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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강) 시편 6:1-10 신자는 고아가 아니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6:03

 

 

 

 

 

 

(6강) 시편 6:1-10  신자는 고아가 아니다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심히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시편 6:1-10)
 

 

 

 


<설교>


세상은 죄의 질과 양에 따라 죄를 달리 봅니다. 그리고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의 수위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은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무거운 죄, 가벼운 죄가 없습니다. 비록 행동에는 차이가 있지만 인간에게 자리하고 있는 죄의 본질은 결코 다르거나,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고자하는 죄가 사람에 따라 그 질과 양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인간의 본성인 탐심 역시 사람에 따라 그 질과 양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 장난감을 탐내는 것과, 어른들이 돈을 탐내고 남을 속이고 부정을 저지르는 탐심이 다를까요?

 

 

 


행동을 기준으로 보게 되면 아이들의 탐심은 어른들과 다르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또한 탐심이 아이가 커가면서 함께 자라가는 것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탐내는 것이고, 어른은 어른의 세계에서 자신에게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탐내는 것입니다. 결국 탐심은 동일한데 각기 자신의 세계에서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는 죄의 질과 그 양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신자는 불신자보다 죄의 행위가 덜해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종교인에 대한 생각일 뿐 하나님은 신자를 그런 원칙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혼이 떨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뼈와 영혼이 떨리다는 말을 하고 있고,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절)고 고백하는 말을 보면, 다윗이 죄에 대해 얼마나 애통해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을 다윗과 같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다윗의 회개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고 싶어 하는 다윗의 간절한 소원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의 회개를 단지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기를 원하는 열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에 대한 애통함이 있습니까? 있다면 왜 죄에 대해 애통하게 됩니까? 신자로서 죄에 대해 애통함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만,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 단지 회개를 위한 것이라면 그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문제에서 죄를 바라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것은 죄로 인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죽음의 상태입니다. 단지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 영원한 사망이 죄로 인해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회개하고 회개하기 위해서 애통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애통해 하는 것은 나의 죄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것이 곧 영원한 사망에 머물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는 자기 죄에 대해 그 질과 양을 따라 경중을 판단합니다. 그래서 가벼운 죄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산다’라고 생각하면서 합리화하고 가볍게 지나쳐 버립니다. 설령 죄에 대해 애통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양심의 반응일 뿐입니다. 도덕적이고 착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하는 양심이 반응하여 후회와 자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불신자는 그 어떤 죄를 두고도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망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행위로 죄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구별하지 않고 자기 속의 죄의 본질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였음을 보게 되고 죄의 무거움을 깨달으며 애통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회개는 하되 애통은 없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고 우는 애통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뼈와 영혼이 떨리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벌을 면하기 위해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또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의 회복을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애통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멀어짐을 뜻하기 때문에 은총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아는 신자라면 죄에 대해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회개는 도덕적 죄책감이나 종교적인 의무감,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상실이나 징계에 대한 염려 등이 회개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부모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이 경우 자식이 용서를 구하고 부모가 자식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은, 단지 자식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용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식의 관계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자식의 잘못으로 인해 부모 자식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면 용서를 구하고 용서함으로써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부모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도 잘못을 저지르면 반성을 합니다. 하지만 고아들은 반성을 해도 그 반성을 받아줄 대상이 없습니다. 고아원 원장이 반성을 받아준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아이의 잘못을 고치기 위한 방법적 차원일 뿐이지 부모 자식의 관계회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해 보자면 불신자가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 자신을 용서를 받아줄 대상이 없는 단순한 자기 양심에 의한 반성으로 그치는 것이라면, 신자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사랑하는 부모와의 관계 회복을 소원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소원하는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은 5절의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라는 구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이 내용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음부에 가지 않게 해달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또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는 곳에는 결코 가지 않게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음부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곳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음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은 음부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곳에 머물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회개에는 죄에 대한 용서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거룩한 교제를 소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회개는 분명 십자가 안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죄에 대한 용서, 심판에서의 구출 이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지만 근본적인 뜻은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간에게 화목의 손길을 내미시고 거룩한 교제를 다시 이루고자 하시는 초청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단절된 교제의 회복을 위해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때문에 십자가 안에서 달라진 가치관에 따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아가는지, 아니면 아직도 고아원에 있는 고아로 살아가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벌 받지 않으려고 회개하고, 상 받으려고 열심을 내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관계가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 없는 고아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진심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인생의 가장 큰 목적과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기에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8-10절을 보면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내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홀연히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고 말합니다. 다윗이 회개를 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즉 회개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윗의 원수를 물리쳐주시고 형편을 바꿔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곡성과 간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확신의 고백이 무엇으로부터 나오겠습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7절의 “내 눈이 근심을 인하여 쇠하며 내 모든 대적을 인하여 어두웠나이다”는 구절을 보면 다윗이 고통의 환경으로 인해 근심하고 염려했던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기도하면서 기억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과의 긍휼의 관계를 믿고 의지하였기에 자신의 형편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이 내 기도를 받으신다고 말하고, 원수가 물러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기도, 자신의 회개, 자기 행위를 믿는 자가 아닙니다. 신자가 믿을 것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의심과 낙심이 없이 확신에 찬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회복된 긍휼의 관계에 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고아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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