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시편 33:1-22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간이 이해할 수만 있다면 그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형편에 따라 울고 웃었던 것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만으로 즐거워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로 인한 신자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셨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만으로도 충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와 같은 즐거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정직한 신자라면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으로 신자들에게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찬송하세요’라는 요구를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에 따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배고프면 밥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적 반응이지 자신의 의지와 결심이 개입되어야 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처럼 정직한 신자에게 있어서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것은 정직한 신자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연적 반응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여호와로 즐거워하지 못하고 찬송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직한 신자의 자리에 있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정직한 자란 누구며, 정직한 자가 만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즉 의인과 정직한 자란 서로 같은 의미의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32:1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구절과 본문 1절의 내용이 서로 무관하지 않은 점을 생각해 보면 33편은 32편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32편에서는 어떤 사람을 의인으로 부르고 있습니까? 1,2절의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 내용을 기억하십니까? 즉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성으로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의해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 일만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그들만이 의인으로 간주되며 그들이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들이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무거운 죄를 봄으로써 하나님의 사하심과 용서가 얼마나 큰 은총인가를 알 수 있고, 그로 인해 감사와 찬송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정직한 자란 마음에 간사가 없는 사람인 것이고, 이는 자신의 무거운 죄를 보면서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것이 당연한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시는 하나님이야 말로 사랑과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자신을 지키시고 도우시는 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하심만으로도 얼마든지 찬송하고 감사하며 여호와로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달라고만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얻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주신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여호와를 대하여 살아가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9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찌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일을 말하는 것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보면서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은 말씀에 완전히 장악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힘과 기술로 살아가고 있다고 우긴다고 해도 참된 현실은 여호와의 능력의 말씀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장악하며 말씀대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힘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진리로 다가올 뿐입니다.
4,5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장악된 세상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의와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이 되며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세워짐으로써 세상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충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인자하심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무거운 죄를 바라보는 신자인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죄를 덮으시고 가리우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야 말로 말할 수 없는 은총임을 알기에 인자하신 여호와를 즐거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이며 마음이 정직한 자라는 것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상관이 없이 사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기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의 인자를 삶의 편안함과 연결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인자는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우시는 것입니다. 이 인자하심이 명확하게 확증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10,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도모는 모두 폐하시면서 오직 여호와가 도모하시는 것을 영영히 세워 가십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도모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12절)을 사망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즉 19절의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 도다”는 말씀을 영영히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바라보고 의지할 뿐이지 세상의 그 무엇도 힘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자신을 사망에서 건질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16,17절)
그래서 33편은 20-22절의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라는 기도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이 33편의 결론인 것입니다.
신앙의 감격과 감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됨으로 있게 됩니다. 내가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이 누구시고, 어떤 뜻으로 내게 어떤 일을 행하시는 분인가를 알게 되면 결국 신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만으로 즐거워하게 되는 것이고 여호와가 나의 도움과 방패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여러분을 돕고 계십니다. 하지만 여호와가 도모하시는 것은 우리가 도모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사망에 처해져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며, 그것이 얼마나 참담한 것인가를 안다면 신자는 인자하심으로 일하시는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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