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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5강) 시편 34:1-22 여호와를 아는 자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51

 

 

 

 

 

 

 

 

 

 

(35강) 시편 34:1-22  여호와를 아는 자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찌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4:1-22)

 

 


<설교>


1,2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고 노래하는 것처럼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며 여호와로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찬송하고 여호와로 자랑한다는 것은 여호와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당시 다윗의 상황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기뻐할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34편은 다윗이 사울에 의해 도망을 다니다가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었는데 블레셋 왕의 신하들이 다윗이 예전에 골리앗을 죽인 자임을 알아보자 위기감을 느끼고 침을 흘리면서 미친 사람인 척 행세를 함으로써 겨우 살아난 후에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의 다윗 처지라면 여호와를 찬송하고 자랑하는 것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여호와로 자랑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그런 처지에서도 여호와를 찬송하고 자랑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윗의 찬송은 자신에게 주어진 형편이나 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오늘날 신자들의 찬양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랑하고 감사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현실의 형편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찬양이 외적인 조건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형편이 좋지 않으면 자연히 찬양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8-10잘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는 것은 신자가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여호와 선하심을 맛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와의 선하심이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선하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좋은 것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알고 감사한다면 그것이 곧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이 됩니다.

 

 

 


다윗이 말하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는 상태는 육신의 것으로 풍요로워진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당시 그런 풍요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쫓겨 다니면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였습니다. 그러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인간의 탐욕으로 눈으로 바라보는 좋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 안에서 바라보는 좋은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신자는 언약이라는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를 언약의 관계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언약 관계에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언약을 성취하는 모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자를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부르신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약이 완성되는 복된 자리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신자를 악한 세력으로부터 붙드시고 지키시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아는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도 여호와를 찾을 수 있는 것이고, 궁핍과 고통 안에서도 자신을 붙드시고 지키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 역시도 비록 형편은 참담하고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여호와의 언약 안에서 자신을 붙드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4-7절)  위의 구절도 여호와의 언약 안에서 여호와를 신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든 대적으로부터 자신을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복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려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이 지키시고 건지시는 언약의 관계에 들어온 것이야 말로 멸망의 자식이었던 우리에게는 복의 자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참으로 좋은 것으로, 복으로 간주하지 않는 우리들의 시각입니다. 분명 탐욕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언약의 관계라는 것이 마음에 차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당장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 채워주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것은 분명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뜻대로 이뤄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고 말합니다. 악이 악인을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세상에 정해진 마지막 운명입니다. 누구도 이 마지막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악에 거하는 자는 모두가 영원한 죽임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돈으로도 피할 수가 없고 권력으로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죄를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죄 있는 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의인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둠의 세상에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여호와께로 피하는 것뿐입니다. 여호와께 무엇이 있기에 여호와께 피하면 죄를 받지 않는 것입니까? 여호와께는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덮으시는 용서가 있고 인자하심과 자비가 있습니다. 신자는 바로 여호와의 용서와 인자와 자비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것이 여호와께로 피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의 결국을 바라보십시오. 악이 악인을 죽인다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악이 악인을 죽이는 세상의 결국을 생각한다면 악에서 건짐 받은 것이야 말로 무한한 은혜가 아닐 수 없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야 말로 복된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의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죽음의 결과를 두고 생각한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안에 있다는 것이야 말로 모든 좋은 것을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를 복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영혼이 구속을 입었다는 것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풍성하고 넉넉하고 완벽한 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야 말로 우리를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가 되는 것이고 주리지 않는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달라고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더욱 깊이 알아가고 그 은혜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자의 기도인 것입니다. 신자가 자꾸 세상을 쳐다보면서 땅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으로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죄에서 건짐 받고 영혼이 구속을 입은 복된 존재가 되었다는 참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미친 체 해서 겨우 목숨을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이러한 찬송에서 ‘뭘 어떻게 해달라’는 자기 요구가 없습니다. 다만 이만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간주하면서 은혜 안에 있음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는 내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를 찾는 자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 기쁨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로 죽었다면 영원한 죽음에 처해지는 것이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오직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세상이 아니라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는 자로 이 자리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시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 모든 세상적 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찬송하시고 하나님만 경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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