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시편 11:1-7 의인이 무엇을 할꼬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사실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호와가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의한 고백이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 피한 상태에서 피난처라는 고백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기대감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기에 막연한 것이고, 공허한 것이고, 종교적인 말로 그칠 뿐인 것입니다.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1절)라고 말하는 것은, 여호와가 피난처가 되어주기를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호와께 피한 상태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다윗의 이 말은 여러분은 얼마나 실감 있게 받아들이십니까? 아니 다윗의 그 말에 얼마나 깊이 공감하십니다. 생각으로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의 말에 삶으로 공감되는 부분이 있으려면, 필히 여러분이 다윗처럼 여호와께 피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피난처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호와께 피한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여호와께 피하고자 하면 난감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고 사실이지 않습니까?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께 피하는 것인지 알지 못해서 말입니다.
전쟁이 났을 때 중앙동 지하도로 피하라고 하면 쉽습니다. 중앙동 지하도가 어딘지 알아서 그곳으로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앙동 지하도처럼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 계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피할 수 있도록 장소와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분도 아닙니다. 결국 내가 달려가서 피할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난처’라는 말은 단지 신자들의 기대감을 갖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지 실제 다윗처럼 하나님께 피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한 피난처는 홍수가 났을 때 임시로 대피하는 대피소와 같은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위험한 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서의 피난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원수에게 쫓기고 있을 때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이 다윗에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피했는데 왜 나에게 새가 산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도망치라고 하느냐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여호와께 피한 자로서 또 다시 산으로 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쫓기는 상황이라면 자연히 원수의 손을 피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목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산으로 도망하여 숨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현명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여호와께 피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늘에서 천군천사를 보내서 다윗을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고 원수는 계속 다윗을 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습니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생각합니까? 나의 어려움을 도와줄 수 있는 힘있는 사람이 있는가부터 생각하지 않습니까? 친구나 친척, 아니면 친구의 친구까지라도 찾아서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우리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미련하고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생각하면 믿음은 세상의 시각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만을 생각하고, 내가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으로 믿음을 말하기가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여호와께 피하였다고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2,3절을 보면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다윗의 상황은 원수가 몰래 숨어서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활을 당기고 있는 급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속히 산으로 도망하여 숨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라는 말을 하면서 도망치지를 않습니다. ‘터가 무너지면’이라는 말은 다윗이 여호와께로 피했는데 만일 여호와께로 피한 자가 악인에 의해 죽는다면 그것이 곧 터가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로 피한 것을 터 위에 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악인에 의해 죽는다면 그것은 곧 다윗이 서 있는 터가 악인의 활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터가 무너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여호와께로 피했다는 것을 자신이 서 있는 터를 굳게 믿고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터를 여호와라고 해 버리면 너무 막연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4,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이 구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신다고 말하고, 또 다시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이든 보좌든 동일한 것은 여호와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성전에도 계시고 하늘에도 계신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계셔서 하시는 일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심으로써 그들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희생의 피를 들고 성전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악까지 감찰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늘 보좌의 의미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신다고 하는 것은 악인이 결코 의인을 해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인을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계셔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인자와 자비로써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는 의인이 악인에 의해 해를 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믿는 것이 다윗의 믿음이었고, 이것이 다윗이 여호와께 피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말한 터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 긍휼이었습니다. 이 터 위에서 의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노래하고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의 터 위에 굳게 세우시고 그 어떤 악으로부터도 해를 받지 않게 하시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6,7절에서 말한 것처럼 악인의 소득은 하나님의 심판뿐입니다. 하지만 의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이루실 이 일을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믿음에 있는 다윗이 악인을 두려할 수 없지 않습니까? 혹 악인의 손에 의해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악인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의 악인의 세력에 패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그 일을 믿는다는 것이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으니까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서 있어야 할 터는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셔서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을 기어코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해 내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신실하심, 인자하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으시고 생명의 나라에 집어넣으실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 피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의지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실하심은 그 무엇에도 무너질 수 없는 견고한 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육신이 사는 것에 마음을 둠으로 인해서 육신에 유익이 되는 방법과 길을 택하게 될 때 스스로 견고한 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돼 버립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노래하고 높일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찬양대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괴로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보게 하심으로써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의인으로 터 위에 세우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믿고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입니다. 이 터 위에 굳게 서서 세상의 방법과 힘을 동원해서라도 육신의 도움을 얻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비록 육신은 고달프게 된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힘있게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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