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강) 시편 17:1-15 굳게 지켜야 할 것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1-15)
<설교>
1절을 보면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정직한 기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로 표현하면서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직한 기도가 무엇일까요? 정직하다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인데, 거짓말을 하지 않는 기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아마 많을 것입니다. 생각이 안나십니까?
여러분은 기도하시면서 마치 진심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처럼 죄인 됨을 고백하면서 십자가를 말합니다. 또한 세상을 싫어하는 것처럼 천국을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세상의 것을 귀하게 보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이 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은 온통 반대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과 전혀 다른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나와서는 자신이 서 있는 길을 속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우리의 기도는 결코 정직한 기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윗과 다른 점입니다. 즉 다윗의 기도를 그대로 내게 끌어 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라고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주가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께로부터 판단 받고 싶은 자기 행위를 3절부터 말합니다. 3-5절의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좇아 스스로 삼가서 강포한 자의 길에 행치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말하는 정직함은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는 솔직하다는 표현이 아니라 다윗을 대적하는 무리들로 인해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입으로 범죄치 않고 주의 말씀을 굳게 지키고 주의 길로 행하며 실족치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이 판단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정직함은 원수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상황이면서도 말씀을 지키며 주의 길로 간 것을 말합니다. 즉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말하는 정직함은 오늘 우리와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대로 정직하게 세상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맞는 말을 한다고 해도 삶으로는 자신의 말을 부인하고 뒤엎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가 다윗처럼 나를 판단해 달라는 말을 하나님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우리가 감히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다윗과 같은 기도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듣지를 않으십니다. 거짓말투성이인 우리 기도를 들으실리 만무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속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기도가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때문에 신자는 예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 앞에 거짓말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나를 보지 마시고 나의 죄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을 보시고 예수님의 뜻을 내게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내 뜻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의 뜻을 내게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말쟁이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정직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 할 때 다른 말 할 것 없이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토대로 해서 우리를 향한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령 병든 사람이 기도할 때 성경을 덮은 채 기도하면 다만 자신의 병이 낫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토대로 기도하게 되면 병조차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인간의 나약함을 알게 하시고, 내 육체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게 하시는 주의 뜻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병이 든 상태에서도 ‘이 은혜가 내게 족한 줄로 여기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욕망을 초월한 채 진심으로 은혜를 알고 싶어 하는 기도이며 정직한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고난에서도 변함없이 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우리의 기도는 다윗의 기도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서 힘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도 주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말씀에서 떠나지 않도록 지켜 달라는 기도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정직한 기도이며 신자가 고난 중에 굳게 지킬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6-9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는고로 내가 불렀사오니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를 그 일어나 치는 자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부르면서 하나님은 하나님께 피하는 자를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뜻은 대적으로부터 환난을 당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주의 인자하심으로 지켜주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나 지켜주심과 같은 말들을 환경적인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항상 눈이 가려진 채로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생각하고 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께는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생명의 나라로 인도해 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날개 아래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지키심을 외면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는 중요한 일을 정작 우리는 전혀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환경만 좋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려고만 할 뿐입니다. 힘든 일이 없이 평안히만 살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복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곧 세상이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보지 못한 무지의 결과며 어리석음이고 눈이 가려져 있는 실상인 것입니다.
세상은 편히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설령 몸은 고달프고 고통이 있는 길로 인도 받는다고 해도 그 길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보게 되고, 나의 연약함을 바라보면서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말씀의 길을 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최고의 복의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이제 우리의 걸어가는 것을 저희가 에워싸며 주목하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을 가는 사람의 형편입니다.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와 같은 대적이 믿음의 길에 엎드린 채 신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처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다윗이 말하는 원수의 특성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 때문에 자녀로 만족하고, 대대로 그 유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후손에게 넘겨줘서 자자손손대대로 내 가문이 번성하기를 원하는 그런 사고방식이 곧 원수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벗어나야 할 유혹인 것입니다.
이 유혹을 벗어나고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 신자가 끝까지 소망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쟁이에 불과한 자신을 알고 그리스도만이 희망이고, 그리스도로 만족하겠다는 그 믿음이야 말로 신자를 살리는 귀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그러한 믿음의 길을 가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깨어났을 때, 즉 부활했을 때 다른 것 필요 없이 오직 주와 함께 거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소망하는 기쁨은 마지막 날 의롭다는 판결과 함께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기쁨을 소원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로 하여금 의의 길로 가도록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정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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