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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 강해 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40

 

 

 

 

 

 

 

 

 

 

로마서 강해 2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로마서 11강(롬1:24-32절) 지금 내리는 진노(1)
로마서 12강(롬1:32-2:1절) 지금 내리는 진노(2)
로마서 13강(롬2:1-11절) 지금 내리는 진노 (3)
로마서 14강(롬2:1-9절) 하나님의 공의
로마서 15강(롬2:1-8절) 하나님의 인내
로마서 16강(롬2:3-8절)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로마서 17강(롬2:6-11절) 구원의 필요성
로마서 18강(롬2:12-16절) 동등한 심판
로마서 19강(롬2:17-29절)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
로마서 20강(롬3:1-4절) 유대인의 유익

 

 

 

 

 

 

 

 

 

로마서 11강(롬1:24-32절) 지금 내리는 진노 (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롬 1:24-32)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인류 모두를 위한 경고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때문에 복음을 믿어야 되고 구원을 얻어야 되며 그것은 인간들에게 있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라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 로마서 1:18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노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경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얼마나 잘된 일인가를,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얼마나 큰일인가를 밝혀 주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사실이고 우리의 신앙에 근거가 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사랑하기 위하여 더 경건히 살기 위하여라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모습으로 각색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씀드린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현실적이고 영원한 우리의 운명에 관한 문제인 것을 직시하고 이 복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앞에 받을 심판을 너무 미래적이고 내일에 관한 것, 멀리 떨어져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악하고 불의한 행동에 대한 보응이 멀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들의 현실 생활에서 신앙적인 승리를 방해하는 요소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알게 되고 그 말씀에 따라 살게 되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를 믿어 복을 누리게 된 것은 천국에 가셔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때 가면 완벽한 것을 누립니다. 다시 죽음이 없고 이별하는 것이 없고, 울 것이 없고 아프거나 죽는 것이 없는 데로 갈 것입니다), 지금 현실 세상에서도 예수를 믿고 나면 세상이 주지 못하는 모든 것을 누립니다.

 

 

 

하나님과 동거하는 기쁨, 건전한 삶의 보람, 진리와 생명으로 쌓아져 나가는 우리 인생의 의미있는 모든 것들을 실제로 지금 누립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거룩과 평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락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불신자들은 지금 당장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지금 당장 누리는 복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지금 당장 당하는 진노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리석은 유혹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에 대한 그 부러운 눈치,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미혹, 이런 것들을 오늘 이 말씀들을 분명히 해서 마음속에서 몰아내도록 합시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지금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진노가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어떤 형태로 내리고 있는냐 하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과 같은 형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에 대한 진노와 벌 주심은 ‘내어버려 두심’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24절에 있었고 26절과 28절에도 있었습니다. ‘내어버려 두셨다’고 말씀이 나옵니다. 어떻게 내어버려 두셨으며 그것이 어떠한 벌인가 하는 현상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첫 번째로 24절과 26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욕심대로 하도록 내어버려 두셨다 하는 것이 하나입니다. ‘욕심대로 하도록 내어버려 두셨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다’는 이것이 왜 벌이냐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자유라고 합니다. 행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이야기할 필요 없이 여러분, 자녀들하고 예배 마치고 가서 의논해 보십시오. 너희들이 하고 싶은 것이 무어냐?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죽었다 깨도 안 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 열 개 써라 해도 공부는 안 들어 갑니다. 하고 싶은 것 100개, 그래도 공부는 안 들어 갑니다. 어렸을 때는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공부의 어려움이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필요성을 알지 못할 때 준비해야 되는 것이 공부의 어려운 점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필요하다는 것을 언제 가서야 누구나 알게 되는냐 하면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 누구나 알게 됩니다. 심판에 서는 날, 누구나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늦습니다. 이것이 어려운 점입니다.

 

 

 

여러분께서 예전에 학교 다니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선생님들이 반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뭐 할까?”하면 “놀아요”하던 기억이 납니까? 그 논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무슨 카드를 치자는 것입니까, 마작을 하자는 것입니까? 공부는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공부는 말고 무엇이든 좋으니까 놉시다. 놀아요 그랬던 기억이 나십니까? 그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놀면 잘하는 것이 많습니다. 전자오락 잘하고 뭐 하여간 잘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그에게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큰아이가 하루는 아침에 학교갈 때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머리를 적당히 하고 나왔습니다. 제가 딸아이에게 물었어요. “야 오빠 멋있냐?” 그러니까 “오빠 멋었어. 공부 잘하는 학생 같애. 그런데 거기서 조금 더 하면 노는 학생 같아져, 오빠.” 그러니까 지금 어떻다는 거예요? 멋이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우린 예전에도 공부만 하는 학생을 놀렸던 기억이 있지 않았습니까? 조금 날나리로 노는 학생을 동경의 대상으로 보고 용기있다고 생각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기억, 그러나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명예도 아닙니다.

 

 


저희 친구들이 모였을 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병으로 군대를 갔다 오고 그 중에 하나만 장교로 군대를 갔다 왔습니다. 이상하게 R.O.T.C를 혼자해서 장교로 갔다 왔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요령을 부리고 가짜 휴가증을 얻고 가짜 외박증을 얻는가 등의 이야기들을 하며 한참 자랑을 하는데 그 친구만 인상을 쓰고 있더라구요. 넌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가 군대있을 때 그런 놈들이 얼마나 꼴보기 싫은 줄 알았냐는 겁니다. 그는 장교였거든요. 서로 입장이 다르니까 일이 달라지더라구요. 우린 얼마나 요령껏 농땡이를 부렸느냐가 자랑이었는데 지휘관으로 책임이 있었던 그 친구 입장에서 볼 때는 그런 사람이 제일 못난 놈이었거든요.

 

 

 

우리가 지금 실수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무어냐 그럴 때 24절과 2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우리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 두셨는데 왜 그것이 벌이 되는냐 하면 더러움의 정욕 때문입니다. 24절에 그것을 더럽다고 하고 26절에서는 부끄럽다고 합니다. 더럽고 부끄럽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벌입니다. 진흙 구덩이에서 노는 것과 같습니다. 진흙 구덩이에서 진흙놀이를 하면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닦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거기에서 재미있는 만큼, 분탕질을 한 것만큼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삽니다. 잘 아시다시피 지금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는 모든 사람들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도 지금 여러 가지 현대 문명의 부산물들을 하나, 둘씩 맛보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회가 성적으로, 폭력적으로 나쁘게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는 시대에나 나타나는,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의 가장 타락한 모습입니다. 정신적인 타락과 폭력은 여러분이 영화를 보시면 잘 알 것입니다. 요즈음 영화같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성적인, 타락과 폭력이 난무하는 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들 예전에 봤던 ‘7인의 신부’라든가 ‘세계를 그대 품 안에’이런 맛은 없어진 것입니다. 그레고리 펙 나오고 그러던 시절은 다 지났고 살벌무쌍한 것뿐입니다. 영화가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 큰 문제가 무언가 하면 우리 나라도 이미 성적인 타락과 폭력이 난무해서 여자들이 차타고 가다가 사고 나면 문 열고 나오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있었던 일 중에 어떤 분의 딸 아이 하나가 잡혀 갔다가 풀려 나왔습니다. 며칠 동안 실종됐다가 이틀만에 돌아왔는데 밤길을 가다가 납치를 당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 풀려났습니다. 밝은 날 보더니 “야 어떻게 저런 걸 잡아왔냐?” 그러고 미안하다고 차비주어서 보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원래대로 태어났으면 다 그럴 것이거든요. “야 어떻게 저런 아이를 데려왔냐” 하고 차를 태워서 보냈을 텐데 지금 우리는 모두가 잘난 척 하느라고 전부 돈 주고 얼굴을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자베스 테일러같이 되려고 해서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누구나가 다 오누이들 같고 자매같이 됐고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여러분이 부러워하는 것 아닙니까!

 

 

 

아휴 저 여자 좀 봐. 남편이 능력이 있어서 일본 데려가서 싹 판갈이 해주는데 나는 어쩌다 이런 남편 만나 점 하나 빼자는 데도 안 될까?” 우리의 불평이 그것 아닙니까! 그렇게 이쁘게 생긴 여자가 생겨나는 이유가 뭡니까? 남자들이 이쁜 여자를 원하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인신매매범이 생긴 이유는 무슨 폭력범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술집에 가서 예쁜 호스티스들을 자꾸 원하니까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잡아 올 수밖에 없고 이쁜 여자 다 골라가도 모자라니까 얼굴을 개조해서라도 이쁘게 만들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방 거기서 술먹고 여자랑 놀아나고 와서 신문 보고서 “쯧쯧쯧”하는 것 아닙니까! 상당한 보응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 딸들과 아들들을 그렇게 키우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학교에 보내서 좋은 집과 사돈관계 맺자. 저의 집사람이 저의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안 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 그 따위로 공부해 가지고는 나중에 장가도 못가. 이쁜 색시 얻지도 못해.” 그러자 우리 아들이 뻔뻔스럽게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습니다.”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우리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순 엉망입니다. 새벽기도 오는 여자를 납치하려고 봉고가 쳐들어 오는 시절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안 일어나서, 내가 아는 사람에게 안 일어나서 그렇지 한다리 건너서 일어나면 “그러게 밤길은 왜 다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마누라가 잡혀가고 딸이 잡혀가야 눈이 나올텐데 아직은 거기까지 사태가 안 와서 여러분은 웃고 있는 것입니다. 큰 벌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욕심대로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것이 자기가 남을 잡아먹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 자기를 잡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문제 되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이런 성적인 쾌락을 구하고 물질적인 욕심을 채우는 이 일에 부끄러움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벌입니다.

 

 

 

사람에게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만큼 큰 벌이 없습니다. 잘못한다고 옆에서 아무리 눈총을 주어도 모르고 말을 해도 모르는 것만큼 안된 것은 없습니다. 그 다음엔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 같이 유학을 온 한국 학생들 중에 미국에 와서 뻔뻔스러운 것을 배운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자유분방하다, 개인주의라고 하지만 나름대로 지키는 어떤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 하나만은 잘 지킵니다. ‘도서관에서는 무엇을 먹을 수 없다’ 이것은 규칙입니다. 그 말을 유일하게 지키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유학생이었는데 워낙 개판이라서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냥 내버려둡니다. 제가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 와서 오렌지를 까먹자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는 먹어도 괜찮데요. 그래도 안 된다고 했더니 담당 사서에게 가서 “나 오렌지 먹는다”그랬더니 그 사서가 웃으면서 “먹어라”그랬습니다. 그것이 욕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욕인 줄 모르고 그것이 자기를 인간 취급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벌입니다. 큰 벌입니다. 우리는 돈 벌고 물질을 채우는 욕심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집어 던졌습니다. 수치심이 없습니다. 염치가 없습니다.

 

 

 

많은 부인네들이 집을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돈벌이를 시작했습니다. 증권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하고 여기저기 많은 일들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그러지 않은 여인들을 향하여 무능하다는 이유로 매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돈을 많이 벌어 가지고 생긴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이 증권투자를 하고 부동산 투기를 해서 돈을 벌자 월급 백만원 벌어오는 남편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이 깨졌죠. 부인이 돈을 벌므로 남편이 무능해지고 가정이 깨진다면 그놈의 돈, 없는 것이 백 번 낫지 않습니까?

 

 

 

부인의 가치는 돈을 얼마나 많이 벌어 오느냐에 있지 않고 가정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있습니다. 아내는 모름지기 정숙하고 현숙하며 지혜롭고 부지런하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것으로 어떻게 알뜰살뜰하게 잘 사느냐가 그 아내의 가치요, 훈장이요, 명예이지 돈을 얼마나 잘 벌어오느냐가 아닙니다. 껌 짝짝 씹어 가면서 선그라스 끼고 하얀 자동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모님 사모님 소리 들어 가면서 통장에 몇 억씩 넣고 있는 것이 자랑이고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 모르고 구역공부에서 떠드는 그런 일이 교회까지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를 구역공부 시간에 성경과 교재를 제쳐놓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벌받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28절에 있는 말과 같이 버려둠이라 하더라도 조금 다릅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상실한 마음’,  정확히 이야기하면 ‘실성’했다고 그럽니다. 완전히 ‘미친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합당치 못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미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밑에 나오는 것 불의, 추악, 교만,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비방, 능욕, 교만, 자랑, 부모거역, 우매, 배약, 무정, 무자비 그런데 이 실성한 것이 어느 쪽으로 가고 있어서 더 큰 일이냐 하면 무자비해진다는 말입니다. 큰일입니다. 미친 자가, 악한 자가, 힘이 세면 그것이 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미쳤으면 우리말에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미치려면 곱게나 미치지, 미치려면 힘이나 없지 그럽니다. 미친 주제에 힘도 있으면 큰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 여러 나라 중에 교육열이 가장 높고 시대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치열한 경쟁력 가운데 살아남은 용감 무쌍한 자들입니다. 얼마나 유능한 미친 자들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자비합니다. 우리 생애 전반이 그렇습니다. 일단 정치가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욕할 마음은 없습니다. 개인을 욕할 틈이 없습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다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 나라는 누구를 위하여 정치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나중에 과학이 발달하면 인간의 모든 장기를 이식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뇌도 바꾸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가서 죽으면서 뇌를 보관해 놓았다가 뇌를 바꿀 때 정치를 하던 사람의 뇌가 가장 비쌀 것입니다. 왜요? 거의 신품이라는 거죠. 뇌를 써 본 적이 없다는 거죠. 정치라고 해서 도무지 그 사람을 정치가로 만든 국민들과 그를 뽑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정치가를 욕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바보, 멍청이인가, 실성했는가를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는 신자들마저도 그것을 부러워한다는 데 있습니다. 정치가들만큼 이해 관계가 얽혀서 거짓말을 떡먹듯 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합니다. 어제까지 동지였다가 다음날 적이 됐다가 다음날 또 동지가 되었다가 이것이 도대체 정신이 제대로 된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것을 꿈꿉니다. 그것이 벌인지를 모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25절 보십시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5)

 

 


하나님을 놓치면 그렇습니다. 28절에 있는 바와 같이 저희가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므로 내어 버려 두는 것입니다. 내어 버린다는 것은 보호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보호는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보호란 순종의 보상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만이 보호를 받습니다. 그럼 유기된 자는 무엇입니까? 그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만 생명과 진리와 복과 영생이 있음을 모르는 자들이기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부패, 당연한 결과인 더러움, 수치스러움, 악함으로 자기를 온전히 다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벌인 것을 아셔야 됩니다. 학교 가지 않고 땡땡이 친 것, 자체가 벌입니다. 아내를 놔두고 외도하는 것은 스릴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릴이 있지, 재미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혼동하지 마십시오. 스릴이란 아슬아슬하다는 뜻이지 재미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슬아슬하다는 것은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 재미있습니까?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육연발 권총 속에 총알을 하나만 넣고 죽음의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총알이 그때 있으면 죽는 것이고 없으면 사는 것입니다. 스릴 있죠? 그것이 재미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그러는 사람을 능력있고 담대하다고 그럽니다. ‘미친 놈 염병한다’ 이렇게 생각을 안하고 그것을 부러워해서 눈알이 빠진 신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예수만 안 믿었어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있다 믿는 것인데... 벌인 줄을 모릅니다. 벌입니다. 벌!

 

 

 

그들은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담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죽었고 썩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우리가 부러워합니까? 세상은 자기네끼리 미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 우리의 정당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아야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저들에게 보상받으려고 하니까 여러분은 그토록 많은 혼돈과 그토록 많은 유혹을 당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가시면 역사상 이미 일어났던 하나님이 심판의 대표적인 사건인 노아의 홍수, 그것이 왜 일어났느냐가 지금 본 바와 똑같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1-6)

 

 

 

당시에 부패상이 무엇인가, 그 마음의 생각이 악해서 일어난 결과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저들의 죄악을 가장 두드러지게 증거하는 것이냐고 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을 더 이상 경건한 하나님의 부름의 축복의 장으로 삼지 않고 눈에 좋은 대로 골라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경건한 자녀들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의 딸들이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결혼하신 분들이 있고 여러분의 자녀들을 그렇게 결혼시키려고 하시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결혼의 첫 번째 조건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닙니다. 무엇이 첫 번째 조건입니까? 저 사람과 사돈을 맺었을 때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유익을 줄 것인가 하는 사회적인 체면과 이익이 여러분들의 계산에 첫 번째 조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분의 아들, 딸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합니다. 무슨 과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학교냐가 문제입니다.

 

 

 

또 이제 부부는 더 이상 신성한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복받은 관계로 부름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 성적인 대상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늙어서 부인들이 걱정하는 것은 우리 남편이 밖에서 혹 젊은 것들에게 침을 흘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있는 대로 돈을 모아서 주름살 펴는 수술을 받습니다. 그래서 전부 이마로 잡아 올려 가지고 주름살을 제거하는데 몇 번 받으면 배꼽이 턱에 와서 붙는다고 전문가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서로 욕을 합니다. 저것도 수술한 것이고 저것도 수술한 것이다. 그러나 돈만 있다면 여러분도 할 것 아닙니까?

 

 

 

배우들은 일본에만 갔다오면 얼굴이 바뀌어져서 돌아오곤 했습니다. 광대뼈가 낮아지고 코가 오똑해지고 그 얼굴이 그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들이 그 얼굴에 침을 흘리는 것만큼 부인도 말없이 남편 몰래 계를 하는 수밖에 없게 되고 얼굴 성형 수술을 위한 2억짜리 계 이런 것들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뻐지면 유혹의 손길이 다가오고 꼭 남편하고만 살 필요가 없어지고 배짱 좋게 이혼하고 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미 창세기 4:19에 성경이 가인의 족보 속에 이미 기록해 놓은, 인류가 단연히 맛 볼 결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16이하에는 가인의 족보가 나옵니다. 5장에 오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나오지만 이미 그 전에 가인 자손의 계보가 나옵니다. 19절에 라멕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리도다 하였더라

(창 4:19-24)

 

 

 

이 라멕이라는 사람은 대단히 거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시를 쓰고 있는데 자기를 건드리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그런 소리를 아내들에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찔렀기 때문에 내가 그를 죽였고 나를 욕되게 하는 자는 소년이라도 죽였다. 여기서 소년이라는 것은 어리다는 뜻이 아니라 힘센 청년을 의미합니다.

 

 

 

누구라도 나를 건드리고 나를 모욕하는 자는 내가 죽이고야 말겠다. 하나님이 가인을 건드리면 칠배나 벌을 주겠다고 했지만 누구든지 나를 건드리면 칠십칠배나 내가 복수하리라. 이렇게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벌이라는 것을 지금 모르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살아야 되고 전전긍긍해야 되고 모두를 원수로 돌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자랑을 누구한테밖에 할 수 없느냐 하면 자기 아내들한테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학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어떤 센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적의 아내를 자기 편으로 만드는 수를 제일 많이 썼답니다. 내가 A라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너무 힘이 세면 그 A라는 사람의 부인을 유혹해서 그를 통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는 방법을 썼답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들을 모아 놓고 큰소리를 쳐야 되는 겁니다. 나를 건드리는 자는 칠십칠배나 원수를 갚겠다고 누구한테 떠듭니다. 자기 마누라들을 앉혀놓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세 살난 딸아이를 앉혀놓고 “아빠 힘쎄지”하는 거나 무엇이 다릅니까? 이것은 못난 짓입니다. 그런데 이 두 아내 이름이 재미있습니다. 하나는 아다고 하나는 씰라인데 아다라는 이름은 그 의미가 이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인 하나는 이뻐서 얻었고 씰라라는 이름은 성적인 매력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는 성적인 쾌락을 위하여 얻었다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중혼의 시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 둘이 한 몸이 될지라 하고 축복했던 그 모든 신성한 결혼과 행복한 가정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아마 힘으로 빼앗았을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이 아닙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고 나를 건드리면 칠십칠배로 갚을 것이라고 자기 아내들에게 고함을 질러야 되는 일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벌 속에 살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스스로 옷 입고 살고 있고 더러움 속에 방치되어 썩고 있으나 스스로 그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벌을 받고 있습니다. 양심이 살아 있고 거룩을 행하며 자기의 욕심을 구하지 않고 남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으며 그래서 자기의 생명력을 무성케 할 뿐 아니라 죽은 생명에게도 생명을 전달하며 다른 사람의 감겼던 눈을 뜨게 하는 이 복된 일은 신자들에게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행복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신자란 무릇 그가 존재하는 곳에서 생명의 기운과 생명의 생명된 모든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보상을 삼으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상당한 보응을 하고 계십니다. 저들은 자유롭지 않으며 저들은 용감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며 저들은 자기들이 어떤 수치와 어떤 더러움 속에 방치되어 있는 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얻은 바 복을 놓치지 마시고 행여나 잠시 미쳐서 세상 사람들의 미친 것에 따라가지 마십시오. 감사하는 자 되시고 여러분이 얻은 바 구원을 인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의 인생이, 주를 의지하여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2강(롬1:32-2:1절) 지금 내리는 진노(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롬 1:32-2:1)

 

 

 

오늘 우리가 생각할 말씀은 여태껏 보아온 말씀과 같이 복음의 핵심과 그 복음이 필요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직시해야 되는 것은 신앙의 핵심 되는 것은 내용과 가치가 아닙니다. 교훈적인 가치나 윤리적인 가치, 그 진리의 어떤 수준 이런 것이 아니라 이 복음의 최고의 가치가 사실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반역하여 형벌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이 성경이 지적하고 강조하고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모든 것의 최고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성경 말씀과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동의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무어냐 할 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고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리고 살아 나셔서 지금 우리 편을 들고 계신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었고 그 핵심은 그대로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의 죄인된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 속에 이미 기초로 깔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럼 왜 이 복음을 받아야만 되는가? 그럼 왜 이 복음을 믿어야만 되는가? 우리가 믿지 않으면 우리는 다 형벌 아래 있고 처참한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하여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18에 있었던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노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범죄한 행위와 범죄한 존재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적으로 이미 주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는 벌이라고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느냐, 주를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벌을 받고 있느냐, 자기 욕심을 따라 살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허망하게 살도록 내버려져 있는 데서 발견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더러움 속에 박혀 있고 죽을 줄 모르고 헛된 것을 구하며 헛되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 주변 어느 곳에서나  살펴볼 수 있고 그 일들이야말로 벌을 받고 있는 가장 뚜렷한 증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살펴보려고 하는 더 중요한 문제는 벌받고 있는 인간들, 그들이 자행하고 있는 죄들의 가장 초점이 되는 것,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이냐 그럴 때 그것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이 지적하고 있고,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가장 핵심 되는 것과 불신자들의 가장 핵심 되는 잘못을 동시에 정확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32절, 본문에 있는 바와 같이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알고 있는 데 잘못을 행합니다. 2:1에는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하니라.” 이것이 이제 중요한 하나의 문제가 됩니다. 이 핑계치 못한다는 말은 이미 1:20에 보시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하는 이야기가 앞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확인을 합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섬기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 벌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자기의 욕심대로 살게 내버려 두는 벌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것이고 헛된 것이고 미련한 것이고 스스로를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더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더럽고 헛된 것일 뿐만 아니라 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도 거스르는 반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는 자들은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려서 벌을 받습니다. 그리고 벌을 받은 결과가 무어냐 하면 의롭게 살지 못하고 옳게 살지 못하고 아름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럽게 살아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거역해서 더려워지고 있다는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일반적인 종교심을 가지고 여러분이 거룩하게 살면 복을 받고 더럽게 살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면 거룩하고 아름다워지고 하나님을 배반하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그 더러워지는 것이 벌받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지금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래서 이 핑계치 못한다, 알면서도 반항하고 있다하는 부분을 여러분이 직시하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분명한 정체를 확인하시고 여러분의 신앙도 이 시점에서 차이가 나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1:32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항하고 자기뜻대로 사는 자들을 옳다고 합니다. 그 앞에 있는 것들, 우매하고 배약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한 일을 하는 자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우리는 확인해야 됩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전에 학교에서 배운 바와 같이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앎의 완성이라, 맞습니까? 앎은 행함의 시작이요 행함은 앎의 완성입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안다는 것은 어떤 정보를 입력하고 있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치있는 것이고 옳다면 그것을 행해야 그 사람이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행하는 것은 자기입니다. 그런데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 옳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 속에 무엇이 끼어 있느냐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이하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34-44).

 

 

 

바리새인을 자꾸 예수님이 공격합니다. 너희는 가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가짜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겁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왜 아브라함같이 살지 않느냐.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무어라 그럽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뭐 좀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또 왜 나를 배척하느냐 배척하는 것을 보면 너희가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다. 펄쩍 뛸 일입니다. 여기가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사탄과 그의 졸개들인, 통틀어서 마귀들은 하나님을 압니까? 모릅니다? 진리를 압니까? 모릅니까? 압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 알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압니다. 사탄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어떻게 시험했느냐 하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렇게 하지 않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것을 해 봐라. 아들인 것을 시비걸지 않습니다. 아들이라는 것을 걸어서 다른 짓을 하게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놓고 공격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사탄과 그의 졸개들 마귀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아는 것을 자기의 욕심으로 덮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거기에 있는 어떤 귀신들린 자를 만납니다. 너무나 귀신이 많이 들려서 귀신의 이름을 댈 수가  없어서 군대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떼로 들어 있는 귀신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무어라고 그럽니까? 주여 어찌하여 때가 이르기 전에 저희들을 괴롭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의 높은 자이심을 압니다. 알아요. 알지만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사탄이란 거스른다는 뜻입니다. 대적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탄은 그런 의미에서 고유 명사가 압니다. 별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는 말씀을 잘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른 것이 개인적인 욕심에 삼키워진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알면서 무엇을 자기의 욕심으로 삼고 무엇을 거기서 선택하는 가를 보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보통 보면 옳고 그르다는 것은 다 무엇에만 사용하느냐 하면 남을 평할 때만 사용합니다. 그것을 자기에다가 적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불평할때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무엇을 지적합니까? 저들의 불공정함, 불공평함, 철면피한 것, 교활한 것, 음흉한 것, 거짓된 것, 이중적인 것 이런 것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자기의 이익에 걸어 가지고 자기의 보호를 위해 많이 썼는지 아십니까? 자기의 합리화를 위해서 자기 변명을 위해서 옳고 그른 것을 쓰지, 진리를 진리 되게 하기 위하여 나의 욕심을 그 앞에 포기한 적은 없습니다, 저는 있습니다. 분명히 나누어서 이야기합시다.

 

 

 

저는 테니스를 가끔 칩니다. 코트에 나가서 테니스를 치다가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테니스라는 게임에서 아마츄어 게임은 전부 복식을 하게 되고 4명이 합니다. 단식은 너무 격렬해서 웬만한 체력으로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 넷이서 실력이 비슷해야 제일 재미있습니다. 그럼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못치는 사람 셋이서 한명이 모자라서 게임을 못하고 놀고 있어도 잘치는 사람 둘이 와서 그 한 사람을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셋이서 그저 어쩔줄을 모르고 있는데도 그 둘이서 기어코 기다리고 있다가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와서 넷이 되면 이 세 사람을 몰아내고 그 넷이서 칩니다. 그래서 처음 테니스를 배우는 사람이 어떤 시험을 받느냐 하면 저들은 인간도 아니다하는 시험을 받습니다.

 

 

 

처음에 테니스를 치면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못치는 사람 둘이서 계속 연습을 하고 있어도, 안에서 잘치는 사람 셋이 한 명이 모자라서 게임을 못하고 있으면서도 와서 같이 합쳐서 쳐주질 않습니다. 지쳐서 들어가면 셋이서 전화해 가지고 출장간 사람 불러서 네 명을 맞추어서 칩니다. 그래서 다 앙심을 먹게 됩니다. 두고 보자, 너희들이 그럴 수 있느냐, 내가 잘 치면 나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그래서 어지간한 사람은 탈락하고 앙심을 품는 사람만 살아 남습니다. 아주 살벌해요.

 

 

 

드디어 잘 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도 못치는 사람이랑 절대 안 쳐줍니다. 그러니까 공평, 상식, 교양은 언제 쓰느냐 하면 자기가 피해자일때만 씁니다. 그 말은 내가 피해자일 때는 공평해라. 교양 있어라.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라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자기가 베풀어야 되는 것일 때 사람들은 그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때는 무어라 그러냐 하면 자기보다 더 악랄한 사람을 예로 듭니다. 누구는 더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나는 덜하다. 그래서 나중에 새로 배우는 사람들이 잘 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럴 수가 있는냐 저럴 수가 있느냐 그러면 무슨 핑계를 대느냐 하면 내가 배울 때는 그것보다 더했다. 나는 그나마 비웃지 않고 몰아 내지는 않는다. 너희들이 연습하다 지쳐서 나온 다음에 치지만 내가 배울 때는 치고 있는데도 와서 몰아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죄된 죄의 대표적인 것이 무어냐 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를 진리로서 소유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진리는 시녀노릇을 할 뿐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근본적인 죄성의 문제로서 하나님과의 문제라는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봅시다. 로마서 1장으로 돌아 가시면 우리는 이 일을 여러 군데에서 봅니다. 1:18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8)

 

 


진리를 막는 사람들’ 할 때 막는다는 것은 의지적으로 반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고’ 일부러 진리를 거스리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합니다. 본능적으로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종교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본능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인간을 높이는 것으로 갑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 탓.’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잘 됐을 때 감사한 적이 있습니까? 드뭅니다. 그러나 안 됐을 때 하나님께 화낸 적은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 마음 속에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는 분노는 여러분들 다 해 보았을걸요. 왜요? 그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25절에 오시면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었다고 그럽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입니다. 거짓 것으로 바꿉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로 말하자면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면 이런 싸움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있다 없다는 논쟁을 벌이려면 일단 둘 다 편견을 버리고 들어가야 됩니다. 편견을 버리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 둘 다 편견을 버리고 양보한 공동의 장입니다. 그러나 세상 불신자들하고 이야기하면 언제나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없다’가 공평하고 정상적인 무에서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없다는 데서부터 출발해서 신이 있다로 올려면 신이 있는 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신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종교,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의 종교는 결국 무엇이 되는냐 하면 신을 자기들이 만들지 있는 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주 커다란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신은 종종 로보트가 되는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8절에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싫어한다는 말을 꼭 기억하십시오. 감정적이고 편파적입니다. 사람들은 냉정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싸움은 이리로 갑니다.

 

 

 

신앙이란 무어냐 그럴 때는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대상과 내용을 전제합니다. 믿음은 믿는 자의 열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 누구를 믿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결국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신앙은 누구를 믿고 무엇을 믿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에 누구와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진리이어야 하고 절대이어야 합니다. 그 대신 절대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거기에 대한 순종밖에는 신앙을 점검할 아무런 다른 기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인 경우 인류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죄성은 무엇이냐 하면 진리라는 것 자체를 절대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종을 안 합니다. 어디에 순종을 하느냐 하면 자기의 욕심에 순종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진리를 언제나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도 바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욕심이 절대입니다. 사실이 절대가 아니라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 이즈러진 마음이 절대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무지와 미련한 악한 생각들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이 불신자들과 기독교의 신앙에 관하여 논할 때 옳고 그른 싸움을 하려고 하는 것은 벌써 실패입니다. 상대방은 자기 욕심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고 우리는 사실을 알면 해결을 하리라고 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저들은 사실을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시는 성경의 복된 구절들 중 하나인 요한복음 3:16을 봅시다. 이 말씀이 얼마나 이 인간의 죄성을 잘 설명하는가를 봅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6-19).

 

 

 

세상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빛이 왔으되 빛을 싫어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빛을 비추면 아, 하고 놀라서 깨닫고 돌아올 것이라고 자꾸 생각합니다. 아니요. 빛을 비추면 전등을 깨고 빛을 가리고 어두운 데로 더 숨고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누구를 사랑합니까? 자기를 사랑합니다. 신앙을 이렇게 점검해야 하며 불신앙을 바로 이 시점에서 점검해야 합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순종합니까?

 

 

 

구약성경 사무엘상 15장에 가 봅시다. 이런 부분들을 여러분의 신앙에 중요한 근거로 놓치지 않고 있어야 됩니다. 22절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서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 꾸중 받는 장면인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십시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 15:22-23).

 

 

 

무엇이 가장 첫번째로 요구되는 것입니까? 순종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입니다. 여러분의 욕심에 순종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우리가 로마서를 배우는 과정에서 무어라 그랬습니까? 자기의 더러운 욕심에 버려두었다는 것입니다. 벌입니다. 이미 그 자체로 벌을 받는 것이요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자기 욕심에 쫓겨 가지 마시고 거기에 잡혀 가지 마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복이요 이것이 순종입니다. 그것이 무엇보다 낫다구요. 번제와 제사보다 낫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오해가 있느냐 하면 내가 교회를 나간다, 기도를 한다, 헌금을 한다, 이러저러한 좋은 일을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예. 그것은 분명히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하는 보조 수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입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밑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것을 감수하느냐, 즉 세상 사람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더 먼저라는, 여러분의 이해 관계를 거기에다 일치시키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은 남을 꾸중하지만 자기 문제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씁니다.

 

 

 

종종 교인들이 이런 상담을 많이 해옵니다. 세상살이를 하다가 분명히 성경적으로 옳지 않은데 그 일을 안 할 수 없는, 하고 싶은데 해서는 안 되는 그런,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일 때 상담을 해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사셔야 됩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토를 다는지 아십니까? 장로님들도 뭐 이렇게 저렇게 살던데요. 미국에 가면 라스베가스에 관광 온 한국 관광객 중에 절반은 목사님이래요. 하기는 뭐 저도 갔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가 뭡니까? 너희들도 떳떳치 않은 주제에 왜 나보고 말씀대로 살라고 그러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나는 왜 말씀대로 살라고 그러느냐, 난 내 욕심대로 살고 싶은데 말씀이 와서 자꾸 긁으니 난 어떡하면 좋아, 그러니 목사가 어떻게 해 달라는 거예요. 상담한 이유가 뭐예요. 본심이 ‘아니 그냥 사세요.’ 이것을 요구하고 온 겁니다. 그럼 서로 다 망하는 겁니다. 그럴거면 왜 물어보러 옵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 죽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물어오는 것은 상당히 괜찮은 신앙의 증거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늘 기준이 무어냐 하면 나보다 더 나쁜 놈이거든요. 저놈도 잘 사는데 왜 나보고 무어라 그러느냐, 이겁니다. 이만하면 양심가다, 나는 왜 마음이 다부지지 못할까 이 생각을 하는 것이 불신자라면 신자는 남보다 덜한 죄를 지어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영 이것이 지워지지 않아서 어떤 생각을 하냐면 더 악해지려고 애를 쓰고 애를 쓰다가 결국 나중에 어떻게 결론을 내느냐 하면 ‘아이 관둬라 하나님하고 편한 것이 낫다. 내가 덜먹고 살지.’ 이것이 복된 것입니다. 이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다 참 감사할 일이다. 내가 더러운 데로 더 이상 못가겠다. 내가 아는데 어떻게 죄를 지으랴.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어떻게 나를 기쁘게 하랴.’ 그렇게 잘 돌아오신 겁니다. 잘한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어떻게 가르칩니까? 야무지게 키우고 지지 않게 키웁니다. “넌 왜 병신같이 맞고 들어와.” 아니요. 맞고 들어오시는 게 낫습니다. 때리고 들어오면 “넌 왜 그러니” 이렇게 꾸중을 하십시오. 맞고 들어오게 하십시오. 지고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정당하게 살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게 하십시오. 여러분도 여러분을 그렇게 채찍질하시고 야무지지 마시고 악랄해지지 마시고 죄를 짓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을 다행으로 아시고 복으로 여기시고 감사하시고 그것이 잊혀지지 말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는 것을 기쁨으로 삼기 위하여 더 많이 하나님을 배우려 하고 더 많은 하나님의 간섭을 요구하십시오. 버려두지 마시라고 기도하십시오. 내 욕심대로 놔두지 마시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결국 존귀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에 아무도 낙오자가 되지 않기로 기도합시다.

 

 

 

 

 

로마서 13강(롬2:1-11절) 지금 내리는 진노 (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롬 2 : 1 - 11)

 

 

 

복음의 필요성을 천국을 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고 하는 적극적인 이해 국면과 예수를 믿지 않았을 때 우리가 마땅히 벌을 받고 영원한 형벌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로마서를 공부해 오면서 지금 확인하는 중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이 슬픔 많고 고통이 있고 악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나라에 가는 소망이요 복된 약속이요 영광된 자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구원을 얻지 못했을 때 본전치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지 못하면 큰일나는 인간의 현재 상태를 고발하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가 구원을 얻지 못했을 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라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는 측면에서도 구원은 시급한 문제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을 알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지식의 문제를 더 지나서 알아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의지적이고 적극적이고 그리고 감정까지 내포된, 하나님을 거스리는 행위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아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지성을 가지고서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를 변호하고 합리화하는 데 써 먹으면 써 먹었지 진리를 혹은 생명을, 영혼과 사실을 알아가는 데는 절대 쓰지 않는다 하는 것이 1 : 32절에 있는, 그리고 앞에서 생각했던 가장 핵심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2 : 1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그래서 잘못보면 이 문제가 옳고 그른 문제를 그의 의지를 동원하여 실천하느냐 못하느냐의 싸움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으로 진리와 거룩과 생명을 위하여 쓰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 합리화하고 자기를 핑계하는데 씁니다.

 

 

 

그러나 나는 옳고 그른 것을 옳은 것을 위하여 쓰고 진리를 위하여 쓴다 그러면 옳은 것이냐? 그러면 다 된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 문제에서 좀더 깊이 이해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알고 모르는 문제 그 이상의 문제가 죄의 문제며 인간은 실천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의지력의 문제를 떠나서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어떤 심각한 지경에 빠져 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게 하고 싶어하는 복음과 연결된 인간의 현실이요 사실인 것을 직시하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시작합시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원을 얻은 신자는 그 신자 된 것을 무엇으로 근거 삼는가? 무엇으로 그 내용을 삼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물론 예수를 믿는 자요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히브리서 11 : 6로 가십시다. 믿음에 대한 가장 압축된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 : 6).

 

 

 

무엇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신 것, 주권자이신 것을 믿어야 한다구요. 이것은 이해한다는 차원 이상이지 이해하고 납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을 어떤 선택을 했다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조금 더 분명한 성경을 찾읍시다. 로마서 10 : 9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 9 - 10).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 그것은 하나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요식적인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 시인하려면 자기가 시인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했고 이미 납득했고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떤 것이 이미 전제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선언하는 것은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하여 어떤 분명한 확신이 있을 때에야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네 마음으로 믿고 네 입으로 시인해라. 이것을 성경에 있는 조금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 이상으로 그분이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내가 죄인 되었다는 것을 납득하고 인정하고 그래서 그 진리와 성경의 요구를 내가 영접한, 선택한 내용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표현이라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모든 구원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이해한 것이고 선택한 것이라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구원의 내용을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내용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지 말고 그것을 사건으로서 한번 설명해보자 이겁니다. 우리의 구원을 받았다, 예수를 믿었다 하는 것을 내용으로가 아니라 이것이 꼭 그렇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건적으로 봅시다. 에베소서 2 : 1부터 봅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 1 - 9).

 

 

 

이 내용은 우리에게 일어난 구원이라는 것이 내 행위의 결과라는 것입니까? 후자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너희를 살렸다. 너희가 믿어서 구원을 베풀었다가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어 있던 너희를 살려냈다라고 합니다. 죽은 자. 죽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체가 아닙니까? 그러면 살아나기 위한 어떤 행위도 열심도 생각도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시체는 아무런 행위나 조건을 시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120% 수동적입니다.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4절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것이 조건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너희가 얻은 것 아니다. 너희가 만든 것 아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한다. 자기가 얻은 것,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 여기에 바로 구원 문제에 관해 우리가 좀더 깊이 이해해야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왜 자꾸 나누어서 생각하고 무엇 때문에 깊이 생각하여 하느냐 하면 우리가 ‘믿는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다는 것을 알고 선택했다, 알고 결정했다라고 자꾸 생각합니다. ‘믿는다’라는 이야기의 가장 핵심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은혜와 사랑으로 그의 자녀를 삼아 그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죽었던 우리를 살렸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들었다. 믿게 되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라는 표현을 좀더 확실히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 4 : 5 - 6).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저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이제 고린도 교회에 있는 사람에게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무엇을 전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우리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것을 알게 되었느냐, 자기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를 제대로 이해해야 상대방을 믿게 만들 것 아닙니까? 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세기의 첫 번째 사건입니다. 빛이 있어라 하면 빛에 생긴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작업입니다.

 

 

 

마치 그와 똑같이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우리가 어떻게 죄인이고 벌받아 마땅한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하는 것을 마치 아무것도 없는 데서 빛을 만드시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만들어 내셔서 내가 예수를 믿게 됐고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설명을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실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십시다. 전문적인 용어로 이야기할 때 구원이라는 것은 이런 식으로 옵니다. 일단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셔야 우리가 믿든지 말든지 할 것입니다. 그것을 계시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셔야 하고 십자가를 알리셔야 되고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반적인 감각기관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수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인 실험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적인 생활의 경험 속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초월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과 생명과 경험의 범주를 벗어난 범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 주셔야 됩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알려주신 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감각시켜도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과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인식을 못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사람은 무엇이든지 합리적이지 않으면 인식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인식 기능은 이성인데 그 이성은 합리적이지 않으면 인식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 때문에 오신 것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해한 그것, 이해하게 한 능력을 이성 혹은 지성이라고 합시다. 그럴 때 알아서 달갑기 때문에 선택을 했다. 결정을 했다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여러분이 교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즉 이성과 지성이 진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이성과 지성이 진리를 선택하는 능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었다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예수가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 주어서, 즉 계시라는 것이 진리에 대한 정보요 영원과 생명을 나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선택한 것은 내 실력이라고 선택한 만큼 복음과 인간의 죄인 된 것을 오해하는 것은 없다는 그것입니다. 깨우친 것과 선택하는 것은 다릅니다. 오히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깨닫고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했기 때문에, 중생시켰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분리하려고 하는 것은 이성과 지성이 갖는 위치입니다. 이해를 하는 것과 분별을 하는 것과 선택을 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분리해 내야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게되고 구원이 십자가로 말미암았는지를 알게 되고 여러분이 인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은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 : 6 - 10)

 

 

 

우리는 십자가를 알고 영원을 알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지옥이 있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우리가 알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럼 우린 그 다음에 무슨 오해를 하느냐 하면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기로 했고, 나는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2 : 1부터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악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 1 - 5).

 

 

 

바울이 고리도 교회에 가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마음속에 걱정하고 조심한 것이 무어냐 하면 이것을 말로 설명하고 그래서 상대방이 설득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려는 것을 제일 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어냐 하면 말의 지혜로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합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은 설득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설명을 해서 항복을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설명해서 항복을 시키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나옵니까? 내가 너희 중에서 무엇만 알기로 했느냐 하면 이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려 갈 때는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하였다는 여기가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가 믿고 있는 구원에 관한 진리 말씀을 저들에게 전할 때에 그가 노력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설명해서 상대방이 이해하고 설득당해서 선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믿게 한 것 같이 전에 고린도후서 4장에서 본 바와 같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사역, 그런 능력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이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는 하나님의 사역이 이 전도의 사역에 합세하지 않는 한, 아무 영혼도 예수를 믿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란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그를 거부한 것 아닙니까? 빛이 왔으되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으로 다 도망간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혀주자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자를 못 박아 죽인, 그래서 없애 버린 것이 십자가 사건이 담은 최대의 메시지 아닙니까? 인간은 옳고 그른 것으로 그가 자신을 콘트롤하지 않고 다른 것으로 자신을 움직이더란 말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옳고 그른 것을 알면 그 아는 것이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는 것은 힘이 아니고 그를 움직이고 그를 결정하는 것은 따로 있고 아는 것은 언제나 자기 변명할 때만 쓰이는 악세사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고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거기 있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전도할 때 애를 썼다는 말입니다. 설득과 항복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해와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갈 1 : 13 - 16).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셔서’ 나는 구원을 얻었고 사도도 됐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나타내셨다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우리를 움직이는 어떤 성향과 그 속에 있는 어떤 것을 고쳐 놓은 작업을 말합니다.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 사도 바울의 회심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바울이 사도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때에 그는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예수 믿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스데반을 그가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핍박을 피해서 다메섹으로 도망간 자들을 다 잡아다 죽이려고 잡은 자들을 처형할 권리를 증서로 가지고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고 있는데 가는 중간에 주를 만납니다. 큰 빛과 음성 앞에 그가 꺼꾸러집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느냐 하면 바울이 바울 된 것이 그의 노력이나 요구나 무슨 간구나 희망에 의해서 일어난 결과가 아니라 그는 정반대 길을 가고 있었고 주를 믿는 자들을 방해하기 위하여 또 주를 방해하기 위하여 가고 있었고 주님은 사도 바울을 고쳐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그를 납득시키고 붙잡아 앉히고 설명하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서로 꽝하고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넘어지자 그 빛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까’거기서 고쳐집니다.

 

 

 

바울 쪽에서의 조건도 요구도 기대도 욕심도 없이 주께서 오셔서 그의 마음에 있었던 주를 반대하는 마음을 뽑아 버리시고 주를 좋아하는 마음을 새로 넣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분명히 해야 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옳고 그른 것으로 자신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성이나 이성이나 상식이나 교양이나 분별력으로써 자신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는 것으로 자신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좀더 복잡한 존재입니다. 지성이나 감정이 그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보다 본질적인 어떤 것이 그를 움직입니다. 이것이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답은 죄입니다. 죄가 그를 움직입니다. 그 죄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속성이 있고 그 죄는 하나님을 반대하게 인간을 부추기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욕심대로 살고 자기 영광을 구하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거나 순종하지 못하게 하며 생명과 진리인 줄 알아도 그것을 순종치 못하게 하는 어떤 고집스런 성격입니다. 경향입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막을 수 없는 하나의 움직임이고, 결정하고, 실행해 가는, 사람들이 갖는 어떤 말릴 수 없는 성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 : 39 - 44).

 

 

 

여러분은 누구의 영광을 구합니까? 자기 영광만을 구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입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논쟁 중에서 가장 큰 대조는 무어냐 하면 예수님께서도 진리를 이야기하고 바리새인들도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도 의를 이야기하고 바리새인들도 의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왜 서로 원수입니까? 의와 진리가 예수님 쪽에서는 하나님께로 가는데 바리새인들에게는 자기 주장과 자기 영광으로 가서 경계와 파멸로 가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옳고 그른 것을 압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면 자기 치장을 하고 정죄하는 데 씁니다. 남을 정죄해서 내가 얼마나 너보다 옳으냐를 명하지, 그 옳은 것을 실제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옳은 것의 궁극적인 목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며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고 회개하고 무릎 꿇는 자리로 가지 않습니다. 내가 아는 옳은 것, 내가 아는 계명으로 그렇지 않은 자들을 욕하고 정죄하고 처단하는 일들은 있어도 자기의 생명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진리를 생명으로 보내며 하나님 앞에 자기를 무릎 꿇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른 것이 자기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바른 것은 다른 하나의 기능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나를 어디로 끌고가는가를 보면서 다른 것이 내속에 있다는 것을 직시하셔야 됩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가시면 같은 싸움을 바리새인들과 같이 이렇게 합니다. 지난 번에도 인용했던 내용입니다만 요한복음 8 : 37을 봅시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나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 : 37).

 

 


주님의 말씀이 바리새인들의 마음 속에는 들어갈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귀머거리라는 뜻도 아니며 특별히 그 말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지성이라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 말을 선택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항복할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 : 40).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 8 : 43).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 : 47).

 

 

 

듣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말 그대로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귀를 막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을 듣고 항복하지 않고 그 말에 공감하지 않고 그 말에 대해 반대 모습을 취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다른 무엇,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가면 이 부분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기록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뭐냐, 죄인이 뭐냐, 자연인인 인간을 움직이는 죄가 인간을 어떻게 움직이냐 하는데 대하여 사도 바울이 기록한 이 말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 15 - 24).

 

 

 

이것은 여러분이 다 경험해 보신 일일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 줄 알지만 여러분이 그것을 시행치 못했던 뼈아픈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남이 그 잘못을 했어도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수 있느냐 그래 놓고 나중에 자기가 그 경우를 당하면 자기도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명분이 있을 때는 좋은데 그것이 명분에 맞지 않고 욕심을 따라 행할 때는 “인생이 그렇지 않아. 현실이 그렇지 않아”이렇게 우리가 우리를 얼마나 많이 핑계 대고 합리화시킵니까?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틀린 것인지를 알면서도 얼마나 열심입니까?

 

 

 

어떤 대학에서 동굴탐사를 나갔는데 지하동굴 탐사가 유행이랍니다. 남녀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갔는데 지하동굴에 들어가 보니까 갈래 길도 많고 해서 편을 짜서 여기저기로 나누다가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한조가 되어서 서로 같이 가게 된 것입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남학생이 여학생을 덥석 껴안았답니다. 입을 맞출려고 했대요. 안 돼요 돼요 돼요… 여러분이 죄를 지을 때 늘 이 동굴의 울림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분명히 안 돼요 안 돼요 돼요 돼요… 언제나 이렇지 않습니까?

 

 

 

명분상으론 안 됩니다. 안 돼죠. 그렇게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이것만은 절대로 안된다고 하고 여태까지 지킨 것이 하나라도 있는지 보십시오. 거의 없습니다. 지키기 어렵습니다. 참 지키기 어렵습니다. 나는 저런 식으로 살지 않겠다. 저렇게 치사하게 안 살겠다는 것 때문에, 무엇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를 걸면서 나는 정당하게 살리라, 나는 깨끗하게 살리라 하고 약속을 합니다. 확인을 하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일이 나의 문제로 닥치면 우리 중에 아무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지성, 지식, 상식으로 자기를 움직이지 않고 무지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아는 것을 행할 힘이 없는 우리가 죄의 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이 복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꼭 알리고 싶어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 예수 믿으면 지옥 가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가장 핵심 되고 본질적인 내용이지만 그것만으로 이해를 하시면 안 됩니다. 죄의 종이었다 하는 부분이 여러분에게 이해되셔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 : 6 - 11).

 

 

 

구원을 설명하는 국면이 무어냐 하면 죄의 종이었는데 구원을 얻은 이후로는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자신을 드릴자유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성령이 우리를 주장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오해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것을 벗어날 자유가 없습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이제 여러분의 신자 된 것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면 여러분이 더 착해지고 의롭고 정직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일날 예배 보지 않고 가끔 어디 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고 난 다음에 무엇이 다르냐 하면 그런 것들이 마음에 걸리죠. 어느 때까지 그것이 안 없어지느냐 하면 회개하고 돌아와서 여기와서 졸다 가는 한이 있어도, 와야 풀린단 말입니다.

 

 

 

무척 다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것을 하고 싶어도 그것을 할 수가 없고 선한 일을 한 것이 뭔가 진 것 같고 손해를 본 것 같고 나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것입니다. 선을 행한 것보다 악을 행하고 나야 본 때를 보인 것 같고 오늘 할 일의 유종의 미를 거둔 것 같은 것입니다. 내 존재가 확실하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서는 그러면 싫은 거예요. 가끔 가다가 옛날 성품이 나와 해대기도 하지만 그러고 나면 찜찜하고 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그래야 유종의 미를 거둔 것 같고 마음이 편합니다. 여러분이 경청하시는 신자된 가장 뚜렷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증거인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죄의 종이 된 것과, 우리가 성령님이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전이 된 것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된 것을, 구별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라고 해서 지금 아는 대로 다 행하진 못합니다. 힘이 없어선지 아직 그럴 실력이 없어서인지 본성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되고 가장 달라질 것입니다. 특권이고 책임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를 이 시점에서 확실히 구별해 내지 못하면 여러분은 쓸데없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의의 병기가 되었고 거룩한 자가 되었습니다.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5 : 8 이하의 말씀으로 결론을 삼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 : 8).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의 종으로 살 때는 너희들이 얼마나 더러우며 얼마나 부끄럽게 살며 그들이 어떻게 생명과 진리를 스스로 거부하여 파멸의 길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두움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주 안에서 빛입니다. 이젠 압니다. 이제 우리가 할 것은 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라.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직시 하십시오. 죄에 의해 사로 잡혀서 종노릇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직시하시고 그것을 부러워하며 시험받지 마십시오. 빛의 자녀처럼 행하십시오. 의와 거룩으로 부름받은 여러분의 신자된 특권들을 자랑하시고 세상과 비교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점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빛과 생명 안에서, 진리와 거룩 안에서 영광된 소망을 내다보면서 승리하시고 감사하시고 열매 맺는 신자의 삶을 영위하십시오.

 

 

 

 

 

로마서 14강(롬2:1-9절) 하나님의 공의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 2 : 1 - 9)

 

 

 

로마서 2 : 1 - 9까지의 말씀은 이해하기 좋게 지금 우리가 그 내용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은 공평하며 절대적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죄를 지을 때 심판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배짱대로 살고 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릴 영광과 두려움을 갖지 않고 불경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심판권을 가지시고 불경한 자들을 가능한 한 벌주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기다리시고 오래 참으사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받게 하시기 위하여 긍휼과 자비로 그 심판을 연기하고 계신다. 그런데 인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불경하고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을 악용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며 죄 짓는 것에 더 담력을 가지고 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두렵고 미련한 짓인 줄 아느냐?’ 하는 것이 오늘 읽은 로마서 2 : 1 - 9까지 말씀의 대표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주된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멸시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오래 참으시는가 하는 부분과 하나님의 심판권의 절대성, 그의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의 높으심과 엄위하심과 그의 공평, 공의, 그리고 심판권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공평한 심판을 행하신다’ 하는 부분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으니까 더 할말이 없습니다만)믿는 자들 중에도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심판권에 대하여 회의와 항복하지 않는 부분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이 큰 이유를 이루고 있습니다. 멀쩡하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다 쳐 죽이고 남의 나라를 뺏고 어린 아이부터 시작해서 노약자까지 모든 것을 진멸하는 그 참혹한 일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셨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 하는 것에 대하여 조금은 만족하지 않고 항복치 않은 근거를 가지곤 합니다. 신명기 7장으로 가시면 바로 그 구절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 7 : 1 -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신 7 : 16).

 

 

 

잔혹한 명령을 내립니다. ‘불쌍히 여기지 말며 진멸할 것이라.’ 이런 것들은 역사상 기독교인들, 기독교 국가들에게까지도 오해된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청교도들이 들어가 얻은 미국땅에서 원주민 인디안들을 쳐 없애는 데도 이 신앙적인 근거가 저들에게 작용해서 참혹하게 인디안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흑인들을 노예로 쓰는데 있어서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당연시했습니다. 호주를 점령한 영국의 죄수들과 나중에 다른 이유로 간 모든 백인들이 백호주의를 앞세우면서 호주 원주민들을 학살한 것도 이런 데 근거합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외국에 갔을 때 서부국가에 가면 황인종은 백인종 흑인종 다음입니다.

 

 

 

그런데 백인종과 흑인종 사이에는 개와 고양이가 낍니다.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것입니다. 백인들은 흑인과 황인보다 개와 고양이를 훨씬 중요시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취급치 않습니다. 근거는 여기 이것입니다. 백인과 황인 이것을 가지고 보면 이갈리는 일이지만 여러분들이 신자로 이 세상을 살 때 어떤 불신자와 이해관계가 얽히고 어려움을 당하면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당장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저것들은 죽어 마땅하다. 진멸받아야 된다’라는 하나님만이 내릴 수 있는 심판권을 여러분이 당연히 여러분의 권리로 주장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진멸하라는 이 문제는 생각같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서 멀쩡히 사는 사람 것을 빼앗아서 주는 것이 가나안 정복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제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 : 13 ~ 16).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편애해서라는 국면만이 아니라 이 일곱 족속이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심판이 동시에 행해지는 것이 이 가나안 정복입니다. 그러니까 이직은 저들이 벌받고 심판받을 죄를 짓고있지만 아직은 좀더 기다려 주고 싶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된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이 심판을 받을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함께 맞아 떨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남의 땅을 빼앗아 주는 데만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빼앗길 수 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적인 또 하나의 경고입니다.

 

 

 

다시 신명기 7장으로 가 보시면 아까 우리가 앍은 말씀들에 ‘진멸하라’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 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 : 3 - 10).

 

 

 

여기서 물론 ‘당장’이라는 말은 ‘’이라는 뜻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나타난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겨서 얻는 복이요 상급인 동시에 뺏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짓들을 했기 때문에 지금 처참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가나안 정복이 갖는 두 국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리하도록 일의 판정을 내렸다 하는, 하나님이 조금 편벽되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같은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일어난 것을 우리가 성경의 기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9장으로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해서 불신앙의 행위를 하다가 결국 그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9 : 1이하에 그 일에 대한 다니엘의 고백이 나옵니다. 자기네들이 당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신앙적인 눈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봅시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단 9 : 3 - 10).

 

 

 

핵심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 나라 정치인들이 썩었습니다. 우리 나라 경제인들이 자기 배만 불렸습니다. 그래서 나라들이 부강할 때 우리 나라는 부국강병책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쎄서 우리가 망했고 우리 나라가 군사력이 열악해서 망했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내던지셨습니다. 이겁니다. 두려워할 주 하나님 아시겠습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입니다. 두려워할 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도 예수 믿어서 여러분이 산 주가가 올라 가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까?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두려워할 물건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단 9 : 11 - 15).

 

 

 

붙잡혀 오고 매맞고 처참한 자리에서 다니엘이 그 입을 열어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사실적 고백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범죄하면 죄값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법칙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

(신 27 : 1 - 8).

 

 

 

이것이 우선해야 되는 일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족속을 다 진멸해야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 놓으라구요. 큰 돌을 세워놓고 여호와의 명령을 명백히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장에 두 가지 약속이 나옵니다. 축복의 약속과 저주의 약속이 나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그러나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이것이 신명기 28장 전반에 걸친 내용입니다.

 

 

 

1절부터 14절까지는 축복의 약속이고 15절부터 68절까지는 저주의 약속이 나옵니다. 모든 내용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 말을 들으면 내가 복을 줄 것이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저주하리라. 다른 방법을 없다. 하나님이 생사화복의 주인이시고 그 만이 주권자이시고 그 만이 우리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다니엘의 입을 통하여 고백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바벨론이 강해서 우리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바벨론에 집어 던지셨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봅시다. 정말 어떻게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됐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적 사건에서 그의 약속하신 바를 이행하셨는가를 찾아 보도록 합시다.

 

 

 

열왕기하 21장으로 갑시다. 이 당시는 이미 북 왕조 이스라엘은 망하고 남 왕조 유다만 남아 있을 때입니다.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버린 신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그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왕하 21 : 1 - 9).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마치 무엇 같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쫓아내고 심판을 행하게 했던 가나안 족속이 행한 것과 방불한 죄를 범하였으며 그것보다 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도 멸하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그 대적의 손에 붙인즉 저희가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이 되리니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하셨더라”(왕하 21 : 10 - 15).

 

 

 

그래서 이제 유다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멸망의 길로 들어 섭니다. 심판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낫세는 기원전 692년부터 624년까지 55년간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악한 왕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심판을 연기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이 아무리 기다리고 끝까지 봐 주어도 옳은 길로 가지 않았고 이 죄악 때문에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소아시아, 지금의 아랍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동 아시아와 그 밑에 팔레스타인 그리고 그 밑에 이집트까지 그 서아시아의 세 나라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이집트가 하나의 강대국이었고 앗시리아가 강대국입니다. 바벨론이 강대국입니다. 이 강대국 세 나라가 그 여러 나라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살고 있던 때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627년에 앗시리아에 이슈파니팔 왕이 죽습니다. 세계사 속에서 배운 유명한 왕입니다. 앗수르는 이 왕의 죽음으로 인해서 서서히 몰락합니다. 그래서 기원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 이 두 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수도 니느웨가 함락됩니다. 나라가 아직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몰락한 앗시리아를 구원하려는 목표와 또 그 세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이중적인 속셈을 품고 애굽의 왕인 느고가 북진을 합니다. 앗시리아가 망해서 그 모든 인력과 경제력이 바벨론 것이 되고 말며 바벨론이 너무 강대국이 되어서 자기네 나라가 이등 국가로 전락하게 되니까 그 나라를 위성국가를 만들자는 속셈을 품습니다.

 

 

 

그러나 꼭 돕는 것도 아닌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앗시리아를 쳐들어 올라오는데 북진하는 이집트군을 요시야 왕이(이 왕은 므낫세의 다음 다음 왕입니다), 어리석게 가로막고 나섭니다. 요시야 왕은 므낫세 왕이후로 하나님 마음에 들었던 왕이고 그 후로는 내리막길인데 그 내리막길의 첫 번째 원인이 므낫세입니다. 므낫세 다음에 아몬이라는 왕이 있고 그 다음 왕인 요시야 왕은 종교 개혁을 실시하고 정당하게 나라를 돌이키려고 애를 쓴 왕입니다. 그러나 불행했던 것은 백성이 그 개혁에 동참하지 못한, 그러니까 나라는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자기가 종교개혁도 했고 하나님 마음에 들게 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 앞에 큰 힘을 얻어 나라를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개인적인 자만심을 갖고 바로 이 느고 앞을 가로막고 섰다가 그만 그 전쟁에서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 이후로 유다나라는 애굽 왕 손아귀에 놀아납니다. 열왕기하 23 : 29부터 봅니다.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 본 후에 죽인지라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왕하 23 : 29 - 30).

 

 

 

이제 요시아가 죽자 그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을 삼았습니다. 31절입니다.

 

여호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바로느고가 저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왕하 23 : 31 - 34).

 

 

 

누가 왕이 되느냐 하는 것이 애굽 왕 손에 달려있는 위치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요시야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 노릇했지만 여호아하스는 포로가 돼서 애굽에 가서 죽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여호야김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시야 왕이 죽고 난 다음에 여호아하스도 죄를 범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고 그 대를 이어서 왕이 된 여호야김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합니다.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이십 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스바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 23 : 36 - 37).

 

 

 

기원전 605년에 유프라데스 강변 갈그미스에서 애굽(이집트)와 바벨론이 커다란 전투가 일어납니다. 거기서 이집트가 집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그 이후로 약 70년 간에 걸쳐 서아시아의 패자가 됩니다.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고 온 천하를 평정한 나라가 됩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유다 나라도 여태껏 애굽 왕권에 의해서 영향을 받던 것이 이제는 바벨론 왕권에 의하여 좌우되기 시작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수가 느부갓네살인데 그는 왕자였습니다. 같은 해 아버지가 죽어서 아버지 뒤를 이어서 바벨론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예루살렘을 포함해서 여호야김에게 항복을 받고 그때에 여러 사람들을 포로로 데려가는데 다니엘과 친구들이 이때 포로가 됩니다. 이때가 기원전 605년입니다. 열왕기하 24 : 1 이하에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 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왕하 24 : 1 - 6).

 

 

 

그래서 이제 여호야김은 죽고 그 뒤에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여호야긴이라는 왕은 다시 바벨론에 대해서 또 반역을 일으키고 여태까지 왕들이 당한 모든 고통들,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왕권이 좌우됐고 그 다음에는 또 바벨론에 의해서 좌우되고 모든 수모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겨 왕권을 정립하고 나라를 부강케 하고 나라를 보호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반항합니다.

 

여호야김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치고 저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가증한 일과 그 심술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그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야긴이 위에 나라갈 때에 나이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 열흘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세초에 느부갓네살이 보내어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여호와의 전의 귀한 기구도 함께 가져가고 그 아자비 시드기야를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을 삼았더라”(대하 36 : 5 -10).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므낫세의 잘못을 인하여 심판 내리시기를 작정했는데 그 이유는 왕 하나 때문이 아니라 백성이 다 쫓아갔다는 데에 잘못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행했습니다마는 그 개인은 정직했다 할지라도 국가 자체가, 백성 자체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유다 나라는 애굽 왕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고 바벨론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고 왕들이 잡혀가기도 하고 그들의 처첩이 잡혀가기도 하고 또 많은 다른 젊은 남녀가 잡혀가기도 하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금은 기구들과 다른 것들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자꾸 다른 왕을 세웁니다.

 

 

 

그러나 일어났던 왕마다 앞에 있었던 일로 교훈을 삼았던 것이 아니라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습니다. 이것이 죄가 갖는 무서움일 것입니다. 죄는 이상하게도 더 죄를 짓게 만들지 그 죄를 돌이키게 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시드기야가 마지막 왕입니다.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이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다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맞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로 하였더라”(왕하 24 : 8 - 17).

 

지금 멸망해 가는 것이 보이시죠. 왕을 계속 바꿉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최후의 심판을 내리지 아니하고 기회를 자꾸 주시는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니 예레미아의 딸이더라”(왕하 24 : 18).

 

 

 

어머니 이야기가 꼭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 어머니 잘못이다 하는 이야기가 내포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시겠습니까?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저희를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왕하 24 : 19 - 20).

 

시드기야 구년 시월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사면으로 토성을 쌓으매 성이 시드기야 왕 십 일년까지 에워싸였더니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이 양식이 진하였고 갈대아 사람이 그 성읍을 에워쌓으므로 성벽에 구멍을 뚫은지라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길로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가더니 갈대아 군사가 왕을 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 미치매 왕의 모든 군사가 저를 떠나 흩어진지라 갈대아 군사가 왕을 잡아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저에게 심문하고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왕하 25 : 1 - 7).

 

 

 

어느 쪽이 더 잔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가나안 백성들이 당한 일과 지금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됐을 때 당한 잔혹성은 어느 쪽이 더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둘이 막상막하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권을 아시겠습니까? 심판을 무서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를 무서워하십시오. 죄를 무서워하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눈에 벗어나는 짓은 이를 악물고 안 해야 됩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매일 회사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며, 학생 중에 누가 매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느 여자가 매일 기쁜 마음으로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안 하면 밑지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가슴 속에서 사이다가 튀어 오르듯 좋고 미치고 좋아서 팔짝 뛰어서 하는 짓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토록 괜찮치 않습니다.

 

 

 

이를 악물고 해야 됩니다. 이를 악물고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죄에게 지지 마십시오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들의 방자함을 여러분 마음으로부터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유혹되려는 마음을 이를 악물고 붙잡아 내셔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몇백 년에 걸쳐서 일어난 일인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한 것이 기원전 1400년 쯤의 일입니다. 사울 왕이 초대 왕으로 취임하여 이스라엘에 왕조가 생긴 것이 기원전 1050년 경입니다. 두 나라가 분리되고 결국 이 유다라는 나라가 망한 것이 기원전 586년입니다. 몇 년 안 됩니다. 왕조가 되어서 500년을 가지 못합니다. 그 동안 무수한 악을 행했고 하나님이 오래 기다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할 때까지 그들이 심판받아 마땅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 그때도 심판을 해야겠다고 작정해 놓고도 하나님이 기다리신 것이 최소한 그 후로 400년이 넘습니다. 앞 사람의 잘못을 보고서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될 줄을 모르는 것. 인간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는 사람들입니다. 아는 바를 행하십시오.

 

 

 

신명기 30장으로 갑니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그의 권세를 가진 진리대로 시행된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 마음 속에 두시기 바랍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신 30 : 15 - 20).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렇게 따지지 마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신 땅에 너희가 들어 가리라. 거기가 천국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 자리로 영접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여러분이 세상을 따라 가면 여러분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종교적인 유희를 하지 마십시오. 헌금이나 내고 예배나 보는 것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신앙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돈을 섬기며 세상에서의 자랑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과 반대된 입장에서 신앙인으로 존재하고 있고 신앙으로 이 싸움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극렬한 풀무불에 던지운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신치 않으리라는 결심과 그 깨우침을 여러분의 자랑으로 갖고 계셔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경고와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는 그 간단한 말 속에 들어있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이 두려운 쪽으로 열매 맺히지 않고 복된 쪽으로 열매 맺는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감사와 찬송으로 계속 이어 나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5강(롬2:1-8절) 하나님의 인내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 2:1 - 8)

 

 

 

인간이 죄인 된 것,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방법이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을 우리가 로마서 1 : 18 이하에서부터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권과 그 공평하심, 그 심판의 엄중함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앞서 확인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한번 더 그 문제를 놓고 확인하려 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안에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과 공평함 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2 : 4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그 심판권을 가능한 한 유보하고 계시며 죄 지은 인간들을 구원케 하여 그의 깨우침과 용서와 사랑을 받을 만한 기회를 우리에게 아는 방법으로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된 지독함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깨우칠 만한 기회들을 돌이킴으로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으로 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고집을 더 높이는 데 쓰고 있다고 역사와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그 문제,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목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심판권을 가능한 한 유보하사 우리에게 사랑과 긍휼로 기회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죄를 지으며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멸시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 인간의 죄악상을 조금 더 분명히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보았던 유대의 멸망 사건을 한 번 봅시다. 역대하 36 : 11말씀입니다. 열왕기하에 기록된 유대의 멸망과 역대하에 기록된 멸망에는 조금의 시각 차가 있습니다. 열왕기하에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마지막 멸망할 때 왕이던 시드기야가 어떻게 처참한 꼴로 그가 잘못한 일에 대한 보복을 받는가 하는 것을 목도했다면 역대하 36 : 11 이하에서는 조금 다른 시각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드기야의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며 느부갓네살 왕이 저로 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케 하였으나 저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제사장의 어른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와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대하 36 : 11 - 16).

 

 

 

이미 므낫세 왕 때부터 하나님께서 유다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고 사자들을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지만 그 뒤로 아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호야김 때 이미 일차 포로가 있었고 그 후에 왕조를 걸쳐서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 의해서 왕위에 오릅니다만 자기가 앉아 있는 위치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의 칼을 뽑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립니다. 여기 있는 식으로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고 또 다른 사자들을 아무리 보내도 듣지 않고 왕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경멸과 조롱을 보내다가 급기야 멸망했다 하는 것이 역대하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다 왕조의 멸망은 이것이 처음이거나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생긴 시행착오가 아닙니다. 그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고 충분히 각성할 만한 역사적인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다는 데에 인간의 죄악 된 모습과 지독한 면이 보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와서 말씀을 전하고 회개를 촉구했다는 것은 예레미야 7장에 가면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7 : 1 - 11).

 

 

 

예레미야 선지자는 기원전 626년부터 포로 된 잠시 후까지 사역을 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기록된 예레이먀 7장은 여호야김 왕일 때에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몇 왕 전에 지금 이 글을 쓸 때가 기원전 608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고 일차 포로가 여호야김왕이 왕으로 있던 605년에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약 3년 전에 이 글이 쓰여졌습니다. 일차 포로가 있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그때 잡혀 갑니다.

 

 

 

20년도 채 안 되서 망하기까지 여호야긴이라는 왕도 있었고 시드기야왕까지 몇 왕을 지나면서 그 꼴들을 보면서도 시드기야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어리석음입니다. 1절에서 11절까지는 의미심장한 경고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모였다가 나가는 사람은 생명과 거룩을 받고 나가야 되고 나가면 경건한 신자로서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성전에 와서 예배와 제사는 드리면서 나가서 하는 짓은 온갖 못된 일을 합니다. 성전이 거룩한 자의 집단이 아니라 도둑놈들의 집단입니다. ‘너희는 이 전이 도둑의 굴혈로 보이느냐’ 그렇게 꾸짖습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렘 7 : 12 - 15).

 

 

 

이미 경고를 합니다. 여호야김 왕 때 그러니까 기원전 608년에 이 경고가 있었고 실제적인 행사가 605년에 일어나서 그때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위되어 여호야김 왕을 비롯한 모든 왕들이 일차로 잡혀가고 그 뒤를 이어서 여호야긴이 왕이 되고 몇 대를 걸쳐서 바벨론 왕의 입김 속에서 놀아 나다가 결국은 그 왕이 눈이 뽑혀서 잡혀가고, 성전이 몽땅 파괴되고 그 나라가 온통 망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제시하느냐 하면 내가 최초로 내 이름을 두었던 실로에 내가 행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내가 하는 경고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가능하면 하나님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본뜻이 아닙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고 우리에게 그 심판이 임하기 전에 이미 내렸던 심판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실로에 있었던 사건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40년 간 광야생활을 하고 기원전 1500년 경에서 1400년 경 사이에 출애굽을 합니다. 또 가나안에 들어오는 것이 기원전 1400년 경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그 민족이 시작되는 것이 기원전 1400년 경 전후인데 1400년 경이라고 쳤을 때 왕조가 성립되는 것은 초대 왕 사울이 왕이 될 때까지 기원전 1050년입니다.

 

 

 

그러니까 들어와서 1050년까지는 이스라엘을 누가 다스리냐 하면 제사장과 사사가 다스립니다. 사사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법관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 사법권을 가진 사람이 일종의 행정관으로서도 지도자였고 종교적 지도자인 제사장이 또 많은 부분을 지도자로서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지 않고 지난 번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저주의 약속과 축복의 약속 사이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늘 저주의 말씀 쪽에 서곤 했습니다. 그래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곤 하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만 후기로 가면 사사들마저도 타락하고 맙니다.

 

 

 

그 중에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이때, 사무엘 다음 사울 왕으로 이어집니다. 그전 사사가 엘리입니다. 엘리라는 사사는 부패한 사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무엘상 4 : 1 말씀부터 봅니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장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연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바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 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육 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 4 : 1 - 11).

 

 

 

가나안 땅에 있었던 원주민들과 이스라엘 간의 대적 관계가 자주 일어나는데 가장 큰 대적이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이라는 이름은 여러분이 익숙지 않겠지만 팔레스타인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PLO 해방기구의 아라파트를 의장으로 한 그의 민족이 바로 블레셋의 후예입니다. 그 땅 이름을 팔레스타인이라고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는 가장 큰 적대관계가 있었고 그때도 전쟁 중인데 이 전쟁이 일어나는 것, 즉 블레셋이 강성해져서 이스라엘을 못살게 구는 것은 언제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입니다.

 

 

 

이 전쟁에서 4000명이 죽자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해 낸 신인데 우리가 질 리가 있느냐,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무언가 잘못한 탓이다”라고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성막 이동하면서 만들었던 하나님의 성막의 법궤를 이 땅에 들여와서는 실로라는 땅에다 그 성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까지 성전을 짓기 전입니다.

 

 

 

실로에 텐트로 쳐 놓은 성막 속의 법궤를 이 전쟁터에 가지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앞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래 가지고 이번에는 삼만 명이 죽습니다. 법궤도 빼앗깁니다. 이 법궤를 모시고 있던 사사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망나니였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오는, 제사 드리려고 오는 성도의 제물을 제사도 드리기 전에 빼앗아 먹거나 또는 제사 드리러 오는 부녀자들을 희롱하는 죄를 범한 자들로 악명이 높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 엘리가 그 두 아들을 꾸짖지 않곤 했습니다. 이때 나이 98세에 이른 엘리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크게 꾸중을 받아서 저주를 받습니다. 이 날 법궤를 빼앗기던 날, 두 아들은 죽고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자리에서 엘리는 몸이 비대하고 눈이 어두워지고 놀래서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며느리는 그 날 애를 낳다가 죽고 애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명명하고 죽습니다. 이가봇이라는 뜻은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 저주가 이스라엘 백성과 그 가문에 일어나는 것을 생생히 보여 주는 사건이 예레미야 7장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내가 실로에 행한 일을 기억하라는 내용의 골자입니다. 이 경험을 이스라엘 백성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사건입니다.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법궤를 빼앗아 가도록 놓아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똑같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버려서 성전이 훼파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안에 있었던 모든 보물들을 빼앗기고 거기에 영광스럽게 칠하여 놓았던 금 같은 것을 다 빼앗기고 있는데도 이스라엘 왕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왕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없다, 정치적, 군사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부지런히 정치, 경제, 국방 외교에 전념합니다. 결국 망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는 또 뒤에 가서 되풀이됩니다.

 

 

 

지금 여기 실로에서 있었던 이 일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났던 이 일에 비하면 그 앞에 오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사건이 경험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것이 유익한 경험으로 남지 않고 유다가 멸망하고 그 후에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페르시야 초대 왕인 고레스는 정책을 어떻게 쓰느냐 하면 각 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유대 포로들이 돌아가도록 고레스 칙령을 반포합니다. 기원전 538년부터 516년에 걸쳐서 약 22년동안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차 귀환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원전 536년에 맨 처음에 귀환한 포로들이 먼저 와서 한 일이 무어냐 하면 성전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파괴된 성전을 쌓기 시작해서 성전의 기초를 완성합니다. 그러나 주변 국가들의 반대로 모함에 걸려서 방해를 받아 계속 연기되다가 기원전 522년에 이르러 페르시아 왕 다리오에 의하여 다시 허가를 받고 기원전 520년에 성전을 재건합니다. 성전이 완성됩니다. 그래 놓고 약 100년이 흘러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상태가 어떠냐 하는 것이 말라기서에 나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床)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 : 6 - 10).

 

 

 

성전을 재건하고 100년도 흐르기 전, 그때가 기원전 430년 경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상태가 이 꼴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 마저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성의없는 제사를 그저 하나의 요식적인 행위로 치르는 상태로까지 전락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역사적인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하나의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써 자기네들은 만사형통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따르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줄 때 약속했던 “거기 사는 족속 같이 하지 말라. 내 말을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종교적 행위”만 유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종교적 행위를 방법론으로 써 먹습니다. 그래서 실패했던 것이 아까 이야기했던 실로 사건입니다.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던 사건이고 이제 유다 왕조가 멸망했던 사건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 하나도 도와주지 않은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고 완전히 정치적, 군사적으로 몰두해 버렸다가 멸망한 것이 유다 왕국의 멸망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이제 정신을 차리고 종교적인 회개와 각성이 일어나서 성전을 재건하고 종교적인 개혁이 일어났습니다만 그것도 나중에는 유야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세상의 욕심을 하나도 채워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나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제사예배가 진심을 잊어 버리게 되고 정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세상을 사는 방법에 대해서 더 많은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능한 한 돌이키게 하고 벌받지 않게 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 시간을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시간으로 쓰고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는 쪽에다 더 많이 투자하고 욕심내어 달려가는 시간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한탄하셨습니까? 10절에 있는 말씀같이 너희가 내 단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일이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납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벨론 후에 일어난 나라가 페르시아이고 그 뒤를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이스가 세계를 제패합니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 휘하에 힘 있었던 네 장군이 헬라가 평정했던 소아시아와 이집트와 그리스의 전 지역을 넷으로 등분해서 통치하게 되는데 그 중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통치했던 그 왕조의 통치자 중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는 장군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렉산더 뒤를 이은 네 통치자들, 네 나라를 분할한 이 왕국 간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고 조그만 약소국가인 이스라엘은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면서 목숨을 연명합니다.

 

 

 

그러다 시리아쪽을 지배했던 곳에 붙었던 때도 있고 이집트쪽의 권세를 잡았던 곳에 붙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나중에 화근이 되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던 안티오커스에 의하여 나중에 이스라엘이 침략을 당하는데 이때 아주 수치스러운 일을 당합니다. 이 민족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서 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에 못된 짓을 합니다.

 

 

 

성전을 다 없애지는 않습니다만 훼방을 놓고 그 성전 안에다 자기의 두상을 만들어 걸어 놓고 거기에다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피로 지내던 제사를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 피로 지내도록 강요합니다. 그래서 가증한 것들, 미운 물건들이 성전 안에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고 합니다. 안티오커스는 그의 이름이고 에피파네스는 ‘신의 현현’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신이라는 말입니다. 기원전 167년에 일어난 일인데 이 장군이 죽고 이스라엘이 다시 국권을 회복한 다음 그때 일이 치욕스럽기 때문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미워해서 안티오커스 에피마네스라고 부릅니다. 에피파네스와 에피마네스는 상당히 뜻의 차이를 가집니다. 에피파네스는 신의 현현이라는 뜻인데 에피마네스는 미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미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이 미친 자들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와서 성전을 훼파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모욕을 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했던 백성이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매를 들을 수밖에 없어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에피파네스를 욕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욕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죄악된 성품을 원망했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넓게 인간 모두의 본성이요 현실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인간들의 죄성의 그 지독스러운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이것보다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런 의미에서 다른 종교적인 교훈이나 종교적인 멋진 말을 기대하시면 구약에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십니다. 그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인간과 역사에 대하여 정확한 책은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이것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가시면 구약적으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통털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 : 3 - 7).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묻습니다. 세상이 뭐 망한다구, 언제 망하느냐 몇만 년 전부터 인류가 있어 온 이래로 세상이 망한 적이 어디 있느냐. 물론 전쟁도 있고 기근도 있고 태풍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망하지 않았다. 영원히 갈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노아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에, 실로에 행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알고 있고 유다의 멸망을 알고 있고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성전의 모독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아니 더 넓게 역사를 보십시오. 나폴레옹의 죽음, 징기스칸의 죽음, 악하게 살았던 나라의 종말을 압니다. 바벨론과 앗시리아의 멸망을 보십시오. 그리스 로마의 끝을 보았습니다. 대일본제국의 종말을 눈으로 보았고 공산주의의 종말을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 : 8 - 9).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를 끝맺을 날을 준비하시고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멸망치 않기 위하여 중간중간 우리로 보고 깨달을 만한 사건들을 준비하여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므로 오히려 하나님을 비웃고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자비하심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이것을 앞에 있었던 말씀과 같이 일부러 고의로 잊으려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죄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가능하면 하나님의 경고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오실 때 잘한다 잘한다 하는 설교를 기대하고 옵니다. 여러분들이 잘못이 지적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잘못한 것을 목사가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이중적입니다. 세상에 나가면 세상적으로 살고 교회에 오면 가장 잘 신앙생활하는 신앙인 같은 얼굴을 해서 서로 짜고 살자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진면목을 들키면 화를 냅니다. 어떡하자는 말입니까? 그래 놓고 내놓고 그 길로 가버립니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자 주님을 쫓아 버렸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죄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달라야 됩니다. 여러분은 거듭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요, 말씀이 마음에 이해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일어나는 거스리려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짧은 인생입니다. 이 짧은 인생, 이것을 잘 살기 위하여 영혼을 팔아먹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깨우치시는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인간은 참 어리석어서 하루를 위하여 1년을 팔아 먹을 수 있는 족속들입니다. 60평생을 잘난 척 하려고 영혼을 팔아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단순히 어리석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멸시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벌리신 사랑의 품을 외면하는,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인 것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남의 것을 훔치고 십일조를 안 내고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사랑과 긍휼을 외면하며 그것을 악용하는 가장 악질적인 것입니다.

 

 

 

이 죄에 여러분이 빠지지 마시고 이 어리석음을 고집 피우지 마시기를,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아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시고 십자가 앞에 여러분의 무릎을 꿇리시고 힘을 다하여 목숨을 걸고 신자로서의 생활을 다시 한번 결심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기록된 성경의 교훈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유익한 밑거름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로마서 16강(롬2:3-8절)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 2:3-8)

 

 

 

로마서 1:18부터 지금 읽은 본문까지 계속된 내용을 간추리면 이제 우리에게 분명해진 몇 가지 결과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상,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고 언젠가는 분명히 있을 전우주적인 종말,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해서 이제 주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궁극적으로 무엇이 다른가를 분간해 내고 믿는 자 자신이 내가 믿고 무엇이 달라졌는가, 또 불신자들은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에서 저들이 우리와 다른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이것은 이 본문 중 4절과 5절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입니다.

 

 

 

여기 있는 바와 같이 회개한 자와 회개치 않은 자, 이렇게 나눌 수 있고 회개치 않은 자를 다른 말로 바꿔서 고집을 부리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신자 된 것이 도대체 그렇지 않은 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을 여기 있는 단어들을 가지고 추적해 보면 뜻밖에 신자란 무엇인가? 불신자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아주 좋은 정의와 분별을 주고 있음을 만나게 됩니다. 이 회개라는 말의 원래 일차적 의미는 ‘다시 생각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본인의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1장에 가시면 이 문제에 대해 대표적인 사상을 전달하는 실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 21:28-32)

 

 

 

뉘우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입니다. 첫째는 가겠다고 대답해 놓고 안 갔고 둘째는 안가겠다고 하고 갔습니다. 안 가겠다고 하는 데는 자기 나름대로 무슨 뜻이 있었겠죠. 그 시간에 놀아야 된다든가 다른 일을 해야 된다든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고 내 생각보다 아버지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판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것을 뒤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이 와서 구원의 도를 전할 때, 세리와 창기들은 믿었지만 너희는 종시 뉘우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뉘우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생각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무엇과 연결되느냐 하면 마음을 바꾼다와 연결이 됩니다.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본문식으로나 이 예문과 연결해서 이야기하기 좋게 말한다면 돌이켜서 자시의 고집을 꺾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란 진리를 알게 됐고 그 알게 된 것으로 본인의 생각과 고집을 꺾은 사람들입니다. 대단한 지혜와 대단한 분별력을 지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으로 가시면 불신자들의 마음 상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고의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을 받지 않고 그 받지 않은 여러 가지 마음 상태 중의 하나가 이것이 미련해 보이기 때문이라고 그럽니다. 미련해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일반적으로 자연인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죄인된 인류들을 놓고 볼 때 대표적인 속성은 자기의 생각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종 무슨 일을 해 보다가 잘 안되면 “비켜봐”해 가지고 꼭 자기가 해 봐야 “아, 안돼는 구나”하고 물러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무슨 열쇠를 여는데 열쇠가 안 열리면 “비켜봐” 그리고 늘어선 열 사람이 다 한 번씩 해보고 나야, “안되는구나” 그러지 남이 안되는 것보고 정말 안되는구나 하고 물러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해 봐야 압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하여 무시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리냐, 무엇이 옳으냐를 안다고 할지라도 결정하지 않습니다. 훨씬 고집스럽습니다.

 

 

 

무지하고 미련하며 고집스럽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도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자기가 요구하는 것과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는데 혹 생각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불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공평하고 변덕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는 안 찾아오시고 필요없을 땐 찾아오시고 악당들한텐 잘 되게 내버려 두시고 여태껏 악당으로 살다가 어쩌다 한번 착하게 살려고 그러면 어려운 일을 주시는 분, 도대체 일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거나 공정하지 않은신 분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마음이 있습니다.

 

 

 

흔히 이렇게 나타납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실까 신자라 할지라도 종종 느끼는 의문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실까? 가장 신앙적이고 우스운 질문 중의 하나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 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십자가로 개 패듯 로마놈들을 다 패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지, 그러면 훨씬 더 잘 믿었을 텐데 죽고 나서 믿으라 하니 난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아마 예수님이 그 십자가로 로마인들을 다 두들겨 패고 했으면 또 이런 기독교는 싫다 틀림없이 그랬을 텐데 지금은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핑계를 그렇게 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일을 그렇게 하실까 하는 말 속에는 적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고의이고 의도적인 신성모독입니다. 인간이 갖는, 인류라는 전체 인간이 갖는 가장 보편적인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와 신자의 싸움 혹은 신자가 된 다음에도 신앙이 굳어지는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문제가 성경에 관한 싸움입니다.

 

 

 

성경에 관한 싸움인데 조금 더 그것을 넓혀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느냐, 천국이 있냐 없냐, 성경 말씀이 맞느냐 안 맞느냐, 그 말씀대로 살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것들이 예수를 믿는 문제에서만 걸리는 것이 아니고 믿고 난 다음에 더 깊은 신앙으로 가는데 언제나 거침돌이 되는 하나의 문젯거리입니다. 신앙을 결심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말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계시면 증거해 보라는 것입니다. 지옥이 어디 있냐, 천국이 어디있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의 초점은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지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설명과 논증이 없습니다. 성경을 그런 시각에서 보면 다 실족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해하기 좋게 예를 듭시다. 여러분이 뭔가 분명치 않은 병에 걸려서 병원에 다녀오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병원에 가면 이거라 저거라 그러고 저 병원에 가면 저거라 그러는 어려운 경우를 당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은 신경염이라는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경염이라는 것을 알아 내는데 1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유명한 의사들에게만 찾아 갔는데 어떤 분은 디스크다, 어떤 분은 중풍이다, 어떤 분은 뇌에 손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나중에 알아 낸 것이 신경에도 염증이 생긴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신경염이라는 병으로 병상생활을 계속 하시다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척추 신경에 장애를 받는 마비라는 진단을 내린 분이 다 의학계에서는 내노라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신경염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거기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의사들을 찾아갔고 이런 진찰들을 받을 때 이 사람은 맞은 것 같고 이 의사는 아닌 것 같다 하는 판단을 여러분들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무엇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여러분 생각에 이 의사는 신뢰할 만하다, 이 의사는 신뢰할 수 없다 할 때 자격증 봅시다, 면허증 봅시다, 이렇게 말합니까? 무엇으로 압니까? 그 사람이 집어내는 증상들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봅니다. 이 증세를 정확히 맞추어서 결론을 내면 이 사람은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의와 양의의 필요성을 저는 다 인정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이야기할 때 한의사를 찾아갔을 때 신뢰감을 가지기가 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한의에게 가면 진찰이 애매합니다. 몸이 허해서 그래요. 이것은 굉장히 애매하단 말입니다. 정확한 증상에 대한 판단이 없이 그냥 애매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언젠가 한 번 하도 피곤해서 간염이 아닌가 싶어서 어느 병원에 찾아갔습니다. 의사와 개인적인 약속을 하고 만났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목사님.” “무척 피곤합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저도 그렇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왔습니다. 누구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참고 살라는 것이랑 똑같습니다. 그것은 말이 안 맞는 것이란 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지옥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그것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답은 없습니다. 선악과를 왜 만들었느냐에 대한 답도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에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 입니다. 그리고 모두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인간이 나를 배반하고 생명과 복의 근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때서부터 인간에게 부패가 있고 죄가 있고 타락이 있고 모든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 고통은 이것이것이다. 근친상간이 있으며 형제끼리 죽이는 일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마음을 편히 먹고 살지 못했습니다. 누구나 죽고 만다.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못하며 아무리 하고 싶은 것을 해도 그것으로 마음을 위로받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왜냐하면 그 죄를 돈이나 건강이나 세상의 어떤 조건으로도 메꿀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무엇을 제시하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걸린 병이 무어며 그 병이 왜 생겼으며 그 병이 죽을병이라는 것이 확실한데 그 증거가 무어냐가 너무나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죄악된 현상에 대한 정확한 분석, 정확한 지적 이것이 성경입니다.

 

 

 

그 유명한 미우라 아야코라는 사람이 자서전 식으로 쓴「빛은 여기에 길은 여기에」라는 3부작 책이 있습니다. 이 분이 예수를 믿게 되는 동기 중의 하나가 본인이 기독교에 대하여, 진리와 절대에 대하여 굉장히 혼란상태에 있다가 죽으려고 하고 허무주의에 휩싸이고 염세주의에 빠져 있다가 어느 날 한 번 성경을 보다가 우연히 본 것이 전도서였습니다. 전도서에 무어라고 나와 있느냐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구절을 만나는 겁니다.

 

 

 

자기는 생각하기를 성경이라는 책은 무척 윤리적, 도덕적으로 고상한 사상을 전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거기에 자기가 품고 있는, 더 이상 절망할 수 없고 더 이상 허무할 수 없는 사람이 가졌던 생각보다 더 허무한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아니 성경이 이런 책이란 말인가 기독교인들이 철저히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얼싸 좋다 그러고 서로 부추키면서 사는, 약간 현실 도피적인 집단일줄 알았더니 이렇게 현실을 정확히 지적하는 내용들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보면 해 아래서 하는 수고가 모두 헛되도다 지혜로운 것이 무엇이 유익하냐 잘 살고 승리하고 명예를 얻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단 말이냐. 미련하게 살고 실패하고 절망한 사람의 죽음과 성공한 사람의 죽음이 무엇이 다르다는 말이냐 하는 데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성경이 기록된 초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발견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야 이것이 인간이다, 맞다, 우린 정말 이꼴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해야 되는데 어떤 꼴이 되어있느냐 하면 결핵 4기인 자가 의사한테 찾아와서 “이상하게 통증이 있고 몸이 나른한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 폐가 이렇게 엉망이 되어서 얼마 못 살게 되었습니다. 요양을 하시고 영양식을 하시고 이런저런 약을 먹으십시오. 그래야 치료가 됩니다.” 하는데 “아니 내가 꼭 그래야 된단 말입니까?” “당신 오후만 되면 미열이 있죠.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힘이 없죠.”, “맞습니다.”, “당신 이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환자가 하는 소리가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은 매일 피를 흘리고 누워서 꼼짝도 못하는데 어저께도 살아있고 오늘 나올 때도 살아 있었어요. 언제 죽는단 말이에요. 공연히 돈 벌려고 나에게 거짓말하는 거죠.” 그리고 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는 것만 남은 것입니다.

 

 

 

이 싸움입니다.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희는 이런 중병에 걸렸다. 너희는 돌아와 고침받고 나에게 구원 얻지 못하면 너희는 죽고 만다. 죽는 것이란 우리가 말하는 이 세상에서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가고 만다. 영원한 형벌 속에 간다. 돌아오라. 돌아와라 합니다. 그런데도 악당으로 살고 있는 저 사람들도 아직 잘 살고, 잘 먹고 있는데, 허리가 48인치인데 아직도 살고 있는데 내가 왜 믿어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과 방불합니다. 이것이 지금 성경이 이야기하는 초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성경 속에 있는 기록에 가장 중요한 초점과 방식에 대하여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결국 이 말에 대하여 귀를 가리우는 자란 말입니다. 고집을 부리고 이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고집을 부리고 성경을 일단 안 들으려고 합니다. 결국 조금 전의 환자와 같이 다들 그러고 잘 살고 있는데 왜 나만요 하고 거부하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데 여기 고집이라는 말은 그 굳어진 마음이란 뜻입니다. 에베소서 4장으로 가 보십시다. 여기 아주 적절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7-19).

 

 

 

불신자 일반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져서 무지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말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게다가 혹 깨닫는 마음이 있어도, 무엇이 옳은지를 알아도 마음이 굳어집니다. 옳은 것을 알아도 마음을 굳게 하고 거스려서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신앙생활 속에서 신자라 하더라도 병이 무어냐 하면 왜 나만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 병입니다.

 

 

 

아니 물론 내가 그때 잘못했지. 그러나 당신 같으면 그때 그럴 수 있겠어, 이것이 우리가 하는 일반적인 변명 아닙니까? 당신 그 일을 참을 수 있겠어? 자식이 매를 맞고 있는데 옳고 그런 것은 그만두고 자식이 맞는 것 보고 가만히 있을 부모가 어디 있어? 말이 안 됩니다.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죠. 죽을 짓을 했으면 죽어야 되고 그러나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라면 그러면 참을 수 있겠어?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모두가 안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옳고 그른 것을 무시하려는 배짱이 인간 모두에게 있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증거가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하루를 살면서도 이 말을 제일 많이 하죠. 아니 그것을 어떻게 참어. 그걸 보고 가만 있어. 아니 그럼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런 말들을 다 옳고 그른 것을 떠나 죄스러운 일을  할 때 많은 동조자의 편을 들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굳어진다는 말이 고집을 부립니다. 정확히 말해서 예를 들면 태양빛이 작렬할 때 그 밑에 버터를 갖다 놓으면 녹습니다. 그러나 거기 진흙을 뭉쳐서 같다 놓으면 녹지 않고 굳어집니다. 진흙이 햇볕 아래서 굳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실이 무엇인가, 무엇이 진리인가를 증거하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가가 나타나면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낸 인간의 결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녹고 회개하고 한 것이 아니라 그를 몰아 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지지고 볶고 사는 인생들이 사는 어떤 마을에 아주 좋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도 가정을 잘 돌보고 부인도 정숙하고 아주 모범적인 가정이 이사를 왔습니다. 그러자 마을 전체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남편들은 하나 같이 아내를 꾸짖을 때마다 누구네 집 아내를 보라고 하고 부인들은 전부 남편한테 바락바락 악을 쓸 때마다 그 집 남편을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모든 마을이 회개하고 좋아진 것이 아니라 마을 회의를 열어서 그 부부를 쫓아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누가 정당하게 검소하게 사는 사람을 내버려 둡니까? 안 내버려둡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에 내버려둔 고질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이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무엇이냐 그럴 때 불신자는 끊임없이 내가 틀린 것이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 책임이야.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죄를 만들었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환경을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요 나에게 너무나 억울한 일을 많이 베풀었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신자는 무엇이 다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이렇게 된 것은 전부 제 책임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입니다. 무엇에 놀라게 되느냐 하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어떻게 그렇게 사랑하십니까? 이 결론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그러실 수 있습니까? 인간 중에 우리가 괜찮은 인간을 만나도 깜짝깜짝 놀라는데 비교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인간, 그리고 노골적으로 ‘야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를 놔두는 하나님, 그리고 그 사람마저 가능하면 회개케 하여 구원을 얻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이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 햇볕을 주시는 하나님, 악당이 잘 사시는 것을 보면 좀 약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얘야, 미운 자식에게 떡 하나 더 준단다. 나중에 어차피 지옥갈 것 같은데 살아있을 동안이라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께 항복하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마땅히 하나님, 제가 항복합니다. 하나님은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게 합당하십니다. 그 결론에 동의하십니까? 여기가 아멘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떤 악한 일과 어떤 더러운 일이 세상에 생겨도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이 저것을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죄를 못 보시는 하나님이 참고 계시는데 내가 왜 먼저 정리를 하느냐는, 이것이 신자의 변화입니다. 세상의 꼴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신자가 빼앗겨서는 안 되는 시각이요 신자 된 자랑이요 신자 된 상입니다. 이 복과 이 시각과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하여 감사하는, 그래서 동참하여 인내하는,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권합니다.

 

 

 

 

 

로마서 17강(롬2:6-11절) 구원의 필요성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롬 2: 6 - 11)

 

 


우리가 읽은 본문인 로마서 2장 6절 이하의 말씀은 하나의 논쟁거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6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그 말씀 때문에 결국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냐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구절이 되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면 영생을 얻고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행하시리라. 이것이 6절에서 11절까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고 그 기준대로 심판을 하시겠다고 말을 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믿는 자답게 선하게 사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요 이유가 된다는 증거 구절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집고 넘어갈 것은 이 로마서를 시작할 때 로마서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 맨 처음에, 물론 복음을 선언합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선언하고 설명할 때 가장 대표적인 것,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일단 해놓고 그 다음에, 왜 복음이 필요하냐로 넘어 왔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복음이 무엇이냐고 할 때 오히려 사상과 교훈과 내용이 아니라 구원하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구원이다. 복음이 무어냐? 복음은 그 아들에 관한 것이데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신 것, 그것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를 나중에 구체적으로 로마서에서 설명하겠지만 구원을 설명한 다음에 논리적으로 맨 처음 따지고 들어가야 되는 것이 구원이 왜 필요하냐에 대해서입니다. 구원이 왜 필요하냐를 납득시키지 않고서는 구원에 관한 설명은 사실상 그 무게를 잃게 됩니다. 구원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왜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가? 구원을 받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증거가 뭐냐, 우리가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느냐, 너희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 것을 보아라, 해서 로마서 1:18~ 3:20 에 이르기까지 구원을 어떻게 받느냐가 아니라 도대체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 우리가 왜 벌을 받아야 되느냐, 하나님의 벌을 우리가 왜 받아야 되느냐,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이 심판을 우리가 피할 수 없느니라가 주된 내용이고 그러면 심판의 기준이 무어냐? 악하게 사는 것이라는 이것이 우리가 살펴보려는 내용입니다. 도덕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것이 죄며 하나님을 모르고 거역한 것이 죄이며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이 심판인데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형태가 무어냐 하면 악행으로 나타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함과 선함을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영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되고 결국 모든 심판은 죄 때문에 받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며 거스려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인데 그 나타나는 모습은 언제나 악행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이며 그 심판을 면할 방법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논쟁 속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아느냐, 우리가 저지르는 악행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이런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집고 넘어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각자가 악하게 살았느냐 선하게 살았느냐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것은 개인적인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차별없는 그리고 철저하게 개인적인 심판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차원에서는 민족적 문제와 인종적 문제, 식자와 무식자의 차별이 없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11절에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하는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이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심판을 면하지 못하고 백인이라는 이름으로 이 심판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이런 후렴이 있는 것을 보십시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롬 2:9).

 

 

 

유대인은 자신을 선민이라 생각하고 나머지 모든 이방인을 대표로 해서 등장한 헬라인은 약속에서 제외된 족속으로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유대인이냐, 헬라인이냐의 구별이 없고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가 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의 구별이 없이 ‘유대인에게 또한 헬라인에게’ 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선민과 이방인으로 나누지 않으며 백인과 유색인종으로 나누지 않고 배운 자와 배우지 아니한 자로 나누지 않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누지 않고 오직 이 두 부류, 선한 자와 악한 자로 나눕니다. 인간은 그런데 다 어디에 속했다는 것입니까? 악한 자에게 속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심판을 받기에 싸다,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여기 로마서 1:18~3:20 에 이르는 동안의 주제요 중요한 내용의 흐름인 것입니다.

 

 

 

앞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문제란 악행을 행했느냐, 선행을 행했느냐 하는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의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훈적이고 사상적이고 개념적인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한 하나의 형태를 이야기합니다. 즉 이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해 보아서 선행을 행하는 자와 악행을 행하는 자, 이 구별을 원리적 차원에서 추적해 보면 성경이 설명하고 싶은 핵심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우선 성경이 나누는 대로 이 두 그룹을 나누어 보면, 먼저 따지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이 두 그룹에 속한 사람들 중 한 그룹은 선을 행하는 자요 다른 한 그룹은 악을 행하는 자인데 선행과 악행의 구별이 나타난 형태로 구별되기 이전에 선을 행하는 자의 선을 행하는 이유, 악을 행하는 자의 악을 행하는 이유가 이렇게 진단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그리고 저들의 삶의 자세, 방향 원리가 무엇인가가 먼저 설명되고 필연적인 결과로써 선을 행하는 자와 악을 행하는 자로서 나타나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을 보십시다. 7절에 보시는 바와 같이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을 행한다 이렇게만 생각하지 마시고 이 선이 도덕적, 윤리적 차원이 아니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속에 있습니다. 영광과 존귀, 이것만으로는 분명치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영광을 구하고 그래서 여러분들도 여러분 자녀들을 좋은 학교 보내려고 기를 쓰는 것입니다. 시집장가 보낼 때 그렇게 좋은 가문과 맺으려고 하는 영광과 존귀, 그런 차원이 아니고 뒤에 있는 단어, 썩지 아니함 속에 포함된 것과 같이 영광과 존귀는 그런 의미에서 영생, 절대적인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 하는 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6장으로 이미 한 번 본 바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6:19 에 가면 이 썩지 아니함에 대한 대표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우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19-20)

 

 

 

하늘에 쌓는 보물과 땅에 쌓는 보물,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같은 돈을 교회에다 내면 하늘에다 쌓는 것이고, 나를 위해 쓰면 땅에 쌓는다는 그런 개념은 아닙니다. 그래서 무슨 건축 헌금을 강요하거나 교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 때, ‘보물을 쌓아 두십시오. 그러니까 헌금을 하십시오.’이렇게 요구를 하는 것은 이 내용이 갖는 뜻을 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헌금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내는 하나의 신앙의 행위이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한 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결국 세상에 있는 가치를 주를 위해서 쓴다는 개념이 아니고 가치 자체가 하늘에 속한 것이냐, 땅에 속한 것이냐로 나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속하는 것들, 땅의 가치에 속하는 것들-돈, 권세, 건강, 지식 이런 것- 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서 쓰여지는 가치, 보물은 어린 소자에게 물 한 그릇 주는 것,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멸시와 핍박과 경멸을 당하는 것, 주를 뒤따르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 그래서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는 것, 이것이 하늘 나라의 보물입니다.

 

 

 

보물 다이아몬드를 헌금하면 쌓는다, 이런 것을 보물이라 그러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인데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보물로 될지 그냥 잘난 척으로 되서 아무것도 안 될지는 본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기도를 많이 한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기도를 밤낮 누구를 못살게 하시고 저를 잘 살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완전히 꽝입니다. 꽝이 아니라 완전히 마이너스 무한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보물이냐 하면 가치관의 문제인데 영원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이 가치는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을 행하는 자들에 대한 묘사,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한다 하는 내용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권위와 요구 앞에 무릎 꿇은 하나님과의 정상화된 관계의 전개된 표현인 것입니다. 여기서 선이란 그런 의미에서 거룩하고 영적인 가치를 말하는 거이지 보통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의 선은 아닙니다.

 

 

 

그 선이 윤리적 도덕성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거룩하고 영적인 선은 윤리성과 도덕성을 내포하고 있게 되어 있어서 신자로서 신앙이 좋은 사람은 도덕성, 윤리성에서도 언제나 합격점 이상을 받게 되는데 그 이상입니다. 오른편 뺨을 맞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왼편 뺨을 내놓은 사람인 것입니다.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농부가 처음 예수를 믿고 오른편, 왼편 싸움 이것을 어떻게 실천해야 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동네가 좀 가물기 시작했는데 비탈진 산은 논농사를 계단식으로 짓게 되어 있는데 자기 논이 위에 있고 이웃집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의 논이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길어 아랫쪽으로 물이 안 내려 가도록 물고를 막아놓고 다음날 아침에 나가보니까 물이 하나도 없더래요. 보니까 아래 논을 가진 안 믿는 논 주인이 물고를 터 놓은 것이더래요. 물을 암만 같다 부어 놓아도 잘 때 물고를 터 놓으면 다 아래 논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남 나가서 물 퍼다 놓을 때 자기는 집에서 놀고 있다가 밤에 자러 들어가면 와서 물고만 트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 다음에 방법을 하나 배웠습니다. 그 다음날 아래 논에 물을 다 채우고 자기 논에 물을 채웠답니다. 그랬더니 이제 물고를 안 트더래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항복을 해서 당신 어쩌면 일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더랍니다. 대단한 실력이죠. 그것이 바로 선행입니다.

 

 

 

내가 위에 물을 채워 놓았는데 아래 사람이 밤마다 와서 물꼬를 트고 가져간 것을 화 안내고, 열심히 내 물만 채우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람 논에 물을 채우고 나서 내 논에 물을 채운, 여기가 신자들의 선행입니다. 거기는 당연히 윤리적, 도덕적 차원의 선행은 포함되고 넘치는 것입니다. 이 선행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선행의 도덕적, 윤리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벗어나서 영적인 것이 어디에서 증명되느냐 하면 참고 선을 행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삶의 자세가 하나님과 화목되고 하나님안에서 그의 삶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함으로써 그는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고 영원을 추구하는 자로 삽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자꾸 반대되고 충돌되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평탄치 않습니다. 세상이 그를 놔두지 않아요.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그가 정직히 살고 성실히 사는 것을 시기합니다. 환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참고 선을 행한다는 말을 씁니다. 우리말에 빠져 있습니다만 “참고 인내하면서” 라고 해야 그 본문이 제대로 인식됩니다. 참고 있다고 해서 보상이 곧 오지는 않습니다. 그 고난을 참을 뿐만 아니라 그 참는 것을 지속적으로 하며,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의 영원한 싸움, 생명과 진리의 싸움을, 세상이 그를 거스르고 반대하는 것을 참고 인내하면서 그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8절에 악을 행하는 자는 어떤 자들인가?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이 악한 자들의 악행의 가장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왜 당을 짓는다는 것이 악한 자들의 악행의 가장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왜 당을 짓습니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연인- 하나님과 화목되기 전, 중생하기 전 모든 인간- 은 하나님에 대하여 거스르는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옳지 않은 일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옳은 일에 자신을 항복시키지 않고 옳은 일을 거스려서 고집을 부리고 일부러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는 마음으로 자기가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틀린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본인의 양심의 가책을 무마하기 위하여 동료들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동조자를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런 실제적인 예를 들면 여러분이 이해하실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도 잘못했고 나도 잘못한 것이 있는데 생각할수록 괘씸한 것은 나는 10원어치 잘못했는데 상대방은 꼭 1억원어치 잘못하더란 말입니다. 따지면 사실 비슷하게 잘못한 것인데 사람이란 늘 자기 것은 자꾸 깎고 남의 것을 늘 키우는 법입니다.

 

 

 

상대방이 잘못이 크니까 그 이야기를 돌아다니면서 자꾸 합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잠깐 잘못을 했더니 어떻게 나에게 못되게 굴었나,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무마하고 상대방이 잘못한 것을 자꾸 확인해서 복수를 해야겠는데 복수를 하는 것이 틀린 것이요 그것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잘못한 것이 반반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상태로 못하겠으니까 내 편을 만들어서 힘을 키워야 됩니다. 악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래서 동조자를 키울 때는 그 원래 있었던 사건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고 나갑니다.

 

 

 

이 당을 짓는다는 이야기 속에 자기가 틀린 일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기 위하여 동조자를 모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동조자를 불러 모으는 짓을 왜 하게 됩니까? 틀린 줄 알면서 틀린 일을 고집부리려고 할 때 우리는 동조자를 불러 모으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당을 짓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 그러니까 저들의 악행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선악의 기준으로 악행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려 못할 짓을 한 일을, 힘을 내어 의지적으로 거스려서 한 행위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악행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스리는 마음을 갖고 있는 일에 나타난 결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당을 지어서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가시면 이 문제가 아주 잘 확대되어 나타나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2-3)

 

 

 

그때가 언제냐 하면 죽었던 때, 하나님을 몰랐던 때, 중생하기 전의 모든 자연인은 어떤 사람으로 살았느냐 하면 불순종의 아들들을 좇아 살았습니다.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불순종합니다. 불의에 대하여 순종하는데 그것을 무어라 하냐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자기 멋대로라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 결국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악행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행은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요 자기 멋대로 했다는 것은 진리를 좇지 않고 불순종한 진리에, 불순종한 자기 육체에 좇아간 불의를 행한 결과입니다. 진리를 좇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양심과 무엇이 옳은가를 아는 것을 기를 쓰고 반대해서 자기 욕심껏 자기 하고 싶은 대로해서 만들어 낸 것이 악행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가시면 그 악행의 죄목들이 이렇게 열거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여기 있는 것 중에 다른 것들은 죄인 줄 다 아실테니까 별로 문제가 안됩니다만 시기, 분냄, 원수 맺는 것 이것은 굉장히 조심하십시오. 이것은 다 어떤 것들이냐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긁는 것들로 인하여 생기는 것입니다. 남의 마음을 긁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긁어서 생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원수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인, 강도, 도둑질, 이런 것들이 마땅히 죄인 줄 알지만 여기 있는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 이런 것들은 어떤 죄인지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마음에 가진 시기심으로,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그 말로 실수하지 마십시오. 도둑질을 해 간 사람을 화가 나서 칼로 찔러 죽이는 사람은 없지만 말을 고약하게 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쪽이 훨씬 더 큰 죄악의 형태냐 그러면 말을 잘못하는 쪽입니다. 말이란 꼭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의 표정을 어떻게 짓느냐도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쌀쌀맞은 표정, 어떤 경멸의 표정을 짓느냐 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 이상으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그 사람 마음에 칼을 갈게 합니다. 참으로 조심하셔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악행입니다.

 

 

 

이 악행이 왜 생기느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은혜를 입었고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지 못하여서 생기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지 않은 자는 남을 용서하지 못하며 사랑을 입지 못한 자는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떳떳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는 그렇지 못한 자를 자꾸 흉보며 심판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악행은 결국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앞에서 자기의 행위를 돌아보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며 또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권을 자기가 갖고 있고 그 심판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 이것이 악행입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5:21 하반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 : 21)

 

 

 

악행으로 인하여 천국으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악행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중생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악한일밖에 할 줄 아는 재주가 없습니다. 기껏 잘 해도 악한 일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의 선행은 그것이 자기 치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지신 십자가 같은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나를 죽여서 남을 유익하게 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아닙니다. 그 선행은 언제나 자기 치장입니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통 자연인을 놓고 볼 때 선행을 그 보상을 받지 않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수재 의연금을 걷는다든가 국가적 어떤 어려움을 인하여 의연금을 걷을 때 매스미디어가 앞장을 서야 언제나 모금액이 많아집니다. TV로 생중계를 하면 언제나 많은 인원들이 모여 듭니다.

 

 

 

신문지상에 이름이 크게 나야 많은 사람들이 합니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죠? 안 그런 사람도 있던데요. 난 무명으로 냈다 그겁니다. 그 무명은 절대 겸손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고 자기가 없으면 아무 존재도 필요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그는 심판과 상급에 대한 생각이 있을 수 없고 짧은 인생 동안 자기 멋대로 살자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한 것입니다. 우리가 실재로 경험하는 것이고 우리 스스로 저지른 잘못 중의 하나입니다. 그 악한 것은 벌받아 마땅합니다. 나의 유익을 위하여 남을 손해 끼치는 일을 거침없이 하고 있습니다. 남을 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본 모든 본문들은 성경이 어떻게 인간이 벌 받아 마땅한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가 핑계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 자식 하나 잘 되게 하기 위하여 남의 자식을 끌어내리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돈주고 내 자식을 학교에 합격시키면 거기에 정당하게 들어갈 사람을 빼야 우리 아들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우리 자식이 잘 되기 위하여 남과 함께 사는 일에 내 자식을 보낸 적이 없고 남이 가질 자리를 내 자식을 더 준비시켜서 뺏게 하는 것으로밖에 우리는 자식을 위할 줄도 모릅니다.

 

 

 

같이 사는 법을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사는 데 유익이 되기 위하여 양보해야 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못합니다. 신자만이 합니다. 우린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것을 구하는 자이고 저 자연인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일반인들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은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로마서에서 하는 이야기, 인간이란 일반적으로 어떤 존재냐,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냐 하는 말속에 항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에 항복되지 않으면 십자가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믿는 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그 전에 있었던 이야기, 십자가가 없었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진노와 분노 속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였구나, 큰일 날 뻔 했구나가 확인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구원이 하나님의 저주라는 전제하에서 얻어진 것임을 알지 못하면 구원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구원이 그냥 돈 내고 얻은 극장표에 불과하다면 이제 재미있는 영화나 해라 하고는 영화가 재미없으면 전부 발을 구르며 돈 물어내라는 소리밖에 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만나서 물어보면 제일 당황하는 것이 무어냐 하면 여러분들이 확보하고 있는 이 구원이 취소될 수 없는 여러분의 영원한 나라에서의 지위가, 그 이후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복된 특권이요 허락된 운명이요 약속된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값없이 치고 예수 믿었는데도 그 다음에 하나님이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더라. 복권을 해도 당첨이 되는 것이 없고 급한 일이 있어서 택시를 잡으려고 기도를 골백번 해도 잡히지 않더라부터 시작해서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인간이 직면한 참으로 참혹한 운명 앞에서 이제 삶의 길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죽음으로 구원을 얻어 이 은혜의 자리로 들어오게 됐지만 감사할 줄 모르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를 구별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특권들을 누리지 못하고 쓸 데 없는 것을 구하러 다닙니다.

 

 

 

여러분이 감사를 놓치지 마시고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리석은 생각들이 우리 안에 본성으로 있고 옛 성품으로 남아 있는 것을 직시하셔서 참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부름받았고 그 일이 가능한 사람으로, 하나님 자녀로 부름받은 것을 기뻐하시고 신자다운 길을 걷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로마서 18강(롬2:12-16절) 동등한 심판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2-16)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 그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행위대로 심판하신다 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율법을 알고 있었던 사람과 율법을 모르고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제는 조금 더 확대를 하면 구원 문제에 있어서 복음을 들은 사람과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이 합당하냐 하는 문제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 12절 보시면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다고 되어 있는 구절을 보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가 잘못을 한 것이 율법이 기준이냐 혹은 14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본성, 양심을 기준으로 하느냐 하는 차이를 우리 마음에 느끼게 됩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하든, 양심을 기준으로 하든 그가 죄를 범했으면 죽는다 하는 이야기는 무엇을 지켰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율법 전체가 지향하고 있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마음을 갖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하는 것이 그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런 하나님의 관한 모든 것, 거룩한 것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본성적으로 갖고 있는 양심의 소리와 비교해 볼 때 그가 범죄했으면 동일한 심판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성경이 장황하게 하느냐 하면 아까 했던 질문의 확장 부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를 받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문제를 연결해서 풀어 나가면 세종대왕은 구원을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 그런 문제로 걸리게 됩니다. 세종대왕이 구원 얻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우리가 생각할 땐 억울하단 말입니다. 그때는 누가 와서 예수를 전한 것도 아니고 이조시대이고 그 무렵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았는데 모르고 있는 것이 그의 잘못일 수가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어떤 이들은 대답하기를 양심을 기준으로 해서 그가 의롭게 살았으면 구원을 얻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근거 구절로 14절, 15절을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양심과 본성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구절들 로마서 1:18~ 3:20 에 이르는 이 전체 내용의 초점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자리에 있는가를 지적하는 대목입니다. 구원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를 논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구원에 관한 여러 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이 구절이 요구하고 있는 바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가진 자와 율법을 가지지 아니한 자가 둘 다 동등한 심판을 가질 것이냐 하는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동등한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어떤 심판을 받느냐 율법을 가진 자가 받는 심판은 율법 없이 범죄한 자보다는 더 심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졌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어쨌던 좀더 나은 정의와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범죄는 더 크게 취급될 것이고 모르고 범죄한 자들은 그것보다는 덜하게 취급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초점은 이것입니다. 몰랐건 알았건 행한 것이 범죄라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모르고 행한 죄라고 해서 그것을 그냥 묵과할 수는 없는 문제가 아니냐 하는, 여기가 초점입니다. 누가복음 12: 36 입니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눅 12:36- 37).

 

 

 

45절부터 보시겠습니다.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주인의 뜻을 알고 또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 12:45-48).

 

 

 

이것은 공평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알고도 안 한 자는 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못했으면 잘했다고 그럽니다. 알고 틀린 사람은 많이 맞습니다. 그런데 모르고 틀린 사람은 몰랐으니까 봐준다, 모르고 절벽에서 떨어지면 안 죽고 알고 떨어지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지금 오늘 본문이 초점으로 삼고 있는 대목입니다.

 

 

 

유대인의 큰 실수는 바로 이 부분에서 율법을 자기네가 맡았다는 것,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 때문에 자기는 구원 얻은 대상이라고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나 사도 바울의 말씀은 율법을 준 것은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지키라는 것, 주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라는 것이지 그것을 맡은 것만으로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범죄한 사람에게 물어 볼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가 범죄했느냐 안 했느냐 입니다. 그러면 율법 없는 자에게는 무엇이 범죄냐,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범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은 것이 범죄인데 몰라서 억울하지 않느냐 하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죄냐 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더 분명히 주어졌고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최소한의 양심, 도덕이 있어서 자기네가 저지른 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비추어 깨끗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시고자 할 때 인간 중에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변명하고 핑계하고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심판을 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부분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2:2에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갖는 그 철저한 심판, 아무도 핑계댈 수 없는 심판을 여러분이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유대인식의 오해가 여러분에게도 없어야 됩니다. 이방인들은 몰랐다고 핑계를 댈 것이고 유대인들은 우리가 율법을 갖지 않았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은 저 이방인들과 우리를 구별한 것이고 그 구별했다는 것은 우리를 자기의 백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율법을 갖고 있는 것은 구원 얻은 표라고 생각하는 것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브라함을 부르는 사건들로부터 이미 그 깊은 뜻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면서 이렇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이렇게 대단한 약속을 주셨습니다만 그 복은 아브라함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서 아브라함에게만 국한한 약속은 아닙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들이,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로 번성케 하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복주는 그 복은 왜 생겼느냐 하면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는 책임 때문입니다. 너로 인하여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복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왜 복을 받는가를 보고 다른 사람들도 복을 얻게 하려 하시며 아브라함은 그 자신이 복받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한 중개인으로 부름받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을 자신들만 선택됐다는 표로써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하여 알고 지킴으로써 유대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통해 전민족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거룩과 심판을 제대로 전파시키고자 유대인을 부른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자기네는 율법을 받았으니까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고 율법을 행할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다 무엇으로 심판을 받느냐 하면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 행한 대로가 무어냐 하면 지금 유대인을 보거나 이방인을 보거나 양쪽 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과 생명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까지 이르지 못한 모든 것, 행위로 나타난 그들의 악행을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가장 놀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자기네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다른 민족과는 다른 편애를 받은 듯한 생각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누구를 심판한다고 그러면 지금 유대인들이 우리만은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듯 우리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닌 우리들이 심판받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죄성입니다.

 

 

 

우리가 승리의 신, 행운의 신에게 빕니다. 도박을 할 때는 행운의 신에게 빌고 시합을 하거나 전쟁을 할 때는 승리의 신에게 빕니다. 승리의 신이 남자입니까? 여자입니까? 승리의 신은 보통 기독교적인 것 말고 승리의 여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행운의 신도 여자입니다. 인간들이 왜 승리의 신과 행운의 신을 여성화했겠습니까?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신과 행운의 신을 여성화하는 데는 그 승리와 행운을 주관하는 신이 힘을 가졌지만 공평치 않고 편벽된다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승리의 여신과 행운의 여신이 편벽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서 핑계를 신에게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라스베가스에 가면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헌금할 것을 전부 가지고 가서 이것이 당첨돼야 교회도 짓고 큰 일을 할텐데 액수가 너무 적어서 슬롯 머신에 넣었는데 다 털렸습니다. 이제 전화 걸 마지막 25센트 짜리 코인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돌아가려고 그러는데 천사가 나타나더니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그 마지막 코인을 넣어라. 너에게 백만 배의 행운을 주겠다.” 그래서 25센트 짜리 코인을 넣고 했더니 꽝이예요.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돌아보더니 천사가 째려보면서 “뭐하고 있어 빨리 가지 않고.” 이러더라는 것입니다. 라스베가스 가면 유명한 일화인데 대부분 못 듣고 오는 이유는 영어가 짧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신이란 결국 인간의 소원을 끝까지 외면하는 존재라는 인간의 본성적인 신에 대한 거부감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제가 이야기한 이 대목은 기억 안하고 앞에 있는 이야기만 돌아가서 하시더라구요. 이 뒷부분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막연하게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끔가다 그 존재를 상상할 때도 신은 언제나 우리를 골리는 자, 우리의 뜻을 외면하는 자, 우리가 가장 진지하고 필사적일 때 우리를 노리개로 삼고 희롱하는 존재, 이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것이 로마서 1:18~ 3:20 에 이르는 동안의 사도 바울의 철저한 논증입니다. 이것이 왜 필요하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가 필요한지,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속는 것은 성경이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금상첨화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이미 우리가 금상을 갖고 있는데 거기에 첨화하는 꽃을 얹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예수를 믿는 유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럭저럭은 살고 있는데 월수입 100만원인데 십일조를 내면 그것이 200만원을 보장하는, 이런 식의 개념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구원을 생각하고 기독교 신앙을 요구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뜻밖에도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앞세웁니다. 우리가 로마서 1:16에서 복음에 관한 정의를 이렇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해놓고서 당장 그 다음에 무엇으로 가느냐 하면 우리의 예상한 바와 같이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을 믿으면 이러저러한 복이 있다가 아니라 왜 복음이 필요한가? 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되느냐부터 따집니다. 구원, 이 구원을 얻으면, 이것만 하신다면 이러 저러한 좋은 일이 생깁니다가 아닙니다. 왜 이것이 필요하냐부터 말합니다. 복음의 내용의 절반은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갖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베풀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큰 일 날뻔 했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배운 자나 배우지 못한 자나 다 하나님의 심판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로마서 3:10에 가시면 인간의 전인류를 정죄하는 이런 선언이 나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12).

 

 

 

전인류를 향한 성경의 불합격 판정입니다. 여기서 예외가 되는 인간은 역사상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인이건 누구건 인간이 스스로의 양심으로나 능력으로나 의지로나 무엇으로나 하나님 앞에 심판을 면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성경의 선언입니다. 우리 주변에 저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도덕성, 윤리성 속에서는 좀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절반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을 얻었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시면, 물론 어려서부터 믿는 가정에서 자라셔서 극적인 상황이 없는 분들에게는 이 경험이 별로 없겠지만 중간에 믿으신 분들 혹은 중간에 다른 회개의 경험을 가지신 분들은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구원은 언제나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 통곡이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기쁨과 내가 누구냐를 발견하는 회개의 통곡이 동시에 수반되지 않습니까? 내가 죄인이었다, 죽어도 싼 사람이었다, 이것이 확인되는 것이 언제나 구원에 수반되는 분명한 절반의 내용입니다. 내가 죄인이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모르고 살고 있었다. 하나님을 모르고도 너무나 떳떳이 살고 있었다. 정말 지옥 가도 한마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것이 언제나 구원에 쫓아 다니는, 분명히 구원받은 절반의 내용입니다.

 

 

 

심판에 관한 깨우침, 회개라는 것이 수반될 수밖에 없는 구원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부분이 현대로 올수록 너무나 약화되어 있어서 우리 모두는 구원에 관한 어떤 생각을 갖기 시작했느냐 하면 채권자 같은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주고 이 비오는 날 교회에도 나와 주는데 그래 이 따위 것 하나도 안 들어 주신단 말이예요.’ 이 따위로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뭐 교회나와서 봉사라도 하나 하기 시작하면 성가대를 한다던가 교사를 한다던가 안내라도 한 번 하면 그 다음에 기고만장해지는 겁니다. 그 다음에 권리가 쌓이는 것같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누구였으며 구원을 얻은 것이 무엇인가가 제대로 감사되지 않는 한 사실은 아직도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적은 것입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요구를 하는 신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에베소서 1:3 로 가시면 구원에 관한 이런 설명이 나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3-6).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입니다. 4절에 있는 바와 같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입니다. 그러니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거룩하지 않고 흠이 많은 존재였습니다.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구원 얻지 못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도 합격점을 받을 자가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인식되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얻은 것이 감사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전에 구원 얻기 전의 상태가 무엇이었느냐가 확인되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부름을 받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 부름받음이 더 높고 더 깊은 것으로 가는 것이 무엇으로 이어져야 하는가의 신앙관이 흔들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주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의 우리의 요구는 우리의 욕심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의지하여 쾌락을 좇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데 반하여 신자란 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쾌락을 좇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그런 존재가 되기 십상입니다. 신자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에 내가 누구였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심판 아래 있는 존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었으면 마땅히 달라져야 합니다. 무엇으로 달라져야 합니까? 거룩하다는 차원에서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사람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늘 우리의 존재가 확인되어야 하고 그래서 우리의 기쁨과 우리의 성숙은 거룩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지 않은 것으로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기쁨은 깊어지는 거룩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나아감도 거룩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름으로, 기도라는 이름으로,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그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방법이 우리에게 얼마나 감사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 갔느냐, 여러분의 사업이 잘 되었느냐에 따라 왔다 갔다 하면 더 크고 거대한 것에 대한 감사를 놓쳤기 때문에 악세사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가장 큰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구원 얻은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로마서 8:31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1-32).

 

 

 

모든 것과 그 아들과 어느 쪽이 무게가 더 무겁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아들과 모든 것은 동등합니까? 아들이 훨씬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아들까지 주었는데 나머지 중에 아낄 것이 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 이외의 어떤 것도 그 아들을 받은 것에 비하면 악세사리입니다. 이쪽이 본체고 무슨 방언을 한다든가 무슨 환상을 본다든가 어떤 신비로운 체험을 한다든가 고속도로에서 차가 12바퀴 굴렀는데 말짱하다든가 이 모든 것은 악세사리입니다. 그것이 감사의 핵심을 차지하고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 여러분이 저주받을 자리로부터 옮겨와 있는 것, 이것이 감사의 최고이며 본체입니다. 이것이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앞에 감사하는 것이 왜 약화됩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어떤 위치에 있었느냐가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뭐라고 교모하게 핑계를 댑니까? 신이란 원래 변덕장이, 자기 기분대로 하는 분이라는 말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진노와 어떤 처절한 운명 앞에 있는 가를 스스로 감추고 외면하고 살아가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살아야 됩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그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절반의 내용입니다. 그 절반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고 그 다음에 구원의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 1:18~ 3:20 에 이르도록 긴 시간 동안 이 많은 장을 할애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하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하며 그것이 왜 복음인가? 그것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할 뻔했는가? 율법을 갖고 있었다든가, 우린 몰랐다든가 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그것으로 변명할 수 없는 처절한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가?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것을 아는가? 그렇다면 그 감사가 얼마나 커야 하는가?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이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감사가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된 구원과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토록 효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신자로서 여러분이 얼마나 지혜롭게 사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얻은 구원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사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을 제대로 인식하시고 감사하며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신자답게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이 남은 여생을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바와 같이 자기의 쾌락과 욕심을 위하여 살지 않아야 됩니다. 신실하게 신자답게 사는 것, 그리고 이 얻은 바 구원을 감사하며 거룩으로 요구받고 있는 신자의 삶을 충성되이 수행하는 것, 여기에 여러분의 기쁨과 자랑과 모든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 19강(롬2:17-29절)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17-29)

 

 

 

지금 우리가 로마서 2장의 끝부분까지 왔지만 아직도 3:20에 이르도록 동일한 주제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인류 모두가 예외없이, 핑계댈 수 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내용에 대해서 성경에 적절하고 날카롭고 도망갈 수 없는 만족한 논증을 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논할 때도 가장 많이 틀리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가 왜 복음이 필요하냐, 복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있고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다.

 

 

 

살아서도 죄와 범죄 속에 있으며 죽어도 영원한 형벌의 자리밖에 갈 수 없다 하는, 이 심각한 문제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필요성도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도, 구원 얻은 것에 대한 감사도 다 틀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죄악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처지에 대한 이해야말로 복음을 이해하는 아주 근본적이고 핵심되는 조건이고 복음의 절반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것은 이 중에 유대인들의 오해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고 있다는 것으로 자기네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구원얻은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인의 상태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공격을 제대로 추적해 보면 유대인인 우리는 선민이고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다는 사고와 동일한 사고방식, 나는 인격자다, 나는 죄 지은 적이 없다, 나는 지식인이다, 나는 양심에 거스른 적이 없다라는 일에 대하여 동일한, 적절한 논증이 되어 인간 모두가 어떻게 핑계할 수 없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한 오해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어떻게 오해의 소지가 되어 아직까지도 많이 남아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오해 중의 하나는 율법을 갖고 있고 할례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저들이 이미 구원을 얻은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17-20)

 

 

 

여기까지는 좋다 이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너 자신은 가르치는 대로 왜 안 사느냐’ 이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싸움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는 율법을 가진 것이 이미 선생된 표라는 겁니다. 그러면 선생된 표는 뭐냐 하면 나는 가르침을 받을 학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가졌다는 것은 나도 선생, 즉 학생이 아니라는 것이고 사도 바울의 지적은 가르치는 네가 가르치는 그 내용을 왜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롬2:25).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율법은 행하는 기준이고 규범이지 갖고 있어서 자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좋은 음식점과 나쁜 음식점의 차이 같습니다. 청결하다든가 친절하다든가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만 좋은 음식점의 첫번째 조건은 맛있어야 합니다. 나쁜 음식점의 첫번째 조건은 맛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의 오해는 무엇이냐 하면 메뉴도 멋지고 테이블도 멋지고 다 멋진데 이 음식점에 맛있는 음식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입니까? 너희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좋다. 그런데 그 율법을 너희는 하나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21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롬 2:21-22).

 

 

 

이 지적에 대하여 자신을 점검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들에 있어서 공통되고 근본적이고 누구나가 오해하는 하나의 자기 변명의 방식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으로 인하여 지금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민족 전체가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논리이고 예수를 믿고서 신앙생활하다가 실패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굉장히 심각한 싸움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싸움을 말하자면 너희가 율법을 갖고 있고 선생이라고 하면서 너희는 왜 그대로 살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2:23-24).

 

 

 

자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원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유대인들은 자기네가 율법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선생이라고 생각했고 바울은 너희가 가르치는 것을 너희가 먼저 소화해 내지 않는 한 선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너희는 이미 구원의 선상에 이른 것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증거가 무엇인지 봅시다. 에스겔서 36장으로 가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제 외국의 포로가 되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저들의 잘못을 지적받는 장면이고 회복을 약속받는 대목인데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서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접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지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겔 36:18-36)

 

 

 

이 전체 내용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주고 율법을 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지 못하여 하나님의 벌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어 거룩하여져서 내 복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그들에게 율법과 할례를 베푼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셔서 죄를 지은 자에게 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고 하나님과 화목하여야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것으로 이미 복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범죄했을때도 벌하시는 분인데 율법을 주어 무엇이 죄고 무엇이 복받는 것인가를 알게 한 자가 죄 지었으니 심판이 더 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백성보다 더 엄한 벌을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자 그 포로로 잡아간 나라가 생각하기를 이 민족이 믿는 신보다 우리가 믿는 신이 더 쎄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종일토록 이방인 중에서 모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욕을 왜 받았습니까? 하나님이 약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 앞에 그 율법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받은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거꾸로 하나님이 모욕을 받아 버린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모욕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자랑하는 율법으로 하나님이 모욕받게 되었다면 문제가 어디 있는가를 분명하게 짚어 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자랑한 저들이 만들어 낸 결실이 하나님을 모독받게 한 일, 하나님께 저들이 율법을 받았는데 그 율법으로 매밖에 맞는 것이 없었다면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냐 율법을 받은 자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자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졌으되 율법을 따라 행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성경 구절도 19절에 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였다 이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대로 율법을 가졌느냐, 아느냐, 모르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어떻게 살았느냐로 저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어떻게 하시기로 했느냐 하면 너희가 나에게 범죄하여 내게 벌을 받고 쫓겨감으로 인해서 너희만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내 이름도 더렵혔다. 나는 내 이름을 아껴서 내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야 말겠다. 그래서 포로된 너희들을 다시 불러 황폐한 너희 성읍을 건설하게 하고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분명히 뭐라고 합니까? 32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 때문이 아니다.”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존심을 위해서다가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를 위함이 아니라는 것은 너희가 행한 것의 결과가 아니다란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날카롭고 분명하게 초점을 지목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벌받음과 화목 속에서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구약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얼마나 무능하고 부패한 족속인가가 증명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는 것은 저들이 보호받을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분위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동시에 증명되는 것이며 구약성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유대인은 뭐라고 생각했습니까? 난 율법을 가졌다는 것으로 끝까지 고집을 부립니다. 나는 선생이다. 내가 율법을 가졌으니 내가 선생이다, 아니다, 너희도 학생이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말 1:6-9)

 

 

 

무척 재미있는 꾸중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은 가장 실한 것을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흠 없고 완전한 것, 양을 잡아도 첫 새끼, 가장 흠 없는 것으로 바칩니다. 그런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바칩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렸다는 명목은 세우고 실제로는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을 바쳤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행한 짓입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식으로 표현해 봅시다. 우리가 얼마나 악당이냐 하는 것을 이렇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생활, 즉 부부생활이나 부모님과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에서 여러분이 만족하고 사시는 분이 있습니까? 왜 못하죠?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권리와 책임 중에서 책임을 앞세웁니까? 누구나 권리를 앞세우죠. 권리를 이야기할 때는 절대 기준을 세워서 권리를 요구하고 책임을 요구할 때는 언제나 상대적입니다.

 

 

 

저희 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쪽입니다. 늘 성적이 나빠서 “야 이것이 뭐냐” 그러면 매일 누구를 대느냐 하면 자기보다 못한 아이 이름을 댑니다. 자기보다 잘 한 사람 이름을 댄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부전자전입니다. 어디서 배웠겠어요. 여러분이 그렇지 않습니까? 저희 아버님은 오래 전에 돌아 가셨고 어머님이 계시는데 제가 그 어머니 한 분을 제대로 못 모십니다.

 

 

 

참 어렵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늘 이렇게 불평을 하십니다. “야 네가 목사냐” 그럼 저는 무어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어머님이 권사님이십니까?” 서로 불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머님에게 권사님이란 이름으로 이것을 저에게 책임으로 돌리지 마시고 이 책임은 어머님이 가지십시오 하고, 어머님은 네가 목사니까 이 책임은 네가 가지라는 것입니다. 책임은 서로 발길질하고 권리는 서로 빼앗아가니까 이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게 이야기할 때는 얼마나 잘 가르칩니까? 참 쉽죠.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일 악질적인 말이 뭐냐하면 “이상해” 입니다.

 

 

 

난 참 이상해” 그 이상하다는 말은 여기에서만 꼭 써야 됩니다. 쓸 수 있는 것은 이 경우뿐입니다. 한번은 영화관에 갔는데 영화가 시작되어 한창 진행이 되고 있는데 손님이 늦게 들어와서 자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번호를 확인하려고 서서 왔다갔다 하니까 안 보이게 됐습니다. 그래도 뭐라고 안 그러고 꾹 참고 있는데 뒤에 어떤 젊은 학생들이 않아 있다가 한 학생이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옆에 있는 친구에게 “야 난 참 이상하다” 극장 안이 다 들리게 큰 소리로 “” 그러니까 “난 왜 앞에 사람이 서 있으면 화면이 안 보이냐

 

 

 

이것은 ‘이상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웠다든가 부부 간에 갈등이 있다든가, 또 문제가 있다면 “어, 난 이상해” 그럴땐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난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척 해결이 되던데. 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우는 것이 이해가 안돼.” 그 속에는 ‘난 그 문제를 넉넉히 해결했어’가 숨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잘해서 한 것입니다. 그 시어머니가 훌륭하거나 아니면 남편이 중간에서 별의별짓을 다해서 양쪽을 입막고 있는 것일겁니다. 그 노고에 대하여 아는 여자를 제가 아직 만난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난 ‘이상해’ 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유가 뭡니까? 유대인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누가복음 18장으로 가십시다. 예수님의 아주 무서운 질책이 여기 있읍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 18:9-14)

 

 

 

유대인들의 가장 큰 약점이 뭡니까? 확신입니다. 어떤 확신입니까? 나는 의인이라는 확신입니다. 최소한의 무엇으로 나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지킨다. 나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지킨다 이겁니다. 저 세리들같이 떼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갈파하셨느냐 하면 산상설교 속에서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한 자라고 했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했습니다. 왜요? 살인은 결국 미움의 열매고 간음은 음욕의 열매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 중 열매 맺어진 것과 열매 맺지 않은 것은 별로 큰 차이가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간음을 열매 맺으면 우리는 음탕한 자요 살인을 열매 맺으면 우리는 미워함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는 악당입니다. 안한 것으로 나는 의인이라고 이야기한 것같이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그렇게 판단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판단합니다. 나는 저 세리와 다릅니다. 그러나 너보다 세리가 낫다고 합니다. 왜요? 도덕과 윤리와 종교성 속에서는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최소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여기 나온 바리새인은 자기는 구원 얻을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이 지적하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가 처음에 저들과 논쟁의 서두부터 부딪히는 단어는 이것입니다.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살고 자기 치장을 위해서밖에 살지 못하는 자가 자기가 죄인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네들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깨끗이 산다는 말 앞에 우리가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낫다, 나는 이 실수는 안 한다. 나는 교만하지 않다. 나는 잘난 척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러분의 자랑이어서는 안 됩니다. 경건으로 가고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는 자리로 가야 됩니다. 우리의 세상적인 욕심과 탐욕, 거칠어진 마음들, 내가 서기 위하여 남을 잡아먹는 모든 방법에서 내가 180도 달라지는 모습으로 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요구 앞에 설 때마다 죄인인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 이야기한 것같이 내가 매일 나를 채찍질하고 근신하며 노력하며 매일 죽노라 하고 고백했던 것들은 사실 우리 신자들이 매일매일 고백해야 되는 유일한 목표이어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한 것이 없습니다. 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죽어 마땅하며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위치가 있고 구원 얻은 기쁨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냐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리에는 십자가가 설 자리가 없고 자랑밖에 없습니다. 남을 향하여 이상하다는 비평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이 혹시 유대인이 아닙니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놓고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 이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점검하십시오. 십자가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늘 잊지 마십시오. 늘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을 점검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를 점검하시고 나를 내 뜻대로 내어 버려 두지 마시고 주의 은혜와 생명과 진리로 붙잡아 달라는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이 신자의 마땅한 고백이고 그 속에서만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이 여러분에게 감사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 20강(롬3:1-4절) 유대인의 유익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3:1-4)

 

 

 

로마서는 그 서두에 복음을 선포해 놓고 구원과 복음의 필요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방인과 유대인 구별없이 모두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가를 로마서 1:17부터 지금까지 주제로 삼고 논증해오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저들의 심판받아 마땅한 근거가 저들의 부패상으로 자명하게 드러났고 핑계댈 수 없다면, 유대인은 율법을 가지고 있었지만 율법을 행하지 않는 것으로 심판 아래 있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하는 것이 로마서의 중요한 주제중에 하나고 우리에게 확인시키려는 작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방인들의 정죄의 근거가 저들의 더러움과 부패상에서 드러난다면 유대인의 정죄의 근거는 2장에서 쭉 논의된 바와 같이 저들의 율법과 할례의 법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갖고 있을 뿐이지 행사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2장에 있는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함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롬 2:1-8)

 

 

 

그래서 행함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중요한 근거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것이 자기네들이 구원얻은 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율법을 준 것은 합격에 필요한 일종의 커트라인이고 표준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하여 좋은 참고서를 가지고 있는 학생과 같습니다. 좋은 참고서를 가지고 있는 것이 공부를 잘 한다는 표는 아닙니다. 그 참고서를 통해서 실제로 공부를 잘 해야 됩니다.

 

 

 

예전에 그런 기억이 나십니까? 공부를 잘하기 위하여 좋은 참고서를 사지 않고 삥땅을 치기 위하여 샀던 기억이 나십니까? 집에 아무리 책이 많아도 그것이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인지 부모님께 돈을 삥땅 치려고 하는 것인지는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가지고 있어서 이방인이 갖고 있지 않은 하나님의 거룩의 표준과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대하여 더 나은 표준을 갖고 있다고 해서 행하지 않고도 저들이 합격점에 든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 1:16에서 복음을 선언할 때도 이 복음의 필요성에 대하여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구원의 필요성이 이방인 이전에 유대인에게 먼저 제시된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 2:9-10)

 

 

 

유대인과 그 외 이방인을 대표하는 헬라인 모두에게 구원의 필요성과 심판의 보편성을 성경이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만나게 됩니다. 중요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율법을 주고 할례의 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문제에 있어서 이방인들과 비교할때 하나도 더 나은 점이 없다면 도대체 유대인을 선별하고 선민으로 부르고 여러가지 기적과 기사로 그 역사에 간섭하시고 율법을 주시고 할례의 법을 세우신 유익이 무어냐 하는 질문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야말로 신앙의 핵심적인 면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되고 오늘 우리가 신앙의 초점을 잡는데 아주 중요한 질문이 되는 것을 결론에서 만나게 됩니다. 중요했던 것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은 그것 자체가 구원의 방법이 아니었고 어디까지가 합격선이냐하는 것을 우리에게 밝혀 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불과하다면 아나 모르나 마찬가지 아니냐 하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여기엔 분명한 유익이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3:1에 나온 질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절에 답이 나옵니다.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

 

 

 

라고 나옵니다. 많은 이익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 대표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말씀을 맡았다 하는 것은 능동태로 되어 있으나 수동태로 보아야 원의에 더 가깝습니다. 저들에게 말씀이 맡기워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기워졌습니다. 행동하시는 하나님, 약속하시는 하나님, 설명하시는 하나님 이 모든 것이 합쳐서 하나님의 계시가 저들에게 주어졌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유익이 있었느냐 하면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고 구원을 기다리는 소망이 약속으로 주어진 유익이 있습니다. 율법이 저들에게 그것 자체로 구원을 주는 역할을 하진 않았지만 길을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율법이 친히 저들을 가르친 선생은 아니었습니다만 학교까지 인도해 주는 길잡이는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유익입니다.

 

 

 

즉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엄존하심이 저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점검할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윤리와 도덕으로서 자기를 점검하는 정도밖에 주어진 것이 없었고 좀 더 깊이 가 보았자 양심으로 밖에 자기를 비추어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회개까지 끌고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었던 유대인은 회개를 결실시킬 수 있었고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을 확인하는 그런 유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계시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로 인도하셨고 그리고 저들에게 구원이 스스로 만들어 질 수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을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을 주셨을 뿐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동시에 주어졌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회개는 당연히 구원을 바라는 하나님으로부터 회개와 긍휼을 구하는 자들을 몰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신명기 8장 말씀과 같이 대표적인 예가 드러납니다.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40년 동안 사막생활을 합니다. 사막생활이 왜 필요했었는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신 8;2-6)

 

 


40년 생활이라는 것은 원래 하나님의 의도 속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으로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그러나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서 열두 정탐꾼을 보낸 후에 그 곳에 사는 원주민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입국을 거절합니다. 그리고는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우리를 애굽에서 끄집어 내셨습니까 하고 한탄을 하고 원망을 하여 벌을 받아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40년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인시키는 것이 무어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적이 강해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범죄합니다.이것이 저들의 항변입니다. 일종의 강변이죠. 그래서 40년 동안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다 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직접 먹여 살리십니다.

 

 

 

만나를 내리시고 메추라기 고기를 먹이시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으로 저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의복이 해어지거나 그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하나님의 간섭하심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가로막는 모든 민족들을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셔서 저들을 보호하신 이 모든 것을 통해서조차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광야생활 동안 계속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무엇이 증명되었느냐 하면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위협을 받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먹고 배불러도 범죄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40년 광야 생활을 통하여 확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문제는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의 마음 속에 죄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 40년 광야생활의 결론입니다. 떡이 없어서가 아니며 의복이 없어서가 아니며 근본적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고 편안해도 죄는 속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입니다. 의와 거룩의 복받을 만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오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더란 말입니다.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것밖에 없더라 하는 것이 광야 40년의 생활입니다. 그래서 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입국시키면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거듭거듭 경고를 하십니다.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기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교훈하시려고 하늘에서부터 그 음성을 너로 듣게 하시며 땅에서는 그 큰 불을 네게 보이시고 너로 불 가운데서 나오는 그 말씀을 듣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사랑하신고로 그 후손 너를 택하시고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며 너보다 강대한 열국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너를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네게 기업으로 주려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 (신 4:32-40)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내시고 간섭하신 모든 기적과 구원하신 모든 일들을 무엇 때문에그렇게 하셨는가? 어디에 초점을 맞추셨는가 하면 저들을 구원받은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깨우치고자 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 같은 분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하기위해서 그의 명령을 따라 지켜서 한없이 복받게 하려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기적으로 간섭하셨고 율법을 주어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고 아까 신명기 8장에서 본 바와 같이 광야 40년 길을 걸으므로 모든 문제가 인간에게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앞에서 인간이 누구인가를 확인케 하여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명령을 따라 행하여 마침내 영원토록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삼으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서 9장으로 가십시다. 여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다니엘은 그 포로 된 바벨론에서 이 기도를 올립니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가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단 9:3-11)

 

 

 

회개하는 자가 없습니다. 회개하니까 용서하십시오가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일들에 대하여 부지런히 가르치셨습니다.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그래서 이 심판과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가르치지 않으셨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잘 보호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받고 어떻게 하면 벌받는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가르치셨고 너무나 엄중하게 경고하셨고 너무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반항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기어코 이 벌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높으심과 그가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요 온 천하에 그분 같은 분이 없음을 확인해야 됐고 그리고 인간이 그분 앞에, 거룩하게 합격을 받을 수 있는 지점 앞에 와있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분명히 인식했어야 되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배워야 되었던 것이고 우리 모든 신자들이 확인해야 되는 지적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하는 것도, 그래서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가 아닙니다. 구약의 초점은 이제 우리는 다시 범죄하지 않겠습니다. 주의 말씀을 따라서 이제는 복받겠습니다가 아니라 우리는 늘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의 범죄를 하나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못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이제는 내가 죄인인 것을 자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여기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 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단 9:8-9)

 

 

 

하나님께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회개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사유하심도 주께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우리는 원래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죄를 저지른 것도 우리가 범죄한 탓이고 앞으로도 또 범죄밖에 저지르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는 것은 그 잘못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쪽에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잘못을 벌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범죄자인 것을 아십니다. 사유하심도 주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고 이 지점에 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저들에게 얻게 하신 기업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정당한 이스라엘인이고, 저들이 율법을 제대로 적용했다면 무엇 하나는 확실하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와 엎드려 빌며 저들의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자리에 와 있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유익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메시아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우리가 잘 아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형성할 때 야곱이 그의 열두 아들을 축복하는 과정에서부터 실로가 오실 것이다. 메시아가 약속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 방법일 수 있었다면 메시아가 약속될 수 없습니다. 구원자가 약속이 되는 것은 율법이 구원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방법으로 저들을 끌고 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구원을 요구하는 자리에까지 밖에는 인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방법으로 저들을 끌고 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구원을 요구하는 자리에까지 밖에는 인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방법인 메시아 약속이 주어지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차별없이 메시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 얻을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유대인과 이방인과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주제로 다루다시피 유대인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이 회개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하여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저들에게는 유익입니다. 누가복음 2장에 가면 그 증거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후에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기 위하여 부모님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왔을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5-32).

 

 

 

시므온이 경건한 유대인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지만 그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평안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나서야 드디어 주재께서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셨다 하고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는 경건한 유대인으로 어느 지점까지 와 있느냐 하면 벌받을 죄인이라는 확인 지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지점까지 와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뿐입니다. 그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은 구원의 필요성을 모르고 하나님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회개를 하지도 않고 구원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유익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유익이라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지 율법을 통하여 회개하는 자리에 먼저 가 있고 구원을 기다리는 자리에 가 있는 것이 그것 없이 구원을 얻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현실적으로 우리 신자들에게 이런 질문과 대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게 된 과정에서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예수를 믿어서 신자가 된 자와 중간에 드라마틱한 어떤 경로를 거쳐서 돌연히 회심에 이른 자와 누가 더 유익하냐 하는 이야기를 낳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이 돌연한 회심에 의하여 중간에 예수 믿은 사람들이 주로 헤게모니를 쥐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펄펄뛰는 사람들로 난장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낫다고 본다면 믿는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분명한 유익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본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분명한 자기 의지적, 이성적, 전인격적 고백과 결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핵심이 되는 것은 결국 그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중간에 믿는 사람들이 신앙의 주도적 분위기를 교회 안에 만들어 내는 것 때문에 한국 교회의 신앙의 초점은 감격, 열심 이런 것들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감각적이고 실존적입니다. 자기네들에게 감각 되는 것, 경험, 신비로운 것들이 굉장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낸다든가 방언을 한다던가, 환상을 본다든가, 가서 넘어진다든가 하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으로 초점을 잡아서는 안됩니다. 유대인의 유익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죄라는 시점에서 신앙의 깊이와 초점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감격이 아니라 죄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구원을 얻어서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복의 시점에서 보지 말고 ‘’의 시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선 자기의 존재를 어떻게 해결해 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과 초점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재에 대한 이해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는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과 우연히 회심한 사람과의 큰 차이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이해도가 좀 다르다는 것입니다. 돌연한 회심의 경우는 자신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반하여 어려서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해서 갖고 있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 부부란 커다란 쇠사슬로 묶인 존재가 아니라 수백만 가닥의 얇은 실로 묶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을 마흔 전에 이해하면 대단한 사람입니다. 부부란 장미꽃을 선사하고 아침 저녁으로 째려 보면서 ‘난 당신 없으면 못살아’ 이렇게 묶여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내가 이 사람하고만 살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나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면서 내가 내일이면 이혼하리라, 오늘 저녁에 해야 하지만 법원이 문 닫았으니까 내일 밝으면 하리라, 그러다가 그 다음날 무슨 일이 생겨서 못가고 이러다 20년, 30년을 살고 있는 그런 관계로 묶인 것이 부부입니다. 그것은 절대 고운 정만으로 묶여지지 않습니다. 미운 정으로 묶여지고 10년쯤 지나면 이 사람이 죽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하게 됩니다. 왜입니까? 언제 또 그 지지고 볶는 10년을 삽니까? 이제는 억울해서라도 같이 살아야지 언제 새로 훈련을 시킵니까? 10년이나 지나고 보니까 서로를 너무 잘 아는 겁니다.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죄에 대하여 아는 것입니다. 어느날 번쩍 빛 보고 알고 펄펄 뛰는 정도로는 그렇게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차를 10년 운전해도 차 내부를 잘 모르듯이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신앙생활 1, 2년 해보고 알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냐, 신앙이 무어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은 10년, 20년 가지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40년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살면 살수록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더 많이 놀라게 되고 다 아는 것 같았는데도 더 깊고 새로운 면을 보는 것이 신앙의 기이한 어떤 깊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런 분명한 신앙의 핵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불신자와 무엇에서 다르냐 할 때 복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불신자와 신자가 공감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이 하나 있다면 무어냐 하면 죄라는 문제에서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저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죄인이었는데 저들은 죄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과 치료하는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이해도 없고 죄를 치료할 방법도 없습니다. 신자는 복받은 데서 저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치료하고 죄가 치료된 자로서 저들과 분명히 할 말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들이 알고 있는 죄가 윤리와 도덕이라면 신자들이 알고 있는 죄는 영적인 것이요 하나님과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치유된 모습을 유일하게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신자가 무어냐 그러면 죄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증명해야 되느냐 하면 죄가 해결된 자로서 증명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5:13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 - 16).

 

 

 

빛이란 어둠과 대조되는 것 아닙니까?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인간이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진화되었는지, 창조되었는지, 하나님의 존재의 유무를 유일하게 드러낼 수 있는 존재는 이제 우리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빛이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 보고 능력을 가지고 있으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비추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죄가 해결된 자의 모습을 여러분이 보이셔야 됩니다.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 에베소서의 요구입니다.

 

 

 

그래서 이 마태복음 5장이 팔복으로 시작되는 산상설교의 시작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화평케 하고, 마음이 청결하고, 이 모든 것들은 죄로부터 해방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여러분을 주장하지 못할 때 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죄로부터 해방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고 오른편뺨을 맞으면 왼편 뺨을 대는 것으로부터 여러분은 이 죄가 해방된 것을 유일하게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는 다른 어느 것으로도 불신자와 우리가 다른 것을 증명해 내지 못합니다.

 

 

 

예수 믿었더니 병이 나았다, 돈이 생겼다, 행복하다 이것은 아닙니다. 다른 것으로도 저 사람이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저들과 우리가 유일하게 다르고 가장 중요하게 달라야 되는 것, 그리고 우리만이 증명해 낼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존재와 무엇이 진리며 생명이며, 인간이 누구이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가, 죄에 대한 모든 것, 거룩과 영광, 영혼에 관한 것을 우리밖에는 증거할 수 없습니다. 빛의 자녀가 되지 않고는, 생명을 힘 입어 죄로부터 풀려난 자가 아니고는 아무도 그것을 증명해 낼 수 없습니다.

 

 

 

동시에 책임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앙, 구원에 대한 확신, 주를 위한 열심 이 모든 것이 이쪽으로 먼저 열매 맺어져 쏟아져 나와야 됩니다. 다른 것은 안 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펄펄뛰고 마음에 아무리 큰 믿음과 능력이 있다 해도 그것이 죄 문제에서 해결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신자의 첫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며 그 거룩하심 앞에 죄인된 모습으로 출발한 여러분의 모습이 있어야 되고 그 죄가 해결된 자로써 신자의 생명, 즉 의, 거룩, 영원을 향한 올바른 추적이 정당하게 열매 맺는 것으로써 여러분이 신자된 책임을 완수하셔야 됩니다. 신앙생활이 해를 거듭하고 경험이 축적될수록 여러분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ABCD 배우는 사람을 왜 신앙생활 3, 40년 하는 사람이 부러워합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의 약점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사람과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사람들 중에 누가 더 영어를 잘하겠습니까? 물어보나마나 미국에서 자라난 사람이 영어를 잘합니다. 그것이 미국에서 태어난 유익입니다. 한국이라는 사회는 영어 문명권 속에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재주보다도 영어를 잘하는 것이 최고로 대접을 받습니다. 영어만 잘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 땅에서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오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어도 미국땅에서 태어난 사람을 영어로 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3, 40년 했으면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과 죄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그쪽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방향 잡으셔야 합니다. 매일의 신앙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이라는 문제와 생명과 진리라는 문제에서 늘 여러분을 점검하시는 것으로 쌓아 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막 믿은 사람이 부러운 것입니다.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시고 유대인의 유익으로 우리에게 제시된 이것, 먼저 믿은 자의 유익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을 올바른 것에 초점을 맞추시고 여러분의 신앙이 거룩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함을 아는 것으로 가십시오. 죄 문제를 해결하는 싸움으로 가십시오. 거듭난 자의 의로운 삶으로 모아지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빛이실 것이고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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