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시편과 잠언이야기

[스크랩] (31강) 시편 30:1-12 주를 높이는 이유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54

 

 

 

 

 

 

 

 

(31강) 시편 30:1-12  주를 높이는 이유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편 30:1-12)

 


<설교>

신자가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자연히 육신의 일에 모든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이 기준이 되어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 감사하고 주를 높이는 것도 영혼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육신의 문제가 주된 이유가 될 것이 뻔하고 결국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의 뜻과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범사가 육신이 잘되는 것으로 주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육신이 잘되어서 주께 감사하고 주를 높인다면 그것은 유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육신이 잘되면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에서도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의 차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 30편의 내용은 다윗이 하나님의 노염으로 인해 징계를 받고 그 영혼이 음부에 내려가는 지경까지 되었을 때 여호와께 부르짖고 다시 건짐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오늘 말씀에서 만남으로써 다윗같이 하나님을 높이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6절의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는 구절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의 노여움을 살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행한 인구조사였습니다.

 

 

 


삼하 24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강한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을 때 다윗이 자신의 힘을 확인하고 싶어서 인구를 조사한 일이 나옵니다. 자신의 군사의 수를 확인함으로써 자기 힘과 업적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온역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 7만 명이 죽게 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다윗의 힘은 이스라엘의 군사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의 수를 자신의 힘으로 여기는 교만에 대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형통하고 평안한 것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룬 결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징계로 인해 7만의 백성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강함은 자신의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주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평안을 누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평안이 주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고 있는 은혜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또한 다윗처럼 주의 은혜를 잊고 삽니다. 내게 있는 것이 마치 나의 실력과 재주로 인한 것으로 착각하고 교만하게 행동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주가 얼굴을 가리심으로써 근심이 되는 길로 밀어 넣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로 살아왔으면서도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았던 우리의 교만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근심케 하시는 일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5절)고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를 고치시고 우리 영혼을 음부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은총으로 진노하시고 근심이 있게 하셨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노염은 잠간이요 은총은 평생이라는 노래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된다면 신자는 어떤 고난에서도 여호와의 은총을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근심이 있게 하시는 이유를 알기에 오히려 근심으로 인해서 여호와의 은총을 노래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 됨 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시고 계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고난이 있을 때 고난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계속될 때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다면 고난은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보지 못함으로써 무작정 고난이 멈추기만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계속되는 고난에서 내게 대해 침묵하지 않으시고 나를 고치시고 영혼을 살리시기 위한 은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에 다윗 같은 감사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발견한 하나님의 일은 자기 백성을 음부에서 끌어 내어 살리시는 것입니다.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지 않고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은총임을 안다면 고난까지도 나를 고치시고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사건으로 바라볼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행하시는 은총의 일인데 병고침 받고, 기도 응답받고, 복 받는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결국은 모두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거나 복을 받는 일 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발견할 수 없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다윗처럼 주를 높이고 감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다윗이 발견한 것은 자신을 고치시고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시고 살리시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음부에서 건지시기 위해 근심이 있게 하시는 것도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다윗에게는 귀한 것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의 일로 인해 주를 높이는 것입니다. 1절의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는 내용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다윗의 대적이 다윗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윗을 음부로 무덤으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다윗을 무덤에서 끌어내심으로써 다윗의 대적으로 하여금 기뻐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의 일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로 인해서 대적이 기뻐하지 못하도록 일하십니다. 그것이 곧 우리를 무덤에서 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라면 하나님의 그 일하심이 세상 무엇보다도 귀한 보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평생토록 중지됨이 없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살아가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를 높이고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일하셨고 오늘도 내일도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일이 때로는 평안으로 때로는 근심이 되는 쪽으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 놓인다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 되신 자리를 지키고 계시고, 우리에 대하여 아버지 되시는 책임도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신자가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확인할 것은 하나님이 그처럼 공의와 신실하심으로 쉬지 않고 일하시기 때문에 나 같은 자도 음부로 끌려가지 않고 고침 받으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며, 이 신앙이 신자로 하여금 주를 높이게 하고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8-10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고 노래합니다. 인간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무덤에 내려간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면 유익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무덤에서 건져줄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 살아가지만 그 돈 조차도 무덤에 있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를 못합니다. 모두가 허망하고 헛될 뿐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구할 것은 무덤에서 건져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덤에서 건지시고 끌어내기 위해 일하심을 알았기 때문에 근심이 되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12절)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인가를 앎으로써 범사에 주를 높이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