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강) 시편 18:1-3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신자가 기도할 때 하나님에 대해 여러 가지 수식을 붙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등 여러 가지 수식어를 붙이는데, 저는 그런 기도를 들을 때마다 ‘과연 저분이 저 말의 의미를 알고 하는 것인가?’ 또한 ‘진심으로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믿는 믿음으로 하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면서 멋진 말을 모두 동원한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진심이며 믿음입니다. 진심과 믿음이 없이는 어떤 멋진 말도 공허한 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무려 아홉 가지의 수식어를 붙여서 말하고 있습니다.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찬송 받으실 여호와 등으로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표현을 모두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18편이라고 적힌 옆을 보면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뢴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파란만장했던 전 생애를 걸쳐서 체험했던 하나님을 한 치의 과장도 없이 그대로 고백한 시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그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경험한 것이 어찌 아홉 번 뿐이겠습니까? 골리앗과의 전투로부터 시작을 해서 백성들이 사울보다 다윗을 더 칭송한 것으로 인해서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게 되었고 신하와 아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과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도움으로 인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적군인 블레셋으로 망명을 하기도 했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겪은 고난은 우리의 생각이상입니다. 4절부터의 내용을 읽어보면 다윗의 고난은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은 그 일생이 환난과 대적이 떠나지 않은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다윗은 그러한 고난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런 체험을 원하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앙을 부러워합니다. 나도 저런 신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은 싫어하고 피하려고 합니다. 결국 진심으로 여호와를 알고 여호와만 신뢰하는 신앙으로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 없는 큰 신앙을 가짐으로써 자기 이름을 높여 보고 싶은 욕망인 것입니다. 즉 큰 믿음이 욕심나는 것이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하심을 체험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믿음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 훈련 받고 고침 받는 과정을 겪으면서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방에 편히 앉아서 하나님을 생각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윗처럼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홉 번에 걸쳐서 각기 다른 말로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실제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지 않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환난 때마다 대적이 다르고 위급한 상황과 형편도 다르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법도 다 달랐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사하게 느끼는 내용도 각기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의 고백은 비슷한 사건이나 같은 상황과 형편에서 체험한 하나님을 다양하게 설명한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얼마나 실감하십니까? 죽을 고비를 넘기는 환난이 없으니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생각이시라면 아직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을 고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를 지킨 결과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신자는 실제 죽을 고비를 겪음으로써 그동안 살아왔던 것들이 기적이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결과였음을 실감하고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원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는 세상을 장악한 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키려고 힘을 씁니다. 그 속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길을 여전히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매일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기적 같은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하나님을 다윗처럼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믿고 신뢰하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라고 고백하면서 정작 반석으로 삼는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라고 고백하면서 정작 다른 피난처를 세상에 두고 살아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돈이 힘이고 권세 있는 자가 힘이라는 방식을 따라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고백을 배워서 그대로 따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윗의 고백 앞에서 부끄러움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2절의 내용을 말하면서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위험에 처했을 때는 건져 주시고 고통을 당할 때는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셔서 세상에서 내 이름을 굳게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다윗의 고백 앞에서 아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수많은 환난을 겪으면서 알게 되고 체험한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대적을 피해 도망 다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반석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나아지고 대적들이 물러가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말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나 대적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면 어려운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다윗의 고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야 말로 그 어떤 세력도 자신을 해칠 수 없는 근거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야 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 대한 영원불변의 보증이 된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있을 때 다윗과 같은 고백이 진심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정사와 권세 자들과의 싸움이라고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은 혈과 육의 싸움에 집중합니다. 타인보다 더 높아지는 싸움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다윗의 고백을 바르게 받아들일 리가 만무합니다. 온통 자기 혈과 육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반석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고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피 흘리신 주님을 따라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십자가를 지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봉사 안에서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길을 힘써 가고자 하는 싸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있어야 하나님이 반석이시고, 방패가 되시고, 요새, 산성이 되신다는 다윗의 아홉 가지의 고백들을 실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이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체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이 가신 길에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고난과 환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해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영원한 사랑의 확증은 여러분 안에 함께 하신 성령의 증거를 따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님과 이런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부요하심과 도우심과 지키심을 날마나 누리면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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