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시편 9:1-20 기쁨은 주께 있다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살전 5:18절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하지만 사람들은 이 말을 크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감사 자체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의미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곧 신앙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쁜 일이 있다고 해도 감사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기쁨이 없는 억지로 감사하는 것일 뿐입니다. 본문 1,2절의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찬송을 드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감사는 오늘날 우리와 동일할까요? 다를까요? 3절부터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는데, 다윗은 여호와의 행하신 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쁨이 될 만한 일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는 일단 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감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좋은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내게 기억될 만한 좋은 일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감사는 믿음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적 반응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생각해야 할 것은 좋은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내게 좋은 일이 있는가 없는가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감사와 일치하는 참된 감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항상 선을 이루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는 신자에게 나쁜 일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가 ‘나의 영혼을 잘되게 하는 일인가?’를 기준으로 하지 않고 ‘내 육신에 유익이 되는 일인가?’라는 기준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좋은 일 나쁜 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조건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나쁜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에서도 감사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감사가 다윗의 감사와 전혀 달랐다면, 그것은 내게 선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잘되게 하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윗은 대적으로부터 쫓기면서 원수로부터 고통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위협과 고난의 상황에서도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그럴 수가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자신의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신자는 어떤 일에서도 불안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긍휼과 자비로 함께 하시는 분임을 안다면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믿음에 의해서 기쁨과 감사의 찬송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2절에서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윗의 기쁨은 주께 있었습니다. 즉 땅의 것들이 기쁨과 감사의 조건이 아니라 주가 감사와 기쁨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주가 다윗과 함께 하시는 날까지 다윗의 감사는 어떤 일에도 방해받지 않고 멈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땅으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결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살아오시면서 기뻐하고 감사할 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감사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 역시 경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께 감사와 기쁨을 둔다면 내 형편과 상관없이 결코 시들어지지 않는 감사와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을 향한 주의 일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의 일을 제대로 경험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기껏 기대하는 것이 육신의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주의 일은 전혀 보지를 못하기 때문에 주께 감사와 기쁨을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의 일이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는 사단의 유혹이 끊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여전히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벗어버리지는 못하였지만 세상에 가치를 두지 않으려고 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으려고 하고 위엣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며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고 믿고 있는 것이야 말로 주의 일이 계속되고 있는 증거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욕심을 두고 살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죄인 됨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야 말로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9,10절을 보면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고 노래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날마다 천국보다는 세상에 소망을 두게 하는 유혹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산성이 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악한 세력의 압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지키심을 바라보게 될 때 하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기쁨과 감사의 노래는 여호와가 누구시며 여호와의 일하심을 믿고 의지함으로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자들을 향해서 ‘감사하라’는 강요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히 감사를 헌금과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사기일 뿐입니다. 교회는 신자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전하면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된 신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자연히 기쁨과 감사의 노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도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고 말합니다. 악인이 음부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자가 음부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입니다. 그런데 다윗도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지 않은 자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결과이며, 다윗의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살피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신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이러한 일을 기뻐하지 않을 수 있고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8절을 보면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즉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음부로 돌아가는 악인이 될지언정 창고에 재물을 가득 쌓아둔 부자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궁핍하고 가난해도 하나님께 잊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영영히 실망하지 않는 구원의 길을 가고 싶은가?’ 여러분은 과연 어떤 길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잊어버림을 당하지 않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고 그러한 인생으로 머무르기를 소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날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과 긍휼의 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기쁨과 감사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께 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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