 하는 것으로 삼고 인간의 가장 높은 경지의 실천을 한 사람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저들과 어려움과 굶주림과 문맹을 함께 당하고 저들을 위하여 인술을 베풀고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신앙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든가 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선행을 자극키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그 인간들의 선행과 지고한 인간의 이상들을 자극하시다가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을 불살라 모범을 보이사 우리를 도전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생각하실까봐 겁이 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거룩한 성품과 의롭고 선한 것을 도전하고 자극하고 개발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러 오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를 도전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혀 희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치르러 오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를 도전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깨우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선생이 아닙니다. 우리의 대속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싸움거리는 이것입니다. 기독교를 개념화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간섭을 그 핵심으로 가지느냐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여러분의 신앙과 일치시켜야 될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으로 가 보십시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 12 : 44 - 45).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 그러면 사랑의 화신, 4대 성인, 이렇게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인식하고 계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보내셔야 됐는가? 이어서 물을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아무런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하여 유일하게 죄값을 물으실 수 있는 하나님이 그 죄값을 묻지 않고 죄 가운데, 절망상태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를 보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라든가 정직하라든가 착하라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고 보내시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 회개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었기 때문에 예전에 누구인지를 아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결론입니다.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여기가 우리가 밤낮 속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논할 때 여러분이 기독교를 무슨 선행이나 고급한 이상의 실천이나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같이 기독교 신앙을 모독하는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인간이 누구인가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현실이 무엇인가는 하나님의 존재와 거룩하신 하나님 아래서, 인간의 위치와의 상관 관계에서 확인하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의 실패는 어디에서부터 오느냐 하면 기독교 신앙을 개념으로부터 갖고 있는 데서 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을 착한 것과 사랑, 용서라는 개념으로만 갖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이 세상을 추구하면서 사는데도 여러분 자신이 틀리고 있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에서의 명예를 추적하고 세상에서의 욕심을 추적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신앙인인 것 같습니다. 왜요? 저 사람들보다 우리가 좀 낫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이면 열 번 다 실패하고, 다 악질적이고, 다 불의하고 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지만 우리는 열 번에 한번쯤은 정직합니다. 열 개 중에 하나쯤은 양보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을 목표로 살지 않고 세상을 향하여 세상의 원리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저 사람들과 다른 것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나는 저들보다 덜 악했다, 나는 저 사람들보다 그래도 좀 낫다. 이것은 여러분이 신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이 여러분 스스로를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우리는 아홉 가지를 잘하고 한 가지를 잘못해도 하나님 앞에 죄책감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으면 기독교의 모든 종교가, 이 신앙이라는 것이 저들이 열 가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내가 하나만 잘해도 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가 늘 신자들이 틀리는 부분인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이것,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의 앞에 서야 되는 우리의 존재를 잊고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 :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그의 나타나실 것, 그의 나라, 이것이 잊혀지고 착한 것, 의로운 것,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 이것만이 다로 떨어져서 기독교를 대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추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과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있으며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우리를 준비해야 됩니다.

 

 

 

이것이 빠지고 선행이라든가 무슨 가치라든가 무슨 의미라든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습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존재, 이것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을 제외시켜 놓고 기독교의 내용이 우리를 속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자, 이런 것들이 우리를 세상적인 욕심과 세상의 가치와 세상 방법 속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한 두 가지 하는 것으로 우리가 마치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인 양, 우리가 할 일을 다한 양 스스로를 속이게 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우리를 이렇게 꾸짖는 것과 만나게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 : 1 - 2).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 착하고 거룩한 것이 왜 가치가 있습니까? 그 사람에게 저 사람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저급한 것을 욕심내는 동물적인 수준이 아니고 고급한 인격이라는 것을 증명받기 위하여 종교가 여러분에게 소용되고 있습니까? 잘못입니다. 모든 기독교적 신앙행위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의 심판을 준비하는 싸움입니다. 그의 기뻐하심을 향한 나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존재가 없이 세상적인 가치로써 종교가 동원되면 사람의 박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헌금은 왜 존재합니까? 여러분이 주일 아침마다 오는 이 종교적인 행위는 왜 존재합니까? 내가 세상의 속물과는 다르다는 증명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거룩에 여러분을 접근시키는 행위입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까? 사람 앞에 서 있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묻고 있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된 날이라 하겠느냐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 : 1 - 7).

 

 

 

금식이 뭐라구요? 금식이 밥을 굶는 것이 다가 아니고 밥을 굶어 가지고서 얼굴이 흉해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금식의 목표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인 행위가 사람에게 박수받는 가치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금식이란, 즉 종교적 행위란 무릇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이라야 합니다. 주린 자를 보면 너희 마음이 동해야 되고 결박당한 자를 보면 그 결박을 풀어주는 자가 되어야 하고 내 골육을 대하여 숨지 않는 것, 고아와 과부를 피하여 숨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과 자비로운 마음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어야만 되지 그것이 사람에게 우리가 종교적 인물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데 불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의 최고의 약점이요 병폐란 말입니다. 성경은 들고 있고 헌금은 하고 있고 찬송은 부르고 있는데 아무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접근되어 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사람들 앞에서 인간적으로도 똑같이 하고 세상의 것에서도 남에게 지지 않으며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고귀한 인격을 가진 자라는 종교적 치장으로까지도 남에게 지지않는 교활한 자가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남을 향한 사랑도, 주님의 불꽃 같은 눈 앞에서의 두려움도 주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나의 소원이 된 변화도 신자들에게 없습니다. 이 나라의 신자의 비율은 무척 높습니다. 사천만 인간 가운데 천만이 넘는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중에 대부분은 사기꾼들인 것입니다. 구원은 못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더럽게 받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다운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옛날 바리새인들을 꾸중한 것같이 너희가 천국열쇠를 가지고 너희도 안 들어가고 남들도 못들어 가게 한다는 것이 정확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꼭 가면서 어떤 소리를 합니까? ‘이것을 누가 들었어야 하는데’ 여러분 자신입니다. 남에게 이 이야기를 돌리지 마십시오. 호세아 6 : 1 말씀부터 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 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을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 : 1 - 6).

 

 

 

번제보다도 무엇을 원한다구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십니다. 6 : 1 - 6에 이르도록 무엇으로 되어 있습니까? 여호와께로, 여호와께로입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선행으로, 고귀함으로, 사랑으로가 아닙니다. 여호와께로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를 거룩하게 지으신 하나님이 제외되고 거룩을 논하고, 신앙을 논하고, 기독교를 논하고, 종교를 논하는 것같이 틀리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해지고 기독교가 논의되면 거기는 언제나 하나님이 서야 할 자리에 인간이 섭니다. 이런 고급한 것을 추적하는 인간의 잘남, 자기의 모든 권리를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인간의 고귀함, 인간이 그 영광을 다 취해 먹는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의 높으심 앞에 배신하고 더러운 것으로 스스로 원해서 뛰어 들어갔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을 씻을 능력이 우리에게 없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선을 찾는 것이 없었던 존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문제를 풀 수 없었던 존재요 하나님이 이 불쌍한 우리들을 찾아오사 이제 거룩해진 존재들입니다. 이 하나님이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이 구원을 논하고 신앙을 논할 때마다 더럽고 무가치한 것을 무지와 연약함과 완악함 속에서 쫓았던 것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생명을 추적하는 자리로 변화되었는가를 살펴 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마음 속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야 합니다.

 

 

 

거룩과 의와 생명과 진리가 세상과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늘 하나님께로, 하나님께로입니다. 하나님, 빛을 더 주십시오, 지혜를 주십시오, 지식을 주십시오, 의와 거룩을 주십시오, 불쌍히 여기십시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내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돈을 주십시오, 건강을 주십시오, 이것은 기도제목에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것뿐입니다. 그것 빼놓고 기도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더 큰 자동차, 더 오랜 생명, 더 높은 지위, 더 아름다움, 더 잘난 재능 이것 외에 기도해 본 것이 무엇이 있느냐 말입니다.

 

 

 

신자답게 살지 않으면서 교회를 채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마십시오. 여러분 혼자 죄 가운데서 돌아 가십시오. 하나님까지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 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더러운 욕심에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지 마십시오. 신자답게 살지 않을 것이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을 치장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이 있다면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불쌍히 여기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말 외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그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 것으로 우리가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영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더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저를 불쌍히 여기셨을 뿐 아니라 구원하신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 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땅한 기도요 감사이어야 합니다.

 

 

 

시편 27편으로 갑니다. 1절에서 3절까지 여러분의 신앙을 모으셔서 함께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아멘

(시 27 : 1 - 3).

 

 

 

 

 

로마서 25강(롬3:21-24절) 구원이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 21 - 24)


                                               


로마서 3 : 21 - 24까지의 말씀은 결국 앞에서 우리가 오랫동안 생각했던 이야기의 종합이고 가장 중요한 이런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결국 구원이란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어냐, 어떻게 얻느냐, 이렇게 우리가 로마서 앞부분에 나오는 부분들을 이제 결론으로 압축시켜야 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24절에 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로운 자리에 가는 것이지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불행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물론 없습니다. 슬프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더 중요한 일에 따라오는 보너스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거나 중요한 내용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거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바 되었다’ 하는데 나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에 의한 선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거나 조건을 제시하여 이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우리가 의인으로 판단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법적 선언인 것입니다. 법정에서의 선고 같은 것입니다.

 

 

 

법적으로 우리는 의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야기시키느냐 하면 신앙을 갖고 계시든가 구원을 받았다고 여러분 스스로 생각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이나 신앙의 회의로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다. 마음의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 신앙상의 어떤 불만족으로 인한 회의 그것은 다 신자 된 가장 중요한 증거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구원과 신앙 문제에 관하여 어떤 조그마한 의심도 없고 보람도 없이 만족하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무슨 잘못된 약을 먹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나 조건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안에 늘 불안이 있습니다.

 

 

 

내가 노력하거나 내가 요구하거나 내가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에 이 문제에 대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진다든가 감정적으로 또는 감각적으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체험을 한다든가 어떤 희열에 휩싸인다든가 하는 것은 구원과 그렇게 직접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뜻밖에도 드라마틱하지 않고 특이하지 않습니다. 매우 덤덤합니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든가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어떤 큰 일들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공통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그것을 달성하기 전에 가졌던 열심, 희망, 기대, 이런 것과 달리 정작 그일을 이루고 났을 때 그저 덤덤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최초로 100m를 십초대에 뛰었을 때, 또는 무산소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했을 때 이런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의 답은-그것을 사람들이 문제로 삼고, 사람들이 박수를 쳐 주니까 그것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지만-그저 덤덤한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싸움이 아니고 생각보다 객관적인 싸움입니다.

 

 

 

그럼 이 구원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인가? 다시 24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 ‘값없이’라는 말은 ‘까닭없이’입니다. ‘이유없이’입니다. 구원은 어떤 면으로 보든지 우리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임한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어떻게 믿었는가, 내가 어떻게 결단했는가, 내가 어떻게 회개했는가는 구원의 조건이나 원인이 아닙니다.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가 그 원인이고 이유이고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근자에 일어나는 모든 신앙상의 잘못들은 기독교 신앙이 우리가 무엇을 바쳐야 되는가, 우리가 어떤 감격을 맛보아야 되는가, 이런 주관성에 너무 많이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지 않나 싶습니다.

 

 

 

찬송가 405장을 지은 죤 뉴튼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Amazing Grace라는 찬송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라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 찬송을 지은 죤 뉴튼은 예전에 노예선 선장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죄악 중에 제일 악질적인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어떻게 회심을 했는가? 그가 어떻게 믿기로 했는가는 초점이 아니라 그 당사자가 이 구원을 얻고 난 다음에 가장 놀란 것은 이것입니다. 나 같은 것도 구원해 주신단 말인가? 그래서 Amazing Grace입니다. 놀라운 은혜, 그 은혜 놀라와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것도 구원해 주셨단 말인가가 초점이지 내가 이 모든 죄를 어떻게 회개하고 주께 돌아 왔는가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죄로부터 등을 돌리고 어떻게 이를 악물고 주를 붙잡았는가, 우리가 어떻게 손톱이 빠지도록 붙잡고 늘어졌는가는 구원에 관한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에 관한 설명은 하나님이 공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공짜라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내지 않았는데라는 식의 표현이 아니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질문을 하나 더 합니다. 무엇이 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가? 앞에서 이미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의 노력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때 어떤 방법으로 주셨는가입니다. 다시 24절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입니다. 방법은 우리의 믿음,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나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보내사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역이지 내가 매달리고 믿고 무엇을 제공해서 얻은 결과가 아닙니다.

 

 

 

여기가 구원 문제에 관하여 우리가 제일 많이 오해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구속이라는 말은 속전을 받고 죄인이나 노예를 풀어주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에 가면 구원을 바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구속이라는 내용과 일치하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을 만납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 19 - 20).

 

 

 

우리가 옛날에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인 적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의 노예로부터 사들인 셈입니다. 말하자면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물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죄의 편을 들다가 이제 하나님 편을 드는 데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죄를 좇고 있다가 이제는 하나님을 좇기로 했다, 옛날에는 사망을 믿고 있다가 이제는 의롭고 거룩하고 복음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그래서 바로 이런 설명을 놓고 우리의 구원 얻는 바 믿음에 관해서 좀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이냐 그럴 때 로마서 3 : 21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 : 21 - 22).

 

 

 

구원은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얻느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는 방법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식으로 나는 예수를 믿었다, 넌 안 믿었다, 이렇게 구별하는 믿음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믿음을 21절에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율법이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어떤 기준, 어떤 수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십계명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줄여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 율법의 요구를 우리 자신에게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우리보고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율법을 지킬 힘과 능력이 없음을 성경이 논증을 하였습니다. 우리 현실 속에서 한번도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이웃을 잡아먹고 살지, 이웃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가 죽는 예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자인하고 율법으로는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실 다른 방법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그 율법을 성취하라는 요구를 바꾼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방법론으로부터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제 자명하게 증거된 후 그 외의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 율법으로 우리가 우리의 의를 찾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3 : 20의 선언입니다. 이제 우리를 의롭게 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은 율법이 아닌 방법입니다. 율법식의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무어냐 하면 예수를 믿는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속습니다. 옛날에는 율법을 지키면 됐는데 이제는 예수를 믿으면 된다가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앞에 있었던 율법을 제대로 이해해야 되는 말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모두 우리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율법 외에 방법이라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그 요구를 우리보고 하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될 문제, 나에게 필요한 것, 죄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스스로 해결하거나 우리 스스로 어떻게 처리할 능력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취하셨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 대신 대속물로 내놓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하여 죽으시고 또 살아나신 일은 우리 모두가 이루어야 할 율법의 요구들입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그 요구를 우리가 만족시켜야 되는 율법의 방법으로 우리는 못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사 우리가 해야 될 일을 예수님이 대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님이 대신 죄값으로 죽게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의인으로 태어나는 것을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변화될 수 없으니까 예수님이 대신 부활하사 새 장을 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을 예수님이 하시고 그 결과를 내 것으로 인정하는 방법을 믿음이라고 그럽니다. 여기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을 잘못 생각하면 무엇이 되느냐 하면 옛날엔 율법을 지켜야 됐는데 이제는 예수를 믿으면 된다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조건이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조건이 되면 안됩니다. 믿음은 조건이 아니고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율법과 대조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필요한 결과와 원인을 제시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요구는 나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나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사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케 하고 율법을 다 성취하고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게 하십니다. 이 일을 내가 한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을 내가 하지 않았는데 이미 해 놓고는 내가 해 놓은 것으로 전가시키는 방법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나는 믿었다, 너는 안 믿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것에게도 구원을 준단 말인가로 오게 되는데 이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나 같은 것에게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그 순간에도 나는 저쪽 가서 딴 짓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원하셨단 말인가, 나를 사랑하셨단 말인가? 이 곳으로 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당한 구원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구원이 어떻게 설명되느냐 하면 나는 구원받을 만하다로 돌아와 있습니다. 나는 회개했다, 나는 교회 나간다, 나는 헌금한다, 나는 그래도 너희보다 좀 낫다. 이것은 구원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주를 믿는다, 믿는다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신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까?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 나를 구원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것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를 믿는다는 것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나를 위하여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어떻게 주를 힘있게 붙잡았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왜 오셨는가를 알며 하나님이 주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알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우리의 죄인 된 현상태를 직시하는 것 위에만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모든 믿음은 믿는 자가 얼마나 기쁘냐, 확신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초점이 모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하고나 구원을 얻었고 같은 신앙생활을 하면 모두가 그 얻는 바 은혜를 나누고 함께 기뻐하게 되지 서로 경쟁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신앙은 경쟁적입니다. 방언을 한다, 넘어진다, 환상을 본다. 이런 경쟁이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의 조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건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모두 은혜로 이것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사실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한 번 성경적으로 해 보면 정확해집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설명하러 오시지 않았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우리를 가르치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 오셨다고 그럽니까?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죽으러 오셨습니다. 왜 죽으러 오십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러 오시지 우리를 깨우치거나, 우리를 분발시키거나, 우리에게 무슨 새로운 것을 가르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죽음, 십자가라는 절정에서 아무도 주님을 좇은 자가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제자들마저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오해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이 가르친 것을 그때 제자들도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모두가 예수님을 버렸다, 외롭게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외롭게 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깊으신 뜻을 위하여 그 길로 나가셨고 기쁘게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하신 일을 인간에게 이해받기를 기대하지 않으셨고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않으셨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묵묵히 죽으러 가신 것입니다.

 

 

 

내가 이제 죽어야겠다고 선언을 하자 베드로가 무어라고 그랬습니까?

 

주님 결단코 이 일이 주님께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누가 주님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내가 보호하겠습니다.”

 

 

 

무어라 그러셨죠?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설득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단 말입니다. 우리의 동의와 우리의 이해와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몰이해와 무관심과 우리가 알지도 못했을 때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내 요청과 내 이해와 상관없이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물에 빠져서 기절해서 떠내려 가는데 조금 놔두면 죽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그 시체를 끌어 내놓으신 것입니다. 손을 흔들어 부르지도 않았고 아우성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와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 6 : 3 - 7).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성경은 우리가 연합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 우리도 죽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므로 우리도 부활하였다고 성경은 자꾸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성경적인 표현을 빌어 이야기하면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앞에 우리가 로마서 3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이런 설명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입니다.

 

 

 

그러니까 죄와 사망의 아래에서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즉 그의 소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이야기하자면 그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배를 탄 것과 같습니다. 물이 아무리 많아도 배를 타고 있으면 물 속에 가라앉지 않습니다. 배는 물 깊이가 1m가 되면 떠 있고 10m가 되면 조금 잠기고 100m가 되면 아주 잠기고 그러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의 수심이 깊어도 배는 언제나 물 밖에 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므로 오늘날 이 구원을 얻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 : 30).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구속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죄로부터 건져낸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동의나 우리의 요청이나 우리의 이해나 우리의 감격이 그 조건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해 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구원 얻을만한 아무런 조건도 방법도 의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까닭없이 꺼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았다는 것이 어떻게 우리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봅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 : 8).

 

 

 

주님이 언제 죽는다구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성경적인 죄인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고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도덕적 윤리적 설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등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벌받아 마땅할 때 하나님께 호감을 갖고 있지도 않은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죽이십니다.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 : 25).

 

 

 

그때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나 그 속에 이미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우리를 새롭게 하기 위한 살아나심이 역사적 사건으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언제 일어났느냐 하면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불신앙 이전에, 우리의 출생 이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우리는 종종 신앙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가 우리의 구원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우선 내가 신앙적으로 훨씬 고양되면 나에게 구원이 넉넉하고 내가 침체되어 있으면 구원도 비실비실하다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언제나 확보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한 구원은 나에게 동의를 구하거나 나에게 의논하거나 나에게 요구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신앙이 시들시들해지거나 마음 속에 의심이 가득찬다 할지라도 이것은 언제나 시종여일한 것입니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껴도 해가 있는 것과 같고 내가 눈을 감아도 세상이 그냥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없어지고 내가 눈을 감아도 해와 달과 별이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나의 마음에 의심이 들고 내가 신앙적으로 침체되었다고 해서 구원이 침체되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지 꼭 기억해 두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하신 일입니다. 하신 일이지 할까 말까가 아닙니다. 일어난 일이고 베푸신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여러분의 신앙이 침체되어 여러분 마음에 회의가 생기고 불안한 마음이 생기고 혹시 나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생길 때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시 이렇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고 살리셨습니다. 제 신앙이 침체되고 이렇게 제 마음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 영혼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베푸신 은혜로 제 마음과 제 심령을 채우시옵소서. 이렇게 돌아가십시오. 더 불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혹시 나는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혹시 생명책에 나를 기록하지 않았을지라도 제가 이제 간절히 기도하오니 새롭게 써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세요. 그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감정상태에 따라 다니지 마십시오. 사실 위에 여러분의 신앙의 집을 지으십시오. 이것이 너무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감정과 자기의 주관과 자기의 생각 위에다 신앙을 지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내가 반짝하면 하나님도 반짝하고 오늘 내가 휘딱 뒤집어지면 하나님도 저기 가서 주무시는 그런 신앙들 위에 여러분이 계십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 모양 이 꼴인데도 구원해 주셔서 놀라는 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의 정확한 표현입니다. 나 같은 것도, 이 꼴인데도 그것이 그래서 Amazing Grace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런 꼬라지를 찾아 오시며 이 놀라운 것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여러분이 이만 하니까 주셨지, 그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못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은 구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건으로써가 아니라 구원 얻는데 대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율법적인 요구가 아닌 또 다른 국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국면은 우리가 믿어야 하고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구원을 가능케 하고 구원을 있었다가 없었다가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믿으면 하나님이 계시고 안 믿으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계시며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 세상은 끝이 있고 영원한 나라가 이제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듯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간직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여러분 각자의 믿음의 분량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예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을 때 하는 이야기중 공통 되는 것이 있습니다. 감격의 순간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옛날에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었는가를 자각하고 회개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붙잡는 결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드디어 예수를 보내셨다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구원이 그때야 효력을 발생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기가 회개했다든가 주님을 더욱 붙잡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죄인을 값없이 구원했다는 것을 그날 깨달은 것에 불과합니다. 깨달아서 그 일이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사랑했고 은혜로 찾아왔고 내가 모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주님의 품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때 늦게 경악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자기는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는 주님을 붙잡기로 해서 너랑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깨달은 감격과 그래서 확인된 구원과 깨닫지 못하고 갖고 있는 구원의 차이지 깨달아서 구원이 더 크고 안 깨달아서 구원이 약하진 않습니다. 구원에는 다른 국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얻은 바 구원이 무엇이냐를 다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몰라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실감 나는 것과 실감 나지 않는 것으로 여러분의 구원의 근거를 흔들어 놓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얼마나 분명히 알았느냐 얼마나 감격하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구원은 역사적, 절대적 사실이요 그 일을 이루신 하나님이 영원한 나라로 그 구원을 끌고 가시고 있는 것이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 완성될 영광되고 영원한 시작이 있고 그래서 끝장을 보고야 말 가장 중요한 역사의 내용입니다. 그 속에 여러분이 있음을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감각으로, 여러분의 감정으로, 주관으로, 기분으로 역사를 왜곡시키지 마십시오. 그래서 이 분명한 구원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신앙에 힘을 얻고 낙심되거나 흔들릴 때마다 다시 이 기초로 돌아오셔서 여러분의 신앙이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견고하고 튼튼하고 풍성하고 그리고 그 위에서만 많은 만족과 위로를 얻기를 권합니다

 

 

 

 

 

로마서 26강(롬3:21-24절)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 : 21 - 24)

 

 

 

구원이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가 만들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성립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모든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인가 하는데 대한 의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야 이 구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 하는 데에 이제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사도행전 16 : 30에 있는 말씀으로 지진이 나서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옥문이 열리게 되었는데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간수와 죄수들은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다가 바울과 실라의 저지를 받고 그 앞에 엎드려서 묻는 장면입니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행 16 : 30 - 31).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무척 복합적인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가지고 이렇게 쉽게 해결하지 마십시오.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 맞습니다. 나는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믿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라고 쉽게 속단은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훨씬 더 많은 뜻을 내포하고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으로 가시면 바로 이런 반대 구절과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 : 47 -48).

 

 

 

우리는 여기서 걸리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이 내 구원을 가능케 하고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이고 책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어서 구원을 얻었느냐라고 꼭 찝어서 말을 한다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정리가 잘 안 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 때문에 전도라는 것을 오해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것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행 8 : 29 - 31).

 

 

 

전도란 무어냐?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설득하는 것이라는 식의 오해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느냐 할 때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행한 것이다라고 못을 박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 감나무 밑에 입 벌리고 누워 있으면 되느냐? 아니 입도 벌릴 필요가 없습니다. 누워만 있으면 감이 입을 벌리고 들어와야죠. 그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구원에 관한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일이다. 우리의 요청이 있거나 그 구원을 가능케 하는 요소로써 우리의 어떤 조건도 거기에 포함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우리보고 믿으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나는 믿어서 구원을 얻었고 저 사람은 믿지 않아서 구원을 얻지 못 했다는 것이 맞느냐? 그러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맞으며 어떤 면에서 틀리느냐? 그것을 오늘 분명히 해야 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일종의 절충안입니다. 내가 믿지만 이 믿는 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나를 설득시키는 작업으로, 전도가 있게 해서 나를 믿게 하는 것 아닌가, 가능한 하나의 제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되는 것은 우리를 설득시키는 것이 전도냐 하는 것입니다. 전도라는 것이 여기 사도행전 8장에 있는 바와 같이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가서 그 읽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서 그를 설득시키는 방법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 : 20 - 21).

 

 

 

전도라는 것이 왜 등장을 하였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니까 이 세상이 지혜로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꾸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알지 못하니까 전도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2 : 1로 가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경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 1 - 5).

 

 

 

전도가 설득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스스로가 말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나타남, 이것이기를 바랬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으로 가 보십시오.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비슷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고넬료 집에 가서 전도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행 10 : 42 - 46).

 

 

 

말씀을 전할 때에 그 말을 듣고 상대방이 납득하고 항복한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찾아온 것으로 고넬료 집에서의 전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란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찾아가시는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 은혜와 선물이 한 죽은 심령을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히브리서 4 : 12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그런 힘으로 찾아오시는 법이지 인간의 생각을 깨우고 도를 깨우치는 설득의 작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태껏 로마서 3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원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능력적 차원에서도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허락된 은혜가 복음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구원을 우리가 꼭 깨우치고 납득해서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필요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율법으로 족했을 것입니다. 율법으로 가능하지 않아서, 설득으로 가능하지 않아서 십자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등장을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예수를 믿는 이 믿음,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구원을 이해하거나 결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못 박아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예수를 믿으라고 요구하느냐? 또 다시 다른 면으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가만히 있어도 되느냐라는 책임 문제가 걸립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로 합시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 6 : 37 - 40).

 

 

 

이 양면성을 보십시오. 첫째는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입니다. 은혜가 강조된 측면입니다. 인간의 결단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39절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양면성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라는 이야기와 스스로 찾아오는 자 두 부류가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둘 다 한 부류입니다만 그 본인이 자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이 둘 중에 하나로 치우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합시다. 내가 예수를 믿었다라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둘은 사실 같은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갖고 있는데 한 사람은 자기의 결단을 강조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입은 바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쪽이 먼저냐고 생각하는데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먼저냐? 이것은 어느 쪽이 먼저냐로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닭이 먼저입니까? 달걀이 먼저입니까? 그것은 일종의 순환논리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순환논리가 여러 가지 나옵니다. 그 중 하나가 어떻게 하면 좋은 믿음을 가지는가? 어떻게 하면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좋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힘있게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믿음을 갖고 싶다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100%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좋은 믿음을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습니까 할 때 뭐라고 대답합니까? ‘하나님께 열심히 구하세요’ 그러죠. 하나님께 120% 전폭적인 신뢰가 되지 않아서, 흔들리는 마음 때문에 좋은 믿음을 구할 때는 하나님께 구하라는 겁니다.

 

 

 

또 하나의 순환논리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성경이 말을 해서 압니다. 그러면 성경의 증거를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순환논리입니다. 성경은 왜 권위가 있습니까?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왜 믿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권위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믿습니까? 성경이 증거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그것이 대표적인 순환논리입니다. 그럼 이 순환논리가 왜 생겼습니까? 하나님을 증명하려면 하나님보다 더 큰 것으로 증명해야 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돈을 꾸어주고 돈 꾸어준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담보를 잡습니다. 그러면 담보와 꿔준 돈 중에 어느 것이 커야 됩니까? 담보가 커야 됩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려면 하나님보다 더 큰, 더 확실한 무엇으로 증거를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존재야말로 모든 사실과 진리와 가치와 권위에서 최고입니다. 그 최고를 그것 아닌 것으로는 아무리 갖다가 증거를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제일 높은 자리를 보려면 그것보다 높은 데 가서 보아야 꼭대기가 보이는데 제일 높으신 하나님을 그것보다 낮은 데서 아무리 올라가 보아도 볼 수가 없습니다.

 

 

 

과학이든 경험이든 무엇으로도 그것을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절대성을 증명키 위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 순환논리가 생긴 이유를 알겠습니까? 이 순환논리의 고리를 풀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있는 어떤 원리든, 어떤 내용이든 우리로부터 그 논리를 출발하거나 그 논리를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내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준이 워낙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대상이고 그 내용이며 우리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존재냐 하면 모든 것을 내 수준으로 끌어 내려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믿었다, 믿었다라는 것을 강조해서 믿은 것이 믿음의 조건인 양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으로 가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 : 9 - 15).

 

 

 

구원의 조건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 예수를 믿으십시오.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고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십시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성경은 어떻게 하여야 예수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14절부터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믿지 않은 이를 어찌 부르리요 믿지 않고 어찌 주를 부를 수 있습니까? 듣지도 못하고 어찌 믿겠습니까?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는 자가 생겼겠습니까?

 

 

 

그래서 근거가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 다시 하나님께로 갑니다. 구원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었다고 해서 나로부터 이 구원이 발생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알아들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구원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허락한 구원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서 내가 믿게 된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이 나타난 표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싶어합니까? 나는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 너는 안 믿으니까 구원을 못 얻는다. 이렇게 갈라섭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그러지 말고 구원 얻은 표라고 이야기하십시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었다. 아니요 난 예수를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이렇게 시인하는 것이 구원 얻은 표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십시오. 구원 얻은 조건으로 삼는 것과 구원 얻는 표로 갖는 것은 뭐가 다릅니까? 구원을 얻었다는 조건으로 삼으면 그는 자랑으로 갑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 1 - 9 ).

 

 

 

믿음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가지는 자의 특색은 그것이 자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난 믿었다. 그래서 구원 얻었다. 넌 안 믿었다. 그래서 넌 지옥가도 싸다. 이렇게 갑니다. 이것은 믿음을 조건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내가 만들어 낸 것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구원을 얻은 표지 구원을 얻는 조건은 아닙니다.

 

 

 

자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은 매우 당황하시고 혹 이렇게 오해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면 결국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설치고 열내고 예수를 믿으며 열심을 낼 필요가 있는가? 제가 아는 믿음의 선배 중에 한 분이 신유의 은사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신유의 은사를 받으셔서 기도를 하는 대로 사람이 낫는 겁니다. 그런데 같이 믿는 젊은 그룹 중에 한 분이 그 친구 분에게 네가 지금 받은 은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선배가 매우 당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냐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냐.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려고 2년을 방황했습니다.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요나서 2 : 4로 답을 얻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다 할지라도 다시 주의 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하리라.”

 

 

 

거기에서 답을 얻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선배가 가졌던 믿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가 풀린 것입니다. 어떤 것이냐 하면 우리의 신앙이 대부분 그렇습니다만 우리의 신앙은 내가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봉사를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주고받는 식의 신앙 관계인 적이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 즉 내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을 신앙으로 갖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분이 그때 무엇을 발견했느냐 하면 이 은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냐 사탄이 주신 것이냐 하는 은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냐 사탄에게 속한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고민하다가 드디어 발견한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께 속했느냐, 사탄에게 속했느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 그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질문을 해 봅시다. 여러분이 주일날 아침, 화창한 가을날 어디 놀러 가지 않으시고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오시고 돌아가서 저녁에 주무시는데 밤에 환상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무개야 너는 내가 구원을 한 백성이 아니다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너는 이제 죽으면 지옥 갈건데 네가 하도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하니까 민망해서 너한테 알려 주러 왔다. 넌 이제 죽으면 지옥갈 것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맘대로 잘 살아라.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구, 큰일날 뻔했네 하고 이제 나가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제멋대로 살다가 떳떳하게 지옥을 가시겠습니까? 저는 그때 이 질문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구원을 얻느냐 못 얻느냐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나한테 잘해 주었느냐 못해 주었느냐 하는 개인적인 것을 떠나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하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 은혜 속에 있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 답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구원하시지 않는 것은 제 죄로 인하여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신 것을 부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저는 지옥을 가도 살아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실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어디서 틀리고 있느냐 하면 예수를 믿어서 그 보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하지 마시고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은 이제 내가 예수를 알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회개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아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 내가 주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우리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믿습니다라는 이야기는 우리 하나님이 누구인 줄을 알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부인합니까? 그거야말로 내가 구원 얻은 가장 분명한 표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얻는 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이렇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 내가 구원 얻은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는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은혜로 이해하지 못하셔도 좋습니다.

 

 

 

당신 예수 믿는가? 믿습니다.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있습니다. 무엇으로 확신하는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100점입니다. 저는 그것을 거부할 마음이 없습니다. 제가 확인시켜 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이 어떻게 은혜로운가가 여러분에게 확인되어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더 크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은혜가 강조되어 책임이 외면되는 것은 싫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고 그러면 내 신앙고백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을 내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내 책임이 강조되어서 신앙고백과 주를 믿는다는 결단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은혜가 망각되는 것이라면 그것도 또 아닙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순환논리에 필요성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순환논리를 여러분 좋게만 갖고 계시지 마십시오. 성경이 이야기하는 대로 이해를 하신다면 이 순환논리가 갖는 풍성함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혹 아직 단순하다면 여러분은 조금 전에 로마서 10장에서 본 바와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좀더 풍성하게 들어가 보십시오. 믿지도 않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들을 수 있습니까? 부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되리요. 그것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이 아는 예수를 믿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주를 붙잡는 행위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구원을 이루사 내가 이제 주님이 누구인 줄 알고 기쁨으로, 간절함으로 나의 큰 영광으로 알고 그를 붙잡은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까 구원을 얻었다는 마르고 가난한 신앙이 아니라 훨씬 풍성한 기쁨으로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주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의 결과인지 알면 여러분의 입술에 자랑이 있지 않고 감사와 찬송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실제적으로 누려야 할 가장 큰 특권들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놓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는가 믿으십시오. 그리고 다시 반문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내가 어떻게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것을 밝혀 내십시오. 이런 성경구절들이 공연히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 : 3 - 6).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가 이미 은혜와 선물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붙잡은 것이라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한 번 붙잡으신 하나님은 손을 놓치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혹 여러분이 예수를 믿은 것이 여러분의 손, 여러분의 의지, 여러분의 결단에 근거한 것으로 가난하게 위태롭게 갖고 계신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의 산물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인식하셔서 마음 편히 풍성하게 기쁨과 감사 속에서 여러분의 구원을 누리십시오.

 

 

 

 

 

로마서 27강(롬3:25-26절) 구원의 특징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5-26)

 

 

 

이번 로마서 강해에서 첫번째로 우리가 살펴보려는 것은 구원의 특징입니다. 구원이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필요한가를 이전에 공부하면서 조금은 이해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 신앙이 이야기하는 구원의 특징이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것대로 또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25절에 있는 말씀같이 구원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라는 말과 ‘화목제물’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그 특징을 주장합니다.

 

 

 

화목이라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기독교적 신앙은 인간의 완성이 목표가 아닙니다. 또한 인간의 어떤 부족함이나 결함을 채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라는 분과 우리와의 새로운 결합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던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떠나서는 신앙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치장하는 의, 신앙, 거룩, 깨우침 그런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신앙이라는 것은 그 의미를 가집니다.

 

 

 

두번째로 기억할 것은 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화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라는 말 속에는 단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말과는 다른 더 강한 것, 성경이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라고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한 하나의 대가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분리되어 있고 적대관계에 있는 이 모든 일은 인간이 범법함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인간은 화목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해한 가해자입니다. 인간이 가해한 일을 보상하고 화목케 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써 죄씻음, 피 흘리심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라고 이야기할 때 주님이 가지신 어떤 정성, 치성의 극에 달한 모습으로써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목숨을 바치며 죽음을 불사하는 정성이 기독교 신앙의 모델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죄 문제의 핵심이 훨씬 우선입니다. 그 죄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며 이 둘의 관계와 핵심을 놓치지 않는 차원에서 여러분은 이 기독교 구원을, 신앙을 기초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할 때마다 성경은 이것이 ‘화목제물’이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깬 우리의 죄를 씻는 ‘피흘림’이었다는 것을 매우 강조합니다. 이것은 성경 어디서나 발견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10:19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 10:19-20).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겨져서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 예수님처럼 죽음을 불사하고 하나님께 매어달린 그 모습을 본받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달려 나가자는 말씀은 없습니다. 십자가에는 여러 가지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거기에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모습, 목숨을 내건 열심이 그 속에 모델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1차적인 상징은 죄값으로 희생된 심판이었다는 것이 십자가로 대표된 상징입니다. 그 내용들을 빼어놓고 다른 것이 이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는 것은 결론 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조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부터 봅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

 

 

 

어린 양, 그리스도의 피, 그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성경은 자연스럽게 이것이 구약에도 먼저 제시되었던 제사법에서의 어린 양의 희생, 희생제물의 피와 그 뜻을 같이한 대속사역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동물의 희생제사, 소를 바친다든가 염소를 바친다든가 양을 바친다든가 하는 모든 동물제사의 뜻은 두 가지 중요한 뜻을 가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서의 우리의 죄씻음입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한 제물입니다. 사람을 감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정성의 표도 아닙니다. 그래서 얼마나 큰 것을 바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제물을 희생해서 피를 낸다, 즉 죽어야 된다는 것이 이 제사의 요체입니다. 얼마나 큰 제물을 바쳤느냐가 아니라 제물을 희생시켜야 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또 두번째로 가해자를 위해 대체된 희생자를 위한 여러 가지 심판의 방법이 이 제사의 중요한 요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한 관계를 깨뜨린, 가해자이고 범법자인 인간을 대신한 희생제물, 이 희생제물에게 심판이 가해지는 것이 이 제사의 중요한 의식이며 내용입니다. 그 제물을 죽이든가 그 제물을 광야로 내어 쫓습니다. ‘왜 이런 식으로 희생제물을 희생하는가’ 하는 중요한 뜻은 구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1장으로 갑시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생축 중에서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릴지니라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니라”(레 1:1-4).

 

 

 

이 희생제물을 드릴 때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가 재물 위에 안수(按手)하는 것입니다. 안수한다는 것의 원래 뜻은 ‘힘을 주어 기댄다’는 뜻입니다. 안수할 때 손을 얹는 의미가 무엇이냐면 ‘안수자가 안수를 받는 자에게 힘을 주어 기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안수자가 안수를 받는 자에게 자신을 밀어넣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민수기 27:18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그를 제사장과 엘리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를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민 27:18-20).

 

 

 

안수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존귀를 그에게 돌리고 그에게 위탁합니다. 안수함으로써 어떤 직분을 위임할 때 승계(承繼)하는 자는 안수를 받음으로 전임자가 직임상 지녔던 것을 물려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수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중요한 논리는 ‘전가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좋은 쪽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희생제물을 안수할 때는 ‘희생제물을 가져온 자의 죄악된 모든 것, 죄악된 존재와 죄악된 모습들을 희생제물들에 전가시킨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희생제물에 안수함으로 그 제물에 안수자의 모든 죄를 계승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희생제물이 희생되는 것은 내가 희생되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되는 것, 이것이 동물 희생제사의 중요한 의식이고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중요한 뜻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법에서는 양이기도 하고, 소이기도 하고, 염소이기도 하고, 비둘기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신약에 오면 예수님을 가리켜 ‘그것’이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목격했을 때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우리 죄값으로 그가 희생되었다, 우리의 죄를 그가 뒤집어 쓰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았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가장 중요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이고 죄값으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다, 희생되셨다’가 먼저 있어야지 센티멘탈하게 “주님이 골고다를 향하여 우리의 무거운 죄를 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것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시면서 채찍에 맞으시면서” 이것만 자꾸 신파조로 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진노, 죄의 무서움에 대하여 여러분의 냉정한 인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의 진의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친 것을 늘 명심해야 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면 예수님께서 그 심판을 받기가 너무 힘에 벅차셔서 그런 비명을 지르셔야 했겠습니까? 그것은 다 우리 죄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에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킨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물론 그 원인과 목적이 사람이요 구원이라 할지라도 그 사건 자체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는 자리여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자리’이고 ‘처절한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어디로 연결시키느냐 하면 주님과의 화목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진수는 죄를 씻어서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둘은 물론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크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궁극적인 목표가 화목이라는 것을 놓고서 죄사함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죄사함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그리고 선결해야 했던 커다란 장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성결, 죄씻음은 이 재결합을 위한 한 요소요 조건입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이 용서와 죄씻음이 나의 증명이 되는 신앙 형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의 화목과 결합을 위하여 죄를 두려워하고 죄씻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증명키 위하여 죄씻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신앙생활이 감사로 가지 않고 자랑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바로 나를 증명키 위한 죄씻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 종교성의 우월감이 증명되는 것이고 내가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모든 것이 나의 치장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겸손과 희생과 복종의 자리로 가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화목으로 가는 죄씻음이 아니라 자기 증명으로 가는 죄씻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나를 증명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무서운 싸움입니다. 나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정상화시키는 자리에 있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없어서는 안될 죄인이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그 피흘림으로 이제 다시 하나님 앞에 들어갔고, 옛날에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고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왕되는 싸움을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 밑에 들어가서 복종하는 자, 순종하는 자, 하나님을 모시는 자로 들어 갔다는 것이 이 죄씻음의 궁극적인 목표이어야 됩니다. 죄씻음이 ‘나는 이제 죄를 씻었다, 나는 신앙이 좋다, 나는 너희들보다 잘났다’로 가는 자기 주장이라면 하나님 없는 교만한 자리에 들어가는 종교인이 될 뿐입니다. 그것이 그것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싸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두 이 싸움이며 또한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하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1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1-6).

 

 

 

이제 우리가 죄씻음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당연하게 하나님이라는 최고의 권위자 밑에 우리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최고의 권위자가 있고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그와 동등한 지위를 나누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고 자연인인 인간, 즉 예수를 믿지 않는 인간은 자기가 주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주인은 함께 살지 못합니다. 모든 불신자들의 최고의 불행은 무엇이냐 하면 각자가 자기가 주인이고 신이라는 데 있습니다. 자기가 신이고, 자기가 왕이고, 모두를 자기의 신하로 놓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인간은 인간끼리 불화합니다. 인간끼리 꼭 경쟁하고 질투하고 싸웁니다. 각자가 왕이 되고 다른 사람보고 신하가 되라는 싸움을 합니다.

 

 

 

신자는 뭐가 달라지느냐 하면 하나님만이 왕이고 우리는 그의 쫄병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쫄병입니다. 쫄병끼리는 싸우지 않습니다. 각자가 왕이 되려고 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주인도 아니며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권위도 아닙니다. 권위는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밑에 내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한 신앙을 제대로 이해한 신자가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떻게 진전되고 그 원리가 어떻게 사용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이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했느냐가 금방 표가 납니다.

 

 

 

에베소서 5:1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그 뒤에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결합하기 위해서 하나님 존전에 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가 합니다. 5:22에 가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가 나오고 5절에 “종들아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 복종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종하는 책임을 맡은 쪽은 남편보다는 아내쪽입니다. 부모보다는 자녀에게 복종이라는 책임이 더 많고 상전보다는 하인에게 복종의 책임이 더 많이 주어져 있습니다. 또 그쪽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에겐 책임이 많고 남편에겐 책임이 적은 것이 아니며 하인에게만 책임이 있고 상전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에게만 책임이 있고 부모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에베소서 5장에서는 4장에서부터 연결해 나가는 신앙의 원리 중 복종이라는 쪽이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책임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인이 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던 자리로부터 복종하는 자리, 참된 권위 아래 들어가는 자리에 가는 것이 화목의 두드러진 표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자리에서 하나님과의 화목된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되었을 때는 하나님을 적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이 싫어하는 부도덕하고 부패한 자리에 갔던 것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여러분의 믿음이,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는 권위자 아래 여러분이 존재하지 않고, 결국은 여러분이 궁극적인 ‘자랑의 표’가 되는 자리로 가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중요한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키 위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자리에 가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들이 해야 되는 싸움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고 섬기는 자, 양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자리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고린도전서 13장이 여러분에게 사용되고 마태복음 5장에 있던 “너희가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말을 실제로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대로 좇아간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해를 주시고 비를 주시는 것같이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마시우라하는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실천하고 있지 않다면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을 여러분의 우월감을 증명하는 또 다른 하나의 악세사리로 가진 것에 불과합니다. 정말 하나님과 화목하는 귀중한 성경의 요구를 여러분의 소원과 기쁨으로 소유하고 계시지 않다는 증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신자의 가장 큰 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날로 더 이기주의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은 지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양보하고 살고 남의 기쁨과 남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부모도 희생하지 않고 자식도 희생하지 않습니다. 자식은 자식들 성깔대로 부모는 부모 성깔대로 삽니다. 이것은 잘하는 짓이 아닙니다. ‘돈이 있는데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왜 난리야’라고 말하는 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양보하고 삽니다. 우리는 희생하고 삽니다. 왜냐하면 거룩과 생명을 우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그 베푸신 사랑과 긍휼을 나누기 위하여 마땅히 주님이 가신 길,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한 알의 썩는 밀알을 기쁨으로 선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한, 십자가가 주장하는 핵심을 제대로 획득한 신자의 가는 길입니다. 신자 여러분의 신앙을 이 성경의 요구대로 점검하셔서 삶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28강(롬3:25-26절) 십자가 사건의 의미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 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롬 3:25-26)

 

 

 

십자가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죄를 용서하시지 않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이 확인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창조주시며 우리를 만드신 온 천하 만물의 유일하신 신(神)인 것을 확인해야 되고 그 앞에 범죄한 인간의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하여야 됩니다. 그 죄를 씻는 방법에 다른 방법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 십자가 사건이 너무 감상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피흘리셨다, 고난을 받으셨다’ 이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시는가를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낸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마땅히 보이셔야 할 심판을 제대로 보이신 적이 없다고 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무엇을 보느냐 하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봅니다. 죄를 어느 만큼 싫어하시는지를 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나는 곳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십자가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라는 시점에서는 생각을 하면서도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 두려워할 하나님, 엄위하신 하나님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가 강조된 것으로 생각하는 면은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가 복이라든가 기쁨이라든가 감사라든가 이런 것으로는 표현되어도 ‘두려워할 하나님, 죄를 지으면 큰일나는 신앙’이라는 ‘거룩과 심판’이라는 차원에서의 기독교는 조금 약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 하시며 어떻게 심판하시는가, 어떻게 우리가 죄를 무서워해야 하는가부터 십자가의 사건 속에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야 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할 때 혹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공격을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봐” 하는 야유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그 이야기는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여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형체를 눈으로 보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더 폭 넓게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불의한 자와 행악하는 자들이 심판을 받지 않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보여 봐” 하는 말 속에 포함된 실제적인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착하게 사는 신자들이 왜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는가? 이것이 성경상에도 있어왔던 질문이고 모든 자연인들이, 신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그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성경의 답은 이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이 어떻게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가를 역사상에 드러낸 커다란 증거요, 그리고 그 증거는 결국 이 세상을 심판하는 날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며 이 십자가는 또 결국 있을 마지막 심판에 대한 하나의 예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이 불신자들과 달리 이 신앙생활을 한다면 우리도 불신자들이 우리에게 힐문했던 그 질문들,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면 정말 심판으로 보상하시고 그렇지 않는 자들을 정말 영원한 징벌로 심판하실 것인가’하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는 한 우리의 신앙은 설 곳을 잃어버립니다.

 

 

 

사도행전 17:24로 갑시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의 아테네에 이르러서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하나님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殿)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限)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4-29).

 

 

 

첫번째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이것입니다. “너희들도 신이 있다고 알고 신을 섬기고 있다. 그런데 너희들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이것이다. ‘신이 있다면 신이 무엇이 부족해서 피조물인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가’” 하는 것이 첫번째 사도 바울의 지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무엇이 부족해서 인간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보조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인간들이 제사도 지내야 되고 그 뜻에 맞게 무엇을 해야 됩니다. 참 신이라면 그 신이 무엇이 부족해서 인간들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이 정말로 있다면 그 신이 신보다 못한 인간의 기술로 도안을 해야 된단 말인가? 인간이 지은 집에 그를 모셔야 된다는 말인가? 정말 신이 있다면 신에 의해서 인간이 도움을 받지, 어떻게 신이 인간의 도움을 받는다는 말이냐, 이것이 첫번째 신에 대한 그리이스 사람의 오해를 지적하는, 기독교적 차원에서의 사도 바울의 일반적 논증입니다. 신과 피조물 하면 마땅히 피조물이 신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신이 더 높고 더 능력이 있고 많은 것을 갖고 계셔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신이 인간의 도움을 받느냐 이것이 첫번째 지적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들어가서 30절입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 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30-31).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 사건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심판주라는 것을 역사 위에 명명백백하게 나타내셨다고 증거합니다. 앞에서도 일반적인 질문을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악당들을 내버려두는가?, 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왜 대접을 받지 못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십자가를 보라” 이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는 자들을 벌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명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 신앙의 가장 굵은 증거는 무엇이냐고 할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 눈 밖에 나면 안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되지 않는 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영위되지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병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눈 밖에 나는 것이 무섭지 않습니다. 무엇이 무섭습니까? 아이들 공부 못하는 것, 돈 못버는 것은 무서워합니다. 세상은 돈 없고 힘 없으면 금방 도태되고 아무도 우리를 보호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그렇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편들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서 힘과 권세를, 세상에서의 것들을 자기가 준비하고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누구를 무서워하는가를 보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무슨 은행이라든가 권세 있는 먼 친척이라든가 좋은 일에 덕을 보이는 정도지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분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데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으로 가 봅시다. 디모데를 권명하는 사도 바울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봅시다. “너는 이렇게 신앙으로 살아라”라고 신앙으로 권면할 수 있는 근거가 이것입니다. 1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딤후 4:1).

 

 

 

너는 신앙을 따라 살아라 세상에 귀 기울이지 마라 헛된 것을 좇지 말라 절제하고 근신하라.” 우리가 이것을 무엇을 근거로 요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 그가 심판으로 나타나실 것, 보상하러 나타나실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계시지 않다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영위될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물러터진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는 알고 있어도 ‘벌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에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예수를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를 죄인이 받는 형벌로 심판하셨어야 옳은데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키 위하여 구원에 길이 마련된 다음에야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긴 하셨으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심판을 외면하고 없앤 것이 아니라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것을 구원의 길이 마련될 때까지 보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판을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의를 만족시키시되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동시에 하시기 위하여 그때까지 참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마땅히 눈에 보이도록 그 심판권을 행사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고 회개하는 기회를 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금도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이 십자가 위에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셨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화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 하는 데 대한 소름끼치는 두려움을 함께 가지셔야 됩니다. ‘이 두려움이 여러분에게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러나 차마 보시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식으로 생각하면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려면 하나님의 공의가 외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면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하나님다우신가’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며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그것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는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 묘사를 깊이 음미해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전 1:24).

 

 

 

왜 십자가를 ‘능력’이라는 말과 ‘지혜’라는 말로 쓰느냐 하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과 공의가 우리의 실력으로는, 우리식 개념으로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그 문제를 하나님이 십자가 속에서 풀어내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가 능력이요, 지혜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이 죄인된 우리를 구해내시는 능력, 구원해 내시는 지혜라고 생각하시지 마시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을 천지 창조하시는 것으로 “빛이 있으라” 하면 빛이 있고 “땅이 있으라” 하면 땅이 있고 “하늘이 있으라” 하면 하늘이 있는 식이 아닌, 십자가라는 방법으로밖에는 풀 수 없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십시오. 즉 그것이 지혜요 능력이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는가 하는 것을 놓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강조해도 좋습니다. 사랑을 강조한 만큼 조금도 손색 없이 거기 공의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을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해서 십자가라는 방법으로밖에는 풀 수 없었다는 것으로 성경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고 사랑한다면 그 문제를, 천지 창조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었던 그 문제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거룩한 성품 때문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 그럼 그 사랑에서 우리를 천지 창조하시던 능력으로 왜 못 만들었느냐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바로 공의라는 부분이 저해 요소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공의를 만족시켜야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우리가 기도하고 매달리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 앞에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 하나님’으로 두려운 떨림으로 그분을 인식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사건을 베드로전서 1장에 가면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벧전 1:10-12).

 

 

 

이 구원이라는 것은 너무 신기하고 신비로워서 천사들도 그것이 관심거리입니다. 하나님이 이 문제를 푸는 방법이 천사들에게도 경이롭습니다. 천사들마저도 상상치 못했던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부분은 성경이 설명을 하는 부분은 아니고 이것은 일종의 상상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앙을 돕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천사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천사장인 사탄이 하나님과 대등해지려는 쿠데타로,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가지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감사와 순종으로 갖지 않고 대등해지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천사들을 유혹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 중의 삼분의 일을 자기 휘하에 넣고 모반(謀反)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서 지금은 우리들을 괴롭히고 하나님의 일을 거스르는 자로, 심판의 때를 기다리는 자리로 쫓겨났습니다. 사탄이 쫓겨나서 보니까 이제 큰일났습니다. 여기서부터가 픽션입니다. 우리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성경의 이야기를 보면 이런 상상이 가능합니다. 성경의 증거는 없지만 일리가 있는 상상입니다. 사탄 쪽에서 보니까 큰일난 것입니다. 자기는 이제 남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영원한 형벌밖에 없고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들, 즉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 중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은 오로지 인간뿐입니다.

 

 

 

인격적이고 대상적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러나 공중에 나는 새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새에 관한 이야기도 마태복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입히시거늘”, 우리 천부라고 그럽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지만 새에게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새들에게는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입히십니다. 그 일반적인 사랑이 있고 인격적인 사랑의 대상은 인간뿐입니다.

 

 

 

사람이 그 인격적인 대상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사탄이 압니다. 그래서 사탄이 어떻게 하려고 했냐면 인간을 공범자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상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공범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탄 쪽에서 하나님께 내놓은 질문이 무엇이냐면 “벌을 주려면 다같이 주어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서는 차마 인간을 벌주지 못할 것이라고 사탄이 회심의 미소를 띄우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용서하려면 자기도 용서를 해주어야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공평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푸셨습니까? 그 죄값을 받아내시고 용서하는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의 피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씻었습니다. 그래서 사탄과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까지도 경악한 사건이 여기 드러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강조하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랬기 때문에 사탄도 이 문제를 걸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실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 공의로우신 것을 어떻게 푸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유케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문제를 그냥 없었던 것으로 넘어가실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 그의 거룩하심에 대해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역사상 명명백백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확인해야 되느냐 하면 특별히 하나님의 성품에 관하여 분명이 해야 됩니다.

 

 

 

그는 영원하시고 공평하신 분입니다. 그는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 중에 어느 것 하나도 약화시키거나 양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고 자비가 있습니다. 거룩과 두려움, 무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랑과 기쁨, 감격 이런 사탕발림으로만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 사랑과 용서는 언제나 이 거룩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 거룩을 요구하신 하나님,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거룩을 기어코 우리에게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됩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2:12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 2:12-14).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런 일종의 공갈 협박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당한 권면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오냐, 오냐”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거룩으로 요구하십니다. 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는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하면 12절에서 보면 시작이 ‘그러므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라는 것은 그 앞에 어떤 내용이 설명되었고 무엇의 결론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무엇의 결론으로 등장하였습니까? 5절을 봅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예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하신 대속물입니다. 그러나 이 빌립보서 2:5 이하에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율법을 다 이룬 거룩으로 살아간 그의 인생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만으로 그 인생을 살아간, 그래서 가장 높은 자리에 가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라고 그의 인생을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최고의 약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필요하고 급할 때만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죄의 무서움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에게는 늘 감상적입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을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용서와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좋습니다. 거기에 거룩과 두려움도 아울러 가지십시오. 죄를 미워하시는 그 하나님의 미워하심을 여러분은 한시라도 잊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를 찾아오신 그 거룩의 성품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품어 내시는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을 얻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거룩을 알면서도 그의 거룩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바 사랑과 구원과 은혜와 자비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감사가 있듯이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속에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죄가 여러분을 유혹하고 시험할 때마다 그것을 미워하기보다 우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죄에 대하여 증오하시는 그 증오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속에 죄가 발 디딜 틈이 없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온전히 주 앞에 복종하십시오. 십자가 아래만 있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두려움이 있고, 두려워하되 기쁨으로 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을 거룩으로 인도하는 참다운 영광의, 사랑의 매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두려움이 여러분의 자랑이며 여러분의 기쁨입니다. 그것을 통해 여러분의 신앙이 인도되기를 기도합니다.

 

 

 

 

 

로마서 29강(롬3:27-30절) 자랑할 수 없는 구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 3:27-30)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되는 믿음에 관한 이야기, 구원에 관한 이야기, 기본적인 내용들은 뜻밖에도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로마서 3:21-26에 이르도록 이 복음의 멋진 선언이 나오고 영광된 내용들이 소개된 후에 마치 사족같이 쓸데없어 보이는 27절 이하의 말씀이 붙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불쌍한 우리들을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잘 아는 하나님께서 이 구원과 복음에 관한 내용 가운데 이해하기 어렵고 우리가 오해할 소지가 많은 부분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씀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제대로 이해했느냐 못했느냐’는 결국 ‘자랑이 없느냐 있느냐’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27절, 28절에는 자랑에 관한 이야기가, 29절과 30절에는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구원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고 자랑할 데가 없다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둘은 같은 얘기입니다. 자랑의 한 국면이 적극적인 자랑으로 나타나는데 반해서 그것이 훨씬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나타나면 차별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부분을 제대로 추적해 보면 뜻밖에도 신자들 중에 많은 분들이 성경이 그토록 걱정하고 염려해서 덧붙인 내용들에 저촉되고 있는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이 말씀을 추적해 나갈 때 신자인 여러분도 이 문제에 저촉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냉정하게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자랑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할 때 ‘나는 구원을 얻을 만하다’ 그리고 차별이라는 면에서 생각할 때 ‘너는 구원 못 얻은 것이 싸다’, 즉 나는 구원 얻은 것이 마땅하고 너는 구원 못 얻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생각이 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에 대하여 자랑할 근거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못되게 굴고 악질적으로 살고 사기치고 부도덕하게 사는 것을 보면서 ‘넌 지옥가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여러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반증입니다. 우리는 더 낫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토록 경멸하는 어떤 사람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아무 조건도 요구하지 않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서 지금 나아진 것이지 나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대단히 오해합니다.

 

 

 

내가 너보다 낫다고 하는 근거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로마서 1:18-3:20에 이르도록 지금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며 부패한가를 따졌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자가 없고 또 스스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획득할 자가 없음을 확인했고 그래서 십자가라는 방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전적인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이것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 하고 구원의 방법으로 율법을 주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지켜서 구원을 얻지 못했고 그래서 이제 긍휼하신 하나님이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셔서 율법을 이루지 못한 것을 예수님이 대신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구원을 완성하셨고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니요 착한 일을 하라는 것도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구원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것으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것 없이 단지 믿기만 하면 당신 것이 된다. 이 구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상 위에 있다. 먹어라”라는 식의 설명을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은가 하면 이런 식의 설명은 결국 자랑을 낳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믿었다, 차려 놓은 밥을 내가 먹었다, 그래서 나는 배가 불렀다, 너는 거절했다, 나는 믿었으므로 이 구원을 받는 것이 마땅하고 너는 걷어찼으니까 지옥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는 생각은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자랑이 개입하는 가장 일반적인 통로입니다. 나는 믿었고 너는 안 믿었다는 식의 생각에 여러분들도 저촉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없으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를 오해시키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오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화의 차원에서 다루는 믿음이라는 표현과 칭의, 곧 신분적인 구원을 얻는 통로에서의 믿음이라는 말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가 이해하는 믿음은 성화의 과정과 성화의 단계에서 쓰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내가 노력해서, 내가 심어서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慢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어느 것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로 성화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서신서에 나오는 모든 글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 구원을 얻은 자들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 안으로 들어 가겠다.” 이것 역시 구원을 결단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믿음을 내 원인으로 내 결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은 언제나 성화의 단계에서 그렇게 요구됩니다. 우리의 책임이 요구되는 것은, 지금 로마서가 다루고 있는 것은 성화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죄인이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복된 자리로 구원을 얻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조건과 원인을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으면 그 구원이 내 것이 된다’ 하는 생각만큼 우리를 혼동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조금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성화 단계에서 쓰는 믿음이라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 칭의, 구원을 얻은 단계에서 성경은 우리의 조건이나, 우리의 믿음을 선택으로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로마서 3:22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여기서 구원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얻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첫눈에 보기에는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는 느낌이 드시겠지만 24절을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것은 22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되어 있고 24절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2절은 언뜻 보기에 내가 믿어야 된다는 것이 조건으로 등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24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는 그 구속은 우리의 조건입니까? 그 표현은 분명히 우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했다, 그것도 값없이 말입니다. 그럼 그 구속이라는 것은 내 조건이나 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 금방 인정이 되십니까?

 

 

 

이 ‘말미암아’라는 단어야말로 똑같은 단어입니다. 헬라어로 ‘δια’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 이야기하면 through입니다. 이것이 똑같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제가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22절,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 24절,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through the redemption) 27절에 보면,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through what law) 같은 단어입니다. “행위로냐 아니라 결국 믿음의 법으로니라”(through a law of faith) 그런데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조건과 원인이 아니라 통로, 매개체, 도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하나님의 의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어떤 수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수준까지 가야 되는데 성결의 영으로 말입니다. 거기까지 가는데 우리가 율법을 이루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 하면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내가 믿어서 내 것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내는 것, 선택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의를 예수 안에서 이루어서 그것을 내 것으로 전가하는 방법,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이동시키는 방법을 믿음이라고 그럽니다.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써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런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선택하는 내 결정, 내 분별로 보면 자랑이 좇아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상당히 오래 전이지만 어떤 전도 운동 대회에서 이런 표어를 내걸었습니다. “I found It.” 나는 찾았네. 누구를 찾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여기서 ‘It’이란 무인격 대명사를 쓴 이유는 진리, 복음, 구원, 이것을 압축시켜서 “I found It”이라는 표어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구원의 전략이고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는 그것은 내가 찾은 것처럼 보이지만 원칙적으로 따지면 하나님께서 내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눈이 떠졌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하면 구원을 얻었다 하는 표현은 꼭 수동태를 씁니다. “I was won.” 이겼다라는 단어를 과거분사로 써서 수동태로 “I was won.” 그러니까 누구에 의해서 승리되어졌느냐 하면 ‘by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드디어 잡아 채도다 하는 뜻입니다. “I found It”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찾았다’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꺼내셨도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은 그렇게 되어 있고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내 것으로 전가시키는 방법으로써만 등장합니다. 그래서 믿은 자체를 의로 정하시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이 의가 아니라 무엇이 의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이유는 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지 우리의 의가 내 믿음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나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구세주로 가운데 두면 두 사람은 동등하고 차별이 없어지는데 믿음을 놓으면 차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 자체를 의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혼자 독립시켜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그것 자체가 내용물이 아닙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실 때 그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동차에 태워 보낸 것이 믿음입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그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태워 보내신 수송 수단,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내가 구원을 획득하기 위하여 내 차를 동원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올라가서 예수님을 모셔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준비한 수송 수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강조하는 자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서 모셔온 내 차가, 내 믿음이 강조되고 거기에 자랑이 개입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믿음은 혼자 있어서는 안됩니다. 즉 그 자체가 대상이거나 그 자체가 내용일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언제나 그 대상과 내용을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해야 합니다. 그것은 수송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가 봅시다. 구원이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조건과 얼마나 무관한가를 분명히 합시다. 에베소서 2:4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

 

 

 

4절, 5절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 속에 우리의 조건이 개입된 것이 무엇이 있나 보십시오.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조건이 없습니다. 구원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믿음, 우리의 결단, 우리의 선택, 이런 것도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6절을 봅시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6-8).

 

 

 

믿음으로 말미암았지만 그 믿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선물입니다.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9절입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9).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나쁜 사람을 만나거나 아무리 절망스러운 죄인을 만나도 그 모습 속에서 여러분의 모습을 보아야지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 나는 얼마나 잘난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을 보든지 “그 사람과 내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았다면 나도 그 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에 대하여 자랑을 가지면 안됩니다. 경의로우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 같은 것까지 구원하셨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그 차별의 차원에 가 봅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자랑이라는 모습이 적극적으로 나타날 때는 구원의 원인을 내가 제공했다라는 생각이 자랑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소극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 구원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으로써 행위적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나는 선천적으로 조금 다른 존재다라고 생각하는 선천적 우월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좀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고 저 사람들은 그 존재가 나만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11-19).

 

 

 

이방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외인도 아니고 손님도 아니다. 너희도 주인이다. 하나님의 동등한 자녀다.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었고 유대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것만으로 자기는 좀 나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은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존재론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보다 나으니까 율법을 주었고 다른 민족은 주어도 어차피 못 알아 먹을 족속이고 그래서 율법을 안 주었고 그런 식의 우열의 개념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 점이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신자들의 공통적인 오해 중의 하나는 나는 좀 나으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고 저 원수들은 베풀어 보았자 돼지에게 진주 던지는 것과 같으니까 은혜를 안 베풀었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이 차별이라는 것을 왜 강조해야 되느냐 하면 이 차별은 결국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으로 그 뿌리를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휴머니즘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휴머니즘으로 돌아오고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하나님에게만 진리와 권위와 모든 것이 있으며 그에게 엎드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복과, 진리, 생명을 받아야 되는 인간의 위치를 탈출해서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로 자기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광된 자리를 자기가 취합니다.

 

 

 

차별의 뿌리를 찾으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우침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도를 깨우치도록, 몰랐던 것을 알게만 해 주시면 됩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어떤 지식일 뿐이지 나 자신, 내 속성, 나라는 존재 자체가 죄인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자리로 가는 그 뿌리가 이런 차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 그런데 뿌리를 캐어 들어가 보면 하나님 밑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에 대하여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불교도와 기독교도가 만나면 누가 더 포용력이 있습니까? 불교도가 훨씬 포용력이 있습니다. 스님들은 성경을 봅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불경을 안봅니다. 불교도들은 기독교도 인정합니다. 뭐라고 인정을 하느냐 하면 다 같이 인간이 착해지고 도를 깨우치자는 하나의 또 다른 방법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도들을 우상을 숭배하는 못된 것들이라고 합니다. 저쪽이 훨씬 포용력이 있고 우리는 편협합니다. 그러나 정당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진리를 갖고 있으니까 진리가 아닌 것을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저들은 어차피 정답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그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지방에 갔다가 돌아오게 되었는데 돈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에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기차를 탔습니다. 특등실에 앉아서 오는데 차장이 표 검사를 하러 와서 당신 표를 보자고 하자 “사실은 내가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인데 신분증을 잃어버려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차장이 그러면 마침 여기 정치부 부장이 타고 계시니까 확인을 하자고 하자 이 사람이 속으로 ‘이제 큰일났구나’ 싶었지만 당할 때 당하더라도 그건 그 때 가서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차장을 따라 갔습니다. “정치부 부장님, 이 사람이 당신네 신문 정치부 기자라는데 맞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장이 맞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차장이 간 다음에 참 고맙다고 어떻게 알지도 못하고 그러느냐고 하니까 사실은 나도 가짜라면서 어차피 자기도 거짓말 시키고 와서 앉아 있는데 남보고 아니라고 그럴 필요가 뭐 있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모르는데” 이것이 불교도들이 보는 기독교도들입니다. 그들의 포용력은, 포용력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포용력이 아닙니다. 어차피 정답이 아니기 때문에 틀린 것을 구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왜 불교에 대하여 우리가 그렇게 날카로운 지적을 하느냐 하면 저들은 인간을 신으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대오 각성(大悟 覺醒)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 인간이 잘나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와는 확연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못난 것으로 갑니다. 이 차이를 아십니까? 여러분의 구원이 여러분을 자랑케 하고 다른 사람과 여러분을 구별케 해서 결국 나중에 하나님과 동등된 자리로 여러분을 추켜 올라가게 하는 것을 아십니까?

 

 

 

구원을 오해하면 이 구원에 대한 오해가 여러분의 구원을 취소시킨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느냐 못 하느냐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느냐와 못받았느냐는 어쩌면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남을 시험하게 되고 여러분 스스로 헛된 신앙을 갖게 될 위험성이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감사치 않게 되고 경의로운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함께 하시는가를 놓치게 되면 언제나 사람 앞에서 여러분을 증명하려고 하고 여러분의 자존심을 위해서 모든 수고를 집중해야 되고 헛된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의 썩은 밀알이 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뒤를 잇지 못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영광을 가리우고 서서 “나를 보라 나를 보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믿는다는 신자를 만났는데 그 신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엄위하신, 은혜로우신 하나님, 영광의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동등하게 무릎을 꿇는 격려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래 너 잘났다’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신자를 많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래 네가 다 해라. 너 혼자 천당가라. 난 안간다. 네가 가는 교회라면 난 안간다.’ 이 시험거리를 여러분이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시험을 받은 적도 있을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설명은 로마서 1:18 - 3:20에서 이 구원에 대한 오해를 설명합니다. 무척 많은 장을 할애해서 구원이 어떻게 오해될 수 있는가를 설명합니다. 거기 나오는 오해들로는 자랑으로 가는 것, 율법에 대한 오해 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신앙을 바로 이 자랑이라는 문제에서 점검해 보셔서 여러분의 구원이 감사로 가고 있는지 여러분이 다른 사람과 방불한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여 참으로 겸손한 자리로 가는지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매우 중요합니다. 뛰기 전에 ‘어디로 뛸 것인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어떻게 가야 되는가’를 알고 뛰셔야 됩니다. 무조건 뛰는 것같이 미련한 방법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의 믿음에 매어 달려서 여러분을 치장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의 지적에 따라 두려운 마음으로 점검해 보십시오. 정당한 믿음을 소유하셔서 경의로움이, 그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여러분을 감사케 하시고 여러분을 한 알의 썩는 밀알로 기꺼이 가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는 자리로 여러분을 밀어 넣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들과 여러분을 통하여 영광받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온 천하에 진동할 것입니다.

 

 

 

 

 

로마서 30강(롬4:23-25절) 하나님을 믿는 믿음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3-25)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전적으로 하나님 쪽에서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에 입각한 것이지 우리 인간들의 어떤 조건도 거기에 작용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설명하는 우리 구원의 가장 중요한 논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은 우리 모든 믿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믿게 하는 설득과 항복을 받아낸다고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피려는 것은 구원을 얻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었는가?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도장을 받은 그 믿음의 핵심 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4). 다시 말하면 신자들이 갖는 이 구원 얻는 믿음의 핵심 되는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 속에 잘 포함되어 있다고 성경은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내용이 아니고 그 내용 속에서 가장 잘 밝혀진 ‘하나님’이 내용인 것입니다. 다시 24절입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 4:24).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데 그 하나님을 어느 차원에서 알아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차원에서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하지 않고 그것을 근거로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문제가 왜 이토록 우리에게 소중하느냐 하면 자유주의신학이라든가 신신학을 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관념론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혹 인격자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으로부터는 거리가 먼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싸움은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라는 방법이 유일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가 만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각 사회, 각 시대, 각 나라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통해서, 불교인들은 불경을 통해서, 어떤 이들은 자기의 양심에 따라서 각각 선과 의를 행하며 더 높은 경지로 자신을 채찍질하여 결국 하나님 앞에 간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예수님의 부활이나 기독교에 기록되어 있는 기적들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나 동정녀 탄생 같은 것도 모두 우리의 선과 의를 격려하기 위하여 기록된 신화적 표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런 식입니다. 백운대를 올라가는데 꼭 우이동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느냐, 정릉으로 해서 갈 수도 있고 세검정으로 해서 갈 수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백운대를 가면 되지 않느냐는 말은 그럴 듯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군에서 훈련받을 때 M1 소총을 다 쏘아보신 줄 압니다만 그 소총은 목표를 겨냥하는 방법에 두 가지 필요한 기준이 있습니다. 앞에는 가늠쇠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총구 맨 앞에 붙어 있고 그 다음에 이 총구 앞에 붙어 있는 가늠쇠와 가늠자에 눈으로 들여다보는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이 두 선상을 일치시켜서 목표물을 보아야 갖고 있는 소총의 총열이 목표지점과 일직선상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가늠쇠와 가늠자 두 개를 일치시켜서 보지 않고 가늠쇠 한 구멍만 보거나 가늠자 한 구멍만 갖고 보면, 사선으로 봐도 목표물이 보여서 구멍 하나로 목표물을 봤다고 해도 총열이 그 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죽어 있어서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며 찾지도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어야만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 1:9-10).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님이 오심으로써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하면 상당히 배타적이고 편협하다는 인상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거나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스스로가 추적하는 선과 의를 인격자이신 하나님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서의 신은 근본적으로 관념론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격자가 아닙니다. 권위자요, 존재하는 분으로서 명령을 내리는 자가 아니라 인간이 추종해 놓은 선과 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가끔 그것이 어떤 힘이 되기도 합니다. Power가 되거나 선이 되거나 의가 되는 일이 있는데 그 하나님이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권위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큰 차이입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 하나님을 믿되 그 하나님을 어떤 근거 속에서 믿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내용 속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면 그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우리 주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은 25절,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다는 내용 속에 첫 번째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24절에 있는 말씀을 잘 보시면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보통 신자들이 ‘하나님’ 하면 성부 하나님을 연상하고 ‘주님’ 그러면 예수님을 연상하지 않습니까? 신약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주님이라는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라는 표현은 정확히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이 예수님을 묘사할 때 주라는 표현을 많이 쓴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그는 세상이 평가하는 것같이 세계 4대 철인이거나 현인이거나 성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그가 우리 죄 때문에 죽어야 했다는 시각과 원리와 기준 속에서 하나님을 정의하시고 인식하셔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우리 때문에 죽어야 했다는 말속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선과 의 앞에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존재자 앞에 죄이고 그분이 그 앞에 죄 지은 자를 심판하는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온 천하만물을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며 인간은 그가 만드신 존재인데 그에게 범죄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시각에서 하나님이 인정되어야 됩니다. 온 천하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그에게 범죄하고 배신하고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님 앞에 벌받을 일밖에 없는 인간, 이것이 인식되지 않고서 하나님을 운운하는 것은 완전히 오해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아간다든가 다른 방법으로 인간이 보람과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우리 주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다는 말속에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요, 우리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요, 그 앞에 범죄한 인간을 심판하는 분이요, 우리는 그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이런 모든 것에 포함된 원칙과 기준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았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대체 얼마나 큰 벌을 받을 죄를 졌는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신자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하나가 ‘회개’라는 단어 아닙니까? 왜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떤 죄인인가’가 우리에게는 다른 것을 대신할 수 없는 우선 순위에 올라 있는 어떤 감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언제나 붙어 다니는, 신자들이 그 신앙과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중에서 맨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이요, 기초들이요, 내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 놓고 하나님을 논하고 이것을 빼 놓고 신앙을 논하는 것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신앙과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선을 이야기하고 의를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한다고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않았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25절,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또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성경적으로 깊이 인식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높으신 거룩함을 인식하며 벌받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우리로서는 무슨 방법으로든 해결할 방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셨고 그의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 범죄 때문에 예수님이 죽음에 버리워졌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제사법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속죄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누가 범죄했을 때 그 범죄한 것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받을 벌을 면하기 위하여 죄를 속하고 죄를 용서함받는 제사법이 있습니다. 그때는 꼭 피 있는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양이나 염소나 소나 어떤 피 있는 동물을 잡아서 정한 희생제물을 자기 대신 죽이고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속하는 예식을 제사장이 드리곤 합니다.

 

 

 

또한 일 년마다 한 번씩은 꼭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제를 드리는데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백성 전체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양푼에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혼자 들어갑니다. 그 지성소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는 장소인데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그냥 들어가서는 그 죄값으로 죽고 맙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 자리에 들어갈 때는 충분한 속죄제물을 갖고 들어가야 됩니다. 우리의 피를 충분히 갚을 만한 어떤 제물을 갖고 들어가야 되는데 그것이 언제나 피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제물을 갖고 들어갈 때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옷 중에 이런 기이한 것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예복 위에 가운을 입는데 그 가운 옷자락에 방울이 달려 있습니다. 소리가 나라고 방울 하나 석류 하나 방울 하나 석류 하나 이렇게 쭉 달아 놓습니다. 왜 소리가 나야 되느냐 하면 제사장이 들어갔다가 종종 죽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들어간 제물이 하나님 앞에 만족스럽지 못하면-아직 그의 흠을 다 가릴 만큼의 제물이 되지 못하면 들어간 자가 죽고 마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제사장이 죽는 일이 있다는 것은 가지고 들어간 제물이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가치로서 불충분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일 살아서 나오면 어떤 뜻이 됩니까? 그 제물이 열납되었다는 것, 제사장이 살아서 나왔다는 것은 백성의 죄값으로 갖고 들어간 제물이 하나님 앞에 충분해서 백성들의 죄가 씻어졌다는 뜻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백성들은 제사장이 살아서 나오느냐 죽어서 나오느냐를 목이 빠지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죠? 제사장이 죽은 게 문제가 아니라 죄가 안 씻어진 것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바치신 제물일 뿐만 아니라 제사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고 살아 나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분이 바친 제물이 열납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물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망이 그를 가둬 놓을 수 없는 존재인 것도 사실입니다만 이 제사장 직분의 상징성에서 주님의 부활은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서의 효능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열납되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가 다 씻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이런 신앙의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만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것을 믿으며 우리의 선조 아담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이제 우리는 그의 후손으로서 죄인으로 태어나고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의 죄를 대속할 제물을 준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제물로 보내사 스스로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게 하시고 또한 주님께서 친히 그 제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들어가 우리의 죄를 다 씻으시고 우리를 죄없다 하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럼, 다시 한번 이 핵심을 점검합시다. 우리는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온 천하만물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 우리는 우리가 우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일반 종교가들이 논하는 하나님과 어떤 종교라는 것과 우리 믿는 사람들이 논하는 하나님과 종교, 신앙이라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논하는 것은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들은 관념론이요, 궁극적으로 철학이요, 도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우리는 그 앞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그것을 뛰어 넘어서 신자로서 확인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며 우리가 그 앞에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 문제가 종종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런 꼴을 하고도 내가 정말 구원을 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이렇게 살다 죽어도 정말 천국에 갈 것인가?” 이것이 이제 이 믿음 가운데서 확인해야 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24, 25절에 있는 원리들을 설명하는 중에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것과 ‘우리가 구원을 어떻게 얻었느냐’는 두 가지 문제가 그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성경의 설명대로 하나님이 누구시냐를 우리가 이제 인식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초점은 뭐냐 하면 그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정말 확실하며 영원히 안전한 것이냐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또 급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의 생애를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그 예로 든 이유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18절로 다시 갑시다. 4:18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다시 봅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8-21).

 

 

 

잘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지금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은 자로서 저가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고 보지 말고 아브라함이 구원을 얻을 때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했느냐 하면 “네 후손이 하늘에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랬는데 그 약속을 얻을 때는 애가 없을 때입니다. 그리고 나이는 들어가고 백 세를 바라보고 있는 나이에서 그는 자식을 낳을 수 없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뭘 믿었느냐 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신다는 걸 믿었다는 것을 믿음의 핵심으로 잡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로마서 4장이 왜 필요하냐 하면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도 인정하고 우리도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이렇게 살아가지고도 구원이 확실한가’라는 의심이 늘 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랍니까? 이 모양으로는 안되지만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동원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이요, 그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우리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그러니까 뭘 믿느냐 하면 우리 자신의 믿음의 성실함과 의지력과 끈기를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의지와 긍휼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종종 여러분 주변에서 여러분을 이렇게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당신 그러고도 예수 믿는다는 말이 나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하십시오. 좀 창피하긴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잘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낫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래서 예수를 보내신 줄을 압니다. 이것이 신자의 다른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더 거룩해져야겠고 더 의로워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이 크신 은혜와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으며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믿음을 이 차원에서 확인하지 않는 한, 여러분이 만일 여러분의 믿음의 근거를 여러분에게 갖고 있는 한, 여러분은 안심하고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실제로는 괜찮은데도 불구하고 여러분 혼자 몇 번씩이나 좌절하고 의심하고 흔들리는 신앙생활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의 가장 확실한 내용, 가장 확실한 근거, 원리를 분명히 하셔서 여러분이 흔들릴 때 하나님을 다시 쳐다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이 백 세일 때 이삭을 주신 하나님, 그래서 그의 후손으로 국가를 이루신 하나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그 안에서 우리가 완성될 수밖에 없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 이것이 우리 믿음의 근거입니다.

 

 

 

다시 24절을 봅시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니라”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넘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능력이 있으신 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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