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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9강) 시편 28:1-9 여호와를 아는 자의 기도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54

 

 

 

 

 

 

 

 

 

(29강) 시편 28:1-9  여호와를 아는 자의 기도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시편 28:1-9)

 

 


<설교>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의 기도와 알지 못한 자의 기도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다른지는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의 기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의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1절의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라는 내용의 기도를 보면, 다윗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주께서 다윗에 대해 잠잠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기도가 어떻게 생각하면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 있다면 항상 하나님이 나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본다면 다윗이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잠잠하시면 자신의 인생은 망하고 말 것임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전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두려움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잠잠하시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많은 신자들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침묵하시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기도에 응답해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 인생을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의 소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기도한 대로 성취되는 것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단지 기도 응답을 구하는 차원에서 주께서 잠잠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무덤에 내려가는 것은 음부로 내려감을 의미하며 그것은 영원한 멸망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다윗은 주께서 자신에게 잠잠하시면 자신의 운명은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자들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2절의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는 내용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의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는다는 것은, 주의 성소에서 베풀어지는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만이 자신을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의 인생과 같지 않게 한다는 것을 믿고 있는 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덤에 내려가는 운명에서 자신을 구출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여호와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자신을 멸망에서 구출할 수 있음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여호와를 나의 반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외면한 채 우리 멋대로 반석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저 내 육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시는 여호와라는 의미에서 ‘나의 반석’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던 나의 반석과 다윗이 의지했던 반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하고 멸시하는 것을 멈춰야 할 것입니다. 다윗이 두려워했던 것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은 운명에 처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들의 운명이 어떻다는 것은 신자들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지식이 믿음이 되어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의 운명을 내다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은 자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신자라면 세상에서 실패한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이 더욱 큰 두려움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께 자신을 붙들어 주기를 기도할 것이고, 다윗처럼 자신의 그러한 기도에 귀를 막지 말아달라고 호소할 것이고, 잠잠치 말아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께 맡긴 신자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엉터리고 형식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기도에서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담겨 있는 자신의 열망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살핌으로써 자신의 마음에 대해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를 보면 다윗은 3절에서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 함께 나를 끌지 마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기도에는 무덤으로 내려가는 악인과 행악하는 자와는 같은 길에 서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들의 마지막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그들과는 구별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악인과 행악하는 자들이 어떤 길을 가는가는 관심이 없이 다만 그들이 누리고 있고 소유한 것을 부러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자를 구별하여 택하시고, 세상이 누리지 못한 하늘의 은총으로 우리를 대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악인과 행악하는 자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악인과는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3-5절의 “저희는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저희의 행사와 그 행위의 악한대로 갚으시며 저희 손의 지은대로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보응하소서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말하는 악인의 마음에 있는 악독은 윤리적으로 악한 행동이 아니라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의 윤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악독이라고 말하고 여호와께 보응해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반발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은 것은 여호와의 구원 사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서 탄생한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구원 사역에 대해 누구보다도 감사하고 찬송해야 할 민족이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종이었던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찬송할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여호와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여호와의 구원 사역을 잊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응으로 멸망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요? 무덤에 내려가는 우리를 붙드시고 무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거하도록 인자와 자비를 베풀어주신 여호와의 행하신 그 일을 감사하면서 행여 여호와의 구원을 잊을까 두려워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진심으로 자신의 신앙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로부터 멀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여기면서 마음은 온통 세상에 둔 채 여호와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악독을 행하고 있는 자가 바로 나 자신임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셨음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하늘에서 무슨 음성을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았기에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기를 원하는 자신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설령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자신을 책망하시고 징계하셔서라도 하나님께로 끌어가실 것임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7-9)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끝까지 붙드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여호와가 힘이요 방패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하나도 잃지 않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구원의 하나님이 목자가 되신다는 것이야 말로 삶을 든든하게 합니다. 문제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잠잠하실 때 내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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