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강) 시편 16:1-11 여호와는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1절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지만, 문제는 다윗의 고백에 우리가 얼마나 동감하는가? 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보호자로 믿으며 하나님께 피하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신뢰와 확신으로 이 말씀을 대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생각건대 분명한 확신과 신뢰로 이 말씀을 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해오던 지금까지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경험을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입니다’라는 말도 수없이 하지만 결과는 항상 그대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때로는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라는 의심과 갈등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입니다’라고 고백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막연한 기대감에 의한 것일 뿐 확고한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얼마 전에 ‘빈자의 성녀’라고 불리던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썼던 편지가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평소 자신의 심경을 신부들에게 편지로 써 보냈던 40여 편을 책으로 만든 것인데 거기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테레사 수녀의 갈등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갈등의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은 당신을 매우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 침묵과 공허가 너무 큽니다. 나는 보려 해도 볼 수 없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으며 기도할 동안 혀를 움직이려고 해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본문의 다윗의 고백보다는 테레사 수녀의 갈등과 고백이 더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까?
테레사 수녀는 이런 갈등의 편지를 신부에게 보냈으면서도, 그해 노르웨이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예수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나는 빈자들 안에도 있고 우리가 주고 받는 미소 안에도 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고백이 세상이 알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신부에게 보낸 갈등의 편지는 자기 신앙에 대해 갈등하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갈등을 했다는 것 때문에 그 신앙에 대해 뭐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성을 두고 갈등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평생토록 가난한 자들을 도우면서 우리가 보지 못한 비참하고 참혹한 현장들을 수없이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런 현장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들을 이렇게 버려두고 계시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을 그렇게 참혹한 상태에 살게 하시는 분명한 뜻과 이유를 알고 있다면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갈등과 의심과 혼란이 있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한 아무런 갈등이 없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보이는 현실에 매어 살 수 밖에 없는 한계의 인간이 눈에 보이는 세상 현실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 없이 확고하게 믿는다는 것은 거의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다윗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도 그런 갈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3:1,2절의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라는 내용에서도 다윗의 갈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는 하나님으로 인해 갈등한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갈등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갈등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의심이 있고 갈등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내 마음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가를 안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고, 또한 자기 백성을 버려두고 계셨던 것도 아니라 다만 내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고 고백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형편과 환경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대적이 물러간 것도 아니고 여전히 위기 상황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본다면 다윗은 육신적인 문제와 형편이 나아지고 해결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러한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 피하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을 우리의 육신적인 문제를 벗어나고 하나님께 맡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그러한 고백을 하는 이유와 뜻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이 성경을 보면서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이 이점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내 형편과 사정에 무작정 끌어 당겨서 소위 적용이라는 것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한국 기독교의 대부분의 신앙의 방향과 그 모습들이 성경의 말씀과 전혀 다르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이 주께 피한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셔서 위기 상황이 물러가고 편안하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의미로 그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본문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10,11절을 보면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두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니 하나님은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고,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시는 분이고 주께 생명의 길이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의 유일한 해결책인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위기 상황에서 죽음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을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과 즐거움만 남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께 피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2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고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복은 무엇입니까? 다윗처럼 여호와가 복이라면 하나님께 복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이신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써 이미 복이 함께 하고 있는데 복을 달라고 한다면 여호와가 복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인데 하나님을 믿어서 잘된 것이 뭔가? 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원하는 땅의 것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되지도 않는 것에 집착함으로써 여호와가 복이라는 말의 기쁨과 즐거움까지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여호와를 바라본다면 여호와가 생명이시고 구원이시고 때문에 여호와만이 복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10절에서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신다는 것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으로 나오는 것은 부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은 죽으면 천국 간다는 것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다시 부활할 것까지 소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행 2:29-32절에서는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소망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고 말하는 것도 우상에게는 생명의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자로서 생명의 능력이 없는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린다는 것을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능력이 없고, 구원의 능력도 되지 못하는 땅의 것을 그토록 소망하고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8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가시고 마귀의 어떤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지키시는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영혼을 굳게 붙들고 요동치 않게 하는 것입니다.
5,6절의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는 내용도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곧 신자에게 소득이 되시고 산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늘에 소망을 두는 신자라면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진 하늘의 넘치는 복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이야 말로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소득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목자 되신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신자는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살아갈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복은 그리스도입니다. 산업도 소득도 그리스도입니다. 분깃도 역시 하늘에 있습니다. 놀라운 이 복을 놓치지 마시고 그리스도 앞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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