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 시편 14:1-7 세상의 형편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사람은 누구나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합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행복을 위해서는 필히 국가의 경제가 좋아야 하고, 국가의 경제는 또한 정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안정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해도 사회적 분위기가 문란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덕의 실천까지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안다고 해도 모른다고 해도 인간의 삶이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산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자로 산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좋은 삶의 질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가 자신의 삶의 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비록 신자라고는 해도 그런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망하는 것도 아님을 잘 알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삶의 질에 영향을 주는 일에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의 형편이며 우리의 형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모르는 문제가 세상에서의 삶의 질에는 영향을 주지 않지만 내세의 문제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들만이 생명의 나라에 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면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결국 내세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내세의 문제를 떠나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종교일 뿐이고 형식만 신자로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을 어리석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다’고 하면 지혜로운 것입니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있다’라고 하지 없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해서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입니다. 즉 그 마음이 하나님이 없다고 외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다스림을 받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뜻대로 살아갈 자로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갈 자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초에 인간에게는 자기 욕망이나 자기 계획 등이 불필요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인간이 스스로의 계획을 갖게 됩니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위해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을 찾으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형편은 이렇습니다. 2,3절에서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다 치우쳐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삶입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을 세상이 순순히 인정 할까요?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볼 때 선을 행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보는 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선이 아니라 단지 인간관계에서의 선을 얘기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인간관계를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의 바른 모습을 선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는 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는 것은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 있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마음에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증거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죄로 가득 하다는 것도 살인과 도둑질 사기 등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가득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세상에 선을 행하는 자는 없습니다. 모두가 더러운 자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자들로만 살아가는 세상이며 바로 우리들입니다. 때문에 죄로 가득한 세상 안에서 세상 것을 가지고 경쟁한다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제 아무리 세상의 것을 소유 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죄인이며 망할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는 강자 약자라는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세상의 형편에서 신자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절을 보면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고 말합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라는 말은 죄악을 행하는 자 가운데도 무지하지 않는 자가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무지한 자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뭔가 하면 떡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하는 자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약자를 일컫습니다. 힘이 없기 때문에 여호와만 의지할 수밖에 없고 여호와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자들을 힘 있는 자들이 괴롭히고 억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돈이 있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힘으로 여기며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이며 무지의 증거가 바로 약자를 떡 먹듯이 먹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무지한 그들은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형편이 어떠한지 보지 못하고 그래서 여호와를 부를 필요도 느끼지를 못하고 살아갑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는 세상에서 여호와를 부른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심판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죄악을 행하는 자로 살아가지만 무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 때의 사람들의 무지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세상의 형편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항상 악한 것으로 인해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셨는데, 정작 노아 시대 때의 사람들은 그러한 형편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심판에서 노아를 건질 것은 방주 밖에 없는 것처럼, 죄악으로 행했던 자를 심판에서 건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죄악 가운데 행하며 세상의 형편을 보고 사는 신자라면 여호와를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여호와의 인자와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약자를 억압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떡 먹듯이 먹었던 무지한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없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가 없어도 괜찮다는 식으로 살아가지만 심판의 때가 되면 그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의인의 세대에 계십니다.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계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를 구함으로써 의인으로 여김 받는 세대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6,7절도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를 구하는 약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온다는 것도 시온에 있는 언약궤로부터 하나님의 인자와 구원이 나오고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세상의 형편을 보십시오. 그리고 죄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자신을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이 왜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인자와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행해야 할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죄악을 행하며 삽니다. 그렇다고 다 무지하지는 않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의 실상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신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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