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는 존재이다. 죄인의 자세는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져야 한다. 바리새인의 약점은 무엇인가? 전혀 귀엽지 않다는 데 있다. 그들의 자세는 자만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2)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 종교 리스트, 행위 리스트, 자랑 리스트가 있다.
반면에 세리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세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여긴다.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자기 부인이다. 나는 안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이 상태로는 안됩니다. 나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나는 목마릅니다. 나는 배고픕니다. 나는 불쌍합니다. 이것이 신앙이다. 한마디로 나를 귀엽게 여겨달라는 자세가 신앙이다. 신앙인인데 귀엽지 않다. 너무 강한 척한다. 그래서 징그럽다. 은혜를 구한다, 불쌍히 여김을 구한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가? 그러면 귀엽게 살아야 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귀여움을 잃어버린 것은 신앙의 본질을 잃은 것이다.
귀여워야 좋은 관계를 맺게 된다.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 의란 좋은 관계를 맺을 때의 표현이다. 의를 말하는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는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뜻한다. 좋은 관계가 깨졌다는 말은 의가 깨졌다는 말이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귀엽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자기 생각도 아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이다. 그것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한다. 다른 사람이 다르게 생각하는 것도 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듣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냥 무시하고, 공격하고, 폭언을 가한다. 모든 사건을 전체로 보지 못한다. 자기 입맛으로 본다. 전체를 품어봄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다. 독선적인 사람은 전혀 귀엽지 않다. 성숙이 무엇인가? 입장을 달리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나이든 아들을 회초리로 때리는 모습이 나온다. 마흔이 넘은 아들이 회초리로 맞으며 눈물을 흘린다. 왜? 아파서가 아니다. 예전에 비해서 어머니의 힘이 많이 빠지셨기 때문이다.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할 줄 아는 자세가 성숙이다. 편협에서 벗어나 귀여워져야 한다. 귀여워야 좋은 관계가 회복된다.
<삼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