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강) 시편 29:1-11 여호와의 소리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신자가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대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 따위에는 관심이 없이 성경을 보기 때문에 성경에서 찾는 것은 결국 자기가 원하는 세계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다’라고 떠드는 것도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잘 살 수 있는 자기 세계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오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는 자기 세계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기가 바라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계가 어떤 것인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은 분명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습니다. 방치된 채 인간에 의해서 유지되고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을 단지 운영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기가 바라는 세계를 꿈꾸고 원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뜻과는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충돌은 성경을 거부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생각에 맞는 성경 해석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해석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요?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과 하나님이 바라시지 않은 세상을 구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축하신 후에 장차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세상은 남기시고 그렇지 않은 또 다른 세상은 영원한 심판에 가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 즉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내가 바라는 세상은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포기해야 할 세상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의 소리라는 말이 일곱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여호와의 소리를 뇌성처럼 힘 있고 우렁찬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3절의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라는 내용을 보면, 여호와의 소리를 많은 물 위에서 뇌성을 발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많은 물은 바다처럼 넓은 물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폭풍우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즉 폭풍우와 함께 뇌성을 발하시는 것이 여호와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호와의 소리는 힘 있고 두렵고 위엄이 있으며 우리를 떨리게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에서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고 말하는 것은 레바논의 존귀한 백향목도 꺾어 심판해 버리시는 여호와의 권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6-9절까지의 내용도 여호와의 소리의 권세와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소리에는 여호와의 권세와 능력과 위엄이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가 여호와의 소리를 들었다면 자연히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 자로 살아가는 우리가 여호와의 소리를 통해서 과연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접하느냐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접한 자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모든 영광을 여호와께로 돌리게 됩니다. 1,2절에서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찌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여호와께 경배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며 경배하게 되는 것은 진심으로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을 접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신자에게서만 나타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권능 있는 자는 세상의 권세와 능력으로 살고자 하면서 여호와 두려운 줄을 모르는 자를 뜻합니다. 세상의 권세와 능력을 힘으로 여기고 의지하는 그들에게는 여호와의 소리는 그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일 뿐이기에 아무리 여호와의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그 소리에서 여호와의 위엄과 권세와 능력을 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현재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 우리들의 실상이 아닌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신자가 여호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물론 자연을 통해서도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볼 수는 있지만 자연이 우리의 죄를 보게 하면서 여호와께 굴복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때때로 자연 재앙으로 인해 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있겠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다가올 위해를 감지함으로 인한 잠깐 동안의 두려움이지 여호와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두려움과 굴복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리고 여호와의 권세와 위엄과 능력을 접하면서 진심으로 여호와를 두려워하면서 굴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굴복은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여호와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여호와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전적으로 여호와의 능력과 권세와 위엄에 굴복한 자로서 여호와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영원히 남기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눈에 보이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니기에 장차 멸하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는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는 죄인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담겨 있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죄인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인자와 자비와 긍휼이 담겨 있는 것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에는 죄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가 있고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 앞에서 신자는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자신이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와 긍휼로 인해 오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아남을 입고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됨을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고백하면서 내 죄로 인해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독생자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의 죄값을 치르게 하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고 말씀하는데 홍수 때에 좌정하신 여호와는 노아 홍수 때 세상을 심판하신 여호와를 말합니다. 그 여호와가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이 여호와가 지금도 왕으로 좌정하고 계신다면 분명한 것은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사람의 마음과 그 생각이 악한 것을 간과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여호와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고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며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 아니라 신앙의 전부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세상의 죄와 악함을 고발하고 책망하는 여호와의 소리를 드러내는 것은 꺼려합니다. 사람들이 즐겨하지 않고 거북해 한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는 여호와의 소리가 거북스러워 그 소리를 외면하고 싶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소리 앞에 굴복하고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고 말하는데,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힘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경쟁에서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것이겠습니까? 여호와가 주시는 힘은 그러한 것이 아니라 낮아짐에 처하고 어려움에 처해도 감사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말합니다.
신자가 여호와 앞에 진심으로 굴복하여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자신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어떤 은총을 누리고 있는가를 보게 되는 그것이 낮아진 자리에서도 여호와로 인해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만이 누리는 평강의 복입니다. 이 복은 여호와의 소리 앞에 제대로 섰을 때 누릴 수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신앙테크 > 시편과 잠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8강) 시편 27:1-14 여호와를 향한 열망 (0) | 2009.05.29 |
---|---|
[스크랩] (29강) 시편 28:1-9 여호와를 아는 자의 기도 (0) | 2009.05.29 |
[스크랩] (31강) 시편 30:1-12 주를 높이는 이유 (0) | 2009.05.29 |
[스크랩] (32강) 시편 31:1-24 강하고 담대하라 (0) | 2009.05.29 |
[스크랩] (34강) 시편 33:1-22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0) | 2009.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