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시편 15:1-5 주의 장막에 유할 자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본문은 다윗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1절)라는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막은 알다시피 성막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나와서 제사함으로 죄가 용서되고 거룩한 이스라엘로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성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산은 이 성막이 세워져 있는 시온 산을 말합니다. 이 성산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장막과 성산이 공통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고, 따라서 장막에 유할 자나 성산에 거할 자라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자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자가 누구입니까? 라는 것이 1절의 내용인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곧 거룩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누구든 죄가 깨끗하게 되고 거룩함을 입지 않고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질문을 바꾸어 말하자면 ‘누가 거룩한 자입니까?’ ‘누가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까?’라는 물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찌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2-5절)고 말합니다.
다윗의 이 말은 이렇게 하면 거룩한 천국 백성이 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는 어떤 방법이나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다. 즉 사람은 무엇으로도 자신을 거룩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슨 의미로 그러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까? 15편의 내용은 14편의 내용과 비교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14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부패하고 가증한 행실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들은 떡 먹듯이 여호와의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망령된 행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행한 망령된 행실로 인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옥에 갈 자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나올 것은 선이 아니라 망령된 행실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망령된 행실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의 특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15편에서 말하고 있는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거룩함을 입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백성들의 특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하는 자들의 부패한 행실은 이웃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힘없는 약자라는 것만 바라본 채 약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잊어버리고 압제함으로써 그들의 부패함과 가증한 행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는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 역시 이웃 관계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음에 진실을 말하고, 혀로 남을 비방하지 않고, 벗에게 행악하지 않고, 이웃을 헐뜯지 않고,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고, 약속한 것은 손해가 되어도 지키고, 돈을 빌려주고도 이자를 받지 않고,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다윗이 말하는 이웃관계를 통해서 드러나는 이 모습들은 구원 받는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자들에게서 나타나는 거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윗이 제시하는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으로 오늘 우리들을 비춰 보십시다. 과연 우리에게서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양심껏 살고 타인으로부터 착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망령된 행실로 가득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말하는 모습들 하나하나는 사실 우리들의 부패함과 악함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시 14:2,3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는 말씀이 곧 나 자신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나님을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고, 착한 척하지만 결국 선을 행하지 않고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더러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의 말은 우리의 더러움을 보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시 14:7절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온에서 나오는 구원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시온에서 나오는 구원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죽는 희생 제물로 인한 구원을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절감하지 않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장막에 유할 자의 모습은 언약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웃에 대해 정직과 진실함으로 대했으며 이웃을 참소하지 않고 오히려 이웃의 허물을 위해 희생하는 길을 가셨으며, 죽는 길도 피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만이 장막에 유할 거룩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에게서 그러한 사랑을 나눔 받음으로써 하늘의 무한한 복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패하고 악한 것 밖에 없는 우리를 참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멸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리는 자리까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신자라면 그에게서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옳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신자의 마음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입으로 말한다고 해서 믿는 자가 아닙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마음에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 증거가 다윗이 말한 본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은혜가 신자로 하여금 다윗이 말하고 있는 이웃관계로 인도해 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이 내용 앞에서 내가 부패하고 가증한 자임을 깨닫게 될 때,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 가를 절감하게 되고, 그리고 그 은혜가 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이 나를 대하신 것과 같은 모습으로 이웃을 대하도록 만들어 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세상 일이 너무 바쁘고, 돈 버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하다못해 성경이라도 보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라도 되는데 성경조차도 외면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볼 기회를 다 놓치고 살아가버립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의 은혜의 깊음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겠다고 아무리 결심한다고 해도 내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예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로 이웃을 대하게 되는 것인데, 정작 내게 예수님의 은혜의 깊음이 없기 때문에 결국 옛 본성 그대로 이웃을 대하면서 무시하기도 하고 업신여기기도 하고 비방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은혜의 깊음을 누리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은혜의 깊음은 교회 다닌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패하고 가증한 자신의 본래의 자리에서 시온에서 나오는 구원을 바라볼 때, 즉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깨달은 그 은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몸을 연약한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우리를 위해 그 몸을 내어 놓으심으로 우리를 하늘의 부요로 가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으로 부요하게 된 그 부요함에 이웃이 참여하도록 힘써야합니다. 그처럼 이웃을 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힘써야 하는 관계에서 이웃을 참소하고 비방하고 거짓말로 이웃을 해치는 모습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자는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은 자로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새로운 질서가 다윗이 말한 본문의 내용이고, 그것이 곧 주님과 함께 거하는 거룩한 자의 특성인 것입니다. 이렇게 안하면 지옥 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빛으로 살아가는 신자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테크 > 시편과 잠언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13강) 시편 13:1-6 울다가 웃는다 (0) | 2009.05.29 |
---|---|
[스크랩] (14강) 시편 14:1-7 세상의 형편 (0) | 2009.05.29 |
[스크랩] (16강) 시편 16:1-11 여호와는 (0) | 2009.05.29 |
[스크랩] (17강) 시편 17:1-15 굳게 지켜야 할 것 (0) | 2009.05.29 |
[스크랩] (18강) 시편 18:1-3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0) | 2009.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