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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주 올레길 1구간을 걷고서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9. 27. 08:47

그곳엔 고즈늑한 아름다움과 안온한 평화가 있었다. 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과 알오름에서 내려다본 우도, 그리고 그들을 안고 있는 바다와 하늘의 조화로운 풍경이 그랬다. 서울에 살고 있는 두 영혼과, 20년째 살고 있는 중국 상해에서 건너온 사업가, 그렇게 3인의 40대 남자들이 그 풍경 속을 걸었다. 제주 여행은 서울의 K가 제안했고, 올레길 걷기는 내가 제안했다. 제주에 많이 가본 사람들인지라 색다른 제주와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상하이에서 온 정(鄭)은 애초에 무슨 극기훈련할 일 있냐며 올레걷기에 거부감을 보이다 1구간 15km만 걷기로 절충하고 함께 길을 나섰다.


그 전날은 오후 늦게까지 비가 내리더니 우리가 길을 나선 10월 1일은 날씨가 화창하게 개었다. 비를 맞으며 올레걷기를 시작하기보담은 기왕이면 이 아름다운 가을 날씨를 만끽하며 길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일 것인가. 설레는 가슴으로 표선의 해안도로를 달려 성산 일출봉을 오른편에 두고 지나쳐서 시발점이라는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의 시흥초등학교를 찾았다. 그런데 웬걸 초등학교 돌담길을 뺑뺑 돌아도 올레길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이나 화살표 사인이 없는 게 아닌가? 일순 당황스러웠지만 초등학교를 지나쳐 오던 길로 한 20m쯤 더 가보니 거기에 ‘제주올레길’이라는 글씨가 화살표와 함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제주걷기가 시작되었다. 이 제주 걷기를 마음먹게 된 출발점은 지난 6월의 자전거 전국일주였다. 한달이 걸렸던 그때의 자전거 여행에서 제주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도는 200여 km의 코스를 달렸는데 4차선의 잘 닦인 일주도로보다 군데군데 이정표를 따라 들어갔던 해안도로들에서 그동안 미처 몰랐던 제주의 진면목을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여기에 내가 존경하는 서명숙선배가 재작년 스페인의 산티아고길 800km를 걷고 나서 올렸던 여행기를 그녀의 블로그에서 읽은 후 오가는 풍문으로 그가 고향 제주에 도보여행길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 출간된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걷기여행>(북하우스, 2008)이란 책을 사보고 나서 바로 결행에 옮긴 것이다. (제주올레 공식 홈페이지가 있는 걸 모르고 나서서 길찾기에 고생을 좀했다) 


시흥리쪽에서 길을 출발하면 바로 말미오름으로 올라가게 된다. 밭들을 지나 오름 입구에 도착하자 나무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 “제주 올레길, 두산봉 산책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마을청년회 명의의 작은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어찌 보면 그것도 공해이겠지만 이 인적없고 불친절한(?) 적막감 속에서는 그 불쑥 내건 환영의 인사가 반갑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표고로 50M쯤 올라가자 멀리 성산 일출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목장의 울타리를 만났다. 잠깐 당황했지만 서명숙선배의 책에서 사전학습한 바가 있어 묶어놓은 철문을 풀고 목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말미오름에서 바라본 일출봉과 주변 풍경)

 

간혹 출몰하는 소똥을 조심하며 오솔길을 걸으니 오름의 정상, 거기서 바라보는 성산 일출봉과 그 주변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마을이 어우러져 실로 장관이었다. 목장 안에서는 주로 나무에 매단 파랑과 노랑 리본이 길 안내를 해주었다. 화살표를 그릴 돌이 없기 때문. 오름을 내려가 출구문을 나서자 시멘트로 포장된 소로가 나오는데 한참을 가다가 오른편에 다른 목장 울타리가 나타나고 거기 철제 출입문에 리본이 매달려 있다. 여기로 들어가라는 뜻인가 보다 하고 울타리 안쪽의 언덕, 오름을 넘겨다 보니 과연 리본들이 연이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제주걷기여행>에서 본 종달리쪽 ‘알오름’인가, 반신반의하며 목장의 푸른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간 오름의 정상에서 바다 쪽을 바라보니 하, 천하의 절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른편으로는 성산 일출봉이, 왼쪽으로 더 가까이에는 바다 건너 길게 누운 우도의 전경이 활짝 펼쳐져 있는게 아닌가? 서선배의 책에서 남매가 공히 절찬했던 바로 그 광경이었는데, 자기들이 만든 길이고 자기 고향 풍경이니 감정이 솟구쳐 그렇겠지 싶었는데 실제내 눈으로 보니 과연 천하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한참동안 그 파노라마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내리막길을 걷는데 절로 콧소리가 났다. 그 목장은 아까와는 달리 말 목장이었는데  군데군데 보이는 조랑말들의 무리마저 이 풍경을 함께 감상한 동지같아 반가웠다.

 

(알오름에서 내려다본 종달리 해변과 바다 건너 우도)

 

상하이정은 처음과 달리 이 올레걷기에 적잖이 감동한 눈치였다. 도시에서만 성장한 두 사람과는 달리 전남 장성에서 10살 때까지 자랐다는 그는 “야, 좋다”를 연발하더니 우리에게 말똥과 소똥을 구분해서 알려주고 밭에 심겨져 있는 작물들을 그 이파리만 보고 당근이다, 콩이다, 팥이다 일러주었다.  1구간의 후반부는 일주도로를 건너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마을길로부터 바다를 따라가는 해안도로변을 걷는다. 길은 다시 시흥리 해녀의 집과 오조리를 거쳐 성산항을 왼쪽으로 바라보며 지나간다.


성산읍내에서 돌연 일출봉 방향의 골목으로 사라진 화살표는 그러나 이내 우리를 백사장이 있는 해변으로 인도한다. 발이 푹푹 빠지는 백사장을 10분 쯤 걸으니 두 배 이상 힘이 든다. 띄엄띄엄해지던 화살표가 길이 언제나 끝나려나 조바심이 날 만하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마지막 종착점인 광치기해안의 해변 횟집에 도착하니 저녁 6시 30분. 이미 해가 기울어 어둑어둑하다. 오후 2시부터 걷기 시작했으니 중간에 팥빙수 사먹은 시간 빼고, 놀며 쉬며 4시간 여를 걸은 셈이다. 종점 표지판에는 1코스의 끝지점이면서 동시에 바로 7코스의 시작 시점임도 알리고 있었다.

 

(해변도로를 걷다가 바라본 일출봉)

 

아침식사를 하고 출발한다면 쉬엄쉬엄 걸어도 하루에 두 구간을 걷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같지는 않다. 하지만 제주에서 게으름의 미학을 실천하려 한다면 하루에 한 구간만 걷는 것이 물론 더 어울릴 것이다. 게다가 좋다, 행복하다는 감정을 하루에 너무 많이 느끼기보다 또 하루의 기회를 만들어 나누어 맛보는 것이 더욱 소망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무조건 하루 1구간만 걸으시라. 어차피 제주 올레길을 빨리 완주하는 것이 목표가 아닌 바에야 또 걷기 위해 다시 한 번 제주를 찾으시라. 이제 제주길 걷기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나도 당연히 그럴 참이다.             


출처 : 김영춘 BLOG
글쓴이 : 아차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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