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심이 사라진 시대의 최대 피해자는 욕을 먹는 어른이 아니다. 오히려 욕을 하는 당사자인 청년과 청소년들이다. 존경심이란 곧 자신의 꿈이요 목표다. 옛날에는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이 많았다.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면 이순신 장군 같은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이자 목표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존경하는 사람은 도산 선생 같은 목적과 인품을 가지고 사는 것이 되고 싶은 자화상이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말이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정확한 삶의 목표가 있다는 뜻이다. 존경심이 사라진 시대의 청년들에게 물어보라. "사고 싶은 것"은 많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은 별로 없다. 오직 눈 앞에 보이는, 잘났다고 하는 대상은 공격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자신은 사회가 유혹하는 물건을 소비하기에 정신없다. 목표도 잃고, 문화도 잃고, 허무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 천박해졌다.
한번은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계속해서 "담탱이"가 어쩌고 하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담을 타고 자라는 나무인줄 알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담임선생님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스승에 대한 자세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충고해 주었다. 전혀 존경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존경할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부모가 특출나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특출난 부모도 있겠지만 대부분 가정의 부모는 평범하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부모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를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당위로 말해버린다. "이것이 옳으니라."
전쟁 중에도 적장을 잡으면 예의를 지킨다. 포로된 장군에게는 경례를 붙여주고, 장군으로서의 대우를 해준다.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이기에 기본적인 예의와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삼국지를 보면 부러운 것이 있다. 전쟁 중에 상대편 장수를 잡으면 죽이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관운장이나 장비도 잡힌 적이 있지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
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가족들을 죽이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중국인의 이런 여유가 부럽다. 이런 여유가 통합의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반면에 르완다 내전에서 투치족과 후투족이 상대 종족을 다 죽여버리는 학살 소식을 들을 때 야만을 느낀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에서 폴포트 정권이 인구의 3분의 1을 죽였다는 말에 절망을 느낀다.
존경심에서 관용이 나오는 것이다. 예의에서 소통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존경심이 회복되면 너무 잔인해지거나 너무 천박해지지 않는다. 인간성의 회복, 문화 회복의 출발은 존경심이다. 존경심이 사라지면 야만으로 간다. 이것은 분명한 일이다.
<삼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