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 시편 27:1-14 여호와를 향한 열망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자로서 왕이시고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어떤 소원과 열망을 갖고 있습니까? 신자가 하나님께 아무런 열망도 소원도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됩니다. 물론 신자의 소원과 열망이 온통 육신의 문제를 향하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지만 아무런 소원과 열망도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 또한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아무런 뜻도 목적도 없이 그저 교회를 찾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시편 저자가 하나님을 향해 가졌던 소원과 열망은 무엇이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27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이 어떤 시기에 이 시를 기록하였는가는 정확하지 않지만 내용을 보면 아마 사울에게 좇기는 때를 배경으로 이해하면 좋을듯합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윗을 두렵게 할 수 있고 무섭게 할 수 있는 대상은 다윗의 대적, 즉 다윗의 원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원수 앞에서 다윗은 여호와가 나의 빛이고 구원이시니 두려워 할 자가 없고, 여호와가 생명의 능력이시니 무서워 할 자가 없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다윗의 이 시에 동참되려면 무엇보다 우리를 두렵게 하고 무서워 떨게 할 대적, 즉 원수가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나에게는 나를 두렵게 하고 무섭게 하는 원수가 존재하는가?’부터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려움과 무서움의 대상인 원수가 없는 상태에서는 여호와가 빛이고 구원이시라 두려움이 없다는 다윗의 말의 깊은 의미에 전혀 접근할 수가 없게 될 것이고, 결국 국어 책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 이러한 대적자가 없다는 것은, 신자가 주의 이름과 연관된 삶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으로 진단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우리의 개인적인 원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원수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과 연관되어 등장하는 것이 원수이기 때문에 신자가 주의 이름과 연관된 삶에 있지 않다면 자연히 원수 역시 등장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의 이름과 연관되어 사는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주의 은혜를 높이고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주의 이름을 높이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원수는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로 하여금 주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에 몰두하도록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사단의 역사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하고, 사단의 역사야 말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강대한 적이며 원수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어야 비로소 빛이시고 구원이시며 생명의 능력이신 분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승리를 믿기 때문에 원수에 대해서도 두려움과 무서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다윗은 원수에 대해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원수는 나를 죽이기 위해 다가옵니다. 그러나 신자 한 개인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주의 이름을 훼방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사실 신자의 개인적인 원수가 아니라 주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주의 이름으로 살지 않는다면 원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청하였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소원이고 열망이었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소원이고 열망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과연 이런 소원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신자가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다윗이 말한 여호와의 집이라는 것이 보석으로 꾸민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꿈꾸고 살아가는 호화로움을 누리기 위해 여호와의 집을 열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그 아름다움을 사모하면서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은 오직 여호와의 집에서만 나타나는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미적이고 지적이며 선한 행동을 의미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빛이 되셔서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다윗이 앙망하는 여호와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이 소원하고 열망했던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빛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풍성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집에서 거한다면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고 무서울 것이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모든 말들은 앞서 말한 대로 두려움과 무서움의 대상인 원수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끌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능력의 도움을 받아서 원하는 육신의 일이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다윗의 소원과 열망 따위에는 관심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주의 이름만을 높이고 자랑하기 위해 살고자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의 본분임을 잊지 않는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주의 이름보다 내 이름에 마음을 두게 하고, 주님을 높이는 것보다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에 더 마음을 두게 하는 모든 유혹들에서 원수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수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기에 빛이시고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의 은밀한 그 곳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곳으로써 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지성소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은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그 인자와 자비하심으로써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서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 아래 거하는 것이야 말로 이미 승리한 자의 삶이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시를 보면 풍성한 기쁨과 찬송과 승리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풍성한 기쁨과 찬송과 승리를 담고 있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은밀한 곳에 지키시고 숨기신 것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을 하나님의 은밀하신 십자가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즉 십자가에 가득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 아래 자기 백성을 붙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십자가 사건만으로도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와 사랑을 누릴 수가 있으며,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승리를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다윗의 기쁨과 승리의 노래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그 기쁨과 승리를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그런 마음이 있다면 여호와께 아무런 소원과 열망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다윗이 누렸던 하나님의 집에서의 기쁨과 승리를 나도 알게 해 주십시오. 사도들의 기쁨과 찬송을 나도 누리게 해주십시오’라는 소원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7편은 7절부터 그 분위기가 달라짐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승리와 기쁨을 노래하던 다윗이 갑자기 고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여호와께 부르짖을만한 고난의 때가 없었겠습니까? 여호와의 집에서의 승리와 기쁨을 알았다고 해서 평생을 승리와 기쁨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다. 원수에게 둘러싸일 때 도 다시 두려움에 빠지고 무서움에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진심으로 여호와를 찾고 긍휼을 구할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27편은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13,14절)는 말로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신자가 바라고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죽음의 세계 속에서 참된 생명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다윗처럼 생명이신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할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때문에 바울처럼 비록 세상에서 낮은 자리에 처하게 된다고 해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말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승리를 누려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만이 가장 든든하고 안전한 피난처로 바라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게 하신 그 사랑을 감사하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에 처할 수록 이 찬송은 더욱 더 높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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