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시편 8:1-9 아름다운 주의 이름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신자의 참 기쁨은 오직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예수님의 놀라운 권능과 은혜로 소생되어 내 마음이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지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뻐하심에 신자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앎으로서 누리는 참 기쁨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이러한 참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과 자비하심을 발견하고 찬양을 합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고 노래하는데,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라는 노래가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여 나타내십니다. 즉 하나님은 이름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의 일들을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행하심들을 노래하며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다는 것은, 주의 영광이 참으로 높고 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참으로 높으신 영광으로 노래하고 있는 이 영광은 어떤 것입니다. 이 영광이 곧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이고, 이 아름다움 즉 주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함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처럼 온 세상에 가득한 주의 영광, 아름다움은 어떤 것입니까?
다윗이 노래하는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 곧 주의 영광은 2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는 이 구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행하심이 온 땅에 가득한 주의 영광인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주의 영광은 한마디로 말해서 약한 자를 세워서 강한 자를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란 구약에서는 사람의 수로 계수되지도 않을 정도로 쓸모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약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약한 존재를 세워서 주의 대적을 잠잠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세우신 것입니다.
마 21:16절을 보면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은 본문 2절의 내용과 연관이 있습니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는 어린 아기와 젖먹이처럼 힘없고 쓸모없고 볼품없는 자에게 권능을 입히시고 승리하게 하신 주를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아름답다고 하는 주의 영광, 즉 주의 행하심은 어린애 같은 약한 자를 세워서 대적을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자신을 존귀하게 하신 일을 뜻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3-5절에 보면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달과 별보다도 못한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생각해주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느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런 나를 존귀와 영광으로 관 씌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크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라는 존재가 무엇입니까? 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변함없이 세상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자기 인생을 만들려고 기를 쓰고 살아가고, 그것을 위해 이웃과 경쟁하고 나보다 조금 낫다 싶으면 시기하고 미워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온통 자신의 욕망만 담고 있는 이런 인간이 과연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움 받을만할까요?
신자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과 사랑이 어떠한가를 알려면 필히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으며 오히려 저주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면 하나님의 행하신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여겨진다면 나를 가난하게 살게 하셔도 괜찮고, 병들게 하시고 고생하게 하셔도 괜찮고, 어려움과 고통에 있게 하셔도 괜찮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보다 더한 고통과 저주에 빠져도 마땅한 존재인데 그런 나를 존귀와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하신 은총과 사랑이 너무 큰 감사로 다가왔기 때문에 현재의 어떤 고통도 낙심으로 이끌어 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찬양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6-8절의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라는 구절은 하나님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어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는가를 말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발 아래 주신 것입니다. 즉 똑같은 피조물인데도 불구하고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두신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영화와 존귀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영화롭고 존귀한 존재로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그 형상으로 만물을 다스리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의 다스림 아래 두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영광에 눈을 돌립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게 되고, 결국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영광을 구축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이 무엇이라고 여전히 영광과 존귀의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까지 희생하게 하십니다. 이제 세상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알에 굴복해야 합니다. 이들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이며, 여전히 자기 영광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굴복하지 않는 모든 자들의 영원한 저주의 자식으로 규정될 뿐입니다. 신자로써 안타까운 것은 신자에게 입혀진 하늘의 존귀와 영광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썩어질 것에 불과한 세상 것에 목매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의 아름다움으로 감사하며 주님을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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