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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7강) 시편 26:1-12 나를 판단하소서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55

 

 

 

 

 

 

 

 

(27강) 시편 26:1-12  나를 판단하소서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26:1-12)

 


<설교>


인간은 누구 앞에서도 ‘나는 완전하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실수와 허물이 있기 마련이고, 설사 외적인 행동에 있어서 흠이 없다 하더라도 그 속까지 깨끗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을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1절)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어떤 죄를 범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말하고, 또한 여호와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기도대로 여호와가 다윗을 판단한다고 하십시다. 과연 여호와는 다윗을 어떻게 판단할까요?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다윗을 어떻게 판단하시는 분입니까? 그보다 앞서 다른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다윗을 판단한다면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이미 모든 죄를 회개하였으니 무죄하다고 판단하시겠습니까? 또한 다윗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고, 사람은 다 누구나 연약하며 다윗과 같은 죄를 범할 수 있으니 용납하고 넘어가겠습니까? 어쨌든 누구라도 다윗에 대해 ‘저 죽일 놈, 지옥 갈 놈’하면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닌, 지금 여러분 주위에 함께 하고 있는 타인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하십니까? 다윗에 대한 동일한 마음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인간의 판단은 수시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수가 동일한 행동을 했다고 해도 동일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판단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 대해 동일한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은 항상 자기 마음에 드는 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판단을 바라보고 믿는 신자라면 자기 기준과 자기 취향을 앞세워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서로 비판을 해봐야 결국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을 믿고 여호와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2-4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고 기도하는 여기에 그 답이 있습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이 자신의 목전에 있다고 합니다. 즉 다윗이 바라보고 믿는 것은 주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모든 죄를 가리시고 덮어주시는 주의 인자하심이 여호와께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근거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는 여호와가 아니라 오직 인자하심과 긍휼로서 다가오시고 판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판단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바라보고 믿었습니다. 다윗의 모든 뜻과 마음은 주의 인자하심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어떤 환난과 시련도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향한 다윗의 뜻과 마음을 흔들 수가 없을 정도로 여호와의 인자를 향한 다윗의 마음은 강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과연 그러한지 여호와께서 시험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 믿음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마음이 붙들려 있는 자신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자신의 마음이 붙들려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자신의 마음을 붙들었기 때문에 어떤 시험과 시련에서도 그 뜻과 마음이 여호와만 향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봤습니다. 주의 인자와 자비는 자신의 어떤 죄와 허물도 다 덮으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 안에서 죄인은 없습니다. 모두가 완전한 자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행위의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 안에서의 자신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 죄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 안에서는 깨끗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주의 인자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면 그는 완전함에 행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의지하면서 완전함에 행하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자신의 의와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주의 인자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에게는 추호도 의가 될 만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인자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의와 공로를 자랑한다면 그가 말하는 믿음은 거짓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의 인자를 믿는 자는 오직 주의 한없는 인자와 자비하심을 높이고 자랑할 뿐입니다.

 

 

 


이처럼 주의 인자를 믿는 신자에게는 주의 인자가 아닌 인간의 의와 공로를 높이는 자들이 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3절 중간부터 5절을 보면 다윗이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허망한 사, 간사한 자, 행악자, 악한 자라는 것도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높이지 않고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인간의 의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을 미워하고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다윗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한다고 말합니다(8절).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은 성전을 말합니다. 아시는 대로 성전에는 제사가 있으며, 제사는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해 죄가 용서되는 인자와 자비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주의 인자와 자비가 있는 주의 집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심정이 여러분께 그대로 전달되고, 다윗과 같은 고백이 여러분에게서 나온다면 과연 어떤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의를 세우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인간의 집회, 즉 눈에 보이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인자와 자비하심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겠노라는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교회는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모여서 교회를 이루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배우고, 우리가 알게 된 주의 인자와 자비하심으로 서로 교통하면서 한 몸의 관계를 확인하고, 또한 나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끊임없이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떤 순간에도 그 마음과 뜻은 오직 그리스도를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9,10절을 보면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저희 손에 악특함이 있고 그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라고 말하는데 이 말에서 다윗이 마치 자신을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도 역시 주의 인자하심 안에서의 자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이 말하는 죄인은 악한 일을 행한 자의 의미가 아니라 주의 인자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 아래 있지 못하고 긍휼하심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종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자기 영혼을 거두지 말아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끝까지 주의 인자하심 아래 거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아는 믿음의 사람의 기도를 대하게 되면 우리가 얼마나 허망하고 쓸데없는 종교에 치우쳐 살아갈 때가 많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인자와 자비하심보다 다른 것에 더 뜻과 마음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실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경배의 모든 내용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알았고 만난 사람들의 기도와 찬송과 감사와 경배의 노래들이 지금 우리가 어떤 허망함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구속하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내 발이 평탄한데 섰사오니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는 기도로 끝납니다. 이제는 완전함에 행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입니다. 자신을 완전케 하시는 주의 인자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발이 평탄한데 섰다는 말도 주의 인자 아래 있는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환난과 시련이 있다고 해도 주의 인자와 긍휼 안에 있는 자신은 안전하다는 의미로 평탄한데 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기도와 찬송은 주의 인자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모든 뜻과 마음이 주의 인자하심을 향한 신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기도며 노래입니다. 사실 주의 인자하심에서 마음이 멀어져 있으면서 신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도하시고 찬송합니까? 그렇다면 다윗과 같은 심정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도 찬송도 모두 허망한 것이고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라면 주의 인자하심을 알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주의 인자에 마음이 붙들리고 모든 뜻과 마음이 인자와 자비하심을 향한 채 어떤 풍파와 환난에도 흔들림이 없는 그런 믿음, 그런 마음을 소원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임을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복이 자신에게 임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 마음을 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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