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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3강) 시편 13:1-6 울다가 웃는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6:01

 

 

 

 

 

 

 

(13강) 시편 13:1-6  울다가 웃는다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분문>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편 13:1-6)

 

 


<설교>


사도 바울이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을 했지만 사실 환난을 겪는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환난이 사라지고 좋은 일이 주어지면 모를까 환난이 여전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사람들이 내놓은 방법 중에 하나가 긍정적 사고방식입니다. 소극적이고 비관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와 마음 자세, 즉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오히려 환난에서 더 낙심하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부정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난 할 수 있다’ ‘난 행복해질 수 있다’ ‘난 환난을 이길 수 있다’와 같은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긍정적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환난에 대한 생각과 환난을 바라보는 시각을 고치고 바꾸는 것이 슬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기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말하지만, 이것이 곧 신앙과 상관없는 단지 심리학에 불과한 세상의 삶의 철학일 뿐입니다. 이처럼 신앙과 상관없는 내용들이 오히려 신앙적인 내용으로 뒤바껴서 많은 교회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경에 관심이 없이 다만 교인들의 심리적 안정을 꾀하고자 하는 현대 교회의 실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부정적인 사고를 비신앙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신앙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사고는 자기 최면의 일종일 뿐입니다. ‘난 할 수 있다’와 같은 자기 암시를 함으로써 실제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긍정적인 사고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분명 도움이 되고 유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긍정적 사고방식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화가 물이 반쯤 찬 컵 얘기입니다. ‘컵에 물이 반 밖에 안남았네’라는 것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이고,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는 것이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사고로 물을 마시든 긍정적인 사고로 물을 마시든 결과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물을 다 마시면 컵에서 물이 없어지는 것은 어떤 사고로 마시든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컵에 남은 물을 바라보는 심리적인 면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심리적인 느낌일 뿐이지 긍정적인 사고로 마신다고 해서 더 많은 물이 남은 것이 아닙니다.

 

 

 


긍정적 사고를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도 못마땅하게 들릴 것입니다. 왜 자꾸 죄인이라는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느냐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부정적인 사고보다는 믿음으로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적인 생각이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이 없이 세상만 바라보고 있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비성경적인 말인 것입니다.

 

 

 


사도의 말처럼 환난 중에 기뻐하는 것은, 생각을 바꾼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환난도 하나님이 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단지 고통을 주기 위해 환난이 있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전폭적으로 자신을 맡기게 될 때 환난 중에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불평을 그대로 내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환난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나를 잊으셨는가?’ ‘여호와께서 나로부터 숨어 버리셨는가?’라는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긍정적 사고로 본다면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전형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은 찬양과 감사와 경배로 끝납니다. 울다가 웃는 것입니다. 즉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평과 의심으로 시작한 다윗이 경배와 찬양으로 끝나게 된 이유가 과연 부정적인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일까요?

 

 

 

3,4절을 보면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환난으로 인해 요동함으로써 원수가 기뻐하며 자신을 대적하여 이겼다고 할까 두렵다고 합니다. 다윗의 이런 말을 보면 긍정적인 사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힘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이 세상이 좋아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환난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환난을 하나님의 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환난에서 벗어나든 계속 환난에 머물러 있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상황과 형편에 머물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설사 죽음으로 이끄신다고 해도 순종하는 것이 곧 환난에서 기쁘게 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5,6절에서 다윗은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는 찬양과 경배로 마칩니다. 다윗은 큰 고통 중에서 하나님이 그를 잊으신 것처럼 캄캄하고 암담한 상황을 겪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성소로부터 멀리 떠나 도망을 치는 신세고, 심지어 이방 땅에까지 피신해 있고 그리고 원수들은 말하기를 ‘그는 여호와의 땅으로부터 떠났도다.’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영광스러운 왕국을 세우시기를 기뻐하셨는데 다윗은 왕의 위에 앉기도 전에 쫓겨나서 이방 땅에 유리하게 될 것 같으면 그것은 참으로 사망의 잠을 자는 것처럼 괴롭고 그리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그 일로 노래하게 될 것이니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겠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고 노래합니다. 즉 다윗은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을 잊으시고 자신에게서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은 암담함을 경험하였지만,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구원을 기뻐할 것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특별히 대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는 고백으로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한 곳 하나 다윗이 생각을 바꿨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환난에서 하나님을 바라봤을 뿐입니다. 자신을 후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또한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고 의뢰하였을 때 결국  환난은 주의 구원으로 끝날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환난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자신의 처지가 환난이 계속되는 것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고, 자신은 여호와로부터 후대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설사 죽는 길이라고 해도 실패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나는 죽는다고 해도 여호와의 일은 이루어짐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이 죽는 길로 간다고 해도 그 길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있고 또한 나를 후대하시는 것도 변함이 없음을 믿는다면 이런 믿음이야 말로 환난 중에서 기뻐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을 주의 인자가 인도하셨던 것처럼,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도 주의 인자로 인도하십니다. 주의 인자가 자기 백성을 어디로 인도하시겠습니까? 주의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라보기보다는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분명하고 확고한 것은 주의 인자로 인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생자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써 정작 영원히 죽어야 할 우리를 생명에 있게 하신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형편과 어려움에서도 요동하고 의심하기보다는 기쁨과 찬양과 경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최고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써 증거된 인자하심과 긍휼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형편으로 인도된다고 해도 기쁘게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현실의 고난에서 벗어나고 형통하기 위해서 기질과 성격을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자기 의지와 노력을 동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진심으로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떤 환난에서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알게 하고 믿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환난 중에서도 주의 구원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고난 중에 울다가 웃는 사람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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