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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7강) 시편 7:1-17 나의 방패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6:03

 

 

 

 

 

 

 

(7강) 시편 7:1-17  나의 방패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것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 무고히 빼앗았거든 원수로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고 내 영광을 진토에 떨어뜨리게 하소서(셀라)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 민족들의 집회로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 잔해는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편 7:1-17)

 

 


<설교>


주일 대예배 때에 하는 대표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기도가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그 수식어가 한두 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힘이 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밝히 보이시며, 우리에게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등등 기도의 전반부가 전부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일색입니다.

 

 

 


물론 기도에 이런 수식어를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돈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라는 말을 하고, 세상의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라는 말을 하고, 지금 수중에 있는 것으로도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등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가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즉 자신의 삶에서 만나고 알게 된 하나님을 진심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기도문을 그대로 판박이 식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미사어구를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기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도 하나님을 부를 때 수많은 수식어를 동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8:1-3절을 보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고 무려 아홉 가지의 수식어로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식어는 시편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들어왔던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들을 그냥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전 생애의 체험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한 치의 과장 없이 묻어 나온 시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본문 10절에서도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라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임을 말합니다. 이 역시 다윗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 되심을 체험했기에 하는 생생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1,2절의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건져낼 자 없으면 저희가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자신을 쫓는 대적을 피하여 도망을 치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줄 방패는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곧 자신의 방패임을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평안하다.’고 외치며 아무런 일이 없이 살아가면서 단지 말로만 ‘나의 방패는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3-5절의 내용을 보면 다윗이 겪고 있는 고난은 자신에게는 아무런 허물이 없는 억울한 고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혹 여러분이 다윗처럼 억울하게 고난을 겪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모르긴 몰라도 하나님께 할 말이 많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할 말이 많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겪는 모든 일의 원인을 하나님께 두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런 상황에서 다윗처럼 나의 방패는 여호와께 있다는 고백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이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억울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기는커녕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아는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고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때문에 6-9절에서 대적을 심판해주시고 그들의 악을 끊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대할 때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다윗은 뭐냐?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도 죄인이고 악한 자인데 자신을 위해 대적들을 심판해 달라고 말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8절에서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분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오직 의와 성실함을 따라 판단하시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의 속에 있는 의와 성실함을 보시고 의인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속에 의와 성실함이 없는 자는 악인으로 판단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데는 인간의 행위는 전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믿음을 판단하고 누군가를 높이는 현대 교회의 모습들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와 성실함은 무엇일까요? 12절의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는 구절을 생각해 본다면 죄에 대해 회개하는 심령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로우신 것이고 성실한 마음인 것입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참으로 의로운 심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회개가 사람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란 자신의 모든 공로와 의를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로 여겼던 모든 행위가 악한 것일 뿐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택한 백성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가 된다는 것입니다.

 

 

 


10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정직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인된 인간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정직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하나님이 곧 자신의 방패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리움이 없습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정직은 죄에 대해 애통해하고 회개함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15절에서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악인은 죄악을 해산할 뿐입니다.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다고 하는데, 궤휼이 속이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악인이 낳는 것은 속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이 낳은 궤휼이 과연 무엇일까요? 악인이 속이는 것은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인간의 의를 개입시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의를 기준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윗은 악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하는 죄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마음 놓고 다윗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의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에게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의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를 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직함입니다. 신자는 이 믿음 안에서 죄인을 사랑하시고 죄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윗처럼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방패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칼을 갈고 계시고 심판을 예비해 놓으셨지만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는 구원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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