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시편 31:1-24 강하고 담대하라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이러한 인간의 자존심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 까지 거부하도록 합니다. 죄인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자존심을 허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면 하나님께 복이 아니라 심판을 받을 존재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와서 ‘나는 심판을 받을 존재입니다’라는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반대로 ‘나는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도 없는 인간입니다’라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자신이 어떤 어려움에 처하고 실패했다고 해도 죄인이기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라는 말은 하면서도 이상하게 자존심이 강하게 살아있습니다. 죄인이면서도 타인에게 지기 싫어하고, 타인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우월감을 삼으려고 하고, 자신이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심으로 죄인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죄인의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는 모든 것은 위장된 거짓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위장한 채 이러한 거짓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을 또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대로 다윗이 주께 피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윗은 17절에서도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부끄럽게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주께 피하는 이유는 세상에서의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주께 피하면 주가 자신을 도와서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으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주께 피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과 무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연 다윗이 말하는 부끄러움이 무엇이기에 주께 피하고 주를 부르면서 자신을 부끄럽게 말아달라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일단 다윗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부끄러움과는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무엇을 부끄러워하십니까? 역시 자존심과 연결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타인보다 낮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그것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타인의 자식들은 공부도 잘하고 잘되는데 내 자식은 공부도 못하고 별 볼일 없을 때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부끄러워 질 때가 많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오지 못한 것도 나를 부끄럽게 하고, 직장이 좋지 않고 돈을 적게 번다는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 집이 적고 초라하다는 것 때문에도 부끄러워합니다. 이러한 것이 인간은 항상 세상 속에서 자신을 의식하고 살아간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죄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인간의 자존심 문제와는 다릅니다. 9-12절을 보면 다윗은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여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피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 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낮아진 자리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은 자신을 부끄럽게 말아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대적으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데, 그 부끄러움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고난에 처한 자가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자존심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신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실패하게 해서 타인들 앞에 쪽팔리게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러한 부끄러움은 인간에게 있는 죄의 산물일 뿐입니다.
마 7장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외면을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이것이야 말로 주님께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다고 하고 또 많은 권능을 행하면서 자신이야말로 믿음이 좋고 주님 편에 있는 자인 것처럼 행세를 했는데 막상 부인을 받을 때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다윗은 이러한 부끄러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고 외면당하는 것보다 주께 외면당하는 것을 크게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를 믿고 있다고 간주해버리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서 자신들이 주께로부터 부인을 받을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권능을 행하는 것을 곧 주님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는 증거로 여겼을 것인데 어떻게 주께 부인 당할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권능을 행한 자신을 바라본 것이지 주님을 바라본 것은 아니었음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나는 권능을 행한다. 그러니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다’는 것으로 자신을 높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외면을 당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항상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바라보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를 바라보고 주를 의지한다는 것은 곧 주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다윗도 1절에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말하면서 주의 의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즉 주의 의가 자신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5절에서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여호와께는 인자와 자비하심이 있고 그 인자와 자비하심이 자신을 구속하셨음을 믿기에 자신의 영을 주의 손에, 즉 인자와 자비로 행하시는 하나님께 맡긴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것은 믿지 않습니다. 오직 주의 의만 믿을 뿐입니다’라는 뜻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낮은 자리로 내려간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주께 부인당하지 않습니다. 즉 세상에서의 낮아짐이 주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세상을 의식함으로 인해서 자꾸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내가 받아야 할 부끄러움을 다 받으시고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 온갖 고난과 멸시를 받으시면서 피 흘려 죽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고 떠들었는데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죽어 버리니 사실 생각하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떠들었던 것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게 하시고 하늘의 영광 자리에 않게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길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었습니다. 신자는 바로 이 길을 가야 할 자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이 길에 있는 신자에게는 세상의 실패조차 부끄러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낮아진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한다고 해도 실패가 당연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부끄러움은 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끄러움 또한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용서하심으로써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세상의 것으로 남부럽지 않게 산다고 해도 그들은 여호와의 의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세상에서 잊혀지고 무시를 받으면서 산다고 해도 신자는 주의 의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됩니다. 누가 과연 영원히 부끄러움에 놓일까요?
23,24절을 보면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고 말합니다. 신자는 인자와 자비로 행하시는 여호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의 낮아진 자리에서도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이 주의 의를 의지하는 신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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