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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도, 천민 자본주의와 목가적 낭만주의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8. 6. 10:57

 

        천민 자본주의,  목가적 낭만주의

 

              A. 다른 문화에 대한 생각

   상식

 

우리는 흔히 '상식에 맞다.' 또는 '상식에 맞지 않는다.'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여기서 '상식'의 의미는 ' 우리 문화와 사회가 공유하고 믿고 있는 가치관, 규범, 행동양식을 총칭하는 것'이다.

 

사람은 소속 집단에 귀속 의식을 느끼고 그 귀속 의식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 집단을 다른 집단보다도 우위에 두려는 경향이 있다.

자기 집단의 우위성을 믿고 그 가치 기준에 의해 다른 집단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 양식을 해석, 평가하는 것을

'자기 문화 중심 주의(Ethocentrism)'라고 부른다.

바꾸어 말한다면 자신의 상식에 비추어 다른 문화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반대로 세계에는 여러 가지 사고 방식, 행동 양식이 있고 어느 쪽이 꼭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라고 한다.

 

한 일본인이 식당에서 어느 중국인에게 ‘무릎을 꿇는 것을 강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을 강요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의 가옥 구조나 의복의 형태에 따라 무릎을 꿇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행위이고

더구나 사과하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릎을 꿇는 것은 완전히 항복할 때나 하는 치욕적인 행위인 것이다.

즉, 일본인에게는 ‘상식적인 행위’가 중국인에게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극히 비상식적인 행위’인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이 사건은 일본인이 자기 문화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상대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자기 문화와 다른 문화의 차이점에 대한 인식을

일본인이 가졌었다면

이와 같은 불행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문화에 대한 태도 변화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문화와의 접촉의

첫 번째 단계에서 자기 문화 중심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이 경우 다른 문화를 무조건 배척・경멸하고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이 단계가 지난 다음에는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회피하고 화제의 대상으로 삼지 않게 된다.

그 다음에는 상대 문화에 대해 적대감도 친근감도 표현하지 않는 무관심의 단계가 된다.

이 단계에서 상대 문화는 ‘그저 외국의 것’일 뿐으로 취급된다.

 

 무관심의 단계가 지나면 점점 문화적 상대주의의 특성이 나타난다. 즉, 인정의 단계인 것이다.

여기서 서로의 차이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상대를 더 이상 비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왜놈’이라고 부르지 않고 ‘일본인’이라고 부르는 등의 태도 변화이다.

마지막으로 문화적 상대주의가 가장 강한 단계에서는 상대의 기준과 입장에서 상대를 보는 것이 가능해지고 

상대의 사고 방식이나 행동에 대해 조급한 비평이나 판단을 내리지 않는 특징이 나타난다.

 

   문화적 상대주의

 

 여기서 주의할 것은

모든 사람이 위와 같은 단계를 거쳐 문화적 상대주의에 익숙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개인에 따라서는 자기문화 중심주의에서 전혀 변화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문화적 상대주의로 옮겨가다가 되돌아 가거나 멈추는 사람 또는

문화적 상대주의를 넘어서 상대 문화에 완전히 복속되는 사람 등 여러 형태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화적 상대주의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

첫째,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먼저 생각한다.

둘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 하나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셋째, 다른 사람의 사고 방식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넷째, 기본적으로 인간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을 중시)

다섯째, 지나친 편견이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과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한다.

이상의 다섯 가지 특성이 가진 공통점은 다원주의(多元主義)이다.

즉, 세계는 한 가지 원소 또는 사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하나의 이념이나 사상이 세계를 지배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인 것이다.

다른 모습과, 다른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가 ,

문화적 상대주의 더 나가서는 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한국인의 인도에 대한 인식은 두 가지의 극단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첫 번째 극단은 ‘인도는 사람 살 곳이 못된다.’는 인식이고

두 번째 그것은 ‘인도에 가면 누구든 부처의 얼굴을 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식 모두가 외국 문화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예들이다.

외국 또는 외국 문화의 평가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모든 문화는 복합적이고 다방면적이므로 그것들 중의 하나만을 강조하여

그 문화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균형 잡힌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흑백 논리로 힘을 가진 분위기에 지배 당하고 있다.

모든 사물을 '좋고・나쁜'의 두 기준에서 평가하는 것이 사회적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외국에 대한 평가에서도 중립적인 평가는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인도에 대해서도

‘경멸’하는 측과 무조건적으로 ‘열광’하는 측의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위의 두 태도를

‘천민자본주의’와 ‘목가적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분석하기로 한다.

 

                         B. 천민 자본주의

   천민 자본주의

 

 천민 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막스 베버(Max Wever)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서

도덕성이 결여된 자본주의의  행태를 표현하는데 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황금 만능주의, 수단보다는 목적의 정당화, 부에 바탕을 둔 편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천민 자본주의의 특징은

사물에 대한 모든 판단이 부에 기준을 둔다는 것이다.

외국을 바라볼 때도 ‘부자인가’ 또는 ‘가난한가’가 유일한 판단 기준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기준에 입각해 인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인도가 ‘사람이 살지 못할 나라’이고

‘우리가 마음대로 다루어도 되는 하급 국가’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하고 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인도 전체를 ‘사람이 살 수 없는 나라’로 매도하는 것은

천민자본주의적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1995년, 방학 중 인도에 갔다가 자칭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중소 기업 사장을 안내해 준 일이 있었다.

하루는 거리의 노점에서 할머니가 파는 바나나를 산 일이 있었다.

인도에서는 바나나를 One Dozen 또는 Half Dozen 등의 ‘12개에 얼마’하는 식으로 판다.

그 당시 12개에 우리 돈으로 600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중소기업 사장은 값을 깎아 보라고 요구했지만  ‘얼마 되지 않는 돈이니 그냥 삽시다.’라고 거절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손짓, 발짓을 하며 한참 흥정을 하더니 결국 우리 돈으로 60원 정도를 깎았고 무척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며칠 뒤 이번에는 자기 딸을 주려고 하니 옷을 파는 곳을 안내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델리에는 South Extension이라는 동네가 있고 그곳에는 고급 옷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서울의 로데오 거리와 비슷한 곳이다.

재미있는 것은 옷 가게에서 바나나 가격의 몇 백배가 되는 돈을 지불하면서도 가격을 깎자는 이야기를 못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옷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깍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화려한 실내 장식 그리고 세련된 용모와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여직원들에게 기가 죽은 것처럼 보였다.

(인도에서는 아무리 정찰제를 주장하는 가게라고 해도 지배인이나 사장을 불러 잘 이야기하면 10-30%까지 깎을 수 있다.)

 이 중소기업 사장의 행태 역시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천민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황당한 인도

 

 인도를 처음 방문하면 그 혼란함과 불결함에 넋을 잃게 된다.

특히 외국이라고는 미국이나 일본 등의 소위 선진국에만 다녔던 사람의 경우에는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비행기 타고 왔나?’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공항 건물에 들어서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전력이 부족한 탓으로 전등 빛마저 우중충하며,

구석으로 눈으로 돌리면 소위 국제 공항 입국장에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다.

공항 건물 밖으로 나오면 환멸은 더욱 커진다.

입국장 출구를 나오는 외국인들을 바라보는 인도인들의 초라한 모습은

그들이 친지를 기다리는 단순한 환영객인지 또는 외국인을 노리는 떼강도인지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

(입국장 입구에 서있는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그저 할 일이 없어서 구경나온 사람들이다.)

 

 여름일 경우에는 숨을 막히게 하는 더위가 인도에 대한 인상을 더 나쁘게 만든다.

 어디 그 뿐인가, 싫다고 해도 계속 따라 붙으며 자기 자동차를 타라고 강요하다시피 하는 호객꾼,

(절대로 호객꾼을 따라 가서는 안된다.

시내로 들어 갈 때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만 무작정 택시를 타서도 안된다.

입국장 밖 통로에 선불 택시라고 쓴 부쓰에 가서

목적지를 말하고 요금을 지불하면 티켓을 주는데 그것을 가지고

지정된 택시 승강장에 가서 택시를 타야 된다.

호객꾼들도 자기 차가 택시라고 강조하지만 불법 영업을 하는 자들이며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정상적인 요금의 10배에서 100배까지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다.

이 경우에는 경찰에 신고해도 별 효과가 없으므로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는 듯이 밀어 붙이듯이 달려드는 자동차들, 이 모든 것이

‘괜히 왔구나’하는 생각을 더욱 절실하게 만든다.

 

   보람찬 여행

 

 시내에 들어와도 인상은 거의 바뀌지 않는다.

물론 호화스러운 특급 호텔의 모습도 간혹 눈에 뜨이지만

거의 모든 건물들이 언제 보수를 했는지 상상이 안 갈 정도로 초라한 모습들이다.

입국장에서 느꼈던 불쾌한 냄새는 더욱 강력해지고

신호등에 자동차가 멈추면 거지를 비롯한 잡상인들이 몰려들어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로 사람의 혼을 더욱 빼놓는다.

이 모든 고난을 넘어 목적했던 호텔에 도착하여 한숨을 돌리려 하면

이번에는 예약한 방이 취소되었다거나 예약한 기록 자체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

(특급호텔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거의 없으나 어중간한 호텔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예약 확인서를 꼭 지참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이쪽에서 보낸 Fax 또는 E-mail의 사본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도인들은 서류에 무척 약하다.)

이때에는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게 된다.

 

 장시간에 걸친 투쟁 끝에 방을 잡고 거리에 나오면 또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인도에서 외국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시내 교통 수단은 한정이 되어있다.

시내 버스는 노선도 여행객으로서는 잘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운행 시간이 매우 불규칙하기 때문에 돈을 아낀다는 목적으로 버스를 기다리다가는

하루 종일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해가 저물 수도 있다. 따라서

1. 릭샤(Rickshaw: 인력거),

2. 자전거 릭샤(자전거 뒤를 개조하여 사람이 앉게 함),

3. 오토 릭샤(Auto Rickshaw: 오토바이의 뒤를 개조하여 사람 2, 3명이 앉을 수 있게 만든 것) 그리고

4. 택시가 있다.

이 네 가지 교통수단의 운전자들의 악명은 같은 인도인들 사이에서도 무척 높다.

앞의 두 가지는 타기 전에 목적지를 말하고 요금을 정해야 하고 뒤의 두 가지는 미터기에 의해 요금이 정해진다.

그러나 미터기가 있다고 안심해서는 안된다.

출발할 때 ‘미터! 미터 !’하고 소리 높여 이야기해 미터기를 작동하는 것을 확인해야지

무심코 앉아 있다가는 미터기를 작동하지 않기가 일수이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엄청난 요금을 요구받는 경우에 부딛치게 된다.

미터기를 작동시켰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인도에서도 석유 가격의 변동이 자주 있고 그에 따라 요금의 변동이 심하다.

그러나 요금의 변동이 있을 때마다 미터기를 재조정하지 않음으로

미터기에 나온 요금의 몇%를 더 주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계산 방식이다.

물론 정부에서는 요금 조견표를 운전자들에게 나누어 주지만 승객에게 그것을 보여주는 운전자는 거의 없고

자기 기분대로 승객에게 요금을 강요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미터기 요금이 10루피이고 유가 상승율이 10%이면 11루피가 적정한 요금인데

운전자들은 20루피, 30루피 등  기분내키는 대로 요구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멋모르고 요금을 지불했다가 뒤에 가서 사실을 알고는 무척 억울해 하지만

그 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을 피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호텔에서 미터기 요금의 몇 %를 더 주어야 하는 것을 확인하고

운전자가 터무니없는 요금을 요구할 때는

소형 계산기를 멋있게 꺼내 들고 운전자 앞에서 계산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인도인들은 기계에 대해서도 약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두 말없이 돌아간다.)

 

 이것 뿐이 아니다.

‘모처럼 인도에 왔으니 토산품이라도 사 가지고 가야지’하는 생각에 상점에 들어간다.

상점 주인은 무척 매끄러운 영어로 자신의 가게 물건의 품질이 좋음을 설명하고

‘Reasonable Price' 심지어는 ’Friendly Price'에 물건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여행객은 그래도 ‘인도에서는 무조건 깎아야 된다.’는 풍문을 들은 바가 있어서 자기 생각에는 흥정을 하고 물건을 산다.

그러나 바로 옆 가게에서는 흥정한 가격에 절반도 안되는 값에 같은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절망에 빠진다.

이 정도 상황에 이르게 되면 여행객의 마음속에는 ‘인도 놈들은 모두 도둑놈들이다.’라는 생각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이제는 ‘복수하는 것 만이 남았다.’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러나 복수는 불가능하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같은 한국인들끼리 모여 앉아 인도에 대한 욕이나 실컷 하는 것 뿐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마찬가지이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속는다는 것은 무척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택시 요금 때문에 길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싸우는 것은 한국 사람 뿐이다.

다른 나라의 여행객들 예를 들어 일본인이나 미국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인도에 대해서 사전 지식이 없어서 바보처럼 속는 것일까 ?

그렇지는 않다.

우리 나라에서 인도 여행 붐이 일어난 것은 불과 10년 미만 밖에 안되지만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에는 수 십년 전부터 인도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그 만큼 정보나 여행 안내서가 풍부한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인도인들의 행태에 대해 우리 보다 많은 사전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음에도 그렇게 무심한 듯이 행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행에 대한 인식 자체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행동이다.

즉, 그들은 여행에서 즐기고 보고 또 느끼는데 우선적인 가치를 둔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불쾌한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알면서도 속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을 즐기는 것보다는  돈을 얼마나 적게 썼느냐에 더 가치를 두고

값싼 가격에 많은 것을 물질적・심리적으로 축적해야만 보람찬 여행을 했다는 것이 여행에 대한 우리의 시각인 것이다.

 

   투쟁하는 여행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놀기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19세기 말 우리 나라에 거주했던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구경거리나 놀거리 만 생기면 상점 주인은 상점 문을 닫고 대장장이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그 장소로 달려갔다고 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여유있는 자세를 가졌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는데도 여행하는데도 목적이 있어야 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배낭 여행을 다녀 온 학생에게 ‘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배웠냐 ?’고 물어야만 훌륭한 교수이지 ‘

잘 놀다 왔어 ?’하고 물으면 학생에게 관심도 없고 철학이 없는 교수가 된다.

또 학생 입장에서도

‘이번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고 이것을 내 장래를 위해 이렇게 사용하겠다.’고 대답해야만

성숙하고 미래가 밝은 학생으로 주위에서 인정을 받지

그저 ‘ 재미있었어요.’하고 대답하면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인간으로 취급 당한다.

비즈니스나 공무를 목적으로 여행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여행은 한마디로 ‘놀러 가는 것’이다.

‘놀러 가는 것’은 ‘즐기기 위한 것’인데 왜 ‘즐기는 것’이외의 목적이 있어야 하고

그 이외의 성과가 있어야만 하는가 ?

이것은 천민 자본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인 배금주의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정액의 자금을 투입했으니 그 액수에 걸맞는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투입=산출’이라는 기계적 사고는 ‘즐기기 위한 여행’을 ‘투쟁을 위한 여행’으로 변형시킨다.

그래서 우리들은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행동하여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싸우고 ‘싼 것! 싼 것!’하고 외치고 다니는 것이다.

사실상, 인도에서 시쳇말로 바가지를 썼다고 해도 우리 기준으로 그렇게 큰 돈이 아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택시요금에 있어서도

시내의 경우에는 10 루피에서 20 루피 정도를, 즉 300원에서 600원, 더 주는 것이다.

분식집의 라면 한 개 값도 안되는 돈 때문에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민 자본주의의 극복

 

 이 말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도에 가는 여행객들이 계속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인도에서 외국인 뿐만 아니라 같은 인도인들도,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당하고 있는 일이다.

이것은 인도 전체 사회가 보다 세련되어지고 합리화되어야만 해결되는 일이지 우리가 목청을 높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이다.

몇 년 전 인도에 장기간 거주했던 우리 한국인 중 한 사람은

자신은 인도인들의 그릇된 행동을 타이른다고 자화자찬하며 다닌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릭샤 운전자가 부당한 요금을 요구하면 ‘너 그러면 안된다.’고 타이른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무척 용감하고 훌륭한 행동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 역시 천민 자본주의적 오만함의 한 표현에 불과하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인도인들의 행동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들 사회의 오랜 관행의 결과인 것이다.

또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 악착같이 속여 보려고 애쓰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가난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도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서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면서

가난하고 못 배운 릭샤 운전자에게 어설픈 설교나 하면서 뿌듯해 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인도에 가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고 분통이 터지는 일을 많이 당하게 된다.

또 인도인들의 뻔뻔스러움과 교활함 그리고 말 바꾸기 등은

가증스러움을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도인들의 이런 행태가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즉, 인도인들이 나쁘게 행동하니 우리도 인도인을 경멸하고 무시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인도는 오래 전에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켰었다.

문명이란 인간의 삶을 제도화시킨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지만

그 제도를 파괴하려는 시도도 끊임없이 존재해 왔었다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법률이 세분화되고 구체화되면 그 법망을 피하려는 시도도 교묘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염증을 주는 인도인들의 행태를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가치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것도 인도 문화의 한 부분이라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인도의 문화가 우리와 다른 것은 당연하고

그것의 장・단점을 평가하기 이전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가짐을 가진다면

 인도를 무시하고 또 인도인을 경멸하는 천민 자본주의적 태도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C. 목가적 낭만주의

   독선과 무지

 

 목가적 낭만주의는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도시 거주자가 공통적으로 갖는

과거에 대한 향수,

자연에 대한 동경 그리고

전근대적인 풍물에 대한 애착 등의 심리 상태 또는 행위를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심리 상태가 될 경우에는

근대화에 대한 역작용이나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의 확대 등을 가져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새마을 운동의 초기 단계에 초가집을 없애는 농촌 주택 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벌어졌었다.

이때, 각종 언론에서는 이 사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었다.

즉, 초가집을 슬라브 주택으로 개량하는 것은 ‘한국 농촌의 전통적인 미를 파괴하는 행위’이고

어떤 수필가는 ‘더 이상 고향은 없다.’고 절규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주택 개량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가 그 당시 초가집에 살고 있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가끔 자동차를 타고 농촌을 지나갈 때

초가집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짓는 연기를 보면

평화스러운 느낌이 들고 어딘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보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저기 사는 사람들은 걱정이 없을 거야’하는 터무니없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그러나 막상 초가집에 살아 보면 문제가 달라진다.

밥상 위에 천장의 벌레가 떨어지기 일수이고, 비가 오면 새고,

더구나 1년에 한번씩 막대한 노동력을 들여 지붕을 바꾸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초가집들은 지금 민속촌에 가면 볼 수 있는

벽의 높이가 높은 번듯한 초가집들이 아니라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온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1년에 며칠정도 극기훈련 한다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묵을 수는 있지만 장기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따라서 초가집에 사는 사람들의 불편을 외면한 채

간혹 보는 농촌의 풍경만을 강조하고 초가집을 그대로 유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목가적 낭만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가난하지만 만족한다?

 

 요즘 인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일부 시각도 목가적 낭만주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도를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보고 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가난하지만 만족하며 사는 인도인들에게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정당화되려면 ‘가난한 사람은 항상 울고 다녀야 하거나 또는 칼을 들고 강도질하러 나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들도 기뻐할 일이 있고 웃을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도 극빈 계층이 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있다.

범죄에 있어서도

유흥비 마련을 위해서나, 한건해서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식의 범죄가 많지

극빈 계층이 일으키는 그것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다.

 

인도인들이 ‘가난하지만 만족하고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묻고 싶은 것은

‘인도 사람들한테 물어 봤어 ?’하는 것이다.

인도의 유아 사망율은 1,000명당 96명이다. 10명 당 1명 꼴로 3세 이하에 죽는다.

유아 사망자의 사망 진단서에는 각종 질병의 명칭이 기록되지만 사망 원인의 대부분은 영양 실조에 의한 것이다.

자기 아기가 세상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가난 때문에 죽어 가는데

‘가난하지만 만족한다.’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을까 ?

또 인구의 70%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농촌의 대부분 주택들은

흙 바닥에 갈대로 만든 자리 하나 깔고 살 정도로 열악하다.

상수도도 없고 전기는 물론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빈곤층 가장들의 알콜 중독자의 비율도 높다.

인생에서 더 이상의 희망이 없기 때문에 술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이 ‘만족하며 산다.’는 것은 가진 자의 오만에서 보는 시각일 뿐이다.

즉,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 대한 목가적 낭만주의자의 해답인 것이다.

인도인들도 절대로 만족해하며 살지 않는다.

잘 입고 싶고 잘 먹고 싶고 보다 나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싶은 마음은 우리와 똑같다.

단,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전통적인 빈부 격차와 카스트에 따른 차별 그리고 낮은 교육 수준이 그들을 체념하고 살게 만든 것이지

절대로 만족해하며 살게 만들지는 않았다.

 

   우물안 개구리

 

 물론 인도인들이 우리에 비해 성취 동기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우리이지 인도인들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대적 빈곤감을 아주 많이 느끼는 분위기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배기량이 큰 차에서도,  더 큰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 대해서도 심지어

다른 사람의 옷, 핸드백, 화장품에서도 빈곤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살아 보아야지’하고 결심하게 되고 우리의 이런 면이 경제 발전의 한 동력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너무 지나쳐

각자의 인생을 ‘보다 풍요한 삶을 위한 경쟁의 장’으로 생각하는 경향까지 나타내고 있다.

즉, 인생의 행복이 부의 양과 비례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런 시각으로 인도인들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만족하고 산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인들이 성취 동기가 적은 것에는 무슨 철학적・종교적 배경이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도 ‘아니다.’이다.

오히려 이것의 원인은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인도 이외의 세계를 모르는데서 찾을 수 있다.

세계 각국의 공항에서 인도인들을 흔히 만날 수 있지만 해외 여행을 경험한 인도인의 수는 전체 인구의 10%미만이다.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외국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그들이 문명의 혜택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하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나는 1988년에서 89년까지 네루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일이 있다.

그 당시 인도의 전화 사정은 악명이 높았다.

개인 전화를 놓으려면 2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고 국제 전화도 뉴델리 시내에서 단 한 곳에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공중 전화가 있기는 한데 가능한  사람들이 발견할 수 없는 곳에 설치해 두었다.

전화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가 되어서 하루는 수업시간에 ‘

한국의 기차역 앞에는 공중 전화 수 십대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고 공중 전화를 통해서 국제 전화도 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들은 인도인 학생들은

‘한국이 잘 산다고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되겠느냐? 선생이 잘난 척하느라고 부풀려 이야기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와 같이 인도인들은 ‘우물안 개구리’적인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인도가 국토의 면적이 넓고 한때 문명의 중심지였던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중화 사상보다는 정도가 약하지만 나름대로 ‘大國관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도 이외의 세계에 대한 관심도 약하고 다른 나라의 발전을 가능한 한 무시하려는 경향도 가지고 있다.

성취 동기는 ‘다른 사람을 따라잡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우물 안의 개구리’적인 사고를 하고 ‘대국 관념’에 젖어 있는 인도인들에게서

강한 성취 동기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도도 사람사는 곳

 

 자기 자신과 현재의 자기 생활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개조를 위한 여행’을 꿈꾸기도 하고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호기심을 키우기도 한다.

그곳에만 가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막연한 기대마저 갖기도 한다.

최근 인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도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있다.’식의 책이 범람하고 있다.

물론 사물을 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북한 지도자는 우리 영화 배우 김 모양이 가장 좋다고 했지만 우리나라 인터넷에는 ‘안티 김 모양’ 사이트도 있다.

인도에 대해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인도 몇 개월 다녀와서 ‘인생의 를 깨우친 사람’도 있는 반면

나처럼 몇 년 동안 살기도 하고 수 십 차례 다녀 왔으면서도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도 있다.

개인의 능력과 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소위 ‘를 깨우친 사람들’이 쓴 글들이 마치 누구나 인도에 가면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있고

모든 인도인들은 매우 철학적 깊이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잘못 된 이미지를 주는데 문제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인도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인도에도

착한 사람이 있는 반면 나쁜 사람도 있고 아름다운 장소와 추악한 장소가 공존한다.

흔히 상상하듯이 인도에 간다고 해서 깊이 있는 철학자와, 평생동안 인생의 진리를 찾는 구도자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0.5%도 안되고 대부분 일반적인 여행자가 쉽게 접근 할 수도 없다.

또 우리 나라에도 사이비 종교가가 존재하듯이

꽤 이름이 알려진 구루(Guru: 종교적 스승) 중에는

무지한 대중에게 혹세 무민적인 방법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도 꽤 있다.

 

   구루와의 대화

 

 또 무척 많은 시간을 들여 혹시 진정한 구루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큰 도움을 받기는 어렵다.

그 구루가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겠지만

힌디(Hindi) 등의 인도어 만을 한다면 멀뚱멀뚱 얼굴만 바라보다가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 구루들이 보는 세계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는 너무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멍청한 선문답만 하다가 돌아오게 된다.

예를 들어, 인도에 가서 매년 의료 봉사 활동을 한다는 어느 의사가 쓴 대화록을 생각나는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구루: 너는 누구인가 ?

의사: 나는 XXX이다.

구루: XXX가 누구인가 ?

의사: 나는 한국인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고 의사이다.

구루: 그것이 너의 자아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

의사:(잠시 침묵) 그럼 당신이 보기에 나는 누구인가 ?

구루: 그것은 너 자신이 찾아야 할 문제이다.

이상의 대화는 얼핏 보면 무척 철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은 무척 가치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 속에서 자기  성찰에 완벽히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사람은 불과 몇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사람들도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그것을 위해 전념하여 성공한 것이지

몇 개월 동안의 여행이나 현명한 구루와의 스치는 듯한 만남에서 진리를 얻은 것이 아니다.

그럼 완벽한 자기 성찰만이 가치있는 것이고 잠시라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성찰은 가치없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만한 일을 위해 먼 인도에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 나라에도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생을 바치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0.5%는 되고

일상 생활과의 모든 인연을 끊고 몇 주일 또는 몇 달 동안 숨을 곳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또 자기의 생활 터전에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

 

   체험!! 삶의 현장

 

 인도를 목가적 낭만주의적 시각에서 접근한 책들은

일단은 상업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출판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사실상 인도는 우리가 상실했거나 상실해 가고 있는 많은 것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다.

이것을 흔히 ‘후진성’이라는 말로도 표현하지만, 우리에게 향수를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현재 50대, 60대의 사람들이,

6.25 때 배 곯았던 이야기를, 눈물을 흘리면서도 즐겁게 이야기하는 심리와 유사한 것이다.

단, 그 사람들에게 그 당시와 똑 같은 환경에서 다시 살라고 하면 그렇게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가적 낭만주의는 이런 면에서 현실을 호도하고 잘못된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또 인도에는 인생에 대한 철학적 계시가 있는 것처럼 강조한 책들도

작가가 자신의 감수성을 자랑하기 위해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면

판매 부수를 늘여 보려는 상업주의적 농간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도 우리처럼 ‘기쁠 때는 웃고 슬플 때는 우는 보통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학문이 아닌 단순히 인생에 도움이 되는 철학적 계시를 받기 위해 꼭 인도에 갈 필요는 없다.

 

그러면 단순한 여행자일 경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인도에 가는 것이 좋을까 ?

첫째, 인도에 대해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선입감을 버린다.

선입감은 편견을 낳고 그 편견은 ‘천민 자본주의적’ 또는 ‘목가적 낭만주의적’ 태도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절대로 우리의 시각 또는 자신의 시각으로 그것을 가치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발길 가는 대로 가고 누울 만한 곳에서 자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다.’는 자세를 갖는다.

물론 여행 계획을 세우지 말고 여행지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아무리 구체적이고 훌륭한 계획을 가지고 갔더라도 그대로 실행될 수 없는 곳이 바로 인도이다.

인도는 계획과 현실의 차이를 몸으로 느끼게 하는 ‘체험! 삶의 현장’인 것이다.

무엇을 꼭 달성하겠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지 말고

‘오늘 안되면 내일 되겠지’하는 느긋한 마음을 갖는 것이

인도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출처 : 아시아, 세계
글쓴이 : 바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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