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일본과 중국이야기

[스크랩] [일본문화] 일본 유녀의 예능과 생활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5. 23. 20:17

[ 다운로드 ]

첨부파일 유녀의 예능과 생활.hwp

 

 

[ 원문 ]

 

 

遊女의 藝能과 生活



1. 유녀의 출현과 변화

 1)유녀의 출현

  (1) 對偶婚의 시대

  지금 우리가 하는 결혼은 한 사람의 남편에게 한 사람의 아내가 있는 단혼이지만, 이러한 결혼(단혼)이, 그렇게 오래전부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 고대에는 단혼보다 이전의 결혼 형태인 다이구꼰(對偶婚)이라는 결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사람의 남편에게 한 사람의 아내가 있는 것은 단혼과 같지만, 다른 점은 이러한 일대일의 관계가 마음이 들 때까지만 계속된다고 하는 느슨한 것으로서, 영속된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부부의 어느 한 쪽이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도 그렇게 비난받지 않았다. 남편이 아내 이외의 여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어떤 시대에도 허용되고 있기 때문에, 다이구꼰의 특징은 아내가 남편 이외의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이 비난받지 않았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러한 특징을 갖는 다이구꼰은, 점차 단혼으로 변해간다. 그 시기는 대강 말하면 지배자층에서 10세기 전후, 일반서민층에서는 12세기 전후라고 생각된다. 단혼하에서는 부부의 일대일 관계가 고정화, 영속화 됨과 함께, 아내의 성은 남편 이외의 남성에 대해서는 완전히 폐쇄되게 되고, 만약 이에 위반한 경우에는 간통으로서 엄하게 처벌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다이구꼰하에서는 간통은 없었다는 것이 된다. 실제로 당시의 사료에는 간통을 나타내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간통을 나타내는 일본어 자체가 없다. 이 사실은 고대 일본에는 아직 간통이 없었다는 것을 무엇보다도 잘 나타내고 있다. 다이구꼰하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성관계나 결혼 상대를 자신이 정할 수 있었다. 또 이혼도 자기 쪽에서 할 수가 있었다. 왜나햐면 다이구꼰이란, 앞에서 말했듯이 마음에 드는 동안만 지속되는 결혼, 남녀쌍방이 좋아하게 되면 함께 하고, 어느 쪽이든 한 쪽이 싫어지면 헤어질 수 있는 결혼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결혼상대를 자신이 선택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에(家)제도가 지속되었던 패전 전까지는 여성이 스스로 결혼상대를 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고대 일본에서는 여성의 의향에 반하는 성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여성이 자신의 결혼이나 성관계 상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만, 여성이 일상적으로 강간의 위험에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고대 일본에 매매춘이 없다는 사실과 대응한다. 왜냐하면 매매춘이란, 여성으로서 그 의향에 반하는 성결합의 최고 형태이며, 당시의 성 관행에 가장 반하는 것으로, 그런 일이 이루어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의 여성은 남성과 함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간통이 없는 등 다이구꼰의 여러 가지 특징은 이러한 것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거의 대등한 남녀간에는 성애(性愛) 또한 대등하여 단혼 하에서처럼 여성의 성이 남성의 욕망의 도구가 되는 상태는 아직 아니었다. 여기에서의 성애는 보다 소박한 것이었다. 이러한 다이구꼰 하에서는 당연히 매매춘이 없었다고 생각되지만, 고대 일본에는 정말 매매춘이 없었던 것일까를 다음에서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2) 유랑하는 예능인 우카레메(遊行女婦)

  고대에는 우카레메(遊行女婦)라 불리는 여성이 있었다는 것을 만요슈(萬葉集)에서 알 수 있다. 이 여성이 성을 매매하는 여성이었는지 어떤지가 문제인데, 그녀들은 고쿠가(國衙;지금의 현청)의 직원들이 여는 연회에 출석하여 자신이 만든 노래나 옛날부터 전해오는 노래를 부르며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 역할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게이샤(者)와 유사하다. 그리고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게이샤가 성을 매매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기 때문에 고대의 우카레메도 매춘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는 단서로 먼저, 우카레메(遊行女婦) 사부루꼬(左夫流兒)에 대한 삽화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만요슈를 편집한 오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가 가미(守;의 長官)로서 에쓰츄(越中)에 부임할 때, 그 부하에 오와리노 오쿠이(尾張小昨)라는 인물이 있었다. 오쿠이는 교토에 아내를 두고 에쓰츄에 부임하였지만, 요즘에도 때때로 일어나듯이 단신부임하던 중 우카레메 사부루꼬의 매력에 빠져 동거하게 되고 말았다. 상사인 야카모치는 부하인 오쿠이에 대해, 그러한 행동은 두 사람의 처를 갖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에 위반한다고 했지만, 오쿠이는 야카모치의 충고를 듣지 않고 당당하게 동거지로부터 출근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사이에 남편의 동거를 알게 된 교토의 ‘전처’는 빠른 말을 타고 남편의 임지로 달려왔다.

  이것은 만요슈에 보이는 삽화이지만, 그 후 오쿠이의 쟁탈을 둘러싸고 교토의 전처와 사부루꼬 사이에 어떤 소동이 있었는지는, 유감스럽게도 만요슈에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카레메와의 동거를,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야카모치조차도 처를 가지는 것, 즉 결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사부루꼬와의 동거는 결혼이며, 교토의 처는 전처가 되어버린다고 하는 점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아주 흥미롭다. 특히, 그 시점에서 성관계를 갖고 있는 여성(사부루꼬)이 처이며, 교토의 처는 자동적으로 전처가 되어버리는 데에, 함께 하기도 쉽고 헤어지기도 쉬운 당시의 다이구꼰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사부루꼬로 대표되는 우카레메는, 성을 매매하는 여성이었을까. 만요슈의 실례로 보면 우카레메는 연회에 출석하여 노래를 부르는 여성, 즉 예능인이었다. 또 우카레메는 그 명칭으로 보아 떠돌아 다니는 여성이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우카레메(遊行女婦)는 うかれめ라는 일본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당시의 일본인은 가나가 발명되기까지 문자로서는 중국의 한자밖에 몰랐기 때문에 うかれ에 ‘遊行’, め에 女婦‘라는 한자를 붙인 것이다. うかれめ와 그것을 한자로 표기한 遊行女婦 중 어느 것으로 하여도, 중요한 것은 여성을 나타내는 め, 즉 女婦가 아니라, うかれ, 즉 遊行이다. うかる(うかれ는 그 연용형)란, 정처를 정하지 않고 떠돌아 다닌다는 의미이며, 그것을 한자로 표기한 遊行은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돌아다닌다‘는 의미로서 うかれめ, 즉 遊行女婦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여성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연회에 출석하여 노래하는 것을 생각하면 우카레메는 떠돌아다니는 예능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질을 가진 우카레메는 결코 자신의 성을 매매하는 여성이 아니었다. 이것은 첫째로 우카레메가 자신의 성을 매매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료가 전혀 없다는 사실, 둘째로 우카레메의 이름이 성매매를 분명히 하고 있는 유녀의 이름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또 당시 우카레메 뿐만 아니라 그 외에도 성을 매매하는 여성이 없었다는 점은 성상품으로 매매되는 여성 노예가 없었다고 추정되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왜나하면 남녀의 노예 값을 비교해 보면, 여성 노예 쪽이 저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무렵 우카레메는 물론 그 외에도 성을 매매하는 여성은 없었던 것이다.

  우카레메가 성을 매매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들이 연회 후에 그 곳에 출석한 남성 관인들과 동침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유부녀의 성관계조차 인정되는 당시에, 술 한잔이 들어간 연회 후에 남성관인과 우카레메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매매춘은 아니다. 연회 후의 동침은 마음에 든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성매매에 수반되는 금전이나 그에 대체할 물건의 수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매매춘에서는 성교섭 상대를 여성이 선택할 수가 없으며, 또 여성은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해 간다. 우카레메의 동침은 그런 매매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2) 유녀의 변화

  (1) 遊行女婦에서 遊女로

  성을 매매하지 않았던 8세기의 우카레메는 9세기에 점차 성격을 바꾸어, 10세기 초에는 분명히 성을 매매하는 여성으로서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10세기 전반에 성립된 사전 ‘와묘루이죠쇼(和名類聚抄)’의 유녀에 대한 해설에서 알 수 있다. 8세기의 우카레메는 10세기에는 한자로 遊女라 표기하게 되고, 일본어에서도 그 때까지의 ‘うかれめ’에 ‘あそび’가 새롭게 덧붙여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은 이것이 성을 매매하지 않는 여성에서 매매하는 여성으로의 변화를 말해준다. 또 우카레메의 후신인 유녀는, 이미 성 매매만을 전문으로 하는 야호치(夜)와 같은 항목으로 일괄되어 있기 때문에 성을 매매하는 여성의 일종으로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유녀가 성을 매매하는 여성이라는 점은, 시대가 조금 내려가지만 11세기 전반의 ‘혼쵸몬즈이(本朝文粹)’에 수록된 ‘遊女を見る’라는 한시에 ‘천하에 여색을 스스로 자랑하며 매매하는자’ 즉, 성을 매매하는 자로 묘사되어 있는 사실로부터도 알 수 있다.

  ‘와묘쇼’에서는 낮에 遊行하는(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예능인으로서의 예를 보이기 위함이다) 유녀 외에, 성매매만을 하는 야호치(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야호치의 발생이 그 때까지의 ‘うかれめ’외에 ‘あそび라는 새로운 일본어를 탄생시킨 것이다. 즉 성 매매만을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나오게 되었기 때문에 그와 구별하기 위해, 성 매매도 하지만 예능도 행하는 여성에 대하여 그 예능인으로서의 측면을 강조할 필요가 생겨서 새롭게 만들어진 용어가 ’あそび‘였다. 8세기의 우카레메가 10세기에는 유녀(うかれめ あそび)로, 일본어와 한자가 모두 변화한 사실, 이 변화 가운데 매매춘을 하지 않는 8세기의 우카레메와 매매춘을 하는 10세기 유녀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2) 겐지나(源氏名)를 가진 유녀들

  앞에서 말했듯이, 우카레메(성을 매매하지 않는 여성)와 유녀(성을 매매하는 여성)의 차이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우카레메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쓰쿠시오토메(筑紫娘子)’, ‘가모오토메(蒲生娘子)’ 등이지만 이들 이름의 특징은 앞이 지명, 뒤가 娘子라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이름은 만요슈에 나오는 보통 여성의 이름과 공통된다. 이러한 ‘지명+낭자’형의 여성 이름은 만요슈에서는 귀족층 여성 외에 일반적인 여성의 이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즉 우카레메의 이름은 당시 일반 여성의 이름과 다를 바가 없다.

  한편 유녀의 이름은 12세기 초의 ‘유녀기(遊女記)’에 의하면, ‘觀音, 中君, 小馬, 白女, 主殿, 宮城, 如意 등이 있다. 이러한 유녀의 이름이 현재의 호스테스라고 불리는 여성의 겐지나(源氏名)에 까지 이어지는 이름과 공통된다고 하는 것은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12세기 유녀의 이름은 일반 여성과 공통성을 가지지 않는 유녀의 독특한 이름으로 변화해 가지만, 이러한 변화야말로 유녀가 일반여성과는 다른, 성을 매매하는 여성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우카레메가 일반 여성과 공통된 이름을 가진 사실을 생각하면, 우카레메가 일반여성과 마찬가지로 성을 매매하지 않는 여성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며, 따라서 우카레메로부터 유녀로의 변화는 그 이름의 변화로부터 보아도 성을 매매하지 않는 여성에서 성을 매매하는 여성으로의 변화였다는 것이다.

  유녀의 독특한 이름으로서는 ‘야마토 모노가타리(大和物馭)’ 145에 ‘うかれめにしろといふものありけり’라고 나오는 것이 최초의 예이다. 이 여성은 10세기 초에 성립된 ‘고킨슈(古今集)’에 しろめ로 나오고 있기 때문에, 10세기 초에는 특수한 유녀의 이름이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된다. 즉 일본에는 10세기 초에 분명히 성을 매매하는 여성이 나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성을 매매하는 유녀가 독특한 이름을 지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면, 그것은 그녀들이 일반여성과 사회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이 사회적으로 어떤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이행할 때에는 이행의례로 개명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성인식에 따라 幼名에서 성인명으로, 장례식에 따라 俗名에서 戒名으로, 득도식에 따라 俗名에서 僧尼名으로 개명하는 것 등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을 매매하지 않는 일반여성이 성을 매매하는 유녀로 이행할 때에는 그 때까지의 이름을 버리고 유녀의 독특한 이름을 지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에는 10세기 초에 이미 성을 매매하는 여성이 있었다. 이 사실을 에도시대에야 성립한 유곽이 중국에는 이미 당대(唐代;7세기 전반)에 있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일본에서의 매매춘이 얼마나 늦게 발달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단혼의 성립이 늦었던 것이 매매춘의 성립이 늦은 원인이 되었다. 일본에서의 단혼은 먼저 지배층에서 10세기 전후에 성립한다. 그에 따라 처의 성이 남편에게 독점되고 결혼이 고정화, 지속화함과 아울러 여성은 자신의 결혼상대를 자신이 선택할 수 없게 된다. 결혼에 있어서 자신의 의향에 반하는 성결합을 강요받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을 때, 그 극한상황이라고 해야 할 매매춘도 발생한다. 매매춘의 성립이 10세기 전후인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2. 중세의 유녀

 1) 유녀의 가업과 생활

  (1) 유녀의 가업

  ‘가라시나일기(更 級日記)’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아시가라야마(足柄山)에서의 일. 달도 없이 어둠을 헤매는 듯한 밤에 유녀(あそび) 세 사람이 어디에서인지도 모르게 나타났다. 각각 50세, 20세, 14,5세 정도였다. 모두가 머물고 있는 소옥 앞에 우산을 쓴채 앉았다. 유녀는 옛날 ‘こはた’라고 하는 유녀의 손녀라고 한다. 머리가 대단히 길고 앞머리를 드리운 모습도 대단히 아름답고, 살결이 희고 깔끔한 느낌이다. 모두 감동하고 있는데 목소리는 비할 데 없이 멋지고, 하늘을 나는 듯 예쁘게 노래를 한다. 모두들 몰입하여 가까이 불러 재미있어하며, ‘서국의 유녀가 모두 이렇게 노래를 잘하는 것은 아니겠지?’라고 묻자, 유녀는 ‘나니와 부근의 유녀에 비하면...’이라는 가요를 멋지게 불렀다.

  이것은 가즈사노구니(上總國)에서 상경하는 도중에 13세의 필자 ‘스가와라노 다까스에노 무스메(管原孝標女)’가 실제로 체험한 11세기초의 일로, 당시 유녀들의 모습과 생활이나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엿볼 수 있다. 다음 시대와 비교하여 특기할 만한 것은 유녀들의 예능의 질적 수준이다. 목소리가 아름답고 노래를 잘할 뿐아니라, 유녀들은 그 장소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를 선곡하여 즉흥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재기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유녀와 유사한 직능을 가진 것에 구구쓰(傀儡子)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원래 남녀 혼합집단에서 남자들은 사냥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예능을 하고 있었지만, 노래를 부르고 성 매매하는 것을 가업으로 한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벌이도 좋고, 귀족들에게도 얼굴이 통하였다. ‘미노노구니 아오바카(美濃國靑墓)’의 구구쓰 오토메마에(乙前) 등은 서울에 불려와 이마요(今樣)를 무척 좋아하는 고시라가와 법황에게 기예를 전수하기도 하였다.

  보통 유녀라 하면, 유곽에서 자유를 빼앗긴 에도시대의 여성들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중세의 유녀(구구쓰(傀儡子)와 시라뵤오시(白拍子)등도 포함)는, 성을 팔기는 하지만 각기 노래, 춤과 같은 수준높은 예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무기로 비교적, 자율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여성예능민’이라고 해야 할 사람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의 유녀가 성립된 것은 10세기로 생각된다. 유녀라는 말이 처음 보이는 당시의 사전 ‘와묘루이죠쇼(和名類聚抄)’에는 ‘유교죠지(遊行女兒)’의 가나명을 ‘ウカレメ アソビ’라고 기록한 후, ‘백주에 어정거리며 돌아다니는 자를 유녀라 하고, 밤을 기다려 성 매매하는 자를 야호치(夜發)라고 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시기의 유녀가 성을 매매하고 있는 것은 같은 시기의 사료를 보아도 틀림이 없지만, 10세기의 시점에서 그것을 전업으로 하는 ‘야호치’와는 분명히 구별되어 있었다. 그런데 11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신사루고키(新猿樂記)’에서는 이 명칭들이 서로 혼동되고, 유녀의 가업에서도 성을 매매하는 비중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 유녀의 생활

  ‘가라시나 일기’의 기술에서, 유녀들은 연령이 다른 여성 3인조로 행동하고 있으며, 머리는 길게 늘어뜨리고 종이우산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대의 사료인 ‘혼쵸몬즈이(本朝文粹)’에는 더 구체적으로 ‘젊은 여자는 화장을 하고 노래를 불러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다. 나이든 여자는 초롱을 들고 지팡이를 짚는다.’고 하여 노소의 분업체제 양상이 기록되어 있다. 후세의 일이지만 ‘호넨쇼닌에덴(法然上人繪傳)’에는 머리를 늘어뜨리고 북을 가진, 비색의 하카마와 고치기라는 복장을 한 유녀와, 초롱을 켠 작은 배를 젓는 유녀가 3인1조로 묘사되어 있어 흥미롭다.

  그런데 유녀는 ‘스이삼(推參)’이라 하여, 설령 초대받지 않아도 귀족들의 연회에 마음대로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어 있었다. 13세기의 설화집인 ‘고지담(古事담)’에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출가한 후에 7대사에 참배하는데, 돌아오는 길 가하지리(河尻)에서 유녀인 쇼간논(小觀音)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얼굴을 붉히며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주어 돌려보냈다’라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권력을 한 손에 쥐고 두려울 것이 없었던 만년의 미치나가(道長)가 유녀의 스이삼에 얼굴을 붉혔다고 하는 일화는, 당시의 사회에서 유녀들이 상당히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허용된 존재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유녀는 귀족의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수 척의 배에 분승하여 집단으로 밀어 닥치기도 하였지만 그 경우 그녀들의 역할은 반드시 성을 매매하는 것 뿐 아니라, 주로 행사 중에 가요 등의 예능봉사를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되며, 그에 대해 보수가 지급되었다. 당시의 사료에 따르면, 이러한 때에는 쌀과 비단같이 분배 가능한 물건이 집단 전체에게 다량으로 주어졌다. 또 예능이 뛰어나거나 마음에 드는 유녀가 있는 경우에는, 귀족들이 개인적으로 입고 있는 옷을 벗어주는 일도 있었다.

  11세기 말의 학자 오오에노마사후사(大江匡房)가 쓴 ‘유녀기(遊女記)’에 의하면, 유녀들은 집단에게 주어진 물건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가졌다.

  

    분배할 때가 되면 부끄러운 마음은 사라지고, 분노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크고 작은 말다툼은 마치 싸우는 것 같다. 비단을 작은 조각으로 나누고, 남은 쌀을 조금씩 나누어 갖는다. 혹은 또 모두가 평등해지도록 나눈다.


  유녀들은 서로 다투면서도 주어진 물건을 비교적 평등하게 분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앞에서 말한 쇼간논(小觀音)처럼 겐지(源氏)명을 가진 귀족들과 친분이 깊은 유녀들은, 챠우쟈(長子)로서 보통의 유녀보다는 한 계단 높은 입장에서, 유녀집단을 관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즉 중세의 유녀집단은, 여챠우쟈(女長子)를 정점으로 하여, 어느 정도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로 맺어져,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특징으로 한다.


 2) 유녀의 쇠퇴와 몰락

  (1) 유녀의 쇠퇴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녀는 교토, 가마쿠라 등 중세적인 대도시를 오고가며, 지방의 교통요지에 거점을 쌓게 되었다. 오토마에(乙前)의 출신지인 미노노구니(美濃國) 아오바카(靑墓)는 그 예이다. ‘헤이지모노가타리(平治物語)’에서는 오오이(大炊)라는 ‘유군(遊君)’이 아오바카쥬크(靑墓宿)의 챠우wi로 되어 있다. 스루가노구니우쓰노야고이마쥬크(駿河國宇都谷鄕今宿)에서는, 구구쓰인 여성이 숙(宿)의 운영에 관계된 ‘료닝자쓰지(旅人雜事)’와 ‘자이케켄베치센(在家間別錢)’이라는 세금을 새롭게 부과받은 데에 대항하여 재판을 일으켜 승소하고 있다. 이 구구쓰는 지역의 실력자요 쥬크(宿)의 챠우쟈적 존재였다. 유녀들은 지방의 교통요지에서, 때로는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실력을 보이며, 어느 정도 자율적인 경영을 하고 있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중앙의 통치권력이 침투하여 교통망 정비에까지 그 힘을 미치게 되자, 그녀들의 자유로운 활동도 점차 제약을 받게 되어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마쿠라 시대의 편찬기록인 ‘아즈마가가키(吾妻鏡)’에는, ‘下々馬橋西方好色家において酒宴亂舞會あり’라고 하여 가마쿠라의 메인도로인 와카미야오오지(若宮大路)에 문을 연 ‘가우쇼쿠노이에(好色家)’가 무사들의 사교장으로서 번영하였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명칭으로 보아도 여기에서 유녀들이 성매매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토에서도 같은 형태로 ‘가우쇼쿠노이에(好色家)’가 번영하게 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무로마치 시대에는 ‘즈시기미(辻子君)’라는 것이 나타난다. 즈시(辻子)란 교토에 새롭게 만들어진 작은 길이며, 즈시기미는 거기에 늘어선 ‘가우쇼쿠노이에(好色家)’에서 손님을 맞게 된 유녀의 몰락한 모습이었다. 15세기 중엽의 교토에는 길가의 10집 중 4,5집이 창루(娼樓)였다고 할 정도로 이들의 상행위가 번성하였다.

  즈시기미들에게 요구된 것은 이제 유녀들과 같은 질 높은 예능이 아니었다. 그녀들에 대한 세상의 눈도 변했다. 즈시기미가 살았던 장소는 ‘지고쿠즈시(地獄辻子)’라든지, 여성 성기와 형태가 비슷한 조개의 호칭인 ‘가제즈시(加世辻子)’등으로 불렸다. 과거 ‘관음’이라 이름 붙여졌던 유녀들이 이제는 ‘지옥’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즈시기미가 묘사되어 있는, 16세기의 ‘나나쥬니방쇼쿠닝우따아와세(七十二番職人歌合)’에는 즈시기미의 옆에 덮개를 쓴 야리테바바(遣手婆)같은 여성이 있다. 그림 중의 대화를 보면 손님에게 집안으로 들어올 것을 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유녀에게 종이 우산을 씌워주기도 하고, 작은 배의 노를 젓기도 하던 늙은 유녀들이 이렇게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시대가 더욱 내려오면 그녀들의 역할은 남성 나코오도(仲人)들이 맡게 된다. 당시의 세금인 구지센(公事錢)을 지불하는 주체였던 것은, 이마쥬크(今宿)의 늠름한 구구쓰를 대신한 ‘게이세이야(傾城屋)’의 ‘나코오도가타노데이슈(仲人方之亭主)’들이었다. ‘가우쇼쿠노이에(好色家)’도 성을 기울게 한다는 의미의 ‘게이세이야(傾城屋)’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성 챠우쟈(長子)를 선두로 하여, 멋대로 귀족들 사이를 오가던 유녀집단은 옛말이 되었다. 이러한 게이세이야는 이제 에도시대 유곽의 영업형태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토에는 특정한 장소에 자연발생적으로 게이세이야가 집중하게 된다.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치하의 교토에는, 정치적 배려에 따라 이들 게이세이야가 니죠야나기쵸(二條柳町) 한 곳에 모이게 되고, 여기에 유곽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부터 시작되는 집창화와 비교하면 소규모이지만, 그 시초로서 주목된다.


  (2) 유녀의 몰락

  유녀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 중에는, 전통적인 예능을 이어받아 예능민으로 살아간 사람들도 있다. ‘72번 쇼쿠닝우따아와세(七十二番職人歌合)’에는 즈시기미와 더불어, 시라뵤오시(白拍子), 구세마이(曲舞)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전자와 비교하면 분명히 예능인으로서의 측면이 강한 여성들이다. 시라뵤오시는 원래 춤의 형식을 부르는 명칭이었지만, 가마쿠라 시대에는 그 춤을 추는 여성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원류는 구구쓰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절정기에는 유녀와 함께 고토바(後鳥羽) 상황에게 불리어 가서, 순번을 정하여 춤을 추는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15세기에는 ‘게이세이, 시라뵤오시, 야호치(夜發)같은 무리들’이라 하듯이, 시라뵤오시라 해도 성 매매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여성으로 일괄하여 생각되게 되었다.

 시라뵤오시마이(白拍子舞)에서 발달한 예능이라 보이는 온나구세마이(女曲舞)는, 15세기 후반에 이미 미노노쿠니(美濃國) 출신의 자(座)조직에 도입되었으며, 남자들이 연기하는 예능의 일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남도(南都) 고후쿠사(興福寺)의 지배하에서 가도쓰케게이(門付け藝)를 중심으로 했던 쇼몬지(聲聞師) 집단에 속한 온나구세마이도 있었다고 한다. 이같이 예능민으로 살았던 여성들도, 남성이 중심이 된 예능집단에서 일부분을 담당하는 데에 지나지 않았으며, 혹은 쇼몬지처럼 세상에서 차별적인 눈으로 보았던 집단에 소속된 형태가 되어버렸다. 즉, 과거에 존재했던 것 같은, 어느 정도 자립한 여성예능민 집단으로서의 유녀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세를 통하여 여성 전체의 사회적 지위가 저하되어 갔던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나아가 예능에 대한 사회적인 관점이 변한 데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어떻든 앞에서 서술한 중세적인 유녀는, 여기에 이르러 완전히 몰락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출처 : 니홍고닷컴
글쓴이 : 양박사 원글보기
메모 :