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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항해시대 大航海時代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09:45

대항해시대 大航海時代

15세기 초부터 17세기 초에 걸쳐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선두로 지중해 중심의 세계로부터 지구 전지역으로 눈을 돌려, 그 때까지 전설적·공상적 영역에 있었던 세계각지가 탐험항해(探險航海)에 의하여 속속 현실적으로 확인되어 간 시대.

지구 전역에 걸친 지리상의 <발견>이었기 때문에 <지리상의 발견시대>라고도 하지만, 여기에는 기존의 유럽중심적 입장에서 본 <발견>이라는 사관(유럽史觀)이 일관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그 후에 이어지는 유럽의 여러 근대국가에 의한 비(非)유럽 지역의 식민지화라는 상황을 몰고 온 배경이기도 하다..

[포르투갈의 탐험]

포르투갈왕 주앙 1세(재위 1385∼1433)와 왕비 필리파(영국의 랭커스터公 존 오브 곤트의 딸)의 3명의 왕자(두아르테·페드로·엔리케)가 기사(騎士)가 되기 위한 조건의 하나로서 1415년 지브롤터의 반대쪽 해안 서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거점 세우타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찾아내는 것과 소금·상아(象牙)·금·노예 등을 주로 하는 이슬람무역권을 그리스도교도의 손에 넣는 것 등을 목적으로 거국적으로 탐험항해를 추진하였다.

카나리아제도·마데이라제도·아조레스제도로의 항해, 1434년 에아네스의 보아돌곶 회항(回航), 1444년 세네갈강과 다음해의 베르데곶 회항, 그리고 엔리케 왕자의 사망 후 상아해안·황금해안 등의 탐험으로 1482년에는 마침내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는 에루미나의 성채(현재의 가나)구축(콜럼버스도 참가)이 실행되었다. 이어서 디오고 카웅은 콩고·앙골라를 발견하였고, 아프리카 서해안으로 남진을 계속하였다.

육로는 1487년 이후 왕명을 받고 페드로 데 쿠빌량이 아덴을 경유하여 인도반도 서해안의 향료 거래지역에 이르고, 페르시아만 연안의 호르무즈로부터 홍해까지, 그리고 아프리카 동해안 잠베지강 어귀 부근까지 남하하였다. 이어서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1487년 리스본을 출항, 다음해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최남단인 희망봉을 돌아서 동해안을 약간 북상하였다가 1488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그 뒤 바스코 다 가마가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출항, 베르데곶제도를 거쳐서 희망봉을 회항, 아프리카 동해안 말린디를 지나 1498년 5월 20일 인도 서해안 말라바르 바닷가의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숙원(宿願)인 인도항로 발견이 실현되어, 포르투갈은 이 방면으로 대선단(大船團)을 보내었다.

[아메리카대륙의 발견]

 근대 세계역사상에 기록될 확증을 지닌 콜럼버스의 항해가 이 시기(대항해시대)의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서 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전후 4회에 걸쳐 실시되었다. 제1회는 1492년 8월 3일 아침 남에스파냐의 팔로스에서 3척의 배로 출항, 카나리아제도를 거쳐 10월 12일에 바하마제도의 한 섬을 발견하고 이것을 산살바도르라고 명명하였으며, 다시 쿠바·아이티·소(小)앤틸리스제도 등을 확인하고, 이듬해 3월 팔로스항으로 귀항하였다.

1498년 콜럼버스가 제3차 항해를 시작할 즈음에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에 도달하고 있었다. 또 포르투갈왕 마누엘이 브라질 발견자인 P.A.카브랄의 보고를 받고서 파견한 수석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501년 5월 리스본을 출발, 카브랄이 지난해 5월에 도착한 남아메리카의 동해안 산타크루스를 거쳐 리우데라플라타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대서양상의 남위 46° 부근까지 남하하였으나 남극권(南極圈)의 심한 비바람에 저지(沮止)당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의 시에라리온으로 되돌아갔다가 1502년 9월 리스본으로 귀항하였다.

그는 이 항해에서 콜럼버스가 도달한 대서양의 서쪽 일대가 인도가 아니라, 유럽·아시아·아프리카에 이은 <제4의 대륙>임이 거의 틀림없다고 믿었다. 1503년 4월 그가 리스본에서 L.메디치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 고장이 <신대륙(Mundus Novus)>이라고 씌어져 있었으므로, 콜럼버스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507년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라틴명 <아메리쿠스>라고 명명되었다.

[세계주항(世界舟航)]

1513년 V.N.발보아가 태평양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1508∼1509년까지 포르투갈의 말라카원정(遠征)에 참가하여 활동한 뒤 귀국한 마젤란은 그 후 F.세라운이 몰루카제도의 모양을 알린 편지와 친구인 우주지학자(字宙誌學者) L.펠레이로의 의견 등에서, 가마가 발견한 종래의 아프리카 남단을 우회하는 포르투갈의 인도항로에 의존하지 않고서 남아메리카를 서쪽으로 회항하여 몰루카제도에 도달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에게 청원하였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세비야로 가서 에스파냐국왕 카를로스 1세의 허가를 받았다. 그는 총지휘관에 임명되었고, 5척의 선박에 265명을 태우고 1519년 9월 20일 산루카르에서 출항하였다. 남아메리카의 남단에서 마젤란해협을 발견하고, 이것을 빠져나가 태평양으로 나가는 데 성공, 4개월의 고난 끝에 겨우 산라사로(필리핀)군도에 다다랐다. 그 자신은 세부섬 동쪽의 막탄섬에서 원주민들과 전투하다가 21년 4월에 전사하였으나, 18명의 승무원은 다음해인 1522년 9월 산루카르로 무사히 귀항함으로써 세계일주 항해에 성공하였다.


[대항해시대의 세계사적 의의]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에도 얼마 동안은 에스파냐인의 신대륙 내부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고, 오히려 서항하는 항로 발견에 노력이 기울어졌다. 발보아는 파나마지협을 횡단함으로써 태평양 기슭에 도달하였으나, 계속 남진할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 유지(遺志)를 이어받은 F.피사로가 잉카제국을 발견하여 제국을 정복하였고, 그 이전에 H.코르테스는 멕시코 중앙부의 아스테카왕국을 정복하여, 에스파냐는 이 방면에서 식민지 수탈정책(收奪政策)을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근대 식민지 체제의 확립은 세계역사상에 하나의 중요한 전기를 가져왔다. 나아가 아프리카 남단을 회항하여 동양에 도달한 포르투갈이 구축한 세계무역체제와, 신대륙으로부터 또다시 태평양을 서항하여 필리핀에 도달한 에스파냐 식민지체제와의 충돌은 몰루카제도 근처에서 격화했다.

이베리아의 2개 국가에 의한 세계지배체제의 확립은, 이어서 영국·네덜란드·프랑스·기타 유럽 여러 나라가 절대왕정(絶對王政)의 형성을 배경으로 세계의 부(富)의 수탈과 권력의 확장을 추구함으로써, 지구상의 모든 지역을 침략해가는 발단(發端)이 되었다.

그때까지의 이탈리아 상인이라든지 이슬람 상인에 의한 지중해무역체제가 붕괴되고, 신대륙으로부터 유럽에 보내지는 귀금속과의 교환에 의한 유럽 공업품의 수출, 또는 향료를 비롯한 동양 산물의 직접 도입,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사탕수수재배가 시작되어 유럽에 근대자본주의의 형성을 실현시키는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비그리스도교세계에 대한 그리스도교화(化)가 추진되었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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